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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4 22:05:56

하이모스 산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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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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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과 트라키아인이 트라키아의 하이모스 산에서 맞붙은 전투. 알렉산드로스 3세가 국왕으로 오른 뒤 처음으로 치른 전투다.


2. 배경

기원전 336년 10월, 필리포스 2세가 아내 올림피아스의 남동생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와 올림피아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마케도니아 왕국의 고대 수도인 베르기나로 갔다가 경호원인 오레스테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살해당했다. 암살 배후에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있다는 주장이 고대부터 강하게 제기되었지만, 이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는 없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뒤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사촌형 아민타스 4세를 처형하고, 아버지가 새로 들인 후처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일가족을 처형했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가 죽고 20살의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과거 필리포스 2세의 '권고'에 따라 가입했던 코린토스 동맹을 탈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측근들은 나라가 아직 혼란스러우니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기병 3,000명만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한다.

테살리아는 도시로 가는 길목에 군대를 배치하고서는 전령을 보내서 자신들이 어떻게할지 고민할 동안 기다리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화가 나서 테살리아가 마케도니아의 영토이며,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왕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일단은 그들의 뜻에 따라서 기다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서는 기병대와 함께 골짜기의 우회로를 찾아내어 빠르게 기동한 다음에 테살리아 군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포위당한 테살리아인들은 바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남하를 시작하자 아테네, 테베, 아르고스 등 여러 폴리스는 이에 놀라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에 회의를 소집한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지도자)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335년 봄, 트라키아의 트리발리인과 일리리아인이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에 앞서 이 두 부족을 철저히 제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암피폴리스를 출발해 필리피와 오르벨루스 산을 왼쪽에 끼고 '자유 트라키아'라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후 네스토스 강을 건너 열흘 뒤에 트라키아인들이 신성시하는 하이모스 산으로 진입했다.

3. 전개

마케도니아군이 좁은 골짜기를 따라 나지막하게 솟아 오른 산비탈에 이르렀을 때, 토착민들과 자유 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군대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고지를 점거하고 있었고, 방어용 울타리로 사용할 수레를 잔뜩 모아뒀다. 마케도니아군이 산비탈을 기어오를 때, 이 수레들을 산비탈 아래로 굴려서 밀집 대형을 유지하던 적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작정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우회로가 없었기에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고지를 공략할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는 중장보병대에 수레가 비탈로 굴러 떨어질 때 공간 여유가 있는 병사들은 옆으로 몸을 피해 길을 터주고, 좁은 길목에 갇힌 병사들은 가능한 한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땅에 엎드린 후 몸 위에 방패를 겹쳐서 덮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수레들을 방패 위로 굴림으로서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 작전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여유 공간이 있는 병사들은 대열 사이로 수레가 지나가도록 했고, 나머지는 머리 위에 방패벽을 세워 수레가 그 위로 지나가게 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수레로 인한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우측면에 위치한 궁수들을 본대 앞으로 이동시킨 뒤 트라키아인들을 향해 화살을 퍼붓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헤타이로이와 아그리아인들을 이끌고 좌익으로 이동했다. 궁수들이 트라키아인들의 공격을 저지하자, 적군 가까이 접근한 보병대가 뒤이어 돌격했고, 트라키아인들은 무기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별다른 대응도 못해보고 달아났다.

4. 결과

이리하여 적병 1,500명이 전사했지만, 나머지는 지형을 잘 알았고 몸놀림이 날렵했기 때문에 잡히지 않았다. 반면 병사들을 따라갔던 여성과 아이들은 모두 포획됐고, 장비와 비축된 물자 역시 마케도니아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전리품을 해안 마을로 옮겨 리사니아스와 필로타스에게 맡긴 뒤, 하이모스 산맥을 넘어 트리발리의 땅으로 진군해 리기누스 강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접한 트리발리의 왕 시르무스는 여자와 아이들은 다뉴브 강에 있는 페우체 섬으로 피신시킨 뒤 강변의 으슥한 숲에서 마케도니아군과 맞붙었으나 패한 뒤 페우체 섬으로 후퇴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뉴브 강 위에 떠 있는 페우체 섬 공방전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