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918년 4월 4일 |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 539번지[1] (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 | |
사망 | 1991년 5월 11일 (향년 73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본관 | 함양 여씨(咸陽 呂氏)[2] |
창씨명 | 미야하라 다이츠루(宮原大鉉) 가네하라 다이츠루(金原大鉉)[3] |
학력 | 중앙중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 졸업) |
가족 | 배우자 정유생[4], 슬하 1남 3녀[5]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71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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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18년 4월 4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 539번지에서 아버지 여규봉(呂圭鳳, 1887.4.12. ~ 1950.6.20.)[6]과 어머니 여산 송씨(1887.8.8. ~ 1928.1.18.)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4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7] 1939년 4월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4월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8]그러던 1941년 4월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曉民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최홍준(崔弘俊)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에서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전해듣고,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조국독립의 실현을 위해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고, 먼저 민족문화 및 경제력의 향상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1943년 2월에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9] 170-1번지 자택[10]에서 최홍준·성장환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토론을 갖고 독립의식을 길러갔다. 또한 그들은 동지포섭에도 노력하면서 동지간 유대를 강화해 갔다. 그리고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을 논의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스탈린그라드를 소련인들이 슬라브 민족의 끈기와 소련의 겨울 추위에 힘입어 다시 탈환하였으며, 유럽에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패전하면 일본 제국도 결국 패전할 것이므로 일본의 패배를 필연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여 독립투쟁의 실행방안을 더욱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면서 여대현을 비롯한 3명 모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후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11] 복역하였다. 이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1944년 2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를 취하하였다.[12]
8.15 광복 후에는 교사로 근무하여 중동중학교 및 중동고등학교의 교장으로 퇴임하였다.[13]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훈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1991년 5월 11일 밤 10시 50분에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14] 유해는 1991년 5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2] 경종중(京宗中)-도정공파(都正公派) 28세 현(鉉) 항렬.[3]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4] 鄭酉生. 동래 정씨 정병하(鄭炳夏)의 딸이다. 1921년 3월 21일생이다.[5] 1991년 5월 14일 경향신문 부고 기사[6] 초명은 여규헌(呂圭憲), 자는 경희(敬熙).[7] 1934년 3월 20일 조선일보 기사[8] 1939년 4월 3일 동아일보 기사[9]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0]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11] 1944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12] 1944년 2월 19일 고등법원 형사사건부[13] 1972년 7월 3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단장을 맡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14] 1991년 5월 14일 조선일보 부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