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양향자
1. 출생
1967년 4월 4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2. 정계 입문 이전
2.1. 삼성전자 시절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11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해서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다. 그 당시 그녀는 주산, 부기 (장부기입), 타자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다 보니 커피 타고 책상 닦고 복사하기, 반복적으로 반도체 회로를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기 정도의 잡일을 했다. 이런 업무들은 성장가능성이 없다. 호칭도 '미스 양'이었다.어느 날 당시 부서장이었던 임형규 책임연구원[1]이 악필로 글을 휘갈겨놓은 뒤 '야, 누가 이것 좀 정리해 봐라!' 하고 말하고 책상에 놓고 나갔다. 그녀에게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읽어보니 전문용어 투성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서 간신히 글을 해독하고 서식에 맞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임형규 책임이 돌아와서 보고 깜짝 놀라면서 누가 했는지 묻고는, "미스 양! 물건이네! 잘 했어!"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것이 입사 후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며 받은 칭찬이자 최고 실력자에게 받은 칭찬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성을 인정받는 것과 기술을 배우는 것은 별개였는데, 당시 그녀는 연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녀가 복사해서 연구원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던 서류는 주로 일본어로 된 반도체 기술 논문들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1983년이라 일본보다 기술이 뒤쳐졌다. 그래서 박사들도 일본어 논문을 읽어야만 했다.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일어에 능통한 연구원 수가 의외로 적다는 걸 알게 된 후, 사내 강의를 통해 일본어를 공부하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주 1시간씩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지만 그 정도로는 논문을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전자 인사부서에서는 '고졸이라서' 사원 대상 일본어 강의의 수강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세 번째 신청하자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에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신청하자 결국 강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다 대졸 출신인데다, 일본어 강사마저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무시를 당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제일 먼저 땄다고 한다.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계속 일본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다 배운 다음 복사한 자료 밑에 0.5㎜짜리 볼펜으로 깨알 같이 해석을 달아 나눠줬다. 그날 처음으로 '미스 양'이 아닌 '양향자 씨'라고 불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업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연구원들이 일본어 서적을 들고 번역해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연구보조원에게는 승진한다는 희망이 없었다. 임형규 책임이 기껏 칭찬한다고 꺼낸 말이 "열심히 해라, 꾸준히 실력 쌓으면 부장도 될 수 있을 거야"였다. 당시에는 연구보조원 출신이 부장을 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순수하게 칭찬한다고 한 말이었다. 양향자는 속으로 '사장도 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좋게좋게 넘어갔다.
당시 연구보조원에게는 책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적당히 회의실이나 탕비실 티테이블에서 대기했다. 그녀는 임형규 책임에게 건의해서 책상을 받아냈다.
일본어 번역을 할 수 있게 되자 임형규 책임이 팀 회의에 끼워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스 양도 회의에 들어와라, 잘 몰라도 그냥 들어봐."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참석했다. 팀 회의 참석과 일본어 서적 번역을 통해 기술력을 쌓아 자신도 반도체 설계 업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내에서 흔치 않았던 일본어 자격증을 가진 여성 사원이었던 터라 이와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1988년 당시 반도체 산업 선진국이었던 일본에서 대단히 중요한 반도체 권위자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내한했는데, 회사에서 양향자에게 일주일 동안 하마다 박사의 통역과 가이드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22세밖에 안 됐던 양향자의 일본어 실력은 통역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겠냐'는 회사의 제안에 양향자는 기꺼이 업무를 맡겠다고 수락했다. 본인 스스로도 "사실 제가 그분들을 모시고 다녔어야 했는데, 그분들이 나를 모시고 다닌 거 같다(...)"고 자기 디스를 할 만큼 뛰어난 통역 가이드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하마다 박사는 양향자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하마다 박사는 귀국길에 오를 때 공항에서 양향자에게 "너무 따뜻한 일주일이었다. 내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다"는 인사를 건넸고 실제로 귀국한 지 2주도 안 돼 양향자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천 장의 편지와 연하장, 카드를 주고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양향자가 반도체 산업계를 떠나 정계 입문한 뒤 처음으로 도전한 선거였던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4월 20일 인사차 하마다 박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는데, 하마다 박사가 양향자에게 “실망하지 마라”고 위로한 뒤 “정치권에 가면 앞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텐데, 이것을 사용하라”고 격려하며 고급 커피 그릇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커피 그릇 세트는 하마다 박사가 약 30년 전 우리나라로 왔을 때,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이병철 회장이 하마다 박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한다. *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9분 22초부터
1990년 삼성전자 직원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고졸 여사원은 일이 힘들거나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 연구보조원 여상 고졸 입사 동기가 30명이었는데, 1991년 즈음에는 그녀 외에는 다 퇴사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일을 계속 하면서 1991년 딸을 낳았는데, 출산 전날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 했으며 일이 고된 나머지, 부산의 시댁에 아기를 맡기고 오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맡길 곳을 찾지 못 해 입구 보안시설의 외부인 면회실에 아이를 맡겨 놓고 출근한 적도 있다고도 한다.
이런 복사 및 번역업무지원 일이 회사에 알려졌다. 당시 임원 비서 1명이 그만뒀는데 회사에서 후임자를 찾다가 상고 출신에 일본어 자격증이 있다고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임형규 책임이 '니는 저 자리에 안 맞다'고 한마디로 못 하게 했다. 기술 연구원으로 커야 할 사람이 비서로 가면 커리어패스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임형규 책임은 그녀를 개발팀으로 끌어당겨줬다.
E-2 (전문대졸 사원 직급) 승진은 쉽게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뒤 E-3 (대졸 사원 직급) 승진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필기 시험은 붙었지만 면접 시험에서 이렇다 할 실수나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이 당시 직장 문화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퇴사하고 집안 일에 힘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상식처럼 굳어져 내려오던 때라, 그녀는 면접관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면접관에게 할 얘기를 테이프에다 녹음해서 몇 번씩 녹음을 반복하며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승진심사에서 면접관한테 직접 얘기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두 번째 필기 시험에 붙고 다음 면접 시험에서 면접관들에게 대놓고 "전 오늘 여러분께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이렇게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키는 회사라면 제가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전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쏘아붙인 뒤 그냥 면접장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승진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2]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그때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던 임원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임원들은 양향자에게 "무서운 여자야!"라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분부터 시작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임형규 책임연구원과 23명의 부서원들은 CCD 반도체 소자 국산화를 위해 3년간의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1991년 당시 그 부서의 말단 연구원 5명 중에 그녀의 이름도 연구원으로 올라 있다.
입사 후 계속 연구보조원으로 지내다가 1993년 1월 SRAM 설계팀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1991년 사내 대학 (삼성전자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3]에 원서를 냈으나 반려되었다. 고졸 여사원에게 학업 지원을 한 전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 해 또 원서를 내자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반려했다. 3번째 원서를 내자 '심사대상이 아니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규상 7년 이상 근속이면 누구나 참여가능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교육부서에 가서 따졌다. 교육부서 고위급이 '심정은 알겠지만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전례가 없으면 자신이 선례를 만들겠다'고 우겨서 입학했다.
들어갈 때는 꼴찌로 입학했다. 여성 고졸 연구원 보조는 그녀 1명뿐이었다고 한다. 공업수학, 유기화학, 고체물리학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회사 멘토 선배[4] 아랫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틈틈이 과외를 받았다. 그 결과 199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2007년에는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08년 2월 성균관대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5] 2011년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및 부장을 거쳐 2014년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로 승진하였다.당시 동아일보 기사
1995년부터 2016년까지 약 42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3. 정치 활동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장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독해지거나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출산이 출세를 막고, 육아가 경력 단절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꿀 책임이 정치에게 있다.
양향자의 더불어민주당 입당 인사 中
양향자의 더불어민주당 입당 인사 中
3.1. 더불어민주당 시기
3.1.1. 정계 입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인재로 2016년 1월 12일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입당 인사에서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장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독해지거나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출산이 출세를 막고, 육아가 경력 단절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꿀 책임이 정치에게 있다."고 강조했다.입당 인사에서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는 성공적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공감가는, 무엇보다도 젊은 이들에게 부당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팟캐스트 방송인 진짜가 나타났다 시즌 2에 출연해 자신이 어떻게 정계 입문을 하게 되었는지 그간의 이야기를 직접 밝혔다. # 들어보면, 무슨 첩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무래도 발표 기자회견을 갖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하려고 그랬던 거 같다.
2016년 2월에는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시장이 있다면 그곳이 오지이든 사지이든 적국이든 진출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이다. 정치의 역할은 그 기업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국력을 다해 지원하는 것이다. 한 달 전 저는 제 손으로 사표를 쓰고 나오는데도, 그렇게 눈물이 났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냥 빈손으로 쫓겨나오는 개성공단 입주 회사 임직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박근혜 정부는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럴 자격이 없다."라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질타하기도 했다. #1#2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광역시 서구 을 지역(화정3동~4동, 서창동, 금호1동~2동, 풍암동, 상무2동)의 후보로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하였다.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 지역에서 남동생과 단 둘이 자취 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선거 결과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에게 23%에 달하는 큰 격차로 패배했다.
3.1.2. 최고위원 당선
2016년 8월 27일 전당대회에서 여성 부문 최고위원 겸 전국여성위원장 경선에 출마하여, 득표율 57.08%로 유은혜 전 의원을 꺾고 승리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의 전국여성위원회 위원장(겸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이 와중에 명문대를 나온 운동권 출신 여성 선배 국회의원들이 똘똘 뭉쳐 유은혜 의원을 밀어주면서 고졸 출신이고 초보 정치인이었던 양향자 위원장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로 인하여 유은혜 전 의원 쪽은 더불어민주당의 친문 성향 온라인 신규 당원들로부터 제대로 미운털이 박혔었다.[6] 사실, 전국여성위원장 자리는 명문대 출신 운동권 선후배가 뒤를 이어서 맡는 관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양향자 전 위원장은 이 관행에 정면 도전을 했던 셈이다.
최고위원 활동 당시 공정경제 3법#,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입법을 두고, 같은 최고위원이었던 박홍배 와 갈등이 있었다. 양향자 는 공정경제 3법을 두고 "3% 룰로 기업 경영권이 넘어갈 수 있다", "기술유출이 우려된다" 고 주장하였으나, 박홍배 등은 "과장 선동" 이라고 맞받았다. 3% 룰의 경우 감사위원 선임에 대하여만 적용되므로, 기업 경영권이 넘어갈 수 있다는 양향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
3.1.3. 광주광역시장 경선 출마 등
2017년 12월 13일, 광주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인 싱크탱크인 ‘광주미래전략산업연구소’를 출범시켰다고 하며 2018년 1월 7일에는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산업정책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1월 28일에는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자신의 저서인 ‘꿈 너머 꿈을 향해 날자, 향자’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출판기념회에는 이석현·이개호·박영선·기동민·김병기·유승희·이수혁·최재성·정청래·전순옥·최민희 등 민주당 동료들을 비롯한 5,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용섭, 강기정 등 상대 후보들이 워낙 광주광역시에서 인지도와 지역 기반이 탄탄한 거물급들인 지라 14.85%의 득표율로 경선에서 탈락했다. 경선 패배 후 "저는 이번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광주광역시의 발전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항상 여러분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2018년 8월 30일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차관급)으로 임명되어 2018년 8월 31일부터 2019년 8월 1일까지 제28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임기를 지냈다.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을 계기로 당내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다. 정계 입문 전에는 반도체 산업에서 오랫동안 종사해온 사람이기도 하고, 일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이 있기도 한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 같다.
3.1.4. 제21대 국회의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때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에 양향자를 자객 공천[7]한다는 설이 떠돌았으나 #, 이해찬 전 대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결국 광주광역시 서구 을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여, 상대 후보인 6선 거물 민생당 천정배 후보를 무려 75.8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윤미향을 지지 선언한 15인 중 1명이다. #
2021년 3월 17일, 박원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에게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다며 SNS로 사과의 뜻을 밝히라 비서들에게 지시했다.
2021년 7월 15일 지역구 사무실 직원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 더불어민주당 윤리위원회에서 징계 출당을 결의하자 실제 출당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자진 탈당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의 현재 당규에 의하면 징계가 임박하여 징계를 피하고자 탈당할 경우 5년 간 복당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광주광역시 서구 을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8] 이제 정당에 적이 없는 무적 정치인으로서 정치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2022년 4월 19일 더불어민주당 당론인[9] 수사 기소 분리 법안에 반대하는 입장문이 양향자 의원의 이름으로 배포되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 더불어민주당은 해당 법안을 안건조정위원회에 회부할 계획이었고,[10] 양향자 의원을 법사위에 사보임하는 전략을 썼다. 하지만 정작 양향자가 법안 처리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더불어민주당이 난리가 난 것.[11] 2022년 4월 20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전 원내대표가 해당 반대 입장 문건은 양향자 본인이 작성한 게 맞다고 확인했다. # 그러자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검찰에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냐며 황당해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같은 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문서는 자신이 작성한 것이 맞다고 밝혔다. 그리고 "처럼회[12] 같은 분들은 막무가내였다. 강경파 모 의원은 (검수완박) 안 하면 죽는다고 했다. 다른 분에게서는 검수완박 처리하지 않으면 문재인 청와대 사람 20명이 감옥 갈 수도 있다는 말도 들었다"는 폭탄발언까지 했다. ###[13]
2022년 4월 30일 검찰청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 양향자 의원은 기권을 했다.
2022년 5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입당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이 아니다"라며 복당 신청을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입장문 전문 기사
한편 더불어민주당 박영훈 전국대학생위원장이 본인의 트위터 트위터에서 "본인이 복당 서류를 낼 때마다 "기각입니다. 양향자 의원은 신청 자격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게 뻔한데 스스로 철회를 한다니 황당할 따름입니다."라고 코멘트했다. 하지만 뒤에서 언급할 김의겸의 발언을 보면, 기각하지 않고 복당 신청을 접수만 받아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22년 6월 8일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인재 양성과 관련해서 교육부에 건의했다. #
2022년 6월 26일에는 국민의힘에서 제안한 반도체특위 위원장을 수락했다. 국민의힘 입당 가능성도 점쳐지지만, 당장은 입당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국민의힘에서 활동할 뜻을 내비쳤다.[14] # 사실상 친여 내지는 범여권 무소속 의원으로 정치적 활로 모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2월 16일, 양향자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이 산자위를 통과했다. # 그리고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양향자 의원이 신청한 복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양향자 본인은 실력과 미래가 없는 더불어민주당에는 복당하지 않겠다는 뜻을 재차 밝혔다. #
여담으로, SNS 활동(특히 페이스북)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에 대한 그녀의 지속적인 관심과 행동을 확인할 수 있으니 궁금하면 방문하는 걸 추천.
3.2. 신당 창당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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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1일, 국회의원 선거를 약 8개월 앞둔 시점에서 신당 창당을 준비 중이라는 단독 보도가 나왔다. 뉴스1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래전부터 신당 창당을 준비해왔다고 밝히면서 2023년 6월 26일에 창당 발대식을 열고서 그때 상세한 계획을 설명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
3.2.1. 개혁신당과의 합당
자세한 내용은 개혁신당-한국의희망 합당 문서 참고하십시오.3.3. 22대 국회의원 용인시 갑 출마
2024년 3월 13일 용인시 처인구에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열었다.# 비례대표 공천에 양향자계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자 3월 21일 오후 2시에 거취 관련 기자회견을 열려고 하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전격적으로 거취 관련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 결국 개혁신당 잔류를 선택했다.22대 총선 용인시 갑에서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득표율은 3.21%로 선거비도 보전하지 못했다.
[1] 그 당시 삼성전자에서 책임연구원은 말 그대로 과제를 책임진다는 의미로 20여명의 구성원을 지휘하는 부서장을 말한다. 그는 서울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미국 플로리다대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연구소 내에서도 가장 전도유망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후 삼성전자 사장까지 승진했다. 이후, 하이닉스를 인수한 SK그룹에 영입, SK하이닉스 대표이사를 맡아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린 주역 중 한 명이 되었고, SK텔레콤 부회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2] 당시에는 여상 고졸 연구보조원은 유니폼만 입게 통제되던 시대고 이런 행동에는 퇴사를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3] 일반 대학과는 다른 곳으로, 삼성전자에서 사원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1990년 설립했다.[4] 박상식. 박사를 받은 후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연구소 이미지 센서 개발 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세종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이직했다.[5] 학위 주제는 "2.0Gb/s/pin 이상의 DRAM 인터페이스를 위한 reference clock-based locking time을 갖는 phase-locked loop".[6] 아이러니하게도, 친문계의 정신적 지주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상고 졸업이 최종 학력이라는 이유로 명문대 출신의 운동권들에게 비슷한 수모를 겪었었다. 이는 열린우리당이 탄생한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이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명문대 나왔으면 다야?"라고나 할까.[7] 상대 당 유력 정치인의 지역구에 자당 당협위원장 대신 신인 정치인/거물급 등 경쟁력 있는 인물을 배치해 유력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전략이다. 이기면 최상의 전략이고, 지더라도 표차가 크지 않으면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8] 단, 제20대 국회 시절 서영교의 경우 징계를 맞기 직전에 꼼수 탈당을 했음에도 멀쩡히 복당하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까지 받아 당선된 뒤 행안위원장으로 잘 나가고 있기에 양향자도 같은 루트를 탈 가능성이 있었으나, 후술할 문제로 더불어민주당과 척을 지면서 가능성이 희박해졌다.[9] 다만 공식적으로 양향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이기 때문에 양향자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당론이다.[10] 안건조정위원회는 2/3 찬성이 있으면 최대 90일까지 끌 수 있는 안건심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교섭단체 기준으로 여야 3:3으로 구성하면 신속한 통과가 불가능하므로 비교섭단체 야당 1인을 포함시켜 더불어민주당 3명, 국민의힘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하는 전략을 쓰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무소속 몫으로 더불어민주당 출신 무소속을 앉혀 2/3를 만들고자 했다.[11]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무소속 의원 자리를 만들기 위해 민형배 의원이 자진 탈당하고 안건조정위의 무소속 몫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12]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 중심의 강경파 모임[13] 공교롭게도 양향자의 발언으로부터 거의 1년 뒤에 폭로된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사건 당시 돈봉투를 수수받았다고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수가 20명이다.[14] 다만 호남 지역구 의원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직접 영입한 친문 출신 정치인으로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당선됐던터라, 국민의힘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은 부담되는 모양새인 것 같다. 그러나 민주당 복당 카드를 접었기에 앞으로도 정치 생활을 이어나가고자 한다면 수도권 출마를 고려하고 국민의힘에 합류할 가능성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