1. 개요
이탈리아의 작위 요구자를 다루는 문서.2.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이탈리아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3.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3.1. 국가
3.1.1. 이탈리아 국왕
관련 칭호[1] | 이탈리아 국왕 사보이아 공작[비토리오][아이모네] 나폴리 공작[비토리오] 아오스타 공작[아이모네] 프랑스 황제[샤를][장-크리스토프] 베스트팔렌 국왕[샤를][장-크리스토프] | |||
작위 요구자 | (사보이아 왕조 본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 (부오나파르테 왕조) 샤를 나폴레옹[10] (아들과 공동) | (부오나파르테 왕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11] (아버지와 공동) |
전임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 |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A] |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 |
후임자 | 비토리아 디 사보이아 |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B] | 제롬 나폴레옹[14] | |
계승 실패 원인 | 1814년 왕국 멸망(부오나파르테 왕조) 1946년 이탈리아 군주정 폐지(사보이아 왕조) |
1946년 국민투표에 따라 이탈리아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보이아 왕조 사람들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입국을 불허했다.[15]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의 외아들인 비토리오 에메누엘레는 1969년에 아버지가 국민투표로 "퇴위당한 것"이므로 일방적으로 본인이 왕위 계승자임을 선포했다. 여기에다가 1971년에 결혼한 스위스 비스킷 제조업자 상속녀에게 귀족의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움베르토 2세와 함께, 비토리오는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1983년부터는 본인이 유일한 왕위 요구자임이 명확해진 듯 했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2002년,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왕족의 입국을 허용했고[16], 아들 베네치아 공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함께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귀국 2년 후인 2004년, 당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들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친척인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메데오는 통일 이탈리아의 국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초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의 증손자로, 이탈리아 왕위 계승 2순위였다.[17] 폭행 사건의 원인도 왕위 요구자 관련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 6월 16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매춘 알선과 부패 혐의로 이탈리아 국경 인근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며칠 후 석방되었는데 비토리오의 가택연금이 풀리기 전인 7월 7일에, 아메데오는 본인이 비토리오의 뒤를 이어 사보이아 가문의 새로운 수장, 사보이아 공작이며, 비토리오는 결혼 후 왕위를 요구할 권리를 잃었다고 선언했다.[18] 비토리오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를 인정한 것이 이탈리아 왕가의 정통성을 해친다고도 주장했다.
"사보이아 공작" 문제는 법정에 올랐고, 2010년 2월 1심에서 비토리오와 그의 아들 에마누엘레가 승소했다. 따라서 사보이아 공작 칭호는 오직 비토리오의 후손만 쓸 수 있으며, 그 외의 친척은 "사보이아"라는 성을 쓸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아오스타 분가의 수장 아메데오는 '사보이아-아오스타' 성을 쓰도록 강제되었다. 물론 아메데오는 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고 계속해서 사실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19] 그러나 이후 8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18년 1월 아레초 법원에서 선고된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혀 아오스타 공작가 사람들도 '사보이아' 성을 쓸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1심에서 아오스타 공작가 측에 선고된 5만 유로의 배상금 지급 명령도 파기되었다.[20] 한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딸만 둘이고 아들이 없다. 그 때문에 2020년 1월 15일 사보이아 왕조 본가에서 살리카법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사보이아 왕조 본가와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 중 한 쪽에서 왕위 요구권을 포기하거나 양쪽의 왕위 요구자가 결혼을 통해 한 계통으로 통합되는 일이 없는 한 사보이아 왕조 본가와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왕위 요구권 다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21]
2021년 6월 1일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가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인 아이모네(1967년생)가 다음 공작이 되었다. 아이모네는 부인 올가[22] 사이에 2남 1녀(움베르트, 아이모네, 이사벨라)가 있다.
프랑스 제1제국과의 동군연합이자 해당 국가의 괴뢰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 또한 여전히 왕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다. 아버지인 샤를과 아들인 장-크리스토프는 서로 자기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이라고 주장하며 다투는 중인데 자세한 건 작위 요구자/유럽/프랑스 문서의 프랑스 황제 문단 참고. 부오나파르테 왕조 왕위 요구자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이탈리아의 왕당파에게는 제대로 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위에서 설명한 사보이아 왕조의 왕위 요구자들에게도 정통성이 없는 침략자의 후손이라며 배척당한다. 하지만, 사보이아 왕조 문서에서도 보듯이,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현 체제인 공화정 지지 여론이 압도적인데다, 사보이아 왕조 구성원들이 전후에 저지른 각종 도의적, 법적인 만행들과 더불어, 이들 구성원들의 극우 성향이 문제가 된 탓에, 어느 쪽이건간에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사실 2002년 수장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왕위 요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귀국에 성공한 것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0%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0%이다. 이와 관련한 이탈리아 헌법 조항을 수정하거나 이탈리아의 국체가 무슨 일로 붕괴되지 않는 이상 완전히 불가능하다.[23]
3.2. 지방
3.2.1. 나폴리 국왕
관련 칭호 | 나폴리 국왕 | |
작위 요구자 | (뮈라 왕조)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조아킴 뮈라[24]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25] |
후임자 | 조아킴 뮈라[26] |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815년 톨렌티노 전투에서 패하여 조아키노 1세가 폐위됨(뮈라 왕조) 1816년 시칠리아 왕국과 통합 |
현 왕위 요구자들 중에서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는 조아키노 1세[27]의 후손이다.
3.2.2.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관련 칭호 | 오스트리아 황제(카이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859년 프랑스 제2제국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롬바르디아 합병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출범 1866년 이탈리아 왕국의 베네치아 병합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1815년에 빈 회의로 세워졌다. 빈 회의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기존에 프랑스 제1제국의 관할이었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자국에 병합하면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칭호를 새롭게 쓰기 시작하여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다가 1859년에 프랑스 제2제국과 손을 잡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롬바르디아를 차지하였고[28], 2년 후인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과 손을 잡아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까지 차지하면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멸망했다.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분리주의자들 중에서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오스트리아 황제)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도 극소수 존재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관계 문서에 나온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갈등을 감안하면,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재건 가능성은 없다.[29]
3.2.3. 만토바 공작
관련 칭호 | 만토바 공작 |
작위 요구자 | 마우리치오 빈첸조 곤차가 |
계승 실패 원인 | 17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지했던 만토바 공국은 1708년에 오스트리아군에 점령되어 결국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현재 만토바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에 속해있으며 현 공위 요구자 마우리치오 빈첸조 곤차가(Maurizio Ferrante Gonzaga)는 페데리코 2세의 후손이다.
3.2.4. 모데나-레조 공작
관련 칭호 | 모데나 레조 공작 |
작위 요구자 | 로렌츠 |
전임자 | 로베르트 |
후임자 | 아마데우스 |
계승 실패 원인 | 1859년 공국 멸망 186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출범 |
모데나-레조 공작가의 남계후손은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한 후 대가 끊어졌으며, 이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관련 칭호인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위와 가문의 유산을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넘겨주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뒤에는 그 조카인 카를 1세가 이를 상속받았다가 제정 폐지 후 명목상의 오스트리아 제위는 장남 오토에게,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위는 차남 로베르트 대공에게 따로 물려주었고 지금은 로베르트 대공의 장남 로렌츠 대공이 보유하고 있다. 로렌츠 대공은 벨기에 전 국왕 알베르 2세의 사위이기도 하다.
3.2.5. 밀라노 공작
관련 칭호 | 밀라노 공작 | |
작위 요구자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A] |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706년 공위 포기(보르본 왕조) 1796년 공국 멸망(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카를로스 1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과 동군연합이 되었던 밀라노 공국은 1706년에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밀라노 공국을 포기하면서 오스트리아 대공국과의 동군연합으로 바뀌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밀라노 공국이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멸망하고 밀라노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는 스페인 보르본 왕가에서 명목상으로나마 다시 밀라노 공작 칭호를 쓰고 있으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현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 또한 밀라노 공위를 요구하고 있다.
3.2.6. 사르데냐 국왕
관련 칭호 | 사르데냐 국왕 스페인 국왕 | |
작위 요구자 | (보르보네 왕조) 펠리페 6세 | (압스부르고 왕조)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1] |
후임자 | 레오노르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압스부르고 왕조) 1708년 왕위 포기(보르본 왕조) |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를 통일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르데냐 왕국의 왕위 요구자가 존재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해당 왕위 요구자들은 흔히 알려진 사보이아 왕조가 아니라 그 이전에 사르데냐 왕국을 다스렸던 보르보네 왕조와 압스부르고 왕조이다.
3.2.7. 사보이아 공작
관련 칭호 | 사보이아 공작 | |
작위 요구자 | (사보이아 왕조 본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
전임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 |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A] |
후임자 | 비토리아 디 사보이아 |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B] |
계승 실패 원인 | 1847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 귀족 작위 폐지 |
1847년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반포한 연합법에 따라 사보이아 공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주로 행정구역 개편이 되었지만, 명목상의 사보이아 공작 칭호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조의 역대 왕위 요구자들은 사보이아 공국의 공위 요구자를 겸한다.[34]
3.2.8. 시칠리아 국왕
관련 칭호 | 시칠리아 국왕 스페인 국왕 |
작위 요구자 | 도미닉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전임자 | 안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35] |
후임자 | 잔도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700년 왕조 단절 및 교체 |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을 겸했으므로 압스부르고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도미닉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이탈리아의 세 왕국 왕위도 요구할 수 있다.
3.2.9. 아오스타 공작
아오스타 공작 문장 | |
관련 칭호 | 아오스타 공작 |
작위 요구자 |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
전임자 |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A] |
후임자 |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B] |
계승 실패 원인 |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 귀족 작위 폐지 |
1946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아오스타 공작위를 포함한 이탈리아 왕국 귀족 작위 또한 폐지되었지만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오스타 공작을 대표 작위로 내세우고 있다.
3.2.10. 양시칠리아 국왕
관련 칭호 | 양시칠리아 국왕 카스트로 공작[카를로] 칼라브리아 공작[페드로] | |
작위 요구자 | (카스트로 계통) 카를로 디 보르보네-두에 시칠리에[40] | (칼라브리아 계통) 페드로 데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41] |
전임자 | 페르디난도 디 보르보네-두에 시칠리에 | 카를로스 데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이 보르본-파르마 |
후임자 | 마리아 카롤리나 디 보르보네-두에 시칠리에 | 하이메 데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이 란달루세 |
계승 실패 원인 | 1861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어 왕국 멸망 |
양시칠리아 왕국이 멸망한지 약 100년 후 마지막 국왕 프란체스코 2세의 조카(정확히는 이복동생의 아들) 페르디난도 피오가 1960년에 사망하면서 왕가는 카스트로 계통과 칼라브리아 계통으로 분열되었다.[42] 현재 카스트로 계통의 수장은 카를로[43]이며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은 페드로이다. 유럽 왕실 대다수는 카스트로 계통을 지지하지만 스페인 보르본 왕가는 칼라브리아 계통을 지지한다.
현재 카를로를 비롯한 카스트로 계통은 프랑스와 모나코, 이탈리아를 오가며 거주하고 있으며, 페드로를 비롯한 칼라브리아 계통은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다.
남이탈리아의 왕당파들 중에는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의 옹립을 지지하는 세력도 소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시칠리아 왕국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자유주의 탄압이었음을 고려하면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가의 복고 가능성은 없다.[44]
3.2.11. 에트루리아 국왕
관련 칭호 | 에트루리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계승 실패 원인 | 1807년 왕국 멸망 |
에트루리아 왕국은 프랑스 제1제국의 위성국이었으며 1801년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아란후에스 조약으로 건국되었다.[45] 그러나 불과 6년 후인 1807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북이탈리아 전역을 프랑스 제1제국으로 편입시키면서 에트루리아 왕국은 멸망했으며, 이후 에트루리아 왕국 영토가 아르노 주, 메디테라네 주, 옴브론 주로 나뉘어져 프랑스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는 후술할 파르마 공국의 공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3.2.12. 토스카나 대공
관련 칭호 | 토스카나 대공 |
작위 요구자 | 지기스문트 |
전임자 | 레오폴트 프란츠 |
후임자 | 레오폴트 아마데우스 페터 페르디난트 아르히발트 |
계승 실패 원인 | 1859년 대공국 멸망 186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출범 |
토스카나 대공국이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멸망한 후 대공가는 본가인 오스트리아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명목상의 토스카나 대공위는 페르디난도 4세의 장남 레오폴트 페르디난트와 차남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귀천상혼을 한 관계로 페르디난도 4세의 3남 페터 페르디난트의 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 토스카나 대공위 요구자인 지기스문트는 페터 페르디난트의 증손자로, 2021년 부친 레오폴트 프란츠가 사망한 후로 대공위 요구자가 되었으며 2남 1녀를 두고 있다.
3.2.13. 트리에스테 영주
관련 칭호 | 트리에스테 영주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영지 상실 |
3.2.14.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관련 칭호 | 파르마 피아첸차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로스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 이 오란지-나사우 |
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후임자 | (카를로스) 우고 데 보르본-파르마 |
계승 실패 원인 | 1859년 공국 멸망 186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출범 |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일대 지역은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재개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양도한 소식이 전해지자 혁명이 일어나 외국 지배자들이 모조리 축출되었다. 1859년 말 중부 이탈리아 연방으로 통합되었다가 국민투표에 의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출범하였다. 현재 파르마 공위 요구자인 카를로스 하비에르는 카를리스타의 수장이기도 하며,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7남 사베리오 공자의 손자로 어머니는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차녀 이레너 공주이다.
3.2.15. 폰테코르보 공작
관련 칭호 | 폰테코르보 공작 |
작위 요구자 |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 |
전임자 | 조아킴 뮈라[46] |
후임자 | 조아킴 뮈라[47] |
계승 실패 원인 | 1815년 공국 멸망 |
폰테코르보 공국은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이었으며 그에 따라 프랑스 제1제국의 붕괴로 함께 멸망했다. 현 공위 요구자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3.2.16. 피옴비노 공작
피옴비노 공국 국장 | |
관련 칭호 | 피옴비노 공작 |
작위 요구자 | 니콜로 |
계승 실패 원인 | 1805년 공가 교체, 루카-피옴비노 공국으로 개편 |
피옴비노 공국의 마지막 공작 안토니오는 1799년과 1801년에 프랑스군에 의해 공작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1805년에 그가 죽으면서 피옴비노 공국은 프랑스에 의해 루카 공화국과 통합되어 루카-피옴비노 공국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가 루카-피옴비노 공국의 여공작이 되었다. 현 공위 요구자 니콜로는 마지막 공작 안토니오의 후손이다.
[1]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전 왕가의 칭호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비토리오] 나폴리 공작[아이모네] 아오스타 공작[비토리오] [아이모네] [샤를] 프랑스인의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장-크리스토프] 프랑스인의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샤를] 프랑스인의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장-크리스토프] 프랑스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10]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11] 장-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A] 아메데오 움베르토 이사벨라 루이지 필리포 마리아 주세페 지오반니 사보이아-아오스타[B] 피에몬테 공작. 아오스타 공작의 아들.[14] 제롬 그자비에 마리 조제프 빅토르 나폴레옹[1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협조하는 등 파시즘과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16] 마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어머니였던 움베르토 2세의 왕비 마리 조제 왕비가 2001년 사망하여 어느정도 명분이 생긴 것도 있었다.[17] 아메데오의 어머니는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의 딸 이리니 공주(1904~1974)이며, 아메데오는 50여년 간 해외에서 망명한 본가 사람들과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아버지가 죽은 5살 이후로 정부의 허락을 받아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서 성장했다. 이탈리아 왕위가 움베르토 1세 이후로는 외아들로만 대가 이어졌기 때문에, 왕정 시기 내내 아오스타 공작이 직계 다음 순서에 해당하는 계승권자였다.[18] 1780년 반포된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칙서와 구 이탈리아 왕국 민법은 왕위 계승권자가 허락없이 귀천상혼할 경우 왕위 계승권이 자동으로 박탈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단, 허락을 받은 경우에는 국왕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할 경우 계승권 유지 가능) 이를 근거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움베르토 2세의 허락 없이 평민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자동으로 계승권을 상실하였으며, 그보다는 구 통치가문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 출신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둔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한편 비토리오는 계승권 주장의 근거가 되는 법령이 이미 폐지되었기 때문에 해당 법령에 기반한 계승권 주장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맞섰다.[19] 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europe/italy/7244567/Italian-aristocrat-cousins-fight-over-defunct-throne.html[20] https://www.lanazione.it/arezzo/cronaca/arezzo-amedeo-duca-d-aosta-vittorio-emanuele-cognome-1.3670963[21] 다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장례식 때 아이모네가 참석하기도 했고, 서로 물리적 충돌을 빚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아메데오와 달리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아이모네는 서로 대놓고 반목하지는 않고 있다.[22] 콘스탄티노스 1세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 왕자의 차녀. 미하일 왕자의 부인인 마리나 카렐라가 그리스인 평민으로 귀천상혼에 해당하지만, 왕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미하일 왕자의 결혼 당시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주었다.[23] 독일의 경우 헌법상 복고 투표가 아예 불가능해서 엄밀히 말하면 같은 0%지만 이탈리아와 달리 지지 세력이 꽤나 많아서 같은 0%라도 차이가 크다. 라이히스뷔르거 운동도 20세기도 아닌 2022년에 일어났었고.[24]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의 아버지. 조상과 동명이인이다.[25]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26]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의 아들. 조상과 동명이인이다.[27]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26명의 원수들 중 하나인 조아킴 뮈라다.[28] 원래 카밀로 카보우르는 베네토까지 합병을 노렸으나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극심한 피해에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카보우르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몰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빌라프란카에서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 롬바르디아만 넘어갔다.[29] 이탈리아의 국가인 마멜리 찬가에는 'già l'Aquila d'Austria le penne ha perdute(오스트리아의 독수리는, 이미 깃털을 잃어버렸다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혐오 감정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A] [31]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A] [B] [34] 다만 사보이아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1860년 토리노 조약으로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었다. 현재는 오베르뉴론알프의 사부아 데파르트망(Savoie Départements)이다.[35] 안톤 마리아 프란츠 레오폴트 블랑카 카를 요제프 이그나츠 라파엘 미하엘 마르가레타 니체타스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A] [B] [카를로] 카스트로 공작[페드로] 칼라브리아 공작[40] 카를로 마리아 베르나르도 젠나로 디 보르보네-두에 시칠리에[41] 페드로 후안 마리아 알레요 사투르니노 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이 오를레앙[42] 페르디난도 피오의 큰동생 카를로 왕자가 스페인 공주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당시 추정상속인)와 결혼하면서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는데, 페르디난도 피오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페르디난도 피오와 카를로의 동생 라니에리가 왕가의 수장 자리를 계승하자 카를로의 장남 알폰소가 아버지의 계승권 포기는 카를로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경우에만 효력이 생긴다는 해석을 제시하며 계승권을 주장하였다.[43] 딸만 두 명 있어서 2016년 절대적 맏이 상속법을 도입하며 맏딸 마리아 카롤리나를 후계자로 정했다.[44] 당장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있었던 이탈리아 군주정 존속 투표에서 나폴리를 위시한 남부지방에서는 오히려 사보이아 가문 지지도가 80% 이상이었고, 움베르토 2세가 거부하며 최종적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일부 극우 왕당파를 중심으로는 국민투표를 거부하고 군주정 지지도가 높은 남부를 중심으로 내전을 벌이자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였다.[45] 나폴레옹이 파르마 공국을 멸망시키면서 파르마 공작이 되어야 할 루도비코에게 옛 토스카나 대공국 영토에 에트루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던져주었다.[46]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의 아버지. 조상과 동명이인이다.[47] 조아킴 루이 나폴레옹 뮈라의 아들. 조상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