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화 이글스
충청남도 천안시 출신으로 북일고를 졸업하고 1996년 고졸우선지명으로 연고 팀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였다.(출처 : 포토로) |
입단 후 1997년부터 1군 중간계투로 등판했으며, 1999년에는 땜빵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승선, 우승을 맛봤다. 2000년에는 팀의 선발진이 붕괴하면서 선발로 뛰었다. 하지만 한화에 있을 당시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2000년 시즌 후 베테랑 선수들을 등용하는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2. 현대 유니콘스
2001년 6월 김홍집과 최영필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때부터 빛을 보기 시작한다.[2](출처 : 포토로) |
원래는 선발로 쓰려고[3] 데려왔지만, 좌완 스페셜리스트로 활약하며 2002 시즌부터 2004 시즌까지 3년 연속 두 자릿수 홀드를 기록했고, 특히 2003년에는 두산 베어스의 차명주와 함께 홀드왕 타이틀(16개)을 거머쥐는 등 마당쇠 송신영, 신철인, 조용준과 함께 현대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쳤다. 스탯티즈 기준 2004년이 커리어 하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던 중, 한국프로야구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2005년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된다.[4] 소집해제 후 2007년 다시 팀에 합류하지만 2년 간의 공백기와 어깨 건초염이 겹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3. 우리-서울 히어로즈
2008년부터는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을 승계한 우리 히어로즈에서 뛰지만 역시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결국 2009 시즌을 끝으로 방출당했다.[5]4. LG 트윈스
이후 좌완 불펜 보강을 원했던 박종훈 당시 LG 트윈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에 새 둥지를 틀면서 다시 기회를 잡는다.4.1. 2010 시즌
그리고 2010년 76경기 2승 2패 16홀드 평균자책점 3.32를 기록하여 재기에 성공했으며, 6년 만에 구원승을 거두었다.4.2. 2011 시즌
2011년 시즌 초 오상민이 일찌감치 이탈한[6] LG 트윈스의 거의 유일한 좌완 불펜으로 분전하였다[7].커브의 각이 매우 좋다. 문제는 그게 제구가 되는 날과 안되는 날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
이상열이 당시 LG의 유일한 좌완 중간계투였는데, 좌우놀이를 좋아했던 前 박종훈 감독의 특성상 말 그대로 노예짓을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시즌이 진행될수록 성적이 안 좋아졌다.[8] 이렇게 엄청난 혹사 때문인지 외국인 듀오와 더불어서 그나마 LG에서 덜 까이던 투수였다.
2011년 11월 17일에 2년 6억 원(계약금 1억 5천만 원, 연봉 1억 5천만 원, 옵션 7,500만 원)의 FA 계약을 맺었다.
4.3. 2012 시즌
다행히도 2012 시즌에 재활을 마친 류택현이 팀에 복귀하고 최성훈이라는 대졸 신인이 가세하였으며, 신재웅도 합류하면서 노예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노예. 류택현은 플레잉 코치였던데다 부상이 또 도져 30경기밖에 못 나왔고, 최성훈과 신재웅은 스윙맨으로 이닝을 먹어준 거지 이상열의 역할을 대체한 게 아니었다.9월 9일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1이닝을 막고 그 다음 공격에서 김용의의 희생플라이로 역전하면서 873일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
후반기에 좀 흔들리긴 했지만 여전히 불펜에서 활약해 주었으며 시즌 내내 두산 베어스에 강한 모습[9]을 보여주며 LG 트윈스가 두산 베어스에게 상대 전적에서 크게 앞서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10]
4.4. 2013 시즌
2013년에도 여전히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했다.5월 26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전에서 스코어 0:0인 5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좌타자인 박정권을 상대하기 위해 등판했다. 그런데 박정권은 우타자인 조성우로 교체되었지만, 이상열은 조성우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동현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결국 뒤이어 나온 투수들이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팀이 스코어 0:1로 승리하면서 이상열은 팀의 이날 승리에 공헌하였다. 이상열은 이날 0⅓이닝 5투구수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6월 5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4:1로 앞선 6회초 무사 1사 이후 선발 우규민에 이어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고 역대 5번째로 투수 통산 700경기 출장을 달성하였다.
6월 20일 NC 다이노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8회말 정현욱이 동점을 만들고 3루 주자도 남긴 1사 상황에서 땅볼과 플라이로 무실점으로 막았다. 이어 9회에 올라와 김종호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최재원의 번트를 막기 위해 치열하게 던지다 풀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성 투구가 볼 판정이 되자 멘탈이 크게 흔들렸는지 다음 타자인 나성범에게 초구 몸에 맞는 볼을 던지고 무사만루를 만든 후 임정우로 교체되었고 임정우가 이호준에게 바로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이날의 패전 투수가 되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을 기록하여, 피안타율 0.323, WHIP 1.67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 페넌트레이스 때와 달리 제 몫을 다했다. 하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특이하게 공 1개를 던질 때마다 구속 시속 1km씩 떨어졌다.
4.5. 2014 시즌
시즌 초에는 무너진 불펜진 중 유일하게 활약하였다. 4월 18일까지 8경기 7이닝 1홀드 5탈삼진,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할 정도로 활약하여 거지+커쇼가 합쳐진 별명인 겆쇼라고 불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피안타와 볼넷이 많아지고 평균자책점이 7.88, WHIP 1.75, 피안타율이 .324까지 치솟는 바람에 5월 6일 자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그리고 시즌 끝날 때까지 1군에 올라오지 못하여 이상열은 2014년에 12경기 8이닝만 소화하였다.이 해 류택현 역시 부진으로 이탈하며 LG는 베테랑 좌완 불펜 둘을 잃었다.
4.6. 2015 시즌
1군에 올라오지 못했으며, 2군에서 6월 13일까지 19경기에 등판해 24.2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6.93에 그쳤다. 정의윤, 신재웅, 신동훈이 SK에 트레이드됨과 동시에 7월 24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이미 6월 중에 팀을 떠나 개인훈련 중이라고 했다.5. SK 와이번스
이후 7월 31일, SK가 계약 양도를 신청하여 이상열을 영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친정팀인 한화 이글스를 포함한 복수의 구단에서 영입을 원했지만 야구 규약에 따라 당시 시즌 순위의 역순으로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SK에 입단하게 되었다.SK는 1군에서 기용할 수 있는 좌완 불펜 투수가 정우람과 신재웅 정도밖에 없었고, 박희수는 여전히 재활 중이었던 데다가 2014년 두산에서 방출된 후 SK에서 영입한 좌완투수 원용묵도 퓨처스 리그에서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좌완 중간계투 강화 차원에서 이상열을 영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2015년 11월 30일 발표된 보류선수 명단에서 빠지면서 방출되었다.
방출 이후 새로운 소속팀을 찾지 못하며 사실상 은퇴했다.
[1] 사진상의 유니폼은 1999~2002년에 착용한 디자인으로 이상열은 입단 3~6년차 때 착용했다.[2] 보기 드문 윈윈 트레이드였다. 최영필과 이상열은 원 소속팀에서 그저 그런 유망주였는데 최영필은 한화로 가서 몇년 담금질 끝에 김인식 감독을 만나 기회를 얻었고 이상열은 신철인, 권준헌[11], 조용준 등과 함께 현대 필승 철벽불펜의 일원이 된다.[3] 유독 현대는 좌완 투수들과는 인연이 없었다. 창단 초기에도 최창호와 김홍집이 있었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팀에서 쫒겨났다. 긴 시간이 지나 대학 최고의 선수들이던 장원삼과 이현승이 팀에 들어와서는 호성적을 냈다. 그러나 팀이 망해서 활약을 했던 영상도 찾기가 힘들다.[4] 그와중에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이상열은 1차전부터 8차전까지 1경기도 빼놓지 않고 등판 출석 체크를 했다. 그만큼 경기가 치열했다는 뜻이며 좌완 원포인트였기에 가능했던 일. 또 다른 좌완투수로는 김민범,마일영,노환수가 있었지만 김민범은 고작 7경기 나온게 끝이라 그다지 유명한 선수도 아니였다. 거기다가 마일영은 시즌 중 이상열과 연루도 되었었고 거기다가 끝없는 부진으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 되었다. 노환수는 2군에서만 활약한 신인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기전 1군 선수들에게 배팅볼 투수로 던져주며 팀에 그나마 잡일이라도 했다.[5] 여담이지만 2009년에 고액연봉자들이 줄줄이 정리되었는데, 전준호와 전준호도 이시기에 방출된다.[6] 결국 오상민은 그대로 웨이버 공시되며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7] 류택현은 2011시즌을 재활로 보냈기에 좌완계투가 별로 없었다. 서승화가 있었지만 모종의 원인이 있는지라 1군에 못올라왔다.[8] 전년도에도 76경기에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 역시 무려 77경기나 출장했다.[9] 13경기 평균자책점 0.73, 1패 6홀드.[10] 2012년을 제외하고는 두산 베어스에게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어느정도 였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LG 팬들이 유일하게 좌완 호구가 두산의 이혜천이라면 반대로 두산 팬들에게 유일하다시피한 좌완 호구가 이상열이라고 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