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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02:36

양규(고려 거란 전쟁)/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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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
2.1. 1회2.2. 2회2.3. 3회2.4. 4회2.5. 5회2.6. 6회2.7. 7회2.8. 10회2.9. 11회2.10. 12회2.11. 13회2.12. 14회2.13. 15회2.14. 16회(최후)
3. 이후 언급

1. 개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인 양규의 작중 행적 문서.

2. 작중 행적

2.1. 1회

여요전쟁이 시작되는 역순행적 구성으로 전개가 시작된다. 작품이 시작하는 1009년 시점에서는 흥화진을 담당하는 흥화진사로 등장해 국경을 넘어 염탐하러 온 거란 정찰대를 추격한다. 활솜씨를 자랑하며 거란 병사 두 명을 포로로 잡았지만, 정작 자신의 군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김숙흥이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기껏 잡은 포로 둘을 교환하여 거란에 돌려준다. 이후 상황을 살피러 상관이자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찾아오자 그를 맞이하며 흥화진의 안위를 다시 한 번 부탁받는다.

2.2. 2회

포로 교환의 책임을 지고 수감된 김숙흥강조의 명으로 흥화진보다 비교적 후방에 있는 귀주로 파견한다.# [1] 김숙흥은 크게 반발하지만, 거란이 흥화진이 아닌 귀주를 공격로, 또는 퇴각로로 삼을 수도 있으니 거란 놈들 죽이는 게 소원일 뿐인 '너 같은 미친 놈 하나는 귀주에 있어야 한다'며 그의 반발을 꺾으면서 귀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파일:고려거란전쟁 2화 양규.gif
그를 보내고 난 뒤 흥화진부사 정성이 거란이 진짜 귀주로 온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그러지 않길 바란다고 답한다.

2.3. 3회

정변을 결심한 강조흥화진으로 찾아와 독대한다. 강조가 결심을 밝히자, '명령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과 '신하가 황제를 세운다는 것' 모두 반역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각오를 묻는다. 이어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밝혀달라고 한다. 강조는 자신이 정변을 위해 군사를 빼내면 생길 국방의 공백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건 전령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자신도 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에 강조는 양규까지 역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으며, 추후 반역자가 된 자신을 이전 같이 대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쉽게 답하지 못하는 양규를 두고 떠나려는 강조에게 직접적인 답 대신, 자신은 장수로서 싸우라면 싸우고 지키라면 지키는 명만 받든다고 말한다. 이에 강조는 그럼 됐다고 답한다.

2.4. 4회

정변으로 집권자 자리에 오른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경이 아닌 흥화진에 남겠다며[2] 김훈최질을 당황하게 한다. 최질이 관례를 따르라고 하자 그럴거면 도순검사 임명을 무르라며 뻗대 결국 흥화진에 남는다. 이에 자기 후임으로 흥화진사가 된 정성이 당신이나 김숙흥이나 윗 사람 말 안 듣는 건 똑같다고 놀리자 멋쩍게 웃는다.[3] 이후 현종의 책봉을 받아내기 위해 거란을 오가는 고려 사신을 바라보며 전쟁을 염려하면서도, 어쨌든 새 황제가 국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일이라며 의미를 찾는다. 이후 선전포고를 전하러 온 거란 사신 한기 일행을 개경으로 인도한다.

2.5. 5회

한기거란 황제의 선전포고를 전하면서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발끈하는 강조에게 "모든 것을 감내[4]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것만 생각하라"라고 충고한다. 이후 가장 먼저 적과 마주하는 장수가 누구인지 황제도 아셔야 한다는 강조의 권고로 현종을 만나 격려를 받고, 강조가 이 전쟁을 현종과 함께 치르고 싶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현종이 임명할 지휘부 자리를 비워 놓았다며 강조의 진심을 대신 전하고 그를 격려해달라고 청한다. 현종이 흥화진으로 떠나는 양규에게 잘 싸워달라고 부탁하자, 양규는 신하에게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면 된다며 현종을 북돋는다. 이에 현종이 흥화진을 꼭 지켜내라고 명하자 무릎을 꿇고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한다.[5] 흥화진으로 돌아와 청야 전술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갖추는데, 거란군을 피해 산으로 가려는 일부 백성들을 독려하여 흥화진 안으로 피신을 권유한다. 이후 실제로 거란이 잡은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생각하면 양규의 말이 옳았던 상황이다. 도중에 흥화진에 항복을 권유하는 한기를 차갑게 돌려보내고[6], 결국 밤에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이 쏘아 보낸 불덩이를 바라본다.[7]
온다!!!
파일:고려거란전쟁 5화 양규.gif

2.6. 6회


흥화진 공성에서 거란의 수십만 대군에 전력으로 맞선다. 예상치 못한 흥화진의 분전에 거란군은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쉴 틈 없이 파상공세를 펼치며 고려군의 피로를 가중시키지만, 양규는 손 체가 피투성이로 범벅이 될만큼 완전히 다 헐때로 헐어버리고 활줄이 전투 도중 끊어지며 심지어는 잠도 못 자는 등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일주일 동안 흥화진을 지킨다.[8] 결국 눈에 띄는 전과가 없자 분노한 야율융서의 질책을 받은 거란군은 7일째[9][10] 북쪽 성문 외곽으로 고려인 포로들을 인간 방패삼아 전진한다.[11] 양규는 인간방패가 된 고려 사람들의 목숨과 성을 지켜야 하는 임무 사이에서 망설인다.[12] 그러나 결국 분노와 죄책감,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격 명령을 내리고, 함께 화살을 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같은 고려인들을 죽여야하는 현실에 절규한다.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보면, 양규가 발사 명령을 내린 후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려 잠깐 활을 놓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온다. 40만 거란군에 맞서 7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싸우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 양규도 이 순간만큼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 직후 다음 회차의 예고편과 함께 나왔던 BGM[13] 또한 이전 에피소드까지의 마무리곡과 다르게 굉장히 처절하고 구슬픈 분위기여서 여운을 남겼다.[14][15]

2.7. 7회

결국 흥화진 공성이 끝나고 거란군 주력이 남하하자 백성들이 양규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지만, 양규는 흥화진을 지키기 위해 고려 백성들을 쏜 일이 마음에 걸려 괴로워한다.[16] 이후 정성에게 이 일을 반드시 갚겠노라고 분노를 삭인다. 인간방패가 되어 목숨을 잃은 아들을 보내주라고 백성을 위로하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백성은 도리어 도순검사 아들이었으면 그리 못 했을 겁니다라며 원망한다. 이때 잠시 음악이 조용해지면서 가족을 잃은 주변의 다른 백성들까지 일제히 양규를 바라보는 것이 압권이었다.[17] 성 밖으로 빠져나가 아군을 도우려다 공성만 끝났을 뿐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흥화진의 생존을 후방에 알리기 위해 분투한다.[18] 결국 정성이 동문으로 나가 거란군을 유인한 뒤, 양규 본인이 직접 북문으로 나가 거란의 습격을 막고 봉화 한 곳을 탈환하여 흥화진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알림으로써 통주와 개경 에 희망을 전한다.

2.8. 10회[19]

흥화진의 포위가 풀린 것을 눈치채고 밤중에 은밀히 성 밖으로 나와 정찰을 돌다가[20], 매복한 척 기다리고 있던 김숙흥과 만난다. 이후 김숙흥으로부터 삼수채에서 고려 본군이 패전한 것과 도통사 강조의 전사 소식[21], 그리고 함락된 세 개의 성 중 거란이 거점으로 삼는 것이 곽주 뿐이며[22], 주력이 모두 서경을 향해 남하했다는 것을 듣고는 곽주성을 탈환하여 거란군의 거점과 보급선을 끊어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흥화진사 정성이 무모한 작전이라며 굳이 갈거면 자신을 베고 가라면서 반대하자, 그럼 자기 혼자서 패잔병 긁어모아서라도 갈 테니 정성은 흥화진을 지키라고 명령한다.[23] 이에 정성이 어쩔 수 없이 내어준 700명을 이끌고 통주성으로 이동한 뒤, 통주성에서 그나마 최대한 긁어 모아서 1,000명을 더 확보한다.[24] 통주성을 지키던 최질과 김훈이 1,700명으로는 어렵다며 만류하지만 양규는 "언제 우리가 승산 있는 싸움만 했던가? 곽주를 탈환해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며 곽주 탈환 의지를 다시 강력하게 천명한다. 그리고 귀주에 보냈던 김숙흥에게 자신에게 합류할 것을 명하면서 개경의 현종에게도 곽주를 탈환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25]

2.9. 11회

통주성의 최질과 김훈의 만류에도 결국 1,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곽주를 탈환할 것을 결심한다. 김숙흥과 사전에 이야기하면서 정공법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인지하고, 결국 김숙흥을 항복을 위장해 포로로 진입시켜 내부에서 성문을 열 계획을 짜고, 김숙흥을 먼저 성 안으로 들여보낸 뒤 최충과 함께 곽주성으로 출정한다.[26]

2.10. 12회


적은 병력 수가 드러나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야습을 감행했고, 미리 잠입시킨 김숙흥과 별동대의 내부 교란을 이용해 곽주성을 탈환해내는 데 성공한다. 역사에서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고 해서 본작의 곽주성 탈환 묘사에도 뭔가 있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정석적인 작전으로 처리했다.[27] 이전 회차에서 서경 전투에서 거란군이 돌풍이 불어 하루 정도 전투가 지체 된 일도 묘사하지 않은 점을 볼 때 아무래도 본작에선 사료에 남아있는 천재지변은 극적 개연성을 위해 삭제한 듯하다. 곽주성을 포위한 병력이 단 1,700명임을 들키지 않도록 동행한 수재관 최충을 동문으로 보내고 나머지 병력들도 남문과 북문으로 보내 견제 사격을 가한다. 이에 곽주성을 지키던 거란군 지휘관은 적의 대병력이 성을 포위했다고 판단해 전 병력을 성벽 위로 올린다. 설마 소규모 부대로 성을 공격할 것[28]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fLftsFly8&t=3s전 병력이 서문을 제외한 성벽으로 몰리자 포로들 속에 들어갔던 김숙흥의 별동대가 내응하여 서쪽 성문을 열었고, 이에 맞춰 양규의 부대가 서문의 성벽을 지키던 군관과 병사들을 활로 사살한 뒤, 열린 성문으로 진입하여 김숙흥의 함께 있던 부대와 함께 단병접전을 벌인다. 이후 남은 세 개의 문으로도 고려군이 진입하고, 백성들이 함께 봉기하면서[29] 곽주성의 거란군은 전멸했다.#
파일:고려거란전쟁 12화 양규.gif
마지막에 성을 탈출하려던 거란군 사령관과 부하들을 포착한 김숙흥이 소리치자, 양규가 말을 타고 쫓아가 추격 끝에 활을 쏴 3명 모두 처단했다. 이후 곽주성으로 돌아와 적장의 수급을 던져주며 백성들의 연호를 받는다.[30] 곽주성을 탈환한 양규의 목적은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닌 거란군의 거점을 없애는 것이었기에 김숙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탈환한 곽주성을 청야시킨 다음 성문을 부숴버리게 한 다음 백성들은 통주로 보내도록 조치한다.[31] 이후 데려온 서북면의 군대를 서경으로 결집시키기로 하고 서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동하던 중 최충으로부터 '개경이 함락되고, 황제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해 서경에서 모두 집결시킨 후 제장들과 대책을 논의했지만, 황제의 생사 여부가 백성들과 군사들은 물론 무장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속으로 애를 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때마침 이현운의 계략으로 거란의 사신이 서경에 와서 '고려 왕이 훙서(사망)했으니 항복하고 상복을 입어라,'면서 고려군의 저항 의지를 꺾어 항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하공진과 함께 사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강감찬이 나타나 현종의 생존과 몽진 소식을 서경의 장수들과 백성들에게 전한다.[32] 강감찬의 말을 거짓말로 몰아 심리전을 이어가려던 거란 사신에게 양규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성상 폐하의 시신을 서경으로 인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란 황제에게 이 말을 전하라. 거란군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요 성종을 향한 '최후통첩'을 사신에게 날려 보낸다. 이에 거란 사신이 머뭇거리자 휘하 제장들도 현종의 승하가 거짓임을 확신했다.[33] 위에 언급한 발언이 나오기 전에 최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빼들어 거란 사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을 양규가 손을 들어 말려야 했을 정도다. 이후 서경 성문 위에서 거란 사신이 돌아가는 모습을 강감찬과 함께 보면서 "큰 일을 해냈다."면서 서로 격려와 감사를 표하고, "단 한 명도 살리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냐?"는 강감찬의 물음에 진심이라고 답한다.

2.11. 13회

이후 서경에서 무장들과 함께 반격 작전을 논의한다. 무로대에 있는 거란군은 보급 담당이고 사기는 떨어졌지만, 거란의 본대는 아직 15만 이상으로 건재하니 전면전은 무리라는 제장들의 건의에, 거란군은 이제 곧 시기상 철군할 수 밖에 없으며, 거란군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험한 산세와 좁은 길목이 있는 귀주로 몰아넣어야 한다며 돌아가는 모든 경로에 고려군을 매복시켜 섬멸전을 제안하고 구체적인 작전을 논의하려던 찰나, 함께 논의에 참여하던 강감찬이 거란이 철군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며, 거란주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을 거론하며 쉽게 철군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에 어느정도 납득이 갔는지, 이후 강감찬과 독대하며 거란을 철군시킬만한 계책이 있냐고 묻는다. 이에 강감찬은 거란의 도통을 만나서 철군 명분을 쥐어줘보겠다고 하지만, 강감찬이 단신으로 거란군의 도통을 만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엔 거부한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통주성에서 잡아두었던 거란 사신과 거란에 항복했던 노전을 풀어준다. 노전은 자신은 거란의 신하로 살기 싫다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지만, 양규는 일단 가라며 풀어준 뒤 노전과 눈을 마주친다. 노전을 연락책으로 삼아 소배압과 강감찬이 접선할 수 있도록 꾸민 듯하다. 이후 강민첨으로부터 강감찬이 다른 거란 장수(야율분노)가 이끄는 군사들에게 생포되어 거란 진중으로 끌려갔다는 보고를 받는다. 강감찬이 사로잡힌 바람에 "혹여나 향후의 계획이 누설되는 게 아니냐?"라는 정성의 물음에 "예부시랑은 그 누구보다 고려의 승리를 갈망하는 자이기에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2.12. 14회

서경에서 통군녹사 조원에게 함정을 파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귀주로 향하는 길에 인근 협곡에서 김숙흥, 보량 등과 전략을 논하다가 적을 없앨 생각에 신이 난 김숙흥이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싸우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전쟁을 또 겪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지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기에 저들이 쳐들어 온 것이라며 여기서 끝내겠다는 말과 함께 망토를 벗고, 협곡 아래를 향해 효시를 쏠 준비를 한다.

2.13. 15회

거란군이 귀주 방면으로 퇴각한다는 보고를 듣자 때가 왔다면서 병사들을 이끌고 직전에 봐두었던 귀주 협곡으로 병사들을 출격시킨다. 이후 거란군의 척후병들을 미리 제거한 다음 선봉으로 길을 개척하던 거란의 선봉도통 야율분노의 목에 직접 화살을 쏘아 사살하고, 거란의 선봉군 1만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후 김훈, 최질, 조원 등이 거란군의 후미를 막았으며, 거란군을 혼란시킨 공을 세운 노전을 구해주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게서 사신으로 갔던 하공진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거란군이 차선책으로 산자락을 넘어갈 것임을 판단하고는 그대로 김숙흥과 함께 결사대를 이끌고 산자락에서 적들을 전부 베어버리고 포로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투에 임한 다음 그대로 실행해 성공하는 방식으로 며칠동안 주변 산자락을 넘나들면서 온갖 방법으로 거란군을 괴롭힌다.[34] 그 결과 거란군 1만 5천 명을 죽이고, 그들이 챙긴 포로 3만 명을 구출해냈다는 소배압의 말을 듣고, 야율융서는 격분하여 [35]을 놓아라. 그 자의 목을 베고 압록강을 건너가겠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시 포로[36]를 끌고 지나가는 거란군을 김숙흥과 함께 보고 효시를 쏘는 모습으로 회차가 마무리되었다.

2.14. 16회(최후)

이전 회차에서 거란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을 구하러 가기 전, 척후병을 통해 상황을 확인하고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김숙흥과 가벼운 잡담으로 여독을 푼 뒤, 척후병을 통해 포로의 위치를 확인하지만 포로를 끌고 가는 군사의 수가 적은 것에 함정임을 눈치챈다.[37] 하지만, 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포로도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를 각오한 양규는[38] 김숙흥에게 자신의 활과 효시 일부를 건네주며[39] 양동작전을 제시한 뒤, 양동작전을 성공시키며 무사히 포로들을 구출해 귀환시킨다.[40]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다 야율융서의 친위 본대 3만을 상대로 구출한 포로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고자 최후의 일전을 감행한다. "백성들과 산천, 그리고 고려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라는 군사들을 향한 격려와 비장한 연설에 더해 "그동안 고마웠다." 라는 말을 남겼다.[41] 이때 휘하 결사대 장병들도 양규가 포로들을 바라보자 일제히 양규의 시선을 따라 포로들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모습을 보여주며, 양규의 최후 독려를 들으며 매우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도 백미. 이 장면을 잘 보면 결사대 중 한 명은 양규의 독려를 듣고 결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야율융서의 항복 요구에 효시로 답하면서 이내 300보가 남았단 것을 보곤 어떻게든 아율융서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거란군의 본대와 백병전을 치른다. 압도적인 전력차이와 중과부적을 감당하지 못한 결사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은 양규와 김숙흥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끝까지 분전하여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자 공포감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할 정도로 사기가 가라앉아버렸고 양규와 김숙흥은 마지막 최후까지 거란의 본대와 처절한 혈전을 치른다.[42] 결국, 양규는 끝내 100보[43]까지 나아가 전신에 피칠갑을 뒤집어쓰고 한 쪽 팔마저 단검이 박혀버린 상황에서 반드시 야율융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가는 무시무시한 집념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거란 병사와 장군들이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그로기 상태에서도 더 이상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심지어, 거란군의 장군들도 겁을 먹고 물러서서 병사들에게 등을 떠밀고 "빨리 나가서 싸워라!" 라고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유목민족으로서 수없이 약탈과 전쟁을 해온 경력이 노련한 거란군의 장군들마저도 두 장군의 분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포감에 겁을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단검이 꽂힌 오른팔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서 입까지 써 가며 야율융서를 향해 효시를 쏘지만 불과 10보가 모자랐고, 이에 다시금 야율융서를 저격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소배압이 궁수대를 동원하면서 양규는 한 걸음마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맞아가면서도 걸어갔으나, 결국 단 3보를 남기고 마지막 숨을 내쉬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김숙흥과 함께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었다.[44]



두 사람의 기세가 어찌나 처절한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노렸던 이들의 모습에 야율융서는 그저 놀라 "저 지독한 놈...!" 이라고 치를 떨면서 진절머리를 냈고, '양규와 김숙흥의 목을 반드시 베고 가겠다.'라고 선언했음에도 두 장군의 수급을 취하지는 않고 그냥 내버려두고 퇴각했다. 아마도, 장렬히 전사한 적장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시신을 훼손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자신을 상대로 처절하게 싸우는 두 장군을 바라본 거란군은 공포감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으니, 차마 목을 벨 용기가 있는 병사들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후미에 있던 김훈이 이끄는 고려군의 추격을 피해서 한시라도 바삐 퇴각해야하는 입장에서, 목을 벨 시간조차도 아깝기 때문에 그대로 퇴각해버렸을 수도 있다. 마침 거란군의 전령이 도착해 야율융서에게 "고려군 추격조가 쫒아옵니다." 라고 보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양규와 김숙흥을 집단 공격하던 거란군 보병대도 뒤에 가서는 나가서 공격하라는 상관의 명령에도 공포감에 겁을 먹고 두려워서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주춤했으며, 거란군의 궁수들도 한동안 활시위를 건 손을 주춤거릴 정도였다. 아율융서에게 도끼로 난도질을 당하고 매우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강조와 달리 양규와 김숙흥은 철저하게 열세인 백병전에서도 온 몸이 유린당하고 화살비를 맞았으나 결코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장엄한 죽음을 맞이했다. 눈이 내리는 벌판[45]에서 『고려사』를 인용한 양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나온 후, 화면이 암전되고 그가 항상 사용해 왔던 그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인 효시의 소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듯 구슬프게 울려퍼졌다.

이후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흥화진사 정성은 분노하면서 성의 군사들을 이끌고 거란군의 후미를 공격했지만, 야율융서와 소배압은 먼저 압록강을 건넌 뒤라 무사했다. 이후 흥화진으로 그와 김숙흥을 포함한 시신이 오자, 정성과 김훈, 최질을 비롯한 모든 장군들이 두 장군과 결사대의 명예로운 전사를 추모하면서 눈물로 맞이했다.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시신들은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실감할 정도의 몰골이었으며, 양규의 시신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흥화진에 들어온 김숙흥의 시신은 좌우기군장군 김훈이 꽉 그러쥔 손을 펴주기 위해서 힘을 썼으나, 도저히 그 손이 펴지지 않아서 김훈은 손을 내려놓고 슬픔에 통곡하였으며, 뒤를 이어 들어온 양규의 시신은 죽었음에도 활에 효시를 끼고 있는 상태라 정성이 "이제 그만 주무시라"라며 도순검사란 직책 대신 '형님'이라 부르며 울었다. 부하들을 재우면서 양규 본인은 일주일 넘게 잠도 자지 못한 채 흥화진의 성벽을 지켰던 모습이 떠오르는 슬픈 장면이다.[46] 그리고 전쟁 이후 논공행상을 통해 공부상서로[47] 추증되었고, 그 식솔들의 생계도 챙기라는 현종의 언급이 있었다.[48]

드라마에서 인용한 그의 마지막에 대한 『고려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 달 사이 일곱 번 싸워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았다.

양규와 김숙흥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전사하였다.

고려사 권94, 양규 열전 발췌[49]

3. 이후 언급

22회에서 거란은 강동 6주가 아니면 흥화진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 중 일부가 흥화진을 내주고 전쟁을 피하는 게 좋지 않냐고 주장하자 한 아낙네가 "양규 장군에게 부끄럽지도 않냐"라며 울부짖고 다른 백성들도 동참한다. 이를 통해 고려 백성들 사이에서 흥화진은 사실상 양규 장군을 상징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고려 백성들에게 양규 장군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 조정에서도 양규 장군이 지켰내던 흥화진은 고려와 대(對) 거란과의 전쟁에서 40만대군을 막아낸 상징과도 같은 특별한 장소로 대우받고 있으며, 현종 또한 거란 사신단에게 이를 언급하며 "흥화진은 단순히 하나의 성이 아니다", "흥화진을 갖고 싶다면 이 고려를 굴복시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을 정도이다. 끝까지 거란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양규 장군의 혼이 흥화진에 남아 여전히 고려를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최종회에서는 목종, 천추태후, 강조, 김훈, 최질, 김은부, 장연우가 차례대로 나오며 시청자들을 기대시켰지만, 정작 양규와 김숙흥은 나오지 않았다.


[1] 이에 반발하면서 뛰쳐 오르는 김숙흥을 향해 활시위를 건 다음 겨누는 장면이 일품이다.[2] 지승현은 실제로 학군사관으로 임관했던 예비역 장교 출신이다. 또 복무지가 흥화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GOP였다. 배우와 배역이 역할이 비슷한 신기한 케이스.[3] 실제로 역사에서 거란이 강조의 명으로 회유하려 했을 때 "나는 조의 명을 받지 않는다" 라고 답한 일화를 참고해 강조에게 상관으로서의 친분은 있지만, 나라를 배반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4] 본인이 나라를 위해서 벌인 반역이고 정변을 벌이기 이전에 각오를 했다고 한 만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라는 뜻이다.[5] 작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양규와 현종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6] 참고로 1010년 겨울의 흥화진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원작 소설에서는 이 시점에서 양규, 정성 등의 흥화진 군사들이 한기와 처음 만난다. 다만 원작에선 한기가 드라마에서 등장하지 않는 흥화진부사 '이수화'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로 나오며, 이때 양규의 지시 하에 고려군이 항복에 관하여 답을 모호하게 하는데, 한기가 초조해 하며 제대로 답하라고 재촉하다가 결국 잘 생각하라고 말한 후 돌아간다.[7] 이때 흥화진 성 내에는 소등을 실시해 어두웠던 상황이었으며, 더불어 인물로서는 처음으로 클로징 전 장면으로 등장했다. 이 부분의 연출은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고 고려군과 백성이 느낄 두려움 역시 살아 있어 극찬받았는데, 참고로 원작 소설에서는 흥화진 전투가 밤이 아니라 낮에 시작한다.[8] 중간에 거란군이 날린 화공 투석으로 인한 맹화유의 유폭에 손이 잠깐 불에 붙을 때에도 금방 털어버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장면만큼은 CG가 아니라 진짜로 작은 불을 손에 붙인 채 연기하였다.[9]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성벽 앞에는 거란군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성벽은 피로 칠해져 있다. 양규 본인도 지휘를 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성벽 위에서 경계 도중 선 채로 잠에 들어버리는 등 피로에 절어져 있었다.[10] 성벽에서 잠깐 잠들었을 때 꼭 화살이 몸에 꽂힌 것처럼 보이게 연출했는데 양규의 실제 죽음을 떠올리면 복선이라는 의견이 많다. 자세히 보면 서서 조느라 몸이 흔들릴 때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살도 양규의 몸과 함께 흔들린다. 파일:양규 최후 복선.png[11] 몇몇 시청자들은 신파억지로 감정을 자극하는 연출이라고 비판했으나, 실제 역사에서 거란, 여진, 몽골 등 다수의 유목 민족 침공군들이 공성전에서 방어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서 주로 써먹은 단골전법으로 굉장히 많은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다. 심지어, 몽골군의 경우는 포로를 산 채로 삶아서 뽑아낸 기름으로 화공을 벌인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거란군이 대놓고 고려 백성들을 고려군이 보는 앞에서 학살하면서 고려군의 전의를 꺾으려고 했는데, 이 부분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 나온다. 드라마의 장면은 이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그나마 인간방패가 '심리전을 위한 학살'을 '심리전을 병행한 군사작전'으로 완화시킨 묘사란 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12] 수성을 묘사한 에피소드에서 거란군의 화살에 아내를 잃고도 목숨을 마다하고 병력의 보급을 도와줬던 어느 백성이 있었는데, 흥화진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 따로 떠나보낸 자식들이 거란군에게 인간방패 포로로 붙잡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제발 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다가 성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해 군사들에게 제지당한다.[13] 3회 목종이 시해되는 장면에서 나왔던 배경음과 동일한 배경음이다.[14] 이 장면을 두고 이후 양규가 왜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포로를 구하는 것에 집착했는지 보여주는 복선이라 보는 평이 많다.[15] 해당 연기는 배우인 지승현이 제안한 것으로, 원안엔 그저 고민한다고만 적혀있었으나 눈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감독은 이게 신파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승현 쪽에서 '자신은 울 것 같다. 울어도 장군처럼 울겠다'며 밀어부쳤고, 이에 감독은 '눈물이 떨어졌을 때, 눈물을 의식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16] 이때 성 한쪽에서는 승전의 기쁨을 환호하는 무리가, 초점이 이동하면서 반대쪽에서는 시신을 모아두어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백성들이 대조되어 묘사되며 전쟁을 만드는 참상을 보여준다.[17] 엄밀히 말하면 흥화진 성내로 대피하라는 양규의 명령을 무시하고 본인의 선택으로 자식들을 성밖에 놔뒀으며, 그 결과로 자식들이 거란군에 잡혔고 그 중 아들이 화살받이로 내몰린 것이니 양규를 탓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물론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은 아버지에게 그런 이성적인 판단력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18] 통주성 앞 삼수채에 주둔하고 있던 30만의 고려군은 주로 농민들이 징집되어서 온 광군들로 이루어져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봉화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흥화진이 무너졌다는 허위 소식으로 인해 개경에 있던 주요 대신들조차 거란군이 무서워서 가족들을 피난 보내려 했다가 현종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19] 8회 및 9회에서는 출연하지 않았는데, 두 회차의 대부분이 통주 전투 이후 전황과 강조의 최후, 고려 조정의 대책 및 서경을 둘러싼 고려와 거란의 신경전 등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20] 거란군에게 눈치채지 않게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쓰고 말의 발마다 신발을 신겼다.[21] 표정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게 드러난다.[22] 나머지 두 성은 불태웠다고 한다.[23] 이때 자신을 베라는 정성의 말에 ‘고려인을 내 손으로 또 죽일 순 없다’ 라고 대답하는데, 아무래도 지난 6회 후반에서 화살받이로 내몰린 고려 백성들을 쏜 일이 어지간히 트라우마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24] 출정 할 때 병사와 헤어지는 가족이 오열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등 비장함이 아니라 슬픔과 비극이 배가 된다. 그동안의 사극이 보여주기식 전투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전쟁이 얼마나 비극이고 죽음이 얼마나 슬픈지 제대로 보여줬다. 참고로 원작에서는 통주성 쪽으로 가기 전에 안의진에 가서 방비를 철저히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주변에서 소수의 거란군을 물러가게 한 뒤 이전에 싸우다가 죽었던 고려군을 애도하고 살아남은 병사를 위로하면서 나머지 고려군을 찾다가 보량 및 김숙흥 등의 귀주군을 만난다.[25] 사서에는 운석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게 운석이 직접 성을 때려서 무너뜨리고 그 틈을 양규가 파고든건지, 아니면 이 운석이 성 인근에 떨어지자 혼란에 빠진 곽주성을 양규가 기습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운석이 곽주성 함락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특히나 양규가 이끄는 결사대와 곽주를 수비하는 거란군 병력이 배는 차이 나기에 극적인 수가 없다면 사실상 함락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11회에서 김숙흥이 이끄는 일부 군이 서경성 내에서 교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서 어느 정도 전황의 개연성을 부과하였다.[26] 양규의 곽주성 탈환과 같은 날에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기록은 사실 유성이 성에 유성이 떨어졌는지에 대한 여부가 불분명하기에 내부 교란 전술을 펼쳐 무너뜨리는 것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27] 원작에서도 그저 곽주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양규가 보는 장면으로 나올 뿐이지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28] 사령관과 부하들 모두 곽주성이 당시 거란군의 주요 거점이고, 공성전에 필요한 병력을 감안하면 6만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손자병법에서 이르는 '수성 병력의 10배면 포위하라'란 상식에 따른 판단이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판단에 양규가 허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이 기습이 성공하고 모든 병력을 사살했기 때문에, 거란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땅을 향해 보급도 없이 등 뒤에 최소 6만 이상의 병력에게 포위되는 상황을 각오하고 내려가야 한단 착각에 빠지게 됐다. 이는 어떻게 보면 통주 전투의 전략적 실패로 인해 고려 병력이 많이 보존된 스노우볼이 구른 것으로 볼 수 있다.[29] 이때 백성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여성은 돌로 거란군의 얼굴을 짓이기며, 남성은 거란군의 목에 창을 대어 온몸을 누르며 울부짖고 있다. 특히 울부짖으면서 돌로 거란 병사를 내리치는 여성이 인상 깊었다는 감상이 매우 많다.[30] 이때 백성들이 "고려군 만세"를 외치며 양규를 칭송하는데, 이 당시 만세는 황제만이 받을 수 있었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고증오류이다. 하지만 곽주 전투에서 양규가 거둔 승리가 2차 여요전쟁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작용할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고증오류라기보단 '현종이 직접 봤더라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정도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31] 이 또한 합리적인 판단인 게, 이미 거란의 타초곡으로 쑥대밭이 된 성을 2천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거란군이 다시 와서 또 점령하면 그대로 거점이 복구되기 때문에, 차라리 양규의 판단대로 방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게 낫다.[32] 이 때 처음으로 양규와 강감찬이 대면하게 된다. 이전 4회에서 거란 사신 한기가 선전포고를 선언할 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세 사람(현종, 강감찬, 양규)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지만, 직접적으로 강감찬과 양규가 만난 건 이 장면이 처음이다. 참고로 원작에서는 양규가 회군하는 거란군으로부터 구한 몇몇 포로에게 전장정리를 부탁하는 동시에 현종의 파천 및 서경성이 누구 덕분인지는 몰라도 건재하다는 소식을 자세히 듣는다.[33] 이 요구가 외통수였던 것이 당연히 죽지도 않은 현종의 시신을 보낼 수 있을리 없고, 굳이 속이려면 다른 이의 시신에 용포 입혀 위장하는 방법이 있지만 다른 장수이나 백성들은 몰라도 양규 본인은 개경에서 현종을 만나 얼굴을 알기 때문에 금방 간파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거란 사신도 그들 중 몇 명이나 현종의 얼굴을 아는지 모르기도 했고, 목을 자르거나 얼굴을 훼손하자니 너무 속이 뻔한데다 오히려 "성상 폐하의 시신을 능욕했다"라며 고려 측이 더욱 분기탱천하는 결과만 낳았을 수도 있다.[34] 전투를 시작하며 신호로 효시를 쏘다 보니 거란군도 효시 소리만 듣고도 겁에 질린다.[35] 사서를 참조하면,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별동대가 애전에서 거란군 부대를 요격해 천명 정도의 수급을 베는 활약을 펼쳤지만 그 사이 요 성종이 이끄는 본대에게 포위당해 격전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원작처럼 거란군의 유인책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36] 포로들 중에는 흥화진에서 만났던 백성의 딸도 같이 있었다.[37] 특히 흥화진에서 포로가 되었던 여자 아이가 함정이란 사실을 알려주었다.[38] 여자와 아이들을 앞세운 이상 마지막 포로 행렬이라는 것은 분명했고, 산길을 거란군이 빠져나가면 바로 평야가 나오기에 여기서 거란군을 놓치면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39] 이후에 작전이 끝나자 김숙흥에게 활을 달라며 손을 내밀지만 악수로 착각한 김숙흥이 악수를 하려고 하자 눈치를 주며 활을 돌려받아서 김숙흥이 무안함을 느끼는 짤막한 개그씬이 나온다.[40] 이들을 구출하며 여자아이에게 피범벅이 된 손을 갑옷으로 닦으며 신을 신겨주는 장면은 마치 아이가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길 바라는 심경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협곡에서 말했던 "다시는 전쟁을 겪고싶지 않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여기서 끝내려고." 의 연장선인 것이다.[41] 이 대사로 16회 예고편을 마무리했는데, 작중 등장인물인 양규가 그간 전장을 누볐던 고려의 전우들에게 건네는 인사임과 동시에 이 회차를 마지막으로 하차 예정인 배우 지승현이 시청자에게 인사한다는 느낌도 주었다. 참고로 원작에서는 거란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에서 양규가 현 상황의 위험성을 강조하자 김숙흥은 이를 듣고 "지금으로써는 거란의 황제를 잡는 방법 말고는 없다" 라고 제안하며, 양규도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수동적으로 있는 것보다는 낫다" 라고 판단하였고, 제장들도 이에 모두 동의하자 양규와 김숙흥은 "거란의 황제를 잡아 이 전쟁을 끝내고 귀주군도 또 다른 전설을 쓸 것이다" 라고 연설한다. 또한 제장들에 대하여 북적을 상대로 믿을 수 없을만한 승전을 거두어 그 어떤 북적도 함부로 업신 여기지 못할 공을 세운 훌륭한 군사들이라고 칭하며, 그들과 전우가 된 것이 생애 가장 큰 영광이라고 말한다.[42] 여기서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당대 갑옷의 방어도가 잘 드러나는데, 물론 과장된 연출이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냉병기와 둔기의 공격에도 불똥이 튀기만 하고 끄떡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보병대의 집단공격에 끝내 갑옷의 갑찰이 떨어져 나가고 목가리개도 뜯겨지며 둔기를 맞고 투구가 떨어지기도 한다.[43] 무편집본에선 100보를 외친 직후 바로 이 새끼들아!라고 욕까지 하는데, 작중 내내 욕 한 번 못하고 바른 말만 하던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서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느낌이기에 더 절절하게 와닿는다는 반응이 많다.[44] 6회 흥화진 전투에서 보였던 복선대로 화살을 잔뜩 맞고 사망한 연출을 보여준다.[45] 참고로 이 눈은 인공 눈이 아니라 양규의 최후 장면을 찍는 도중 실제로 내린 눈이다. 전사 장면을 찍은 뒤, 이 눈을 보고 양규 역의 지승현 배우와 제작진들이 "양규 장군이 보고 가셔서 그런 거 같다."라고 평했다. 물론 내린 눈의 양이 적어서 인공 눈을 일부 뿌리기도 했다.[46] 이 장면 이전에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백성들과 포로에서 구출된 딸을 만나 기뻐하는 아버지와 대비된다. 또한 정성이 양규의 죽음을 슬퍼할 때 물망초 꽃이 클로즈업된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물망초의 꽃말이 "나를 잊지 마세요."임을 감안하면 여요전쟁을 통해 발생한 모든 비극과 그런 비극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호국공신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제작진의 의도로 보인다.[47] 정3품에 해당하는 상서공부의 최고위직. 지금으로 치면 농업부, 자원부, 상공부, 과학부, 건설부, 노동부의 장관을 모두 겸한다고 보면 된다.[48] 작중에서는 더 깊게 언급되진 않았으나 전쟁 직후 현종은 아들 양대춘을 교서랑에 임명하고, 또한 손수 교서를 지어 양규 처에게 남편의 공적을 찬사하고 그녀에게 매년 도곡(벼) 백 석을 평생 지급토록 하였다. 8년 뒤인 1019년(귀주 대첩으로 사실상 여요전쟁이 마무리가 된 해)에는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을 하사하고, 1024년에는 두 사람에게 '삼한후벽상공신'의 칭호를 하사하여 공신으로 예우했다.[49] 실제 양규 열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얼마 뒤에 거란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김숙흥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중략)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를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중략) 현종 10년(1019)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려주고, 15년 다시 두 사람에게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문종이 즉위하여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대중상부(大中祥符, 송 眞宗의 연호) 3년(1010)에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도순검사 양규·부지휘 김숙흥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야 할 것이니,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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