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1988년 1월 3일 (향년 50대)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역감정을 선거판에 끌어들인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세 명(김대중, 박정희, 노태우)을 지원한 대한민국에서 손 꼽히는 킹메이커.
2. 생애
2.1. 출생과 월남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에서 태어났다. 주을중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인민군 징집을 피해 산속에 숨었고, 중학교 선배 및 학우들과 함께 반공 유격대에 입대해 내무서를 파괴하는 등 유격 활동에 참여했다. 1950년 11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북진해 온 국군에 편입되어 헌병대 보조원으로 있던 중 월남했고,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現 동해시 묵호동),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 등지에서 KSC(미군부대 노무자부대) 소속으로 복무했다.[2] 이후 부상을 입어 양구군 국립구호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했다.[3]2.2. 김대중 비서 시절
제대 이후 강원도 인제군에 정착해 이곳에서 한약방을 개업해 경영하던 중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김대중을 알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1년 김대중의 비서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4]계속 낙선하던 김대중을 도와 그의 약점을 보강시키고 1961년 재보궐선거와 1963년 총선에서 재선까지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보좌역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김대중의 참모로 선거를 도왔다. 그의 선거 전략은 당시 박정희 세력의 주된 방식이던 공권력 남용과 돈을 이용한 금권력 양쪽의 틀을 부수고 당시 여당의 위기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2.3. 갑작스러운 실종
1971년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 캠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던 중 이후락이 개입된 것이 의심되는 중앙정보부 요원 4명이 그의 집에 방문하자 아내에게 '동교동에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선거 끝날 때까지 실종되었다.[5]그의 실종 이후 지지율이 밀리던 박정희가 경상도를 중심으로 지역주의를 창출하여 중부와 남부간 투표 구도를 부수고 전라도만 격리하여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이때 박정희의 선거 전략이 수정된 방식을 보고 김대중을 위시한 동교동계 측에서는 엄창록의 솜씨가 보인다면서 상대편에 강제로 합류한 게 아닌가 크게 의심하였다.[6]
그렇게 1971년 대선이 끝나고 박정희가 당선된지 한 달 후, 실종됐던 엄창록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일이 있어 한동안 속리산에 있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이후 그렇게 존경하던 김대중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김대중과 동교동계를 피하고 도망다녔다.
2.4. 최후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안기부를 시켜 대선 선거 캠프에 모시려고 했으나,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당신들이 이긴다."며 웃기만 하고 거절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하여 함께 대선에 출마했기 때문에 노태우의 어렵지 않은 승리를 예견한 것이다.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13대 대선 직후,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 말을 못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글씨로 소통하며 김대중의 선거 결과를 물어본 후 사망하였다.[7] 기사 그가 모시던 주군 김대중은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3. 여담
- 실종 전까지는 박정희 정권이 공무원들과 경찰까지 동원한 공권선거와 금권선거를 하는 것에 반발하여 당시 기준으로 국내에서는 없었던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방식과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선거 운동을 실행하였다. 화장실에 김대중이 쓰여진 고급비누를 배포하여 표심을 얻는가 하면,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짝짝이 고무신을 선물하거나 봉투에 형편없는 액수의 돈이나 싸구려 담배를 살포하는 등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교묘한 선거 전략을 펼쳤다.
- 상황을 예측하는 판단력도 뛰어나 투표 이후 당시 박정희 정권이 투표함에 비리를 저지를 것을 예상하고 선거 감시인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손전등을 배포하였고, 실제로 그의 실종 이후에 투표장에서 야간에 박정희 정권의 공무원들이 투표함을 도둑질하려고 왔다가 선거 감시인단들에게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4. 대중매체에서
[1] 아내인 장모씨가 1991년 당시 54세였던 점과 1950년 당시 6년제 주을중학교 재학중인 점을 미뤄보면 1930년대 초중반 출생으로 추정된다만 아내와 나이차가 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다 당대에는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중학교를 실제 나이보다 늦게 입학하는 경우가 많아 더 일찍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제 나이에 맞춰 6년제 중학교에 입학한 것이라면 1932~1937년생이다.[2] 기존 서술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복무했다고 하나 1971년 2월 4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조선인민군 징집을 피해 반공 유격대원으로 활동했고, 항간에 떠도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이나 조선인민군에서 복무했다는 것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3] 1971년 2월 4일 동아일보 기사[4] 김대중은 1958년부터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당적으로 정치활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엄창록을 알게 된 것 같다.[5] 정확히는 71년 1월 27일, '김대중 후보 집 폭발물 사건'이 일어나자 중정에서는 자작극이라며 김대중 측 인사 51명을 조사하였고, 심지어 김대중의 14세 조카 김홍준이 범인이라며 고문까지 가했다. 이때 엄창록과 아내, 가정부까지 다 끌려갔는데 갇혀 있으면서 중정의 회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6] 엄창록의 스타일이 여당운동원인 척하며 비싼 담배를 피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싸구려 담배를 뿌려서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전술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상도 일대에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호남후보에게 몰표를 주자'라는 유인물이 호남향우회 이름으로 돌았는데 이것이 엄창록의 평소 전술과 같다는 것이다.[7] 킹 메이커(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었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지만 곁에 다가갈 수 없는 모순적인 심정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