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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1:13:31

야자와 에이키치

야자와 에이키치
矢沢永吉 | Eikichi Yazawa
파일:yazawaeikichi.jp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949년 9월 14일 ([age(1949-09-14)]세)
일본 히로시마시
국적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연합군 점령하 일본|
연합군 점령하 일본
]] →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가수
레이블 가루루 레코드

1. 개요2. 약력
2.1. 초기2.2. 캐롤, 전성기2.3. 솔로, 해외진출2.4. 두번째 해외진출과 90년대.2.5. 2000년대, 현재까지.
3. 음악적인 평가4. 사건사고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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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가수. 1949년 9월 14일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출생. 양아치, 폭주족 계열 서브컬처의 대부분을 정립한 전설적인 뮤지션이다. 일본 록을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끌어올린 인물 중 하나로 일본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 통한다.[1]

2. 약력

2.1. 초기

히로시마 출신으로 매우 암울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 중 어머니는 유년기에 집을 나가버렸고[2] 원폭 피폭자인 아버지는 소학교 저학년 때 사망하고 나서는 천애고아 신세로 친척집을 전전하다 친할머니 슬하에서 빈곤하게 자랐다. 중학생 시절 라디오에서 비틀즈를 처음 접했고, 벤쳐스의 히로시마 공연에 가게 되는 경험을 토대로 프로 뮤지션으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히로시마에서 도쿄까지 막차 야간열차로 상경하지만 당시에 도쿄역으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비틀즈가 항구도시인 리버풀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같은 항구도시인 요코하마에서 시작해보자는 포부를 가지고 중간에 내려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자그마한 단칸방을 얻어 레스토랑 서빙이나 폐지 수집, 용접공 등의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뮤지션으로의 초기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야자와는 '비틀즈의 음반을 내는 회사'라는 이유로 도시바 EMI에 고교 시절부터 작곡한 자작곡인 I Love you OK의 데모테이프를 제출했지만 '한 물 갔다'며 거절당했고 소니 뮤직에도 데모테이프를 제출하지만 역시 불합격하는 시련을 겪었다. 결국 솔로로서 한계를 느낀 그는 몇몇 밴드를 거쳐 1971년 야마토라는 밴드를 결성해 카마타, 요코스카를 비롯한 요코하마 일대의 라이브하우스나 클럽에서 공연하며 의욕적으로 활동했고 야마토의 멤버 그대로 프로 데뷔를 꿈꿨지만 로큰롤보다 포크, 디스코로 흘러가는 시대의 트렌드 변화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1972년 4월, 다시 혼자가 된 야자와는 가와사키역 근방 악기점에 스스로 작성한 밴드 구인광고를 붙였다.

2.2. 캐롤, 전성기

그렇게 벽보를 보고 전화한 인원 중에는 후에 절친한 친구이자 애증의 관계가 되기도 하는 문제의 인물 조니 오오쿠라[3]가 있었다. 베이스 겸 보컬인 야자와를 중심으로 리듬 기타에 조니 오오쿠라, 리드 기타 우치우미 토시카즈, 드러머 유우 오카자키의 4인조로 구성된 밴드인 캐롤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우치다 유야의 프로듀스에 힘입어 필립스와 계약하고 프로 데뷔, 이런저런 사고와 가쉽 속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일본 음악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고 구성원간의 갈등으로 3년 후 1975년 4월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해산했다. 수용인원이 겨우 2500명이 될까말까한 히비야 야외음악당에 7천명이 넘게 밀집하는 해산 라이브 이후 야자와 에이키치는 솔로 가수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3. 솔로, 해외진출


그의 출세작 시간이여 멈춰라(時間よ止まれ)[4]

과거 고배를 마시게 했던 소니 뮤직으로 이적한 야자와는 캐롤 시절의 스탭들과 결별하고 LA 현지에서 해외 스탭들과 함께 레코딩한 솔로앨범 1집의 타이틀이자 솔로 첫 싱글인 I Love you OK를 발표했다. 캐롤 시절의 로커빌리나 간단한 록큰롤, 양아치 이미지와는 달리 다분히 대중적인 노선의 곡이라 캐롤 시절의 팬들이 거의 다 떨어져나갔지만 다시 의기투합한 야마토 시절의 벗들인 작사가 아이자와 유키오, 키하라 도시오의 지원에 힘입어 서서히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초기의 저조했던 라이브 동원력은 점점 회복되어 이듬해인 1976년 캐롤 해산라이브를 진행했던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다시 강행한 콘서트의 대흥행 이후 일본 록 아티스트 중에서도 솔로 아티스트 최초로 일본 무도관 단독 공연을 강행, 콘서트 투어 중 발매한 2번째 앨범인 A Day로 기세를 이어나가며 1977년 한 해 내내 전국 투어를 돌게 되었다. 이 전국 투어는 엄청나게 흥행했고 역시 투어 도중 발매한 3번째 앨범은 오리콘 2위의 호성적을 기록했다.[5] 다음해인 1978년 역시 그의 역작 Goldrush[6] 수록곡이자 CM송으로 제공한 곡인 시간이여 멈춰라(時間よ止まれ)가 싱글로 발매되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4번째 앨범이 오리콘 1위에 등극하는 폭발력에 힘입어 또다시 전국 투어를 실시하고, 첫 자서전이 1백만 부 이상 판매되어 사회현상으로까지 거론되는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록 뮤지션 최초의 가수부문 재산순위 1위를 기록하는 초대박을 치며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70년대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한 야자와 에이키치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첫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개하고 워너 뮤직으로 이적하며 해외진출의 포석을 닦기 시작했다. 단신으로 미국행에 오른 야자와는 데이비드 게펜 산하의 어사일럼 레코드와 계약하고 9월에 첫 해외 앨범인 YAZAWA를 전세계 발매했다. 비록 신통치 않은 2천 장 남짓한 판매량에 그쳤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주로 LA를 활동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음해엔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유명 록 그룹인 두비 브라더스 멤버들의 프로듀스를 거친 두번째 해외 앨범 YAZAWA It 's Just Rock'n Roll을 미국에 발매하고 싱글인 ROCKIN' MY HEART가 빌보드지 선정 추천 10곡으로 선정되며 이름을 알렸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첫 해외 진출을 마무리했다. 사실상 실패로 마무리된 첫 해외 진출 성과와 달리 일본에서는 꾸준히 Yes my love나 misty등의 싱글을 내며 오리콘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다시금 의욕적인 국내 활동을 재개한 야자와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LOUDNESS, 사노 모토하루, 오프 코스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일본 대표로 공연하고 1987년 오랜만에 해외판 앨범인 Flash in JAPAN을 발표했다.

2.4. 두번째 해외진출과 90년대.

FLASH IN JAPAN 앨범은 미국에서만 발매한 앨범으로 5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인세만 1천만엔에 육박하는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수익분배를 둘러싼 레이블과의 불화로 인하여 워너에서 도시바 EMI로 레이블을 이적하고 일본 전국투어를 재개, 이것으로 미국진출을 끝맺었다. FLASH IN JAPAN 앨범은 다른 해외판 앨범과 달리 끝내 일본 미발매로 남게 되었다.

레이블 이적 후 80년대를 지나 90년대 내내 안방 호랑이로만 남을 것 같던 야자와는 꾸준한 오리콘 차트인을 목표로 원숙기로 향해가던 중 97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추도 20주기 기념공연인 song and visions에 아시아 대표로 선정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본 조비, 로버트 파머, 로드 스튜어트와 협연했다. 이 공연은 전 세계 60개국에 생중계되었는데 야자와가 커버한 Don't Be Cruel은 8만 관중 앞에서 존재감을 제대로 발산하며 로드 스튜어트의 극찬을 받고, 같이 월드 투어를 돌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았다.[7] Yes.E로 콘서트 투어를 재개한 야자와는 VOW WOW의 기타리스트 야마모토 쿄지를 투어 세션으로 기용하며 연일 투어는 호황을 맞았다.

2.5. 2000년대, 현재까지.

완벽하게 콘서트형 뮤지션으로 각성한 야자와 에이키치는 2000년에 첫 미국 투어를 시작했고 그 후로도 계속 콘서트 투어 위주의 일정을 소화해내며 섬머 소닉이나 Rock in japan, ap bank fes 등의 거대 록 페스티벌이나 홍백가합전(서프라이즈 출연)에 가끔씩 얼굴을 드러내면서 일본 음악계에서 고참 록 뮤지션이자 성공한 솔로 아티스트로 자기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2019년 역시 나이 7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록 페스티벌인 E.YAZAWA SPECIAL EVENT "ONE NIGHT SHOW 2019를 치바 마쿠하리 멧세에서 개최하기도 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3. 음악적인 평가

야자와가 데뷔하던 시절은 벤쳐스비틀즈가 한참 일본점령을 시작하던 서프 음악과 팝의 시기였고, 서프의 시기가 지나갈 때 즈음 일본 자체 그룹인 더 스파이더즈,잭스, 더 타이거즈[8]를 위시한 GS붐이 잠깐 일다가 미소라 히바리하시 유키오를 비롯한 성인음악, 엔카를 메인스트림으로 두고 청년음악의 흐름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나 핫피 엔도, RC 석세션을 위시한 포크로 트렌드가 변하던 시기였다. 그 시점에서 펑크와 로커빌리로 다시 스타일을 일신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캐롤은 핫피 엔도가 짧고 굵은 전성기 이후 종막으로 단명한 이후의 갭을 로큰롤로 다시 채웠다. 이는 일본 음악계의 메인스트림이 서서히 록으로 기울게 하는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80년대의 폭풍 슬럼프BOØWY, 블루 하츠등의 걸출한 밴드들의 전성기로 이어지는 1차 밴드 붐의 도화선이 된다. 밴드 내적으로 이래저래 말이 많았고 사생활적으로는 가쉽지를 여러 번 장식했지만 캐롤은 엄청난 전설과 일화들을 남기며 일본 록의 역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해산한 후에도 다운타운 부기우기 밴드키시단 등의 폭주족, 츳파리 이미지와 무수한 후배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속된 말로 캐롤 이전에 일본에서 로큰롤으로 인정받는 밴드는 없었다.

야자와 에이키치 개인 솔로는 대부분 블루스나 팝 위주의 성인음악이 주 장르지만 록적인 느낌을 버리지 않은 작업물인 止まらないHa〜Ha[9][10] 같은 명곡도 존재하며 時間よ止まれ같은 블루스 필의 메가 히트 싱글도 엄청난 대박을 터트린 바 있다. 명실공히 데뷔 50주년을 넘긴 일본 록의 원로이자 대중음악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

4. 사건사고

데뷔한지 50년이 되어가는 원로급 가수인 만큼 다양한 사건사고가 많긴 한데, 대부분의 사건사고가 본인은 결백하나 주변인이나 아예 타인의 영향인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인생에 굴곡이 심했지만 모두 이겨내고 현존하는 일본 록의 큰형님 대우를 받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78년 후지산 근방 야마나카 호수에 스튜디오가 딸린 자가주택을 지은 적이 있는데 아사히TV에서 사전협의 없이 무단으로 '야자와 에이키치의 대 저택 발견!'이라는 식으로 소개되고 지도까지 게재되어 연일 열성팬들이 연이어 방문하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 결국 현지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아내는 노이로제에 자녀들이 등교거부를 하는 정도로 일이 커져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 빈 집에 일부 극성 팬들이 무단침입해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거나 내부에서 모닥불을 피우거나 하는 식으로 일이 커져 1982년 결국 자택을 철거했다.
1978년 12월, 연초에 구입한 포르쉐 911 scs가 도난당하고 다음해 범인이 잡혀 되찾았다.
1982년 매니저와 이벤트업체 관계자들이 과거 5년간 계약서를 위조하여 콘서트 대금과 기타 수익을 착취한 것이 판명되어 배상금과 반성문을 받고 해고했다.
홋카이도파친코 광고에서 야자와 에이키치를 따라한 인물이 등장하는 CM이 방영되자 초상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해당 파친코 회사와 CM제작 회사에 3억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긴 소송 끝에 CM에 대해 사죄하고 1994년 소송이 마무리되었다. 합의조건으로 '초상권을 소중히 합시다'라는 전면광고를 CM제작사, 파친코 회사, 야자와 모두 비용을 부담해 주요 신문들에 게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쿠와타 케이스케 항목의 여담 참고. 이 역시도 대선배인데도 피해자 입장이지만 '뭐 피차 크리에이터간에 그거 갖고 그러냐, 난 신경 안쓴다 걱정하지 마라. 그것보다 쿠와타 너는 괜찮냐?' 라며 후배를 걱정하는 진정한 대인이자 군자다운 반응을 보였다.
1998년 호주에 투자목적으로 거액을 유치해 26층짜리 빌딩으로 구성된 음악학교를 포함한 녹음 스튜디오를 세우려고 했지만, 소속 사무소의 가족과도 같았던 직원들이 공문서 위조,횡령을 포함한 사기를 치고 도주해 순식간에 35억엔의 빚이 생겼다. 한때 잘나갔다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았고 콘서트나 라이브하우스까지 채권추심을 하러 빚쟁이들이 따라오는 사태에 본인도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 야자와의 아내 왈 '야자와가 못 갚을 금액은 아니다'라는 격려로 마음을 고쳐먹고 라이브와 투어를 돌고 드라마와 CM에 출연해나가며 6년만에 35억엔을 모두 갚았다. 이는 호주 범죄 역사상 두번째로 큰 피해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 대신 도쿄 아카사카의 도심에 5층짜리 스튜디오를 지어 음악적 기반으로 삼았다.
산토리 BOSS커피의 CM에서 '여름이니까 어디 가자는 소리는 그만하자, 어딜 가도 여름이잖냐'라는 멘트를 했다가 나가노 현의 료칸 주인들이 일제히 항의를 했고 CM은 멘트가 변경되었다.
2007년 야자와 본인의 모노마네 탤런트인 이시야마 류다이가 '야자와 에이키치가 유일하게 인정한 모노마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자기 홈페이지에 기재하고 자신의 경영하는 식당을 선전하며 야자와의 지명도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시야마 본인의 재무상태 악화로 행사장의 대관료 체납이나 자동차 판매의 명의 문제 등 이런저런 문제의 불만 호소가 전혀 상관없는 야자와 에이키치의 사무소까지 미치자 참다 못한 야자와가 이시야마를 상대로 1000만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시야마는 적반하장 격으로 야자와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며 맞소송으로 야자와에게 1억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야자와는 대인배스럽게도 '정성을 담아 사과하면 넘어가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시야마 측에서는 소송을 취하하고 사죄하는 문서와 50만엔을 배상하는 조건으로 야자와가 직접 만나 격려하는 것을 끝으로 화해했다. 하지만 후에 야자와가 개인 홈페이지에서 '이시야마가 저 화해에 납득하지 않는 것 같고 합의에 의한 해결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다는 코멘트를 지 홈페이지에 게시했는데 법원이라거나 사법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라고 적자 이에 대해 이시야마 측은 '납득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게시한 적이 없다'고 반박, 악성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2009년 야자와에게 3000만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2010년 3월 기각되었다. 당연하게도 현재는 이시야마가 잇파츠야 이하로 이름마저 잊혀진 데 비해, 야자와는 일본 록 씬의 큰형님으로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5. 여담



[1] 게다가 두 사람의 생년월도 같다.[2] 1972년에 카와사키에서 다시 어머니와 재회하고 모든 것을 용서했지만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뇌일혈로 사망했다. 야자와 본인은 어머니의 사망을 모르고 있다가 어머니 사후 2개월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화로 들었다고 한다.[3] 1952-2014. 본명은 오오쿠라 요이치이며 한국계 일본인. 한국 이름은 박운환.[4] 훗날 용과 같이 3에서 시마부쿠로 리키야의 사망씬 BGM으로 사용된다.[5] 하지만 야자와에게 큰 힘이 되어준 할머니가 투어 도중 사망하는 비극을 겪어 지금까지도 이때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한다.[6]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 5위에 선정되는 등 당대 가요상을 대변하는 걸작으로 불린다.[7] 단, 아직까진 실제로 투어를 돌지는 않았다. 서로 언급만 꾸준히 하는 사이[8] 사와다 켄지가 이 그룹에서 뉴비 시절을 보냈다.[9] 가수 박상민이 리메이크한 적이 있다[10] 2023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으로 데뷔한 야자와 코타의 등장곡으로 사용되고 있다.[11] 주장의 근거가 1978년에 발행한 관보에 실린 히로시마에서 1949년생 한국국적자가 일본국적을 취득하면서 야자와 에이키치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삼고 있는데, 동명이인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1978에는 이미 야자와 에이키치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절인데다가 관보 내용에 의하면 해당 귀화자가 원래부터 사용하던 통명이 아닌 귀화시 개명한 이름인지라 히로시마 출신 유명인이고 하니 거기서 이름을 따서 지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물론 완전한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있다.[12] 야자와가 한창 일본 내 전국투어를 돌던 70년대에 돌던 소문인데 현재도 일부 찌라시들은 그의 재일 루머에 대해 종종 보도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오래 전에 이 루머 문제로 편집 분쟁이 벌어진 적이 있고 출처없는 루머를 사실처럼 본문에 기재하는것은 금지로 결론이 났기 때문에 해당 서술은 문서 훼손으로 간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