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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11 03:30:06

암피폴리스

파일:암피폴리스.jpg
바실리카와 내성 일대
파일:Λέων Αμφίπολης_Lyon of Amfipolis (1).jpg
랜드마크인 기원전 4세기에 조성된 사자상

1. 개요2. 역사
2.1. 아테네의 북방 거점2.2. 마케도니아 왕국의 주요 항구2.3. 로마 제국 시기
3. 볼거리

1. 개요

그리스어 Ἀμφίπολις / Αμφίπολη
영어 Amphipolis

그리스 동북부의 유적. 암피폴리, 엠피폴리스로도 표기된다. 테살로니카에서 동북쪽으로 80km, 카발라에서 서남쪽으로 45km, 세레스에서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스투루마 강 하류의 협곡에 위치한다. 펠라, 필리피와 함께 고대 마케도니아 남부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고 아테네의 위성 도시였다. 기원전 4세기부터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주요 항구 도시로써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을 준비한 곳이었다.

2. 역사

파일:σερρες.jpg

금, 은, 목재 등의 자원이 풍부하고 스키타이산 곡물[1] 운송로 상에 위치한 트라키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들어 여러 차례 거점 마련을 시도했다. 기원전 497년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가 마케도니아 해안에 도시 건설을 시도했으나 아케메네스 제국의 엄포로 실패했고,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 장군 키몬이 기원전 476년 에이온에 기지를 세워 군사 거점 및 무역항으로 삼았다. 기원전 465년 아테네 인들은 첫 식민도시로 9개 길이란 뜻인 엔나-호도이를 세웠으나 1만여 이주민들 뒤이은 오드뤼사이 왕국의 공격으로 학살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437년 아테네 장군 하그논이 같은 장소에 재차 도시를 건설하며 7.5km에 달하는 성벽을 세웠다.

2.1. 아테네의 북방 거점

새 도시는 '도시 주위'란 뜻인 암피폴리스로 명명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스트리몬 강이 도시 양쪽으로 흐르는 것에서 유래했다 기록했고, 후대의 수다에서는 주민들이 도시 주변에 주로 거주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암피폴리스는 아테네의 중요 북방 거점이 되어 곧 규모와 부가 증가했고, 뒤이어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가 도시를 점령했고, 트라키아 방면 사령관이던 투키디데스는 암피폴리스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20여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한편 바로 반격에 나선 아테네가 30척의 함대와 함께 파견한 클레온은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브라시다스와 격돌했으나 패배했다. 소크라테스도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두 장군 모두 전사했다.

승전보를 들은 후에야 숨을 거둔 브라시다스는 암피폴리스 근교의 성대한 무덤에 안장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브라시다스에 조경을 표하고 도시의 창건자로 여기며 매년 희생제와 경기를 열어 추모했다. 다만 스파르타는 기존의 동맹이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아테네 측으로 이탈하자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를 체결해 암피폴리스를 반환했다. 이후 암피폴리스는 델로스 동맹원이 아닌 독립적인 폴리스로써 아테네의 동맹으로 남아 더욱 번영했다. 기원전 414년 암피폴리스는 아테네와의 동맹을 끊었지만, 뒤이어 아테네 장군 에베티온이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디카스 2세의 지원 하에 도시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다만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 후 암피폴리스는 마케도니아에 복속했다가, 기원전 375년에야 다시 아테네에 양도되었다.

2.2. 마케도니아 왕국의 주요 항구

이후 아테네는 오드뤼사이 왕국과 함께 암피폴리스를 공동 통치했는데, 기원전 357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피드나의 지배권과 교환하자고 제안하자 승낙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암피폴리스와 피드나는 물론, 필리피까지 전부 정복해버렸다. 이에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가 암피폴리스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후 도시는 3세기 가량 마케도니아 령으로 남았다. 다만 바로 직할령이 되지는 않았고, 한동안 기존의 달력과 동전을 쓰는 등 자치를 누렸으나 점차 필리포스 2세가 임명한 총독들에 의해 마케도니아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시기 암피폴리스는 그의 해군 기지였고, 즉위 후 첫 전투인 하이모스 산 전투를 위해 준비한 곳이었다. 트라키아 평정 후 단행한 동방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암피폴리스 출신의 네아르코스, 안드로스테네스, 라오메돈에게 해군 지휘를 맡겼다.[2]

알렉산드로스 3세는 트라키아 원정과 동방 원정 모두 암피폴리스에서 준비했고, 후자의 경우 해군과 육군 모두 집결했다. 암피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거금인 1천 5백 탈란트를 들여 크고 화려한 신전을 세운 6개의 도시 중 하나였다. 대왕의 사후 벌어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기원전 317년, 폴리페르콘과 연합한 태후 올림피아스필리포스 3세와 에우리디케 2세 부부, 카산드로스의 동생 니카토르를 사로잡은 후 암피폴리스에 2개월간 감금했다가 처형했다. 그러자 반격에 나선 카산드로스는 이듬해 올림피아스를 처형했고, 록사나알렉산드로스 4세 모자를 사로잡아 암피폴리스에 감금했다가 6년 후 자신이 즉위하기 위해 암살했다. 기원전 3세기 안티고노스 왕조 시기 암피폴리스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도 펠라와 왕립 도로로 연결되었다.

그 무렵 성벽이 보강되었고, 김나지움 (체육관)과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고급 저택들이 세워졌다. 기원전 175년경 트라키아의 사페아 족이 도시를 공격했으나 마케도니아 군주 페르세우스가 격퇴했다. 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피드나 전투에서의 패전 후 페르세우스는 펠라에서도 버림받자 암피폴리스로 향했다. 그는 로마 장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고, 주민들이 떠날 것을 요구하자 사모트라케 섬으로 도피했다가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했고, 기원전 167년, 로마 원로원이 파견한 10명의 레가투스들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암피폴리스 선언을 통해 마케도니아를 4개의 메리다 (자치공화국)들로 분할했다. 그중 암피폴리스 메리다가 제일 세력이 컸다.

2.3. 로마 제국 시기

로마의 지배가 이어지던 기원전 150년, 안드리스코스란 자가 페르세우스의 아들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암피폴리스와 테살로니카에 두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모아 로마군에 연패를 안겼고,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해 필리포스 6세를 칭했다. 하지만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2차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마케도니아 지역을 평정해 속주로 삼았다. (4차 마케도니아 전쟁) 전후 암피폴리스는 에그나티아 가도가 놓였고, 여전히 큰 도시로 남았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 트라키아 인들의 반란 시에 암피폴리스는 크게 파괴되었고, 교통의 요지인 덕에 중소 도시로 남을 수는 있었다. 서기 50년경 기독교의 사도 바울과 실라스가 도시를 지나가며 현지의 에피쿠로스 및 스토파 학파 철학자들을 개종시키려 노력하기도 했다.

3. 볼거리

파일:암피폴리스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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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테네는 흑해 연안의 곡물에 의존했다[2] 그중 후자의 무덤은 암피폴리스의 사자상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