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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5:13:43

요르단-팔레스타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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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팔레스타인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고대 말2.3. 중세2.4. 근세~근대2.5. 현대
3. 교통 교류4. 관련 문서

1. 개요

요르단팔레스타인의 관계. 요르단내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두 나라가 원래 같은 역사와 같은 민족성을 공유한 한 나라였으나, 여러 중동전쟁을 거쳐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아랍인들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나바테아 왕국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2. 고대 말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 동부에는 동로마의 위성 국가인 아랍계 가산 왕국이 들어섰다. 가산 왕국은 사산조 페르시아 혹은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동로마 제국의 동부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대가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원조를 받았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대교 탄압 이후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기독교로 개종한 상황이었으며, 가산 왕국 역시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과 다르게 기독교를 믿었다.

2.3. 중세

아라비아 반도아랍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그동안 아랍인들과 대치하던 사이였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며, 이후 아랍인들은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이집트 영토를 공략하였다.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 치세에는 가산 왕국이 이슬람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이후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에는 아직 이슬람교 교리가 기독교 및 유대교와 완전히 체계적으로 분리, 구분되기 이전이었고, 아랍 정복자들은 우마르가 솔선수범해서 기독교인들을 존중하는 것도 있고 해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한동안 상당한 수준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 우마이야 칼리프조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이 이슬람 제국에서 가지는 위상은 더욱 올라간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성지라는 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로는 예루살렘이 하드리아누스의 유대인 추방 이후 헬레니즘 관련 유산이 풍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우마이야 칼리파들은 헬레니즘 문화 애호가였고, 이들은 예루살렘 그리고 요르단의 아므라에 별장을 짓고 예루살렘 내 아직 잔존해있던 로마 제국 문화를 즐기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이슬람에서 신체 노출 및 회화를 금기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 칼리프들이 머물던 아므라 별장궁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큐피트사티로스 그리고 나체나 반나체 상태로 춤을 추는 무희들의 벽화 등 이슬람 근본주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마이야 칼리프조가 압바스 칼리프조로 교체된 이후 요르단 지역은 카라크 같은 일부 무역 거점 이외에는 가난한 베두인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 즈음으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압바스 칼리파들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일대에 별장을 짓고 노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신 이라크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무역이나 아니면 흑해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과 사치품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수백여 년 이후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가 주요 전장터가 되는 와중에도, 요르단 사막 지역은 십자군의 보급 문제로 전장터가 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2.4. 근세~근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지역은 16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의 경우 세 종교의 성지라는 상징성도 있고 해서 쉴레이만 대제 시절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면, 요르단 사막 지역의 경우 성지순례 루트 이외에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이집트메흐메드 알리가 오스만 제국에 반항하며 시리아 일대를 위협하고, 헤자즈 지방에서 와하브파를 믿는 베두인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레반트 지역으로 가는 요충지인 요르단 일대에 좀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낙타를 치며 유목하던 베두인 부족들을 반강제로 농민으로 정착시키고,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피해 피난온 체르케스인과 체첸인 난민들을 요르단 각지에 주둔시켰다.[1]

다른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은 당시 이집트 케디브 왕조의 영향이 강하던 시나이 반도 그리고 네게브 사막 지역의 베두인들은 과거 그대로 방치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요르단의 아랍인들과 시나이, 네게브 베두인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후술되는 중동전쟁 당시 네게브와 시나이 베두인들이 이스라엘군과 힘을 합쳐 팔레스타인인, 요르단군들을 공격했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2.5. 현대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토를 대거 상실하고 몰락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지역을 손에 넣었다. 오늘날의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들어섰다. 오늘날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라는 무슬림 자치정부가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는 이슈브라는 유대인 자치정부가 들어섰다.

요르단은 1946년에 독립하였으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갈등이 격화하면서 독립이 지연되었다. 1948년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아랍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고 아랍 연합군은 요르단의 압둘라 1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요르단과 인접한 아랍 국가들은 압둘라 1세의 권한이 커져서 자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이스라엘에 패배한다. 요르단은 서안지구 일대를 겨우 유지하는데 그쳤다. 이런 역사적 배경, 지리적으로 접해있은 점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국기도 비슷하다.[2]

요르단은 제3차 중동전쟁 때 요르단령 서안지구를 다시 상실했고[3] 이후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 다른 아랍국가들과 달리 중립 정책을 고수했다.

이후 쫓겨나 새 살림을 차린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국내에서 무장한 채 국경을 넘어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요르단 영내에서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의 침공을 불러왔고, 조직을 결성하여 요르단 경찰과 군대의 통제를 거부하는 한편 요르단인들에 대한 폭력적 행동까지 벌였다. 이에 요르단 정부는 1970년, 9월 팔레스타인인 캠프에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이를 검은 9월 사건이라 부른다.

1988년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한 PLO가 11월 15일에 서안지구가자지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요르단은 중동전쟁 이후 요르단에 팔레스타인 난민들도 받아들여주었으나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난민 출신이라 차별하기도 하는 등 갈등도 있었으나(검은 9월) 이를 빼면 동시에 거의 관계가 많이 완화되었다. 일단 같은 아랍계인 점도 있다. [4][5]

다만 요르단은 정부차원의 대 이스라엘 정책에서는 현 압둘라 2세 선친 시절부터 강경책은 자제해 왔기에 다른 아랍국가들에 비하면 이스라엘과 관계는 나쁘지 않다. 물론 민간 감정은 대다수 요르단인들이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민족적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말이다.[6]

1991년 요르단을 비롯한 친이라크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주장했다. #

3. 교통 교류

팔레스타인의 공항이 많지 않거나 운항된 곳이 많지 않다보니 이스라엘을 경유해야 하며, 운항되는 곳은 가자의 팔레스타인 항공과 암만의 퀸 알리아 국제공항 뿐이다.

4. 관련 문서



[1] 이 과정에서 일부 체르케스인들이 갈릴리 호 일대에도 정착한다.[2] 물론 국장은 이집트랑 더 비슷하다.[3] 지리 멸렬한 이집트, 시리아군과 달리 당시 요르단군은 소수 병력에도 활약을 펼쳐 이스라엘군 회고록에도 좋은 평가로 등장한다.[4] 애초에 요르단의 인구 다수가 팔레스타인인이다.[5] 라니아 왕비부터가 팔레스타인인이다.[6] 정부적 차원에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모로코나 타 아랍국가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