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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여수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 ||||||||
여수군 (麗水郡, 1897) 돌산군 (突山郡, 1896) | → | 여수군 (麗水郡, 1914) | → | 여수부/시 (麗水府/市, 1949) 여천군 (麗川郡, 1949) | → | 여수시 (麗水市, 1949) 여천시 (麗川市, 1986) 여천군 (麗川郡, 1949) | → | 여수시 (麗水市, 1998) |
여수시의 역사 | |
538년(백제 성왕 16년) | 원촌현과 돌산현 |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년) | 해읍현과 여산현으로 개칭. |
940년(고려 태조 23년) | 여수현과 돌산현으로 개편. |
1479년(조선 성종 10년)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 설치. |
1593년(조선 선조 26년) | 삼도수군통제영 설치. |
1896년(조선 건양 원년) | 돌산군 설치. |
1897년(대한제국 광무 원년) | 여수군 설치. |
1914년 | 돌산군 폐지, 여수군에 편입. |
1923년 | 여수군 여수면이 지정면으로 승격, 여수항 개항. |
1931년 | 여수군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 |
1949년 |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 나머지 9개 면이 여천군으로 개칭, 여수항 개항. |
1976년 | 전라남도 여천지구 출장소 개소(여천군 삼일면, 쌍봉면) |
1980년 | 삼일면과 돌산면이 읍으로 승격. |
1986년 |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7동) |
1998년 | 4월 1일 통합여수시 개청(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
2012년 | 여수세계박람회개최(5.12~8.12) |
여수 지역의 역사는 줄곧해서 독립영역과 반독립영역을 오갔으며 독립된 시기에는 주로 육지부와 도서부가 독립된 형태를 유지해나갔다. 하도 속현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아예 조선 시대 500년간 독립된 지역이 아니었던거 보면 역대 국가.왕조들로부터 차별과 고생.수탈에 시달렸던 천형(天刑)의 땅 이미지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빠른 공업화로 번성하였다.
2. 각 시대별
2.1. 선사시대 ~ 후삼국시대
대부분의 전라도 지역이 그러하지만 신석기 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림동이나 돌산등지에 이를 뒷받침하는 고인돌 유적이 발견되어 일부 보존된 상태이고 부속도서인 안도나 송도등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패총이 발견된바 있다. 이 들 패총에서는 흑요석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 흑요석의 산지를 일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후 기원전 4~3세기에 중국 전국 시대 연나라가 고조선의 요동 및 청천강 이서 영역을 침탈했을 때 한반도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대량 발생하는 흐름이 나타나는데, 이 시기에 여수 일대에 고조선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어 살게 되며 이들이 바로 훗날 삼한 마한 연맹체에 속했던 원지국(爰池國)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 수장국이 건마국에서 목지국으로, 목지국에서 다시 백제국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자치력은 유지했으나, 적어도 3~4세기부터는 반파국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더니 475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잃고 공주로 남천하며 위상과 국력이 떨어지자 아예 그 이후부터는 다른 전남북 동부 옛 마한 소국들과 함께 반파국이 주도하는 가야 연합즉 가야 다리국(상다리,하다리)에 들어가게 된다. 실제로 죽림지구 택지개발사업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다 510년대 초반 무령왕의 대가야 공세 때 백제에게 함락되면서 옛 원지국의 세력 기반은 완전 해체되어 백제의 직접 지배지가 되었고, 이후 대가야가 520년대에 백제에게 반격하는 과정에서도 백제는 여수시 일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백제 성왕 때 이미 여수에선 반도지역은 원촌현[1], 도서지역은 돌산현(突山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6세기 후반에 관산성 전투 및 그 이후 여러 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게 패배하면서 전남북 동부 내륙 일대가 신라에게 넘어갔지만, 이때도 백제가 전력투구하면서 여수, 순천, 광양 일대만은 빼앗기지 않고 유지했고, 이후 660년 백제 멸망 때까지 백제의 강역으로 유지된다.
남북국시대 신라 경덕왕의 지명 한자화 정책으로 여수시의 반도 육지권역은 해읍현, 화양면을 포함한 도서권역은 여산현(廬山縣)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때부터 승평군(순천)에 소속되었다.
신라 왕궁 근위대 장교로 복무하던 견훤이 지방 군 지휘관으로 인사이동할 때 처음 배치된 곳이 다름아닌 순천-여수 일대 승평군이었고, 이 일대에서 복무하던 견훤이 다시 광주로 전근가서 기반을 잡았었다. 그래서였는지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역에 들어간다.
2.2. 고려
태조 왕건 때 이름이 다시 여수현, 돌산현으로 돌아갔다.이후 고려 시대에는 승주목[2]의 속현이었으며 돌산현과 여수현으로 나누어져 존속하였으며 이는 여수와 돌산지역의 생활권이 구분되어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여수가 순천부 관할이지만 속현으로 되어 있음으로서 서로 생활 권역이 약간이라도 달랐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경계는 근대까지 이어져 돌산군과 여수군으로 나뉜 조선 말 까지 양 쪽의 생활권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하고 있다.
2.3. 조선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3] 1396년(태조 5)에 여수현이 폐현되어 순천도호부에 속한 여수면이 되었고 1414년 돌산현마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안 도서를 독자의 군현으로 편제하기보다는 수군 진지로 편성하고자 하는 방침과 관련이 있어 폐현되어 순천도호부로 편입되어 여수반도 전체가 조선시대 순천도호부의 땅으로 계속 잔류했으니 1696년부터 1897년 5월 16일 여수군 설군 되기 까지 길고 질겼던 삼복삼파가 시작되었다.여수현과 돌산현이 폐현된 결과, 순천도호부의 부곡으로 격하되고 5백여년동안 과거시험도 볼수 없었고 현단위도 없었으니 향교도 설치가 되지 못하여 주민들을 천민화시켜 문맹으로 방치함으로 벼슬에 오르는 길이 아예 막혀버려는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겪는 어려움에 시달렸다. 인근 군.현이상 행정구역이 있는 곳과 달리 여수의 조선시대 문무관인들 숫자가 많지 않는 걸로 확인 되었다.
1479년 내례만호진을 폐하고 전라좌수영이 설치됨으로 인해 순천부와 전라좌수영의 이중통치와 이중과세로 인해 순천부로부터 분리.독립을 하게 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1696년 숙종때 잠시 여수도호부로 승격, 복권 했다가 순천부 아전배들의 농간으로 다시 순천도호부로 귀속당했고 이후로도 역사를 반복했으니 (영조 때인 1725년, 1750년에도 반복) 삼복삼파로 불리었다. 순천도호부의 상급 기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은 성종 때 이래 여수에서 유지 된 것으로 보아 좌수영성지인 여수와 그 일대는 사실상 순천에서 독립된 생활 권역을 계속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유명한 건물이 이순신 장군의 진남관.
조선 말기에 여수는 행정적으로 순천에서 독립하여 여수군과 돌산군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육지부는 여수군이 관할했으며, 여수의 섬 지역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소속 섬들과 짜깁기되어 돌산군이 된다. 1896년 완도군과 지도군하고 함께 돌산군이 먼저 신설되었고 육지부는 순천에 잔류했지만 불공평한처사에 여수주민들이 분노하여 또 다시 복현 운동의 결과로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정확히 500년만에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하여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설치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는 여수군이 복군되었다.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가로지르는 산맥을 타고 좌우로 해촌면과 용두면이 자리하는데 여수에 소속되어 있던 용두면[4] 지역은 여수로 환원되지 않고 잔류 되었다가 1914년 군면폐합때 해촌면과 합쳐서 해룡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삼복삼파로 인해 1397년부터 5백여년간 여수군 설군을 통해 독립되기 이전까지 털릴대로 철저히 탈탈 털렸던 원한과 피해의식도 적잖게 있어 광양만권 통합에 적극적이지 못한 편이다.
복설 후 소라면에서 화양면을 분리하였다.
1899년에 소라면 북부를 구산면(龜山面)으로, 남부를 덕안면(德安面)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1902년에 여수면을 쌍봉면(雙鳳面)으로 개칭하였다.
1908년에 쌍봉면에서 현내면이 분리되었다.
- 여수복현 4명 선각지사(1차복현) : 오석조, 차국태, 차동궤, 황성룡
- 여수복현 3명 (3차복현이후 1887년) : 최창모(崔昌模), 정동열(鄭東烈), 유봉의(兪鳳儀)
- 여수복현18인동맹(3차복현이후 1896년) : 정시홍(鄭時洪), 유하열(柳河裂), 정충섭(丁忠燮), 유민열(柳敏烈), 주봉성(朱鳳成), 황안성(黃安性), 김병두(金秉斗), 정지섭(丁芝燮), 유계열(柳啓烈), 정시현(鄭時鉉), 황운수(黃雲秀), 김재호(金在浩), 최현호(崔炫浩)
2.4. 일제강점기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과 함께 역사적으로 돌산 소속이 아니었으나 돌산군에 편입된 섬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원래 돌산 소속이었던 섬은 일부 지역(태인면은 광양군에, 금산면과 봉래면은 고흥군에)을 제외하고 여수군에 편입됨으로써 조선시대 말까지 역사속에 없었던 여수의 이름은 완벽하게 복권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일제강점기 여수지역 공업화의 배경은 1923년 여수항 개항과 여수면의 지정면승격, 1930년 12월에 있었던 광주-여수 간 철도(오늘날의 경전선) 개통과 여수-시모노세키(하관) 간 '관려연락선' 취항이었다. 또 1930년대 여수지역 공업화의 상징은 혼다本田 조면공장과 천일고무공장이었다.여수에 조면공장이 세워지게 된 것은 '전조선 굴지의 면화생산지'였던 여수의 면화농업과 관련이 있다. 천일고무회사의 공장이 여수에 세워진 것도 직항로를 통해 고무원료를 일본으로부터 직접 들여와 고무제품을 생산하고, 생산된 고무제품은 전남 내륙으로 이어진 철도를 통해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전개된 여수의 공업화는 여수읍의 도시화로 이어졌다. 도시화는 인구의 집중과 증가를 수반했다. 1925년부터 1940년까지 15년간 여수군의 인구는 전남이나 조선전체의 평균인구증가율을 2배 이상 웃도는 비율로 급증했다. 이러한 여수군의 인구증가는 15년간 130%에 이르는 여수읍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공업화에 따른 또 다른 변화는 도시 기반시설의 정비이다. 이는 도로 개설, 항만매립, 신시가지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과정이었다. 여수의 공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를 주도한 인물은 여수에서 활동했던 기업인들이었다. 이들 기업인은 토착 조선인, 이주 조선인, 여수거주 일본인, 외래 일본인 등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네 부류의 기업인들은 여수상공회와 여수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했다. 여수에서 활동했던 기업인들은 일제의 자문기구 참여를 매개로 식민권력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이들 기업인들은 여수의 도시화 과정, 즉 철도 개통, 도로 개설, 항만 매립, 신시가지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 과정에도 진정위원이 되어 일제 권력과 대기업을 상대로 청원 활동을 하거나 여수토지건물주식회사 등을 통한 기업 활동을 하면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페이스북 '여수시-여수이야기'는 22년 광복절을 앞두고, 여수시의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을 알렸다.
곽재석, 곽찬신, 김권문, 김귀문, 김백평, 김성택, 김순배, 김용환, 김인식, 김재곤, 김철주, 김초암, 김형석, 노병주, 박용수, 박우종백, 박창래, 배세동, 백인열, 오말수, 오우홍, 유병옥, 유봉목, 윤자환, 윤장, 윤형숙, 이병현, 이선우, 이형영, 장평완, 정기채, 정두범, 정보한, 정영한, 조병섭, 주재년, 진자미, 최완규, 최용식, 최풍룡
2.5. 대한민국
8.15 광복 후 여수는 전국 주요도시에 포함되면서 1949년 대통령령으로 여수군 여수읍이 여수부(府)→여수시(市)로 승격되었다. 여수군의 잔여지역은 여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980년 삼일면과 돌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여천군 삼일읍과 쌍봉면+화양면 용주리 일부(송소마을)를 여천시로 분리 승격되었고 1987년 1월에는 묘도동의 지새미, 쥐섬(지진도)이 광양군 태금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98년 이른바 '삼려(三麗) 통합'이라 불리며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이 다시 하나의 여수시로 통합되었다.[5][6] 삼려 통합의 자세한 내용은 여수시 본 항목 참조.특히 1960년대에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정부 주도로 건설되면서 여수시는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된다. 여수문화방송과 한국방송공사 여수방송국이 개국하였으며 완도군 금당도와 여서도등 전남 동부지역의 모든 여객선 항로가 여수를 기 종점으로 운행되어 완도군 일부, 고흥군 일부, 남해군 지역이 약간이나마 여수 생활권을 공유하였다.
2.5.1. 종주도시로서의 위상 쇠락
좌수영과 순천부의 지위에 따른 이중적인 도시체계 속에서 여수는 해상교통망을 바탕으로한 전남 전체의 해상중심지로서 계속 기능을 해오다 개항 이후에 공업화를 통해서 빠르게 전남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7]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서 순천시와 승주군의 통합 이후 순천의 연향지구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여천의 공업단지근로자 상당수가 거주지를 순천으로 변경하는 등 인구유출이 시작되었고, 해상교통망의 쇠락과 맞물린 순천 지역의 육상교통망 확충은 순천시의 도시 위상의 상승을 가져왔다. 이후 여수역시 도시통합을 하였지만 종주권 도시로서 기능은 크게 감소하였다. 통합을 통해서 여수 인구의 2/3 에 불과했던 순천은 여수 인구 턱 밑까지 쫓아오는 끝에 2020년 3월에 역전시키며 광양 지역의 공단 근로자들의 배후도시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특히 이 시기에 여수시민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KBS여수방송국의 지국으로 출발한 KBS순천방송국에 KBS여수가 통합이 된 사건이었다. 방송국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여수지점의 폐쇄, 감사원의 순천 이전 등이 대표적이었다.[8]
특히 이 시기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치면서 해운업의 축소와 더불어 조선소의 잇따른 부도에 더해 어업경제도 불황이 겹치면서 여수의 쇠락은 더욱더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문화방송국은 여수의 잔류를 선언하였고[9] 새롭게 KBC 전남동부지국이 여수에서 개국하였으며, 또한 노동부과 국정원 지청, 출입국관리사무소, 대한민국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부, 국립검역소,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광양이전설은 전면 백지화되었으며, 여수 세관의 광양이전은 광양세관을 별도로 신설로 여수에 잔류하게 된다.
전남 지역의 법원과 검찰청 및 코레일의 전남본부를 제외한 모든 국가기관들의 전남지역 관할하는 기관들을 여수에 잔류함으로서 여전히 전남권 종주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으며 국가 산업단지와 공항 및 항만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고 전남지역에서 가장 큰 문화시설인 예울마루를 통해 각종 공연문화등 문화중심지로서 기능 및 소호요트장 및 웅천마리나 개발을 통한 문화기능에서도 점차 우위를 확보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종주도시로서 기능문제에서 여수와 순천은 분점하고 있는 상태를 거듭하다가 순천지역의 일시적인 인구 증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광양의 덕례지구 완공시 광양 지역으로 중심축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 될걸로 우려하는 여수시는 2010년대 중반, 봉전리 전원택지조성사업이 무산된지 수년만에 대항마로 율촌면 산수리~조화리일대에 테크밸리 신도시조성하는 걸로 맞서고 있고 별개로 조화리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때도 지리적인 여건상 순천 광양만큼의 유기적인 도시관계보다는 약간은 떨어져 있는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지만 최근 여수 순천 광양 시 간의 상호 교통망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도시의 연담화가 가속화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실 지금도 매우 대단한데 향후 여순광 통합 시 엄청난 시너지를 보이게 될 것이다.
2.5.2. 여수/순천/광양 통합 문제와 미래
도시 통합 문제와 율촌산단의 조성과 관련하여 여수와 순천 양 도시의 교류는 점차로 증가하는 추세다. 또 이순신대교를 놓음으로서 광양과의 교류도 점차로 증가할 예정으로 세 도시의 광역화된 생활권이 좀 더 가까워질 것으로 보인다.
여수와 순천 광양의 도시통합은 최초 여수의 직할시 승격움직임에 따라 여수가 순천과 광양을 흡수하여 인구를 확장 시킨 이후에 추가로 들어오는 현대자동차 공장등 개발여건에 따라 인구 100만을 돌파할 시점을 기해서 직할시로 승격한다는 계획에 따른 통합 논의가 출발점이다. 당시 순천의 경우 승주군을 완전히 생활권으로 두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승주군은 사실상 서로 별개의 영역이었던 낙안군 지역과 승주군 지역을 일제가 강제로 낙안군을 둘로 쪼개서 벌교는 보성으로 낙안은 승주로 강제 편입을 한 결과였다. 그 결과 승주군은 원래부터 하나의 생활권이 아니었던 낙안군 지역과 통합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순천의 인구 역시 12만명에 불과해 전남 동부 지역에서 영향력은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도시 통합시 여수의 영향력 아래 완전히 복속시켜 직할시승격을 하려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단 여순광 지역의 100만 인구 돌파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현대자동차 율촌 공장의 착공이 전면 백지화 된 사건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여수시가 조성한 율촌지역의 산업단지에 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하였으나 실제로 착공전 사업은 전면 백지화되었고 직할시 승격에 필요한 인구 유인책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통합을 해도 직할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깨지게 된 것이다. IMF 전후를 거쳐 이런 영향 아래 통합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가 다시 2010년을 전후로 여수의 시민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광양만권 통합 논의체가 발족되었다. 활발하게 도시 통합을 전개했고 여수시장 후보로 나섰던 한창진등 일부 시민단체가 정치 세력화 하면서 세 도시의 통합을 논의하였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의 호응이 떨어졌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순천시는 연향지구 개발을 하였는데 광양읍과 가까운 지역에 택지개발을 한 결과 광양의 근로자들이 대거 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양과 순천이 연담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여수는 순천 광양 지역과 도시연담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생활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동질감을 느끼지 않고 있고 해양도시인 만큼 실제 여수의 인구 구성에서 외지인 출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순천 광양이 아닌 고흥이다. 즉 여수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고흥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등 상호간의 인적교류 역시 떨어지고 있다. 이는 순천 광양은 상호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여수는 순천 광양 지역과 시내버스 공배차를 하지 않고 있는 단적인 예로 양 지역의 생활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수의 인구 구성에서 고흥 출신이 많은 만큼 여수는 꾸준히 고흥과의 연담화를 계속 추진해 와서 고흥 지역과 교량 연결 사업을 핵심 추진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즉 실제 도시 연담화가 순천 광양과 여수 고흥으로 서로 다르게 추진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온 시민단체의 통합 논의에 있어서도 역시 시청과 이름은 경제력과 인구가 월등한 여수가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들은 아예 서로 다른 동네인데 뭘 통합하냐며 그냥 무시해버린 결과 통합 논의는 알아서 소멸했고 앞으로 최소한 여수 지역에서 먼저 통합 논의를 이야기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 대교의 개통으로 여수 지역과 광양 지역의 이동 시간이 30분 정도 단축 되면서 시내버스를 상호 배차하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순천과 여수도 시내버스 운행 조정 및 양 도시간 버스 환승을 논의하는 등 세 도시의 생활권을 일치 하려는 실무적인 움직임은 있다.
세 도시의 연계교통망을 위해서 2천년대 여수시청에서 전라선 일부 구간을 포함해서 순천 광양 여수의 도시철도 순환선을 제안해서 용역 발주하였으나 타당성이 낮아서 이 계획은 폐기 되었다.
[1] 화양면인 경우 고돌산진이라는 문화재로 인해 돌산현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음.[2] 현 순천시[3] 칙서가 오기 전에 관부의 도장을 대문에 걸어둔 채로 지리산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4] 현 순천시 신대지구 및 상삼리.[5] 참고로 (2000년 개편 이전) 지역번호는 통합 이전에도 0662로 동일하였다.[6] 그러나 중심가를 두고 두개로 나누는 시민도 있다. 여수시내는 진남상가, 여천시내는 흥국상가로 하여 나눠진다.[7] 관련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부터 여수는 사실상 전남의 군사와 교통 경제의 중심지로서 기능이 강했는데 특히 경제분야의 중심지 기능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8] 순천으로 이전했던 한국은행 전남지점은 최종 폐점해서 광주로 기능이 옮겨갔다.[9] 비슷한 사례로 경상남도 마산시와 창원시가 있다. 여기도 KBS와 MBC 모두 마산에 있었으나, KBS만 창원으로 이전하고 MBC만 그대로 마산에 잔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