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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20, 요메이 덴노
1. 주의
- 일본서기의 내용은 고대 일본제국이랑 천황들의 위상을 드높히기 위해 천황중심주의적으로 기술된 사서이다. 특히 대외 외교, 국제관계 와 관련된 부분은 한국, 중국 사서들과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서기의 내용만 보고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구나!"같은 생각을 가지지 마시길.
2. 권 21
2.1. 즉위 전기
타치바나노토요히노스메라미코토(橘豊日天皇) 요메이 덴노(崇峻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타치바나노도요히(橘豊日) 덴노는 아메쿠니노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키타시히메(堅鹽媛)이라고 한다.덴노는 불법(佛法)을 믿고[1] 신도(神道)[2]를 존숭하였다. 14년 가을 8월에 누나쿠라노후타토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가 붕했다.
9월 5일에 덴노가 황위에 올랐다. 이하레(磐餘)에 궁을 짓고, 이케노베노나미츠키노미야(池邊雙規宮)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소가노우 마코노스쿠네(蘇我 馬子宿禰)를 대신으로 삼고[3] 모리야노오호무라지를 대련으로 삼으니, 전대 왕때와 똑같았다. 임신에 조를 내려 스카테히메노미코(酢香手姬皇女)를 이세노오호미카미노미야(伊勢神宮)에 보내어 일신(日神)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이 황녀는 지금의 덴노 때부터 카시키야히메노스메라미코토(炊屋姬天皇)의 시대에 이르기 까지 일신의 제사를 받아들였다. 이후 자신의 의지로 카즈라키(葛城)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취옥희기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책에서는 37년간 일신의 제사를 받들고 스스로 물러나 죽었다고 하였다.】
2.2. 원년 : 585년
- 1월 1일 : 아나호베노하시히토노히메미코(穴穗部間人皇女)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네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우마야도노미코(廐戶皇子)라고 한다.【또한 토요미미토쇼오토쿠(蘴耳聰聖德)라고도 한다. 혹은 토요토미미노노리노오호키미(蘴聰耳法大王)이라고도 한다. 혹은 노리노우시노오호키미(法主王)이라고도 한다.】 이 황자는 처음에 카미츠미야(上宮)에 살았다가 후에 이카루가(班鳩)로 옮겼다. 취옥희기에 나온다. 둘째는 쿠메노미코(來目皇子)라고 한다.[4] 셋째는 웨쿠리노미코(殖栗皇子)라고 한다. 넷째는 마무타노미코(茨田皇子)라고 한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의 딸 이시키나(石寸名)를 세워 세자빈으로 삼았다. 이시키나는 타메노미코(田目皇子)【또한 토유라노미코(蘴浦皇子)를 낳았다.】카즈라키노야마다노아타히미츠코(葛城山田直瑞子)의 딸 히로코(廣子)는 아들과 딸을 낳았다. 아들은 마로코노미코(麻呂子皇子)라고 하는데, 이는 타기마노키미(當麻公)[5]의 시조다.딸은 스카테히메노미코(酢香手姬皇女)라고 하는데, 3대에 걸쳐서 일신을 받들였다.
- 여름 5월 : 아나호베노미코(穴穗部皇子)가 (죽은 형의 부인인) 카시키야히메노키사키(炊屋姬皇后)를 범하려고 스스로 빈궁(殯宮)에 들어갔다. (비다츠 덴노)의 총애받은 신하(寵臣)인 미와노키미사카후(三輪君逆)가 병위(兵衛)를 불러 궁문[6]을 쇠사슬로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아나호베노미코가 "누가 이곳에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병위가 "미와노키미사카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나호베노미코가) 일곱번 문을 열라고 호령햇으나, 끝내 들어갈수 없었다.
이에 아나호베노미코는 대신과 대련에게[7] 사카후(逆)[8]가 몹시 무례하다. 그는 빈정에서 '조정을 어지럽히지 않고 거울의 앞면처럼 깨끗하게 하여, 신은 (나라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도록 봉사하겠습니다.'라고 조사를 읽었다. 즉 이는 무례한 것이다. 지금 덴노의 수많은 형제들과 아들들이 살아있고, 두 대신도 조정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어찌 (미와노키미사카후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멋대로 봉사하겠다고 말하는가. 또한 내가 빈소 안을 보려고 하는데, 막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몸소 문을 열라고 호령하여도 일곱 번이나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두 대신은 "명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때 아나호베노미코는 몰래 천하의 왕이 되는 일을 꾀하여, 구실을 만들어 사카후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모리야노오무라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반여(槃餘)의 지변(池邊)을 포위하였다. 미와노키미사카후가 이 사실을 알고 미모로노워카(三諸岳)에 숨었다. 그리고 이 날 밤중에 몰래 산으로부터 빠져나가서, 후궁(後宮)[9]에 숨었다.【(후궁은) 카시키야히메노키사키의 별관을 말한다, 이곳을 츠바키이치노미야(海石榴市宮)이라고 한다.】그런데 사카후의 일족인 시라츠츠미(白提)와 요코야마(橫山)이 사카후가 있는 곳을 알렸다. 아나호베노미코는 즉시 모리야노오무라지【어떤 책에는 아나호베노미코와 하츠세노미코(泊櫴部皇子)가 서로 의논하여 모리야노오무라지를 보냈다고 한다.】를 보내어 "너는 가서 사카후와 그 두명의 자식들을 죽여라."라고 말하였다. 모리야노오무라지는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떠났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밖에서 이러한 계책을 듣고, 황자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곧 문 앞에서 만났다.【황자의 집 문을 말한다.】(황자)는 모리야노오무라지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이때 "왕은 죄지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몸소 가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곧 다시 달려가서 반여에 이르러서도【어떤 책에는 가서 지변에 이르렀다.】간절히 간언 하였다. 황자가 이에 간언에 따라 멈추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호상[10]에 앉아서 모리야노오무라지를 기다렸다. 한참 지나서 모리야노오무라지가 도착하였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와서 "사카후 등을 죽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어떤 책에는 아나호베노미코가 스스로 활을 쏘아 사카후를 죽였다고 한다.】이에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슬퍼하며 "천하가 머지 않아 어지러워 질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리야노오무라지이 이를 듣고 "너는 소신(小臣)[11]이어서 (미래를) 알수나 있을 것 같으냐."라고 하였다.【미와노키미사카후는 워사타노스메라미코토(譯語田天皇)의 총애를 입어, 궁궐 안밖의 모든 일을 맡았다. 카시키야히메노스메라미코토와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는 이 사건을 겪은 후 아나호베노미코를 원망하였다.】
이해 간지는 병오이다.
2.3. 2년 : 586년
- 여름 4월 2일 : 반여의 강가에서 신상제(新賞)를 지냈다. 이 날 덴노가 병을 얻어서 궁에 돌아오니 군신들이 모였다. 덴노는 군신들에게 "짐은 삼보(三寶)에 귀의 하고자 생각한다. 경들은 이를 의논하라."[12]고 명하였다. 군신들은 입조하여 의논하였다.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와 나카토미노카츠미노무라지(中臣勝海連)는 덴노의 명과 달리 "어찌 국신(國神)을 등지고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명을 내리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가노우마코노오호오미(蘇我馬子大臣)는 "덴노의 명에 따라서 도와야 합니다.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제황자(皇弟皇子)【황제황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나호베노미코, 즉 덴노의 서제(庻弟)이다.】는 풍국법사(蘴國法師)【이름이 빠졌다.】를 데리고 내리(內裏)로 들어갔다. 모리야노오무라지는 노려보면서 크게 화를 냈다.
이때 오시사카베노후비토케쿠소(押炍部史毛屎)[13]가 급히 돌아와서 은밀히 모리야노오무라지에게 "지금 여러 신하들이 경을 노리고 있습니다. 또 장차 귀로를 차단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모리야노오무라지는 이를 듣고 곧 아토(阿都)로 물러나서【아도는 대련의 별관이 있는 곳의 지명이다.】[14] 사람을 모았다. 나카토미노카츠미노무라지는 사람을 모아 모리야노오무라지를 쫒아가 도왔다. 그리고 태자 히코히토노미코(彦人皇子)의 상(像)과 타케타노미코(竹田皇子)의 상을 만들어 저주하였다.[15] 그런데 갑자기 일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미마타노미야(水派宮)으로 돌아와서 히코히토노미코에게 귀부하였다.【水派는 미마타(美麻多)라고 읽는다.】 사인(舍人) 토미노이치히(迹見赤檮)【迹見는 성이고, 赤檮는 이름이다. 赤檮는 이치히(伊知毗)라고 읽는다.】는 나카토미노카츠미노무라지가 히코히토노미코의 처소에서 물러나기를 엿보다가 칼을 빼어 죽였다.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는 아토에 위치한 집에서 모노노베노야사카(物部八坂)와 오호치노미야츠코워사카(大市造小坂), 누리베노미야츠코아니(漆部造兄)을 시켜서 소가노우마코노오호오미에게 "나는 여러 신하들이 나를 노린다는 책모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물러나겠다."라고 라고 말했다. 소가노우마코노오호오미는 곧 하지노야시마노무라지(土師八嶋連)을 오호토모노히라부노무라지(大伴毗羅夫連)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자세하게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의 말을 알리게 하였다. 이로 인해 오호토모노히라부노무라지(大伴毗羅夫連)는 손에 활과 화살, 가죽방패를 들고 츠키쿠마(槻曲)의 집으로 가서 밤낮으로 물러나지 않고 대신(大臣)을 호위하였다.【규곡은 집은 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의 집이다.】
덴노의 두창은 점차 심했졌다. 장차 죽으려고 할 때, 쿠라츠쿠니노타스나(鞍部多須奈)【司馬達等의 아들이다.】가 나아가서 "신은 덴노를 위하여 출가해서 수도하겠습니다. 또 장육불상 및 절을 지어 바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덴노는 이 때문에 슬프게 울었다. 지금 미나부치(南淵)의 사카타데라(坂田寺)의 나무로 만든 장육불상과 협시보살이 그것이다.
9일에 덴노가 대전(大전)에서 붕했다.
- 가을 7월 21일 : 이하레노이케노베노미사자키(磐餘池上陵)에서 장사지냈다.
[1] 긴메이덴노 13년에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덴노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언급한 최초의 기사다. 따라서 요메이 덴노대에 불교가 공인화 되었다고 볼수 있다.[2] 일본의 토속신앙을 일컫는 말.[3] 부왕이었던 비다츠 덴노대에 이미 대신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불교 문제로 불교를 반대하는 인물인 모리야노오호무라지(弓削守屋大連)와 갈등을 빚었다.[4] 스이고 덴노 10년, 신라 정벌 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에 죽었다.[5] 일본의 가문.[6] 민달기 14년 8월에 미와노키미사카후가 궁문을 지키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형제의 장례식장에서 "죽은 왕은 모시면서 왜 나, 살아있는 왕은 차별하냐!"라는 소리를 하고 형수를 범하려고 한거 보면 어지간히 막장이었나 보다.[7]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대신), 모리야노오무라지(대련)를 말한다.[8] 왕궁을 지키던 미와노키미사카후를 말한다.[9] 비달 황후의 궁을 말한다.[10] 접이식 의자[11]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의 직책이 대신(大臣)인 것을 이용해 조롱하는 것이다.[12] 불교를 믿겠다는 이야기다.[13] 원래 한반도 도래인으로 원래 성은 이씨(李氏)엿다고 한다. 오진 덴노때에 귀화했다고 한다.[14] 현재의 오사카[15] 두사람은 비다츠 덴노의 아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