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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0:48:17

일본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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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ihonkatchu.jpg
일본의 각 시대 별 고위 무사용 갑옷. 왼쪽부터 단갑, 괘갑, 오오요로이, 마루도요로이, 당세구족

1. 개요2. 발달 과정3. 특징4. 구성요소5. 스타일
5.1. 갑(甲)류(고훈 시대 ~ 헤이안 시대 전기)5.2. 요로이(鎧)류(텐교의 난 ~ 오닌의 난)5.3. 구소쿠(具足)류(호조 소운 거병 ~ 오사카 전투)5.4. 카타비라(帷子)류(겐나엔부 ~ 세이난 전쟁)
6. 투구
6.1. 도래기6.2. 초기6.3. 전기6.4. 중기6.5. 후기6.6. 말기
7. 이야깃거리
7.1. 중일전쟁 에피소드
8. 번외
8.1. 류큐 갑옷8.2. 아이누 갑옷

1. 개요

일본갑주(日本甲冑)로 통칭되는, 일본전통 갑옷투구를 다룬 문서.

2. 발달 과정

일본에서도 선사 시대에 해당하는 야요이 시대부터 갑옷이 있었다. 가죽제를 비롯한 다양한 갑옷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유기질이므로 유물은 남은 바가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갑이 현존하며, 이 형태가 고분 시대의 단갑(短甲)과 유사하여 단갑의 스타일의 원조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양식, 또는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류에 의한 영향으로 추정된다.

야마토 정권이 일본의 주도권을 잡고 세력을 확대해 간 고분 시대에는 단갑(短甲)과 괘갑(掛甲)이라는 갑옷이 주류를 이루었다. 단갑은 일본과 초기 백제, 신라, 가야에서 공유하고 있던 것으로 철판의 연결 방식과 패턴에 따라 종장판갑, 횡장판갑 등으로 구분한다.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반도 국가였던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게 유력하다.[1] 단갑은 철판을 리벳으로 연결하여 몸에 맞게 제조한 철판갑옷, 즉 라미나 아머(Laminar Armour)로써, 기본적으로 몸통만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어깨와 다리를 방어하는 부품들도 등장한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 지방에서 사무라이들이 크게 세력을 늘리고, 중앙 정치에도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확인되는 갑옷이 바로 오오요로이(大鎧)이며, 일본 갑옷 하면 바로 떠올리는 바로 그 모양새이다. 투구의 커다란 V자 장식, 얼굴 옆부분의 커다란 판, 사각형의 거대한 어깨 보호구, 형형색색의 화려한 실로 엮은 외장에 이르기까지 이후 1000년간의 일본 갑옷의 기원은 직접적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무사들이 말을 타고 원거리에서부터 활을 쏘며 접근하여 근거리 저격전으로 들어가는 전투 양상이었고, 오오요로이는 화살에 대비하여 크게 펑퍼짐하고 갑옷과 신체 사이에 넉넉한 공간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하급무사들의 갑옷으로는 도마루(胴丸)가 있었는데, 걷기 편하게 만들어졌고 이때에는 투구 말고는 다른 부속품이 따로 없었다.

가마쿠라 막부시대까지는 오오요로이가 대세를 타고 있었지만 몽골침공 이후 벌어진 사회 혼란속에서 대두된 악당(惡黨)이라는 신흥 무장세력과 그들의 새로운 전투 방식은 더이상 고리타분하고 의식화된 마상 활쏘기 전투가 아닌 산악에서 매복하고 기습하며 지형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투 방식이었고, 전쟁의 형태 자체가 바뀌어갔다. 그래서 몸에 딱 붙고 도보전투가 간편한 도마루가 정규 장비로 격상되어 투구를 비롯한 다양한 부속품이 붙어 풀 슈트의 제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서 겐무 신정, 남북조시대에 이르는 수십년간의 내전기간 중 완전히 정착되며, 간이 장비로 여겨졌던 하라마키(腹卷)까지 가볍고 활동이 편하다는 점 때문에 정규 장비로 격상되게 된다. 또 이 내전기간 동안 방어가 부실했던 무릎과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하이다테(佩盾)가 등장하고, 왼팔에만 차던 팔 보호구인 코테(籠手)를 양팔에 모두 차게 되는 등, 일본갑옷의 방어 범위와 방어력이 크게 향상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이러한 갑옷의 강화와 중장화에 따라 백병전용 무기가 크게 흥하였고, 금쇄봉이나 가리봉같은 타격무기, 오오타치, 나가마키, 같은 신무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2]

무로마치 시대 후기와 센고쿠 시대에 당세구족(토오세이구소쿠, 当世具足)이라는 양식이 등장한다. 당세구족이란 요즘 시대의 갑옷이라는 뜻인데, 그 양식이 굉장히 다양해서 그 특징을 한 번에 말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주요한 변화는 소찰을 엮어 만들고, 그 실도 굉장히 촘촘하게 엮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큰 철판을 사용해 갑옷을 만들고, 실도 꼭 필요한 만큼만 듬성듬성 엮어서 기존의 갑옷에 비하면 화려함이 덜하지만, 실용성은 매우 좋고 양산하기 편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이 점은 현대 재현 갑옷에서도 동일해서 소찰을 엮어 만드는 고전 갑옷은 그 가격이 수백~수천만 원이지만, 당세구족은 싼 것은 수십만 원 선에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크게 보급된 총기류에 대한 방어를 신경 썼다는 점도 특징이다. 유럽제 판금 흉갑과 투구(모리용 투구)를 수입해서 일본식으로 개조해서 쓰기도 했으며,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유럽제 판금 흉갑을 남만동(南蠻胴)이라고 불렀고, 차후 일본인의 체형에 맞추어 국산화시키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갑옷이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갑옷도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써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당세구족보다는 과거의 오오요로이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3] 물론 에도 시대 초중기까지는 당세구족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다. 막부 말의 혼란기에 다시 갑옷이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갑옷은 과거의 당세구족이 아니라, 쇠사슬로 짠 쿠사리 카타비라로써, 옷 밑에 받쳐입어 칼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접이식 간이 투구나 가죽제 방어구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갑옷 착용은 유신세력과의 갈등이 내전으로 비화되면서 더 이상 최신예 유럽식 소총과 대포앞에서는 갑옷이 실전에서 의미있는 방어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등 투구에 쓰인 면갑도 쓰였는데 카부토에 달린 가면도 면갑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면구라고 불렸다.

3. 특징

오랫동안 이어진 사격전의 전통 때문에 궁시에 대한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전반적으로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내식성과 정비성을 우선으로 추구하여 각 부위가 따로 나뉘어지는 특징이 있다. 전국시대까지는 사슬은 아예 쓰지 않거나 유연성이 필요한 부분을 가리는데 제한적으로 쓰고 대부분은 판찰이나 통짜철판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이는 방수방청을 위한 옻칠을 쉽게 해두고 녹이 슨 부위를 빨리 교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경우 일본의 갑옷은 쇠 느낌이 나지 않게 검은색이나 빨간색으로 되어있는데, 바로 방수방청을 위한 옻칠때문이다. 또한 철포가 전장에서 대규모로 사용되면서 총탄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총상을 악화시키는 사슬방어구는 인기가 없었다. 일본에서 포형 사슬갑옷은 굉장히 늦게 등장하며, 이마저도 평시에 옷 밑에 받쳐입는 호신용 방검복에 가까웠다.

4. 구성요소

다음은 일본 갑옷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용어이다. 개략적인 설명을 넘어선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후술하는 5.의 내용을 참조. 투구에 관련한 설명은 6.의 내용을 참조.

5. 스타일

5.1. 갑(甲)류(고훈 시대 ~ 헤이안 시대 전기)

이 시기의 초에는 교류가 활발하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이며 나라 시대에는 독자성을 띄기 시작하였다.

5.2. 요로이(鎧)류(텐교의 난 ~ 오닌의 난)[4]

이 시기의 초에는 작은 철찰을 화려한 끈묶음으로 유연성없이 빳빳하게 엮은 열도 특유의 혼코자네(本小札, 본소찰)가 등장하였다. 또한 정강이받이인 스네아테와 방호판이 달린 긴 팔토시인 코테(籠手)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5.3. 구소쿠(具足)류(호조 소운 거병 ~ 오사카 전투)[6]



당시 갑옷의 테스트 영상

이 시기의 초에는 중장화된 요로이의 최종진화형으로서의 구소쿠(具足, 구족)가 등장하였다. 구소쿠란 용어 자체는 본래 발(足)끝까지 갖췄다(具)는 뜻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등장했는데 이때에 카부토, 도, 코테 이외에 전신방호를 위해 착용하는 갖가지 부속구를 코구소쿠(小具足, 소구족)라 하였다. 본격적인 구소쿠는 코테(소매)와 하이다테(다리가리개)의 발달로 인해 소데와 쿠사즈리가 축소되었으며, 노도와(멱가리개)가 요다레카케(목가리개)로 멘구(얼굴/턱가리개)에 통합되었고 얼굴을 가리는 멘구가 보편화되면서 후키카에시도 생략수준으로 극소화되었다. 즉 전신방호력을 높게 유지하면서도 제작비용과 중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5.4. 카타비라(帷子)류(겐나엔부 ~ 세이난 전쟁)[9]

이 시기의 초에는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무력의 보유와 행사를 전국적으로 통제하여 번국간의 전쟁이 없어졌으며 수많은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낭인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구소쿠 대부분이 더 이상의 필요를 상실하여 대부분이 망실되었고 그나마 만들어지는 무겁고 두꺼운 구소쿠나 요로이는 주로 크고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쓰였을 따름이고, 일선에서는 적재공간을 적게 차지하여 운반이 편리한 타타미 계열 갑옷이 널리 쓰였다. 또한 호신과 치안활동을 위해서 평복 밑에 쉽게 받쳐 입을 수 있는 갑옷으로서 앞면이 열리는 옷의 형태인 카타비라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19세기에 흑선내항 사건 이래 수차례 발발한 대대적인 내전에서 갑옷이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전투 양상이 근대화되는 과도기에서 화기의 관통력, 사거리와 명중률이 크게 증가하면서 돌입하기까지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는 중갑주의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총검과 군도의 공격 정도만 막아주는 쇄자갑경번갑이 흥하였다.[10] 다만 이 또한 볼트액션 소총과 개틀링 건과 암스트롱 포의 화력 앞에서는 의미를 잃었고 결국 서양식 근대 군복에 밀려 사라지게 된다.

* 타타미구소쿠(畳具足, 첩구족)
파일:karutatatamigusoku.jpg
모든 타타미구소쿠는 당세구족의 일종으로서 이미 전란기에 존재하였었던 타타미도구소쿠란 용어의 지칭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에도 시대의 타타미구소쿠는 이전과 달리 판찰을 잇는 '사슬' 부분의 비율이 증가했으며 도뿐만 아니라 쿠사즈리는 물론 연결부위까지 모두 사슬화되었고 접이식 투구와 같이 쓰였다는 점이 다르다. 에도 시대에는 겐나 엔부 선포에 따라 대규모 전란을 상시대비할 필요가 없는 대신 지방영주들이 반기를 들지 않는지 막부가 어사를 보내 감찰할 필요가 생겼고, 또한 참근교대 제도의 시행으로 인해 매년 영주의 호위무사들도 같이 고향을 떠나 수도인 에도로 이사를 가야 했으므로 티나지 않게 옷 밑에 받쳐입을 수있고 도검으로 가해지는 불의의 일격 정도는 막을 수 있으면서 벗고 나서는 접어서 자루에 넣고 다니기 편한 갑옷이 필요하게 되어 몸체부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부위까지 접어서 갤 수있는 타타미구소쿠가 흥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부속구의 구성 면에서 볼때는 어디까지나 당세구족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파일:tatamiokashi.jpg
에도 시대의 타타미구소쿠는 센고쿠 시대에 존재하였던 하이다테가 없는 오카시구소쿠(아시가루의 갑옷)의 연장선으로도 존재하였다.[11] 여기에는 보통 개어서 수납할 수 있는 사진의 즈킨(두건형 투구)이나 고정대를 풀고 접어넣을 수 있는 다단 투구인 쵸친나리카부토(提灯形兜)가 조합되었다. 타타미즈킨+타타미구소쿠의 조합은 어째선지 현재 일본 현지에서 닌자 갑옷(...)으로 밀고 있다.

6. 투구

6.1. 도래기

6.2. 초기

6.3. 전기

6.4. 중기

6.5. 후기

6.6. 말기

7. 이야깃거리

7.1. 중일전쟁 에피소드

특이하게도 몇몇 일본군 장교들이 중일전쟁 기간에 집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골동품 갑옷을 껴입고 나온 바가 있었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맹신과 부족한 총기를 항일대도 같은 냉병기로 커버하려는 중화민국군의 궁여지책이 충돌하면서, 2차 대전의 여러 전장 중에서 유독 백병전이 잦았던 중일전쟁이었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은근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 어느 문화권이든 갑옷이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백병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때문에 총탄이나 포탄 파편은 못 막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총검 돌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유럽도 1차 대전 시기에 몇몇 장병들이 옛 기사들의 판금 갑옷을 입고 참호 전투를 치른 바가 있다.

중국에선 이 때문에 사무라이 명문가 출신의 장군이나 장교가 일본 전국시대부터 쓰이던 말 그대로 진짜 귀중한 유물 갑옷을 입고 와서 싸우다 전사하고, 그걸 노획한 중국군 병사나 그 후손이 나중에 같이 딸려온 전가의 보도와 함께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혹은 비싼 값에 팔아 치웠단 사례가 종종 나온다.

8. 번외

8.1. 류큐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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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갑옷의 경우 전통적으로 중국 갑옷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일본 갑옷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이를 보여주듯 제 2 쇼씨 왕조 시대의 고위 장수들은 당세구족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갑주를 입었고, 부장급들은 조선명나라에서 영향을 받은 두정갑이나 찰갑 계열 갑주를 입었다.

8.2. 아이누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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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인 전사들은 원피스 형태의 찰갑을 입었다. 아이누인들의 전성기였던 조몬 시대부터 성립된 형식이며, 냉대 기후인 홋카이도사할린 지역에 거주하던 후대 아이누인들은 여기에 모피나 털가죽 등을 추가해서 방한성을 높이기도 했다.


[1] 야마토 정권 이후인 아스카 시대를 연 쇼토쿠 태자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2] 창은 헤이안시대까지 모(矛)라는 이름으로 쓰였으나, 이때에는 방패를 들고 한손으로 잡고 찌르는 무기였다. 이런 무기는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에 비해 전투의 융통성과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여 쉽게 제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모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헤이안 후기부터 남북조시대까지 도보 백병전 무기의 1번은 단연 검과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였다. 일본에서 창(야리:槍)이란 두손으로 잡고 쓰는 것을 호칭하며, 이 시대의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논픽션 군대소설. 황당한 소설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많아 연구의 주요 자료가 된다.)에 창이라는 단어가 등장함으로써 난보쿠초 시대 전쯤에 재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3] 이것은 훗날 초기의 일본 사극에서 배경이 전국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오요로이가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조차 일본군의 갑옷이 오오요로이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치 조선 후기에 의장용 갑옷으로 두석린갑이 생겨난 영향으로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 조선군 갑옷이 두석린갑으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진 것과도 비슷하다.[4] 헤이안 중후기, 가마쿠라, 겐무 신정, 난보쿠초, 무로마치[5] 나중에 생긴 평민 징집병인 아시가루들에게 빌려줄 원가절감형 간이 갑옷으로 잠깐 부활한 적은 있으나, 당시의 전장이 철포와 궁시의 집단운용으로 인해 너무나 험악해져있다보니 그 정도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도마루식 중갑으로 대체당하고 최종 도태되었다.[6] 센고쿠 시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15세기 중반 ~ 17세기 초반[7] 소속 가문에 따라 간혹 값싼 즈나리카부토나 모모나리카부토를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8] 실제 박물관에 전시된 난반도들 중에는 총에 맞은 자국이 있는게 상당히 많다.[9] 에도 시대, 메이지 초기[10] 동시대의 한국(조선)과 중국(청나라)에서 쇄자갑과 경번갑이 사실상 씨가 말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11] 그래서인지 한때 전국시대 배경 창작물(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 포함)에서 아시가루가 오카시구소쿠가 아니라 타타미구소쿠를 입는 고증 오류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남원시황산대첩축제에서도 왜구 역할을 맡는 사람은 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 스타일 갑옷이 아니라 타타미구소쿠를 입으며, 그러면서 병사급 왜구의 투구는 삿갓형 투구인 진가사로 나온다. 타타미구소쿠와 진가사는 남북조시대 일본에서는 아직 생겨나기 한참 전이었는데도 말이다.[12] 일본 투구 하면 연상하는, 얼굴 옆부분의 확 젖혀지는 바로 그 부분. 당초에는 화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지지만 시대가 갈수록 간소화되며, 당세구족 시대로 가면 아예 생략되기까지 한다.[13] 위의 투구에서 보면 면구를 쓰고 있다.[14] 챙 부분이 떨어져 나간 투구를 착용하고 있다.[15]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기를 묘사한 그림들도 보면 대부분 고위 무사가 아닌 이상 머리띠에 철판을 이어붙인 간이 보호대나 합푸리라고 불리는 면갑을 쓰고 거기에 일부는 추가로 에보시라고 불리는 모자를 쓰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16] 또한 일본의 더운 날씨와 여느 중세 국가들이 그러하듯 거의 통일되지 않았던 병사들의 장비차이도 한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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