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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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20, 비다츠 덴노
1. 주의
- 일본서기의 내용은 고대 일본제국이랑 천황들의 위상을 드높히기 위해 천황중심주의적으로 기술된 사서이다. 특히 대외 외교, 국제관계 와 관련된 부분은 한국, 중국 사서들과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서기의 내용만 보고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구나!"같은 생각을 가지지 마시길.
- 백제인들의 이름을 보면 앞에 관직들이 보인다. 파견된 이들의 등급은 고덕 이상만이 보여진다. 16등급은 다음과 같다.
제1품 | 좌평(佐平) | 내신좌평(內臣佐平) / 내두좌평(內頭佐平) / 내법좌평(內法佐平) / 위사좌평(衛士佐平) / 조정좌평(朝廷佐平) / 병관좌평(兵官佐平) |
제2품 | 달솔(達率) | |
제3품 | 은솔 | |
제4품 | 덕솔(德率) | |
제5품 | 한솔(扞率) | |
제6품 | 나솔(奈率) | |
제7품 | 장덕(將德) | |
제8품 | 시덕(施德) | |
제9품 | 고덕(固德) | |
제10품 | 계덕 (季德) | |
제11품 | 대덕(對德) | |
제12품 | 문독(文督) | |
제13품 | 무독(武督) | |
제14품 | 좌군(佐軍) | |
제15품 | 진무(振武) | |
제16품 | 극우(克虞) |
2. 권 20
2.1. 즉위 전기
누나쿠라노후타토마시키노스메라미코토(渟中倉太珠敷天皇)는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스메라미코토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시히메노키사키(石嬉皇后)이다. 【이시히메노키사키는 타케워히로쿠니오시타테노스메라미코토(武小廣國排盾天皇)의 딸이다.】덴노는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문자와 기록(文史)을 사랑하였다. 29년에 황태자가 되었다.32년 4월에 긴메이 덴노가 붕어하였다.
2.2. 원년 : 572년
- 원년 여름 4월 3일 : 백제대정(百濟大井)[1]에 궁(宮)을 만들었다.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物部 弓削守屋大連)를 옛과 같이 대련(大連)으로 삼고,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蘇我 馬子宿禰)를 대신으로 삼았다.
- 5월 1일 : 덴노가 황태자와 대신들에게 “고려(高麗) 사인(使人)이 지금 어디에 있는냐”고 물었다. 대신(大臣)이 “상락관(相樂館)에 있습니다”라 대답하였다. 덴노가 듣고 매우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슬프도다. 이 사인들의 이름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덴노에게 아뢰었었다”라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를 상락관(相樂館)에 보내어 조(調)로 바치는 물건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서울로 보내게 했다.
- 5월 15일 : 덴노가 고려에서 올린 표(表)를 대신(大臣)에게 주었다. 여러 후비토(史)[2]를 불러 모아서 풀이하 게 하였는데, 이 때 여러 후미토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읽지 못하였으나[3] 선사(船史)의 조상인 왕진이(王辰爾)가 능히 읽고 해석하였다. 이 때문에 덴노와 대신들이 모두 찬미(讚美)하여 “수고하였다. 진이(辰爾)여, 훌륭하구나 진이여, 그대가 만약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읽고 해석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부터는 궁궐 안에서 (나를) 가까이 섬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흑고 동쪽과 서쪽의 여러 후미토에게 “너희들이 배운 바는 어찌하여 나아진것이 없느냐, 너희들은 비록 수는 많으나 진이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라 하였다. 또 고려가 올린 표에 까마귀 날개에 쓰여진 것이 있었는데 글자도 날개처럼 검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진이가 이에 밥김에 날개를 쪄서 비단으로 날개를 찍어 그 글자를 베껴냈더니 조정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 6월 : 고려(高麗) 대사(大使)가 부사(副使) 등에게 “긴메이 덴노 때에 너희들은 나와 상의한 바를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함부로 국가의 조공을 나누어 천한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찌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만약 우리 국왕이 안다면 반드시 너희들을 꾸짖을 것이다”라 하였다. 부사 등이 서로 “만약 우리가 나라에 돌아갔을 때 대사가 우리의 허물을 말한다면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몰래 죽여서 그 입을 막아야 한다”라 하였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모의가 새어나갔다. 대사가 이를 알고 복장을 갖추고 혼자 몰래 가다가 관가[4]의 뜰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한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서 대사의 머리를 치고 물러 났으며 다음에 또 한 사람이 곧바로 대사를 향해 와서 머리와 손을 때리고 갔다. 그런데도 대사는 묵묵히 서서 얼굴의 피를 닦았다. 다시 한 사람이 칼을 들고 급히 와서 대사의 배를 찌르고 갔다. 이 때에 대사는 두려워서 땅에 엎드려 빌었는데 뒤에 한 사람이 나타나 완전히 죽이고 갔다. 다음날 아침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야마토노아야노사카노우에노아타히코마로(東漢坂上直子麻呂) 등이 그 이유를 추궁하였다. 부사 등은 “덴노께서 대사에게 아내(妻)를 내려 주었는데 대사가 칙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무례하였으므로 신들이 덴노를 위하여 죽였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유사(有司)가 예로써 거두어 장사지냈다.
- 가을 7월 : 고려 사신이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2.3. 2년 : 573년
- 여름 5월 3일 : 고려 사신이 월(越)의 해안[5]에 정박했는데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 것을 의심하여 향응을 베풀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키비노아마노아타히나니하(吉備海部直難波)에게 칙을 내려 고려의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 가을 7월 1일 : 월(越)의 해안에서 나니와(難波)와 고려의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송사 나니와(送使 難波)의 배에 타고 있던 오호시마노오비토이하히(大嶋首磐日)와 사워카노오비토마세(狹丘首間狹)를 고려 사신의 배에 타게 하고, 고려인 두 사람은 송사의 배에 타게 했다. 이같이 서로 바꾸어 타서 간사한 마음에 대비하도록 했다. 함께 배를 출발하여 몇 리쯤 갔을 때 송사 나니와가 파도를 두려워 하여 고려인 두 사람을 붙잡아 바다에 던져 넣었다.
- 8월 14일 송사 나니와가 돌아와서 복명(復命)하기를 “바다에 큰 고래가 배와 노를 가로막고 부술듯 하였으므로 나니와 등은 고래가 배를 삼킬까 두려워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덴노가 듣고 속이는 말임을 알고는 관에서 사역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2.4. 3년 : 574년
- 여름 5월 : 고려 사신이 월의 해안에 정박했다.
- 가을 7월 20일 : 고려 사신이 수도에 들어와 “신들은 지난 해에 송사(送使)를 따라서 귀국했습니다. 신들은 먼저 저희 나라에 이르렀는데 저희 나라는 사인의 예에 준하여 오호시마노오비토이하히(大嶋首磐日) 등에게 향응을 베풀었으며 고려 국왕은 따로 두터운 예로써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송사의 배는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삼가 사신과 반일(磐日) 등을 보내어 저희 사인들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라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 나니와의 죄를 책하여 “조정을 속인 것이 하나요, 이웃나라의 사신을 물에 빠뜨려 죽인 것이 둘이니, 이같은 큰 죄는 놓아서 되돌려 보낼 수 없다”라 하고 그 죄를 처단했다.
- 겨울 10월 9일' : 소가노우마코노오호오미(蘇我馬子大臣)를 길비국(吉備國)[6]에 보내어 시라위노미야케(白猪屯倉)와 전부(田部)를 더욱늘렸다. 그리고 전부의 이름 있는 책(名籍)들을 시라위노후비토이츠(白猪史膽津)[7]에게 주었다.
- 10월 11일 : 선사(船史) 왕진이의 아우 우(牛)에게 명하여 츠노후비토(津史)라는 성을 내렸다.
- 11월 :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2.5. 4년 : 575년
- 1월 9일 : 오키나가노마테오호키미(息長眞手王)의 딸 히로히메(廣姬)를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한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을 낳았다. 첫째는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호에노미코(押叛彦人大兄皇子)라 하고【다른 이름은 마로코노미코(麻呂古皇子)이다.】, 둘째를 사카노보리노히메미코(逆登皇女)라고 하며, 셋째를 우지노시츠카히노히메미코(莵道磯津貝皇女)라고 한다.
이 달에 한 명의 부인을 세웠다. 카스가노오미나츠키미(春日臣仲君)의 딸로 오미나고노오호토지(老女子夫人)이라고 한다.【다른 이름은 쿠스리코노이라츠메(樂君娘)이라고 한다.】. 세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 그 첫째를 나니하노미코(難波皇子)라 하고, 둘째를 카스가노미코(春日皇子)라 하고, 셋째를 쿠하타노히메미코(桑田皇女)라고 하고, 넷째를 오호마타노미코(大波皇子)라고 한다. 다음에는 채녀(采女)인 이세노오호카노오미토워쿠마(伊勢大鹿首小熊)의 딸로, 우나코노오호토지(莵名子夫人)이라고 한다. 후토히메노미코(太姬皇女)【다른 이름은 사쿠라위노히메미코(櫻井皇女)이다.】와 아라테히메노미코(糠手姬皇女)【다른 이름은 타무라노히메미코(田村皇女)이다.】를 낳았다. - 2월 1일 : 우마코노스쿠네노오호오미(馬子宿禮大臣)가 수도로 돌아와 둔창의 일을 복명하였다.
- 3월 11일 :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평년보다 많았다. 덴노는 신라가 임나를 세우지 않으므로, 황자와 대신들에게 "임나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라고 명하였다.
- 여름 4월 6일 : 키시노카네(吉士金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키시노워사히코(吉士木蓮子)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 6월 :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평소의 예보다 많았다. 아울러 다다라, 수나라, 화타, 발귀 네 읍[8]의 조공을 바쳤다.
- 이 해에 점치는 사람에게 명하여 아마노오호키미(海部王)의 집터와 오토위노오호키미(絲井王)[9]의 집터를 점쳤다. 점친 결과가 좋았다. 드디어 궁궐을 워사타(譯語田)에 지었다. 이를 사키타마노미야(幸玉宮)이라고 하였다.
- 겨울 11월 : 황후 히로히메가 죽었다.
2.6. 5년 : 576년
- 3월 10일 : 유사(有司)가 황후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노미코토(蘴御食炊屋姬尊)을 세워 황후로 삼았다. 이에 두명의 아들과 다섯명의 딸을 낳았다. 첫째는 우지노카히타코노히메미코(莵道貝鮹皇女)【다른 이름은 우지노시츠카히노히메미코(莵道磯津貝皇女)이다.】로 동궁(東宮)인 쇼오토쿠(聖德)에게 시집갔다. 넷째는 우모리노히메미코(노鶿守皇女)【다른 이름은 카루노모리노히메미코(輕守皇女)이다.】이다. 다섯째는 워하리노미코(尾張皇子)이고, 여섯째는 타메노히메미코(田眼皇女)로 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노스메라미코토(息長足日廣額天皇)에게 시집갔다. 일곱째는 사쿠라위노유미하리노히메미코(櫻井弓張皇女)이다.
2.7. 6년 : 577년
- 2월 1일 : 일사부(日祀部)와 사부(私部)를 두도록 명하였다.
- 여름 5월 5일 : 오호와케노오호키미(大別王)과 워구로노키시(小黑吉士)를 내보내어, 백제국의 사신으로 삼았다.【신하가 덴노의 명을 받들어 삼한의 사신이 되면스스로 재상(宰)이라 칭했다. 한(韓)의 재상으로 삼았다는 말은, 생각하건데 옛날의 법도인 것 같다. 지금의 사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나머지는 모두 이를 따른다. 오호와케노오호키미의 출신은 알수가 없다.】
- 겨울 11월 1일 :백제국의 왕이 돌아가는 사신 오호와케노오호키미 등에게 경론 몇권,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 주금사(呪禁師), 불상을 만드는 이(造佛工), 절을 만드는 이(造寺工) 이상 6인을 바쳤다. 귀국후에 나니와의 오호와케노오호키미의 절에 안치했다.
2.8. 7년 : 578년
2.9. 8년 : 579년
- 겨울 10월 : 신라가 지질정(枳叱政), 나말(奈末)[11]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아울러 불상을 보냈다.
2.10. 9년 : 580년
- 여름 6월 : 신라가 안도(安刀) 나말과 실소(失消) 나말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받지 않고 그것을 돌려 보냈다.[A]
2.11. 10년 : 581년
- 봄 윤 2월 : 에미시(蝦夷) [13]수천명이 변경을 침범했다. 이로 인해서 그 우두머리 장수인 아야카스(綾槽)【우두머리 장수는 대모인(大毛人)이다.】등을 불러서 "생각하건데 너희 에미시는 오호타라시히코노스메라미코토(大足彦天皇) 때에 죽여야 할자는 죽이고, 용서해야 할 자는 풀어주었다. 지금 짐은 그 전례에 따라 원악(元惡)을 죽이고자 하낟."라고 말하였다. 이때 능조등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하츠세(泊瀨)의 증류에 내려가서 미모로노워카(三諸岳)를 바라보며, 입에 물을 머금고서, "신 등의 에미시는 지금부터 자자손손【옛 말에서 아이를 낳는 것을 80번 거듭하는 것이라고 한다.】맑고 밝은 마음을 가지고 천자를 받들겠습니다. 신들이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천지의 여러 신과 천황의 영혼이 신의 혈통을 끊으십시오."라고 맹세하였다.
2.12. 11년 : 582년
- 겨울 10월 : 신라는 안도 나말과 실소 나말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받지 않고 돌려 보냈다.[A]
2.13. 12년 : 583년
- 가을 7월 1일 : "우리 선고덴노의 치세에 신라는 내관가(內官家)[15]
- 겨울 10월 : 키노쿠니노미야츠코오시카츠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조정에 "백제국의 왕은 일라를 아까워 (일본으로)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 이 해에 또 키비노야마노아타히하시마를 보내어 일라를 백제에서 불렀다. 하시마(羽嶋)는 이미 백제에 가서 먼저 따로 일라를 만나고자 혼자 집의 문 앞으로 갔다. 잠시 후 집 안에서 나온 한(韓)의 부인이 한어(韓語)로 "너의 뿌리를 내 뿌리 속에 넣어라."라고 말하고,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시마는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일라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몰래 "제가 은밀히 들으니, 백제국주는 천조(天朝)를 의심하여 신을 보낸다면 머무르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아까워하면서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칙을 알릴 때 엄하고 무서운 안색을 드러내면서 재촉하여 급히 부르십시오."라고 고하였다. 하시마는 곧 그 계책에 따라 일라를 불렀다. 이에 백제국주는 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칙을 어기지 못하였다. 백제국주는 일라, 은솔 덕이(恩率 德爾)‧여노(余怒)‧기노지(奇奴知)‧참관(參官) 타사(柁師) 덕솔 차간덕(德率 次干德) 수수(水手) 등 약간의 사람을 보냈다.
일라 등이 길비(吉備)의 코지마(兒嶋) 둔창(屯倉)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大伴糠手子連)를 보내어 위로하고, 다시 대부(大夫) 등을 나니와관(難波館)[16]에 보내어 일라를 찾아보게 했다. 이 때 일라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서 곧 건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절도 있게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탄하기를 “히노쿠마노미야니아메노시타시라시메스스메라미코토(檜隈宮御寓天皇)때에 우리 주군(君) 오호토모노카나무라노오호무라지(大伴金村大連)가 국가를 위하여 바다 밖에 사신으로 갔던 화위북국조 형부채부아리사등(火葦北國造 刑部靫部 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는 덴노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며 내조(來朝)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덴노에게 바쳤다. 덴노는 아토의 쿠하노이치(阿斗桑市)에 관사(館舍)를 지어 일라를 머물게 하고 바라는대로 공급해 주었다. 또 아배노메노오미(阿倍目臣)와 모노노베노니헤코노무라지(物部贄子連)‧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을 보내어 일라에게 국정을 물었다. 일라가 대답하기를 “덴노가 천하를 다스리는 바의 정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르는데 있습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멸망에 이르려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논의하는 자들로서 조정에 있는 신(臣)‧연(連)의 이조로부터【이조(二造)란 국조(國造)와 반조(伴造)이다】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유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시요. 이렇게 3년을 하면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물불을 꺼리지 않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근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진(津)마다 줄지어 두고 객인[17]들이 보게 하여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십시요.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되 만일 오지 않으면 태좌평(太佐平)‧왕자(王子) 등을 부르십시요. 그러면 저절로 복종할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어십시요”라 하였다. 또 “백제인이 꾀하여 ‘배 3백 척으로 츠쿠시(筑紫)를 달라고 하자' [18]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청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츠쿠시를) 내려주십시요.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반드시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때를 대비하여 일기(壹伎)‧대마(對馬)에 복졍(伏兵)을 많이 두었다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요. 오히려 속임을 당하지 말고 중요한 곳마다 튼튼한 요새를 쌓으십시요”라 아뢰었다.
이에 은솔(恩率)‧침관(參官)이 나라로 되돌아 갈 때에【옛 책에는 은솔을 한 사람, 참관을 한 사람이라 하였다】 몰래 덕이(德爾) 등에게 “내가 츠쿠시(筑紫)를 지나갈 때 쯤을 헤아려 너희들이 몰래 일라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모두 아뢰어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고 자신과 처자식들에게도 후에 영예를 내리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덕이(德爾)‧여노(余奴)가 모두 수락했다. 참관 등은 드디어 치카(血鹿)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일라는 쿠하이치노무라(桑市村)로부터 나니와관(難波館)으로 옮겼다. 덕이 등은 밤낮으로 서로 모의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에 일라의 몸에서 빛이 나 불꽃같았으므로 덕이 등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12월 그믐에 빛을 잃기를 기다려 죽였다. 일라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노비(奴)등의 짓이지 신라가 한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 때에 신라 사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덴노가 니헤코노오호무라지(贄子大連)와 아라테코노무라지(糠手子連)에게 명하여 워고오리(小郡)의 서쪽 부근 언덕 앞에 거두어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수수(水手) 등은 이시카하(石川)에 살게 했다. 이에 오호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가 논의하여 “한 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라 하였으므로 처자식들은 석천 백제촌(百濟村에 살게 하고 수수 등은 석천 대반촌에 살게 했다. 덕이 등을 붙잡아 하백제 하전촌에 두고 몇몇 대부(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따져 물었다. 덕이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은솔‧참관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감히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때문에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복명했다. 아시키타(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일라의 권속을 다 불러 덕이 등을 주어서 뜻대로 죄를 판결하게 했다. 이 때 이시키타노키미(葦北君) 등이 (덕이 등을) 받아서 모두 죽여 미메시마(彌賣嶋)에 던져버리고【미메시마는 아마 히메시마(姬嶋)일것이다.】 일라를 이시키타(葦北)에 이장(移葬)시켰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 “은솔의 배는 바람을 만나 바다에 빠졌고, 참관의 배는 쓰시마(津嶋)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라 하였다.
2.14. 13년 : 584년
- 봄 2월 8일 : 나니하노키시이타비(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마침내 임라(任那)에 갔다.
- 가을 9월 : 백제에서 온 카후카노오미(鹿深臣)【이름이 빠졌다】가 미륵석상 1구를 가지고 있었고 사헤키노무라지(佐伯連)【이름이 빠졌다】이 불상 1구를 가지고 왔다.
- 이 해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蘇我馬子宿禰)가 그 불상 2구를 얻어 쿠라츠쿠리노스구리시메다치토(鞍部村主司馬達等)와 이케베노아타히히타(池邊直氷田)를 보내어 사방에서 수행자를 찾게 했다. 이에 오직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서 승려로서 환속한 자를 찾았는데 이름이 고려 혜편(高麗 惠便)[19]이었다. 대신이 스승으로 삼았다. 쿠라츠쿠리노스구리시메다치토의 딸 시마(嶋)를 출가시켰는데 젠신노아마(善信尼)[20]라 한다【나이 11세였다】. 또 젠신노아마(善信尼)의 제자 2인을 득도시키니, 한 사람은 아야히토야보(漢人夜菩)의 딸 토요메(豊女)로 이름이 젠노오노아마(禪藏尼)라 하고, 또 한 사람은 니시코리노츠부(錦織壺)의 딸 이시메(石女)로 에젠노아마(惠善尼)이다【壺는 츠부(都符)라 한다】. 우마코(馬子)는 홀로 불법에 의지하여 세 비구니를 공경했는데 세 비구니를 히타노아타히(氷田直)와 타치토(達等)에게 맡겨서 옷과 먹을 것을 주게했다. 집 동쪽에 불전(佛殿)을 세워 미륵석상을 안치하고 세 비구니에게 법회를 열어달라 간절히 청해 법회(齌會)를 크게 열었다. 이 때 타치토가 재식(齌食)[21]할 때에 부처님의 사리(佛舍利)를 얻었다. 곧 이 사리를 우마코노스쿠네( 馬子宿禰)에게 바쳤다. 우마코노스쿠네는 시험삼아 사리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후려 쳤더니 모루와 쇠망치는 부서졌지만 사리는 훼손할 수 없었다. 또 사리를 물에 던졌더니 사리는 멋대로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와 쿠라츠쿠리노스구리시메다치토, 우마코노스쿠네는 불법(佛法)을 깊이 믿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마코노스쿠네가 또 석천의 집에서 불전(佛殿)을 지었는데 불법(佛法)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2.15. 14년 : 585년
- 봄 2월 15일 :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탑을 오호노(大野)의 북쪽 언덕에 세우고 크게 법회를 열고 식사를 나누어 주었다.그리고 타치토가 얻은 사리를 탑의 머리부분에 안치하였다.
- 2월 24일 :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병이 들었다. 점쟁이에게 물으니 점쟁이가 "아버지대부터 부처님에게 제사지낸 것 때문입니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아들을 덴노에게 보내 그 점의 결과를 아뢰니, 덴노는 "마땅히 점쟁이의 말에 따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라고 명하였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명을 받들어 석상에 예배하여 수명을 늘려줄 것을 빌었다. 이때 나라에 역병[22]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 3월 :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가 스스로 절에 나아가 호상(胡床)[23]에 걸터앉았다. 그 탑을 무너뜨리고 불을 놓아 태워 버렸으며 또 불상(佛像)과 불전(佛殿)을 불태웠다. 태우고 남은 불상을 모아서 나니와(難波)의 호리에(堀江)에 버리게 했다. 이 날 구름도 없었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는 비옷을 입고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와 그를 따라 수행하는 승려들을 꾸짖어 욕보였다. 그후 사헤키노미야츠코미무로(佐伯造御室)【다른 이름은 오로게(於閭礙)이다】를 보내어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공양하는 젠신노아마 등의 비구니를 불렀다. 이 때문에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슬피 울며 비구니들을 불러내어 미무로(御室)에게 맡겼다. 우사(有司)가 곧 여승의 승복을빼앗고 가두었다가 츠바키치의 정자(海石榴市亭)에서 채찍으로 쳤다. 덴노는 임나를 세우려고 생각하여 사카타노미미코노오호키미(坂田耳子王)를 뽑아 사신으로 삼았다. 이 때 마침 덴노와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가 갑자기 종기에 걸려서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타치바나노토요히노미코(橘豊日皇子)에게 명령하여 “아버지 덴노의 조칙을 거스릴 수 없다. 임나의 정치를 힘써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종기가 생겨 죽은 사람들이 나라에 가득찼는데 종기를 앓는 자들이 “몸이 불타고 매맞고 부러지는 듯하다”고 하면서 울부짖으며 죽었다.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몰래 서로 “이는 불상(佛像)을 불태운 죄이다”라고 말하였다.
- 여름 6월에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가 "신의 질병은 지금까지 낫지 않았습니다. 삼보(三寶)의 힘을 입지 못하면 치유도기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덴노는)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에게 "너에게만 부처를 모시는 것을 허락한다. 다른 사람은 허락치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세 여승을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에게 돌려 보냈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이들을 맞이하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없던 일이라 하여 세 여승에게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올렸다. 이후 새로운 절을 지어서 부처를 모시고 공양하였다.【어떤 책에서는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 오호미와노사카우노키미(大三輪逆君), 나카토미노이하레노무라지(中臣般余蓮)가 함께 불법을 없애고자 의논하여 절에 탑을 불태우고, 불상을 버리려고 했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이에 반발해 이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 가을 8월 15일 : 덴노가 병을 오래 앓다가 죽었다. 히로세(廣瀨)[24]에 장례식을 치를 궁(殯宮)을 세웠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칼을 차고 조문을 읽었다.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는 큰 소리로 웃으며 "사냥에 쓰는 화살에 맞은 참새 같다."라고 말했다. 다음에 모노노베노유게노모리야노오호무라지는 손발을 떨며(搖震) 조문을 읽었다.【搖震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웃으며 "방울을 달아야 겠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하여 두 신하는 조금씩 원한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와노사카우노키미는 준인(隼人)으로 하여금 장례식장(殯庭)을 지키도록 하였다. 아나호베노미코(穴穗部皇子)[25]는 천하를 가지려고 했다. 분노하여 "어째서 돌아가신 왕은 섬기고, 살아있는 왕은 섬기지 않는가"하였다.
[1] 현재 오사카 일대에 위치한 지리명.[2] 사관을 말한다.[3] 당시 고구려 특유의 언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존재.[4] 사신이 머물던 상락관을 말한다.[5] 지금의 이시카와현으로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사신들이 주로 정박했던 곳이다.[6] 키비노구니. 현재의 오카야마 현 전역과 히로시마 현 동부와 가가와현 도서 지역 및 효고현 서부에 있었던 세력.[7] 왕진이의 조카.[8] 흠명서기에도 등장하는 단어로 현재의 다대포, 김해 일대를 말한다.[9] 참고로 한자 득음은 "사정왕(...)"이다.[10] 둘째 황후에게서 낳은 첫째딸.[11] 신라의 17관등중 제 11관등으로 외교와 관련된 기록들에서 찾아볼수 있다.[A] 학계에서는 이를 중복해서 적은 오기라고 보고 있다.[13] 일본 동북부 일대에 위치했던 민족.[A] [15] 일본의 속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임나일본부|임나(금관 가야)를 자신의 속국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프로파간다가 담긴 단어이다.]인 나라를 멸망시켰다.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 23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신라는 우리 내관가를 멸망시켰다고 말한 것이다.], 선고덴노는 임나를 회복하고자 꾀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그 뜻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짐은 신령스러운 계책을 받들어 다시 임나를 일으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화위북국조(火韋北國造) 아리사등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는 어질고 용맹하다. 그러므로 짐은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곧 키노쿠니노미야츠코오시카츠(紀國造押勝)와 키비노야마노아타히하시마(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어 백제에 불러들였다[16] 현재의 오사카에 위치했던 사신 접대 장소.[17] 이웃나라 사신[18] 현재의 구마모토.[19] 고구려 출신 인물로 추정되며 혜편은 법명을 속세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0] 참고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이다.[21] 법회가 끝난후 하는 식사.[22] 천연두로 추정된다.[23] 접이식 의자[24] 나라현 일대로 추정.[25] 비다스 덴노의 13번째 동생으로 이듬해에 사망한 형의 부인을 범하려다가 살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