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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9:00:01

Apple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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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oldcomputers.net/appleiii.jpg
▲ 모니터 사진에 있는 사람은 윈스턴 처칠. 옆에 있는 프린터는 Apple의 열전사 프린터인 Apple Silentype.

Apple III

1. 개요2. 상세
2.1. 하드웨어 사양2.2. 운영 체제2.3. 실패 원인
3. 결과와 영향

1. 개요

Apple III는 1980년 5월 19일 Apple II 후속 제품으로 기획된 컴퓨터였다. 밑에 서술한 이유로 실패한 제품이 되었고, 출시 4년도 안 된 1984년 4월 고작 12만여 대만 팔린 채 단종되었다.

2. 상세

1977년에 발매한 Apple II는 처음에 가정용으로 팔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최초의 스프레드시트였던 VisiCalc 덕에 Apple II 판매의 대부분이 소규모 기업들이 사무 목적으로 구매하고 있었음을 Apple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Apple은 Apple II를 가정 및 교육용 컴퓨터로 포지셔닝하면서, 본격적인 사무 컴퓨터를 목적으로 Apple III를 개발하기로 했다. Apple III는 1978년 말부터 웬델 샌더 박사의 감독 아래 1억 달러의 비용을 들여 1년 남짓 개발해 만들어진 컴퓨터였다. 개발 코드명은 사라였는데, 웬델 샌더 박사 딸의 이름을 갖고 온 것이었다. Apple III는 스티브 워즈니악이 설계에 참여하지 않은 최초의 Apple 컴퓨터였다.

Apple은 Apple III를 띄우기 위해 심지어 디즈니랜드까지 빌려 제품 발표회를 열었다. 가격이 $4,340에서 $7,800였는데, 경쟁 비즈니스 컴퓨터 가격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심지어 광고에서도 이 컴퓨터를 챌린저 우주왕복선에서 사용한다고 광고하기도 했다.[1]

2.1. 하드웨어 사양

2.2. 운영 체제

Apple III는 Apple II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Apple DOS보다 진화된 Apple SOS(Sophisticated Operating System)[4]가 탑재되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Applesoft BASIC을 Apple III용으로 이식했다. 이를 Apple 비즈니스 BASIC이라 이름 붙였으며, Applesoft BASIC에 비해 배정밀도(64 비트) 연산을 지원했다.

Apple III와 동시에 등장했으나, 1982년 11월 1일 버전 1.3을 마지막으로 개발을 종료했다.

2.3. 실패 원인

Apple III는 발매 후 여러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Apple III는 기존의 Apple II 소프트웨어들을 제한된 기능으로 구동하게 만들어졌고 로직 보드는 결함이 있었으며 발열 관리는 엉망이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Apple III에 100% 하드웨어 결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Apple III는 원래 Apple II와 하위 호환이 가능했다. 그러나 Apple은 Apple III로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Apple II로의 직접 하위 호환을 막았다. Apple DOS로 부팅해야만 Apple II 소프트웨어 동작이 가능했고, 그마저도 Apple II Plus 모드로만 동작하도록 기능을 제한하는 특수칩을 집어넣었다. 이에 대해 스티브 워즈니악은 "일부 Apple II의 기능을 못 쓰게 하기 위해 칩을 넣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Apple III는 사무용이고 Apple II는 취미와 가정용이라는 올바른 이미지를 갖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를 조용히 작동시키기 위해서 냉각팬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이 때문에 냉각팬 없이 열 설계를 해야 했는데 본체가 방열판 역할을 하도록 설계해야 했고, 이 때문에 케이스를 비싼 알루미늄 합금 주조로 만들어야 했다. 이는 Apple III의 가격이 비싸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ple은 Apple III의 발열 관리에 실패했다. Apple III의 문제는 케이스를 작게 만들어 내부를 빽빽하게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내부의 공기 흐름 상태가 나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만 만들어놨을 뿐 방열을 도와주는 냉각팬조차 없었던 것이었다.[5] 당시의 컴퓨터 잡지, Incider의 기사에 따르면 "열은 항상 Apple III의 가공할 만한 적이다."라고 평가했으며, BYTE는 "칩이 소켓 밖으로 돌아다닌다."고도 보고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Apple III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 댄 코트키인데, Apple III를 들어올린 다음 바닥에 내려치는 것이다. 실제로 Apple은 당시 Apple III 고객들에게 6인치(약 15 cm) 정도 Apple III의 앞부분을 들어올린 후 떨어뜨리면 칩을 다시 꽂을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6]

Apple III 케이스 디자이너 스티브 매녹은 케이스의 결함이 아닌, 미세 배선 기술이었던 '파인라인' 기술 설계한 기판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작은 케이스에 보드를 넣기 위해 도입한 기술이었다. 보드를 작게 설계해 대량 생산하는 기술이었는데 문제는 그 당시엔 성숙하지 않은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제품들이 단락 문제를 겪어 수리해야 했으며, 결국 로직 보드를 다시 설계한 제품으로 교환해 줘야 했다고 말했다.[7]

또한 실시간 시계에도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모델을 개정해 부품을 제거해 버렸고, 추가 보드로 만들어 동작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1983년 10월, 연방 통신 위원회(FCC)에서 Apple III의 주파수 간섭 문제로 규정을 위반했다며 판매 중단, 재설계 및 재설계한 컴퓨터의 모델명을 바꿀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1983년 12월에 등장한 것이 Apple III Plus였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Apple III에 대한 악명으로 자자해진 상태인데다 IBM PCIBM PC XT의 잇다른 성공으로 마케팅이 더 이상 어려워진 상태였다.

당시 Apple의 제품 마케팅 관리자이면서 임원이었던 테일러 폴만은 Apple III 실패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There was way too short a time frame in manufacturing and development. When the decision was made to announce, there were only three Apple IIIs in existence, and they were all wire-wrapped boards.

The case of the Apple III had long since been set in concrete, so they had a certain size logic board to fit the circuits on ... They went to three different outside houses and nobody could get a layout that would fit on the board.

They used the smallest line circuit boards that could be used. They ran about 1,000 of these boards as preproduction units to give to the dealers as demonstration units. They really didn't work ... Apple swapped out the boards. The problem was, at this point there were other problems, things like chips that didn't fit. There were a million problems that you would normally take care of when you do your preproduction and pilot run. Basically, customers were shipped the pilot run.

개발과 제조에 들인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발표하기로 결정했을 때 Apple III는 단지 3개 밖에 없었고, 모두 전선으로 연결해 포장한 것들이었습니다.

Apple III의 케이스는 오래전부터 확정했고, 그래서 딱 맞는 크기의 로직 보드에 회로를 구성해야 했습니다. 서로 다른 세 군데의 외주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꼭 맞는 보드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가능한 가장 가는 배선으로 회로를 작게 구성해 보드를 만들었습니다. 이 중 약 1천개의 사전 생산 보드를 딜러들에게 시연용 유닛으로 제공했습니다. 실제로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Apple은 보드를 교환했습니다. 문제는, 그 시점에서 소켓에 딱 맞지 않는 칩과 같은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전 생산과 시험 양산 할 때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수없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사실상 고객들에게 시험 양산한 것들을 배송한 것입니다.
- 인포월드(Infoworld) 1984년 12월 10일 41쪽, 질문과 답변: 테일러 폴만(Q&A: Taylor Pohlman)

3. 결과와 영향

결국 Apple은 Apple III Plus 발매 4개월만인 1984년 4월 24일에 Apple III 전 제품군의 단종을 결정했다. 스티브 잡스는 이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손실을 입었다고 말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Apple III가 실패한 주된 이유로 이전의 엔지니어들이 추진했던 컴퓨터 프로젝트들과 달리 이 컴퓨터가 Apple의 마케팅 부서에서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pple III의 실패로 기업 시장으로의 진출은 좌절되고 사무실은 PC와 MS-DOS가 점령하게 되었다.

Apple III는 실패해서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았다. Apple III의 운영 체제였던 Apple SOS의 코드는 훗날 Apple II의 운영 체제로 등장한 ProDOS에 재활용했으며, Apple III를 위해 발매한 주변 기기인 Apple ProFile은 오랫동안 Macintosh의 파일 시스템이 된 HFS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안타깝게도 이 기종이 망해버리는 것은 물론 챌린저 우주왕복선도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2] MOS 테크놀로지 6502에 비해 뱅크 전환 컨트롤러가 내장되어 있어, 최대 256 KB의 RAM까지 접근 가능.[3] 서드파티에서 제공하는 메모리 업그레이드 키트를 꽂으면 최대 512 KB까지도 가능.[4] 공식 발음은 애플 소스이다.[5] 당시 PC들은 발열이 적어 냉각팬 없이 구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Apple II나 1982년에 나온 코모도어 64 경우에는 CPU와 전원 공급 장치에 냉각팬이 없었다. MSX 및 대다수 8비트 컴퓨터도 마찬가지. 그러니 케이스 설계만 잘 했어도 발열 관리에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여담으로 그 이듬해인 1983년에 나온 IBM PC XT와 그 호환 컴퓨터의 경우 발열 제어를 위해 이 때부터 전원 공급 장치에 팬을 달아 컴퓨터를 냉각시켰는데 아직 CPU 및 케이스 팬 같은 것은 추가로 없어도 되었다.[6] 여담으로 30여년 뒤 엉뚱한 다른 대기업 제품의 문제 해결법으로 5인치(12.7cm) 높이에서 떨어뜨리기를 제시해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7] 공식 발표는 이렇지만 사실 PCB 설계 및 생산 기술 부족일 가능성도 높다. 1980년대가 되면 Apple의 기판 등의 상당수는 미국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하청으로 생산되었다. 동 시기 발매된 PC98 등 수많은 일본제 PC들의 경우 훨씬 더 빡빡한 기판 및 케이스 구성임에도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