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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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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십자군의 프리드리히 2세(좌) 협상하는 카밀(우)
본명 알 카밀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아랍어 الكامل
영어 Al Kamil

1. 개요2. 생애
2.1. 리처드 1세와의 인연2.2. 즉위 이전2.3. 5차 십자군에 맞서서
2.3.1. 만수라 전투
2.4. 술탄과 황제2.5. 6차 십자군과 협상
2.5.1. 시리아 문제2.5.2. 예루살렘 대여
2.6. 연이은 전란
2.6.1. 1차 다마스쿠스 원정2.6.2. 자지라 원정2.6.3. 아이유브-셀주크 전쟁2.6.4. 2차 다마스쿠스 원정
2.6.4.1. 죽음과 후계자
3. 가족 관계4. 기타5. 참고문헌

1. 개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으로, 1218년부터 1238년까지 재위하였다. 알 아딜의 장남이자 살라흐 앗 딘의 조카로서 5차, 6차 십자군에 맞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동시에 살라딘 급으로 대인배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카밀은 알 아딜의 장자로서 부왕이 사망하자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십자군을 처리한 후에는 시리아의 군주들인 친척들을 제압하고 호라즘 왕조 및 룸 셀주크 등 외세를 격퇴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망하고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와 시리아로 분열하여 쇠퇴하게 된다.

2. 생애

1177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알 카밀은 아랍어로 '완전 무결한 자'라는 뜻이다.

2.1. 리처드 1세와의 인연

리처드는 자신의 매부가 될 뻔한 알 아딜의 아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날 리처드는 협상에 동행한 소년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소년은 순순히 따랐다. 리처드는 칼을 빼 소년의 어깨 위에 올리며 말했다. "너를 기사에 봉하노라." 소년은 웃었다고 한다. 이 소년이 나중에 이슬람 술탄이 된 알 카밀이다. 이에 대한 1차 사료는 1200년경에 라틴어로 쓰여진 Itinerarium Regis Ricardi(리처드 왕의 여행기)이다. 이 책에 의하면 리처드는 아버지인 알 아딜을 따라 리처드를 방문한 11살의 알 카밀에게 기사작위와 함께 작위수여에 쓰인 기사검을 선물로 주었고, 알 카밀은 무척 기뻐했다고 나온다.[1]

2.2. 즉위 이전

파일:Каир_крепость_цитадель_Kair_Fortress_Citadel_-_panoramio_(1).jpg
이집트 총독 시절 알 카밀이 세운 시타델 동쪽 요새. 그 외에도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와 해자를 설치하는 등 도시 방어에 힘썼다.

부왕 알 아딜은 본래 요르단 일부의 봉토만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범한 지략가였고 1196년 7월 살라딘의 장남 알 아프달로부터 다마스쿠스를 취하였다. 1198년 11월, 살라딘의 차남인 이집트 술탄 알 아지즈가 낙마 사고로 요절하자 그의 어린 아들 알 만수르가 술탄이 되었다. 이에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알 아프달이 유배지에서 탈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다. (1199년) 당시 아르투크 왕조의 수도 마르딘을 포위하고 있던 알 아딜은 카밀을 남겨두고 황급히 회군하였다. 포위를 이어나가도록 남겨진 카밀은 아이유브 왕조의 자지라 평정을 원치 않았던 장기 왕조의 구원병에 패배하여 함락이 임박한 도시를 두고 떠났다. 다만 승리한 아르투크, 장기 조가 서로 싸우기 시작하자 그 틈에 카밀은 하란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200년, 알 만수르를 폐위하고 이집트를 얻은 알 아딜은 장남 카밀을 그 총독으로 임명하였다.[2]

알 카밀은 1202년 부왕의 명으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에 나섰다. 비록 1198년 7월 십자군과 평화 협정이 맺어졌지만 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십자군 수송을 책임지는 베네치아와 협상하도록 알 아딜이 지시한 것이었다. 알 카밀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알렉산드리아와 다미에타 등 델타 지대의 항구 이용권을 제공하였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그 대신 베네치아는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1204년의 4차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와의 계약을 어기지 않으려는 베네치아의 의지대로 레반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던 것이다.[3] 한편 이집트 총독으로서 알 카밀은 살라딘 때 시작한 시타델 축성을 완성하고 개선광장 (히드포룸), 말 시장 등을 세웠다.

술탄 알 아딜은 다시 1204년과 1212년, 십자군과 각각 6년과 5년의 휴전을 맺었다. 그리고 1218년 4월, 휴전이 끝나자마자 5차 십자군이 이집트로 향하였다. 당시 다마스쿠스에 있던 고령의 알 아딜은 아들 카밀에게 '이집트의 관문' 다미에타 방어를 맡겼다. 다미에타는 강력한 요새도시였다. 3중성벽과 28개의 탑 외에도 도시의 동쪽과 남쪽은 늪지대에 의해 보호받았고 북쪽과 서쪽 역시 나일강의 여러 지류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십자군이 다가오자 수비대는 강 건너편의 외곽 요새와 도시 사이에 굵은 쇠사슬을 설치하여 적함의 통행을 막았다. 다미에타 함락을 위해선 수륙 양면의 공격이 필요했고 따라서 다미에타의 운명은 외곽 요새에 달려있었다.

2.3. 5차 십자군에 맞서서

파일:SS2478244.jpg파일:SaintFrancisAssisiWithAlKamil15thCentury.jpg
다미에타 공방전 술탄과 만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218년 8월 25일, 큰 배 두 척을 묶어 수상 공성탑을 만든 십자군은 기어코 외곽 요새를 함락시켰다. (8월 25일) 비슷한 시기에 역병이 퍼져 많은 십자군과 무슬림이 죽었다.[4] 비보를 들은 알 아딜은 병사하였고 이에 알 카밀이 이집트 술탄이 되었다.[5] (1218년 8월 31일) 우선적으로 그는 다미에타 인근 수로에 배를 가라앉혀 육상 포위군과 합류하려 했던 십자군 해군의 진입을 막았다. 9월 중순, 교황의 특사 펠라기우스의 도착과 함께 십자군은 기어이 옛 수로를 이용해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6] 10월 9일, 이집트 군대가 십자군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장 드 브리엔의 반격으로 선발대가 괴멸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십자군은 다미에타 외곽의 나일 강에 수상 요새를 만들어 공격에 박차를 가했으나 11월 말엽 폭풍으로 성벽 인근에 좌초되고 말았다. 이에 수비군이 그를 공격하여 점령해버렸고, 수상 요새를 지키던 십자군은 전멸하였다.[7]

1218-19년 겨울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1219년 2월, 후방의 카이로에서 이마드 앗 딘 이븐 알 마쉬투브가 이끄는 하카리 쿠르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밀의 또다른 동생이자 유순한 성격의 알 파이즈 이브라힘을 옹립하였고 이에 카밀은 25일 다미에타 방어선을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아들 알 마수드의 영지인 예멘으로 향할까 고민하던 카밀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시리아를 통치하는 동생 이사가 지원군을 보내준 것이었다. 그 도움으로 겨우 반란을 진압한 카밀은 8월 29일 십자군의 무질서한 습격[8]을 괴멸시켰고 반격을 개시하였다. 장 드 브리엔과 템플러, 병원 기사단원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가까스로 전멸을 면하였다. 이후 임시 휴전이 성사되었고, 다사다난했던 치세의 첫해를 넘긴 술탄은 십자군과의 평화 협상에 나섰다.

카밀은 십자군에게 다미에타와 성도 예루살렘을 바꾸자며 운을 띄웠고, 10월 말엽에는 예루살렘에 베들레헴, 나사렛을 더하고 성십자가 반환 및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 등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실현되었다면 이는 3차 십자군의 결과를 훨씬 능가하는 성과였다. 실제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과 프랑스, 독일의 기사들은 그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템플러 등의 기사단원들은 세 도시들은 무슬림들에게 쉽게 빼앗길 것이라며 거절하였고 펠라기우스 추기경 등의 이탈리아인들은 이집트 정복이 목전이라며 김칫국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9] 술탄이 오죽하면 저런 제의를 할까, 즉 그가 수세에 몰렸다는 증거라는 것이다.[10]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이에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십자군의 내분만 더 커진 셈이다.

파일:sultan-and-the-saint-film-map-5th-crusade-egypt-1024x398.jpg
미래의 엘 만수라로 후퇴한 알 카밀

1219년 가을, 나일 강이 범람한 후 퍼진 기아와 질병 때문에 다미에타는 생지옥이 되었다. 술탄은 자신이 보낸 식량마저 11월 3일 십자군에게 빼앗기자 다미에타를 포기하고 카이로 방면으로 병력을 소개하였다. 한편 도시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십자군은 식량을 빼앗은지 이틀 후에 다미에타로 향하였다. 저항 없이 입성한 그들이 마주한 것은 폐허 그 자체였다. 포위 이전 6만의 시민이 살던 도시에는 몰골이 앙상한 수천의 시민들만이 숨만 붙은 채로 널부러져 있을뿐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가 교회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장 드 브리엔[11]과 대립하였는데, 장이 회군해버린다고 협박하자 주장을 거두었다.[12] 다미에타 함락에 대한 보복인지 시리아의 이사는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여 카이사레아를 약탈하였다. (1219년 말)

1220년 2월 2일, 정화 축일에 펠라기우스는 추기경은 기존 다미에타 마스지드 (모스크)를 성모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한편 1219년 가을 장 드 브리엔의 장인이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 레온 1세가 두 딸만을 남긴채 사망하였는데 유언으로 막내딸 이사벨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이에 장녀 리타와 결혼한 장 드 브리엔은 그녀 혹은 둘의 아들인 장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반발하였고 1220년 2월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장을 레오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1220년 부활절 무렵 장 드 브리엔은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아 십자군을 이탈, 아크레로 돌아왔다.[13] 하지만 킬리키아로 떠나기도 전에 아내 리타가 사망하였고[14] 몇 주 만에 아들 장까지 죽었다. 이에 교황은 안티오크 공작이자 레온 1세의 종손인 레몽 루펜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봉하곤 장 드 브리엔에게 더이상 처가의 상속권을 탐내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1221년 레몽 루펜 역시 펠라기우스의 허락으로 십자군을 이탈해 킬리키아로 향하였다. 그는 타르수스를 기반으로 아다나까지 점령하며 아르메니아 왕을 자칭했으나 결국 1222년 아르메니아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레온 1세의 어린 딸 이사벨이 아르메니아 왕으로 재위할 수 있었다.

한편 1220년 여름 이집트 함대는 키프로스 인근에서 라틴 함대를 기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움켜쥔 알 카밀은 휴전을 30년 연장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십자군은 프리드리히 2세를 기다리며 요지부동이었다. 1220년 11월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른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를 선발대로 파견하며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독일군의 지휘를 맡겼다. 마침내 1221년 5월, 루트비히는 바덴 변경백 헤르만 5세와 더불어 다미에타로 향하였다. 알 엔보로르 (프리드리히)의 참전 소문을 들은 알 카밀은 재차 케라크와 몽레알 성을 제외한 기존 예루살렘 왕국 영토를 내어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하였지만 역시 거절되었다. (1221년 6월) 그리고 독일 십자군이 다미에타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2.3.1. 만수라 전투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하자 전략회의가 열렸고 루트비히는 나일 강의 범람 전에 카이로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6월 29일,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나와 강변에 진영을 설치하였고 7월 6일에 펠라기우스는 3일간의 금식을 명하였다.[15] 자금난으로 이집트로의 복귀를 늦추던 장 드 브리엔도 교황의 압박으로 결국 합류하였다. 7월 17일 십자군은 다미에타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파라스쿠르에 집결하였다. 그곳에서 십자군은 이집트 군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사상자 없이 막아내었다. 7월 19일, 술탄은 남하하는 십자군에 경기병대를 보내 근접전을 피하고 계속 화살을 퍼붓게 하여 교란시키고자 하였다. 십자군이 견뎌내자 다음날 더 많은 기병들이 공격해 왔으나 십자군은 소수의 사상자만을 내었다. 21일, 이집트 군대는 후퇴하였고 그 과정에서 십자군의 경로 상에 위치한 마을들을 불태웠다.

청야전술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버려진 마을들에서 식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장 드 브리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진격을 지속하였다. 십자군이 카이로까지 향할 것이라는 소문에 시민들이 피난을 준비하는 소동까지 있어 술탄이 군대를 동원하여 제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카밀은 동생 이사와 무사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전자는 십자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들과 다미에타 사이에 주둔하였고 후자는 그들과 카이로 사이에 주둔하였다. 술탄이 반격을 준비함과 동시에, 이방인인 십자군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나일 강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8월 중순, 십자군은 다미에타와 카이로의 중간 지점까지 도달하였으나 이미 지면이 질퍽해져 기사들은 행군을 포기하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겨우 겨우 왔던 길의 절반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카밀은 둑을 무너뜨리라는 명령을 하달한 상태였다. 결국 8월 26일, 십자군은 퇴로를 차단당한채 쉬림사흐 인근 진창 속에 고립되었다. 이틀 후, 펠라기우스는 마침내 협상을 제안하였다. 이후 포로 석방, 성십자가 조각의 반환 등의 조건[16] 하에 8년간의 평화가 성립되었고, 아사 직전까지 이르렀던 십자군은 술탄이 보내준 빵 덕분에 무사히 항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약속 이행을 위해 카밀의 아들 앗 살리흐가 십자군 진영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장 드 브리엔이 카이로에 인질로 남았다가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반환한 후 풀려났다. (1221년 9월 8일) 그 사이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술탄을 만나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기도 했다. 성당으로 개조된 다미에타의 모스크는 1년 반만에 원상복구되었다. 이로써 알 카밀은 첫 난관을 무사히 극복하였다. 십자군이 마침내 회군한 장소에는 '승리'를 뜻하는 도시 알 만수라가 세워졌다.

2.4. 술탄과 황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지지를 업고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독일 왕으로 즉위한 1215년과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1220년 두차례에 걸쳐 십자군 종군을 약속하였다. 애초에 예정되었던 프리드리히의 참전은 1221년 8월이었고 그는 자신의 출정 전에 바이에른 공작인 루트비히 1세에게 2천 마르크를 주어 선발대로 이집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미처 참전하기도 전에 5차 십자군은 이집트 내부로 깊숙히 들어갔다가 만수라 일대에서 항복해버렸다. 이후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와 장 드 브리엔과의 면담에서 프리드리히는 1225년 6월 종군을 약속하였다. 4년전 십자군과 알 카밀이 8년간의 평화를 맺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십자군에 별 흥미가 없었고 약속일이 다가왔음에도 프리드리히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1225년 7월, 호노리오 3세는 황제와 산 제르마노 조약을 맺어 1228년 전에 출정을 못박았다. 또한 프리드리히와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녀 욜랑드를 결혼시켜 그를 예루살렘의 왕으로 삼았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술탄은 가신인 파크르 앗 딘을 황제에게 대사로 파견하였다. 붉은 머리의 프리드리히를 만난 파크르 앗 딘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프랑크인' 황제는 한때 이슬람 문명권이던 시칠리아에서 자라난 덕분에 아랍어를 유창히 구사하였고 이슬람 문명의 우수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로마 교황을 경멸하였고 친위대 중에는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아랍 무슬림이 다수였다. 프리드리히는 종교나 민족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 및 이익 여부에 따라 행동하던 합리적인 군주였다. 따라서 파크르 앗 딘은 어렵지 않게 황제와 술탄 간의 외교적 창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철학을 논하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동물에 관심을 보이자 알 카밀은 코끼리, 낙타, 원숭이, 곰 등을 보내주었고 황제는 그 관리를 아랍인에게 맡겼다. 술탄은 또다른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 역시 십자군에 회의적이며 이를 형식적으로만 여긴다는 것을 깨닫자 안도하였다. 게다가 당시 시리아를 지배하던 동생 이사와의 사이가 틀어진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기 바라기까지 하였다. 살라딘과 리처드 때와는 달리 예루살렘은 이제 종교적 사안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1227년 5월, 마침내 프리드리히가 진지하게 십자군 종군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에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6차 십자군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3월 18일)

2.5. 6차 십자군과 협상

파일:Sixième_croisade-es_svg.png
6차 십자군의 진로

1227년 8월, 무려 4차례의 종군 서약[17] 끝에 프리드리히 2세의 6차 십자군은 이탈리아 동남쪽 끝의 브린디시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출정과 동시에 전염병이 돌았고 튜튼 기사단장 마저 출정 연기를 주장하여 항구로 회군하였다. 이를 또다른 지연책이라 판단한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9월 29일 프리드리히를 파문하였다. 9개월가량 휴식을 취한 프리드리히는 1228년 6월에 파문된 상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교황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출정하였다. 교황은 이를 도발이라 여기고 황제가 자리를 비운 1년간 시칠리아 왕국의 몰수를 주장하며 교황군을 동원해 공격하였다. 1228년 9월 7일, 프리드리히 2세는 3천의 기사들과 무슬림 친위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인 아크레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그가 지체하는 동안 정세는 급변하였다.

1227년 11월, 카밀과 경쟁하던 동생 이사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앗 나시르가 다마스쿠스를 계승하였다. 1227-28년의 겨울, 정권 교체의 틈을 타 베이루트티레의 십자군이 1192년부터 세금의 절반을 납부하는 대가로 십자군 영토 속 무슬림 도시로 남아 있었던 시돈을 향해 진군하였다. 1197년 독일 십자군에 의해 방어 시설이 파괴된 시돈에 십자군은 무혈입성 하였고 카디 (재판관)는 축출되었다. 이후 일단의 십자군은 5차 십자군 당시 이사에 의해 기습적으로 점령되며 성벽이 파괴된 카이사레아로 향하여 재차 요새화시켰다. 이에 대해 무슬림 측은 1228년 봄, 시리아의 얼마 안되는 아이유브 왕조령 항구도시인 바니야스[18]의 알 아지즈 우스만[19]이 매복을 통해 70명의 기사들을 전사시킨 것 외엔 별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2.5.1. 시리아 문제

1228년 8월, 프리드리히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알 카밀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가자 인근 텔 알 아줄에 주둔하였다. 그러곤 십자군에 맞서긴 커녕 앗 나시르의 팔레스타인 영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헤브론, 나블루스 등을 점령하였다. 그는 이후 나블루스로 진영을 옮겼다. 그곳에 이사가 지어둔 궁전은 이제 그의 거처가 되었다. 술탄에겐 십자군 보다 친조카와의 영토 분쟁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알 카밀이 북상하자 불안해진 앗 나시르는 자지라의 지배자인 숙부 무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신자르에 있던 무사는 호라즘과 룸 셀주크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군을 남겨둔 채 소수의 병력과 함께 8월 말엽 다마스쿠스로 왔다.그는 스스로 술탄과의 협상을 이끌겠다고 자청하였다.

무사는 나블루스로 아미르 급의 고관을 사절로 파견하여 '앗 나시르의 다마스쿠스 점유가 승인되길 희망하나 본인은 술탄에 반기를 들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온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신의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돕기 위해 온 것'이라는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 이에 알 카밀은 앗 나시르의 계승에 대한 승인은 거절하였으나 자신이 시리아로 출정한 것은 프랑크 인들로부터 시리아를 지키기 위함임을 강조하는 답변을 보냈다. 이후 진심을 보이고자 했는지 술탄은 나블루스를 떠나 기존 숙영지였던 텔 알 아줄로 회군하였다. 이에 무사는 '술탄이 시리아 방어를 포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마스쿠스를 떠나 알 카밀의 진영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며 다마스쿠스 문제를 논의하였다.

2.5.2. 예루살렘 대여

이러한 배경 속에서 술탄이 시리아 문제에 치중하며 십자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자 파문된 상태로 두고온 영토에 대한 걱정이 커지던 프리드리히는 초조한 마음으로 먼저 서신을 보냈다. 이로써 이탈리아에서의 황권 확립을 원하던 프리드리히와 시리아에서의 왕권 확립을 원하던 알 카밀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두 협상을 진행한 솜씨가 대단하다
나는 그대의 친구요. 이 여행을 부추긴 것도 그대이지 않았소? 지금 교황과 유럽의 왕들은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소. 내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완전히 명망을 잃을 것이오. 부디 은총을 베풀어 내가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도록 예루살렘을 넘겨주길 바라오 !

ㅡ 프리드리히 2세가 알 카밀에게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을 염두에 둔 술탄은 더이상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완충지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이 필요했고 알 카밀은 조카로부터 다마스쿠스를 빼앗기 위해 정세의 안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양측은 서신을 주고 받으며 협상하였다. 이미 8년 전 알 카밀이 제안한 조건이 있었다.
나 또한 여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몸이오. 만약 내가 예루살렘을 포기한다면 칼리파의 비난은 물론, 종교적 반발이 일어나 나의 왕위까지 위태롭게 될지도 모르오.

ㅡ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에게 특사로 파견된 파크르 앗 딘과 대책을 논하였다.
백성들은 살라흐 앗 딘이 피 한방울 없이 명예롭게 회복한 예루살렘을 포기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정이 맺어진다면...

ㅡ 파크르 앗 딘이 프리드리히 2세에게

1228년 11월 말, 프리드리히 2세는 야파를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술탄은 강력한 프랑크인의 왕에 맞설 길고도 험난한 전쟁을 준비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렇게 서로 생색을 내곤 실제 전투 없이 협상이 시작되었다. 알 카밀은 10년간의 평화를 대가로 프리드리히에게 성전산 일대를 제외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자렛 등의 도시들과 그들과 해안으로 이어지는 통로 일대도 주었다. 예루살렘의 무슬림 주민들은 따로 행정관을 선출, 재산과 종교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한 시돈, 야파, 그리고 티레 동쪽의 티브닌 (토론) 요새까지 추가로 할양되었다. 1229년 2월 18일, 이러한 내용의 협정문은 프리드리히 2세와 술탄의 대리자인 파크르 앗 딘에 의해 서명되었다. 3월 17일,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20]

2.6. 연이은 전란

두 차례의 십자군에 성공적으로 대처했음에도 내우외환은 여전했다. 우선 같은 아이유브 가문의 친족들과 시리아를 두고 대립하였고 룸 셀주크, 호라즘 왕조,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몽골 제국까지 민족과 종교를 막론하고 다양한 적들과 마주해야 했다. 특히 알 카밀은 알레포,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등으로 나눠진 시리아를 살라딘 때처럼 술탄 직할령으로 두려 하였다. 하지만 봉건제가 굳어진 시리아에서의 중앙 집권정책은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특히 예루살렘을 일시적이고 명목상이긴 하지만 외세에 넘겨준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2.6.1. 1차 다마스쿠스 원정

최근 새롭게 닥쳐온 재앙에 우리들의 가슴은 찢어질 듯 합니다. 무슬림 순례자들은 더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쿠란의 구절 또한 더이상 마드라사에게 울려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오늘보다 수치스러운 날이 또 있었단 말입니까!

ㅡ 다마스쿠스의 이맘 시브트의 연설

술탄이 예루살렘을 '무슈리킨'[21]에게 넘겨주자 각지의 무슬림들은 분개하였다. 바그다드, 모술, 알레포 등의 도시들의 사원에선 규탄 대회가 열렸고 특히 다마스쿠스에서 반발이 격화되었다. 앗 나시르는 그를 기회로 다마스쿠스의 여론을 격앙시킬 유명한 설교자들을 후원하였으며, 공개적으로 알 카밀에 대해 선전포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협상을 일임했던 숙부 무사는 이미 다마스쿠스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 풍요로움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몇달간의 협상 끝에 조카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무사는 카밀을 우위를 인정하며 다마스쿠스를 차지하고, 카밀은 팔레스타인을 점유하며, 나시르는 무사의 영토 중 에데사, 하란, 라카 일대[22]를 주어 보상한다는 내용이었다. (텔 알 아줄 조약)[23]

1229년 2월, 알 아줄 회담이 마무리 되어갈 무렵 나블루스까지 남하하여 결과를 기다리던 앗 나시르의 귀에 대략적인 회담 결과가 전해졌다. 삼촌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앗 나시르는 당연히 반발하였다. 그는 전쟁 준비를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 이에 무사 역시 그를 설득하기 위해 소수의 일행과 협상장을 나섰다. 요르단 협곡의 카스르 이븐 무민 앗 딘이란 궁전에서 양측이 마주하였고 무사는 '나는 다마스쿠스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알 카밀은 왕공들 중 가장 강력할 뿐 아니라 아이유브 왕가의 최고 권력자이며 따라서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존재이다. 또한 다마스쿠스 대신 그 신분에 맞는 새로운 영지가 주어질 것이니, 이정도면 존엄한 대우가 아니냐'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앗 나시르는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재상 이즈 앗 딘 아이베그의 일침에 강경 노선으로 복귀, 실망한 무사를 두고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공성전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앗 나시르를 도우려 했던 시리아의 여러 제후들은 한발 물러나 사태의 동향을 지켜보기로 하였고 상당수는 무사의 진영으로 향하였다. 병력이 모이자 무사는 곧바로 야심을 드러내며 다마스쿠스로 향하였고, 이로써 포위가 시작되었다. (1229년 3월) 포위군은 시내로 향하는 수자원을 장악하였으나 수비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이후 양측은 대치하였다. 한편 4월경 프리드리히와의 협상 이행을 감독하던 알 카밀은 재상 파크르 앗 딘과 하마 수복을 노리는 알 무자파르 마흐무드에게 각각 1천의 군대를 주어 파견하였다. 그리고 5월,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을 떠나 귀로에 오르자 술탄은 친히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을 넘긴 술탄에 맞서자는 여론 지지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이집트 군대와 한달간 버텼다. 공성전 동안 알 카밀은 앗 나시르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그의 모후와 보물이 있는 케라크에도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그녀가 시민들을 모아 기습하자 패배하였고 두명의 장교가 포로로 잡혀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희소식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임을 느낀 앗 나시르는 6월 14일 밤, 친히 알 카밀의 진영을 방문하여 협상 의사를 밝혔다. 이틀 후, 그는 파크르 앗 딘의 인도 하에 술탄과 마주할 수 있었고 갈릴리 호수 ~ 사해에 이르는 요르단 지역의 영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항복하였다. 협상 후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앗 나시르는 6월 25일, 성문을 열어 술탄을 맞았다. 그의 영토는 삼촌들 사이에 분할되어 다마스쿠스는 자지라 (하란)의 무사가, 팔레스타인은 술탄 알 카밀에게 넘어갔다.

여담으로 이후 앗 나시르는 끝까지 저항했던 케라크에 머물며 지하드 전사들을 모았다. 결국 10년의 휴전이 만료되고 백일이 흐른 1239년 11월,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다윗 탑에서 저항하던 십자군도 12월 7일에 항복하였다. 이슬람 세계는 환호하였고 앗 나시르는 살라딘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역시 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1243년 예루살렘 전체를 십자군에게 넘겨주었다. 심지어 성전산, 즉 하람 알 샤리프까지 포함한 전체 시가지를 말이다.

2.6.2. 자지라 원정

한편 알 카밀이 프리드리히와 서신을 주고 받던 1225년 몽골 제국에 항거하며 서쪽으로 쫓겨오던 호라즘 왕조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자지라 북부에 나타났다. 셀주크 제국 말엽 그 섭정을 지냈던 엘디귀즈 왕조를 멸한 잘랄 웃 딘은 스스로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고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한편 살라딘 때부터 아이유브 왕조의 속국이던 아르투크 왕조가 잘랄 웃 딘과 동맹하여 독립을 꾀하였다. (1230년) 이에 알 카밀은 룸 셀주크의 술탄 케이쿠바드 1세와 동맹하여 그에 맞섰고, 동생 무사로 하여금 그와 함께 하도록 하였다. 연합군은 잘랄 웃 딘에게 대패를 안겨주었고 그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포로를 석방하고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1년 후 아이유브 조에 큰 위협이었던 잘랄 웃 딘은 몽골군에게 패한 후 도망치다 사망핟다.

그러나 승리에도 불구하고 몇년간의 혼란을 거치며 무사는 아르메니아 영토를 상실하는 등 자지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1230년 카밀은 무사와 협상하여 다마스쿠스와 인접한 바알벡을 그에게 주어 시리아 남부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무사의 본거지였던 자지라를 술탄 직할령으로 두게 되었다. 1231년 3월,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무사는 이내 술탄의 초청을 받아 이집트로 향하였다. 논의 끝에 그들은 잘랄 웃딘 편으로 배신했던 디야르바크르의 아르투크 왕조를 응징하기로 결심하였다. 알 카밀은 동생이 다마스쿠스의 유지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그를 오랫동안 카이로에 잡아 두었다.

1232년 4월, 형제는 이집트를 떠나 출병하였다. 행군 도중 술탄은 케라크를 들렸고 화해의 의미로 자신의 딸 아슈라 카툰과 앗 나시르 다우드를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해 10월 5일, 아이유브 대군은 아르투크 왕조의 수도 디야르바크르를 포위하였다. 아르투크 조의 베이 알 마수드는 대군의 위세에 저항을 포기, 같은 달 18일에 항복하였다. 이후 술탄은 무사를 항복한 알 마수드와 함께 아르투크 조의 원래 수도였던 하산케이프로 파견, 역시 11월경 함락시켰다. 이로써 1차 십자군과 맞서며 성장했던 아르투크 왕조의 본가는 멸망하였고 방계 혈통이 지배하는 마르딘 왕국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알 카밀은 아들 앗 살리흐 아이유브를 하산 케이프의 총독으로 봉하고 이집트로 회군하였다.

2.6.3. 아이유브-셀주크 전쟁

한편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후 룸 셀주크와 아이유브 왕조는 동부 아나톨리아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1234년 알 카밀이 출정하여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카르푸트 (현 엘라지)를 점령하였으나 이내 셀주크 술탄 케이쿠바드 1세의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1235년, 케이쿠바드 1세는 공세로 전환하여 에데사 (샨르 우르파), 하란, 라카를 점령하였고 8월 디야르바크르 함락에 실패한 후에야 회군하였다. 다만 점령된 세 도시는 반환되지 않았고 이로써 알 카밀은 살라딘 때부터 유지되던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를 상실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이에 그해 가을, 알 카밀은 즉시 실지 회복에 나섰다. 다마스쿠스의 무사, 하마의 알 무자파르, 홈스의 알 무자히드 등이 동참하였다. 첫 공격 대상인 에데사가 함락되자 카밀은 시타델의 파괴를 명하였으며 하란 역시 곧 함락되었다. 고립된 라카 역시 탈환되자 카밀은 케이쿠바드 1세의 남하 당시 그에 동조한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하지만 마르딘에서 동남쪽으로 60km 떨어진 신자르까지 몽골군이 이르렀다는 모술 측의 첩보가 도착하였고 몽골과 대면할 것을 우려한 알 카밀은 철수하였다. (1235년 말)

2.6.4. 2차 다마스쿠스 원정

이후 몽골군의 동태를 파악하며 다마스쿠스에 머물된 술탄은 몇달이 지나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1236년 알 카밀은 자신의 사위이기도 했던 조카 앗 나시르를 의심하여 자신의 딸과 이혼하게 하기도 했다. 이에 나시르는 직접 바그다드로 향하였고 갖은 모욕 후에 술탄과 독대, 그가 보낸 특사의 도움으로 카밀에게 해명을 하여 7월경 부인과 재결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1월, 알레포의 알 아지즈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 앗 나시르 유수프가 계승하였다. 이에 대왕대비이자 카밀의 동생인 다이파 카툰 하에 섭정단이 꾸려졌는데 승인 요청을 하러 온 사절단에게 술탄은 섭정단의 주도자를 정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실 1233년 6월 바니야스의 알 아지즈가 죽었을 때도 그가 시리아의 영주임에도 알 카밀이 직접 후계자 문제를 감독하는 등 술탄의 시리아에 대한 간섭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술탄의 이러한 내정간섭적 행태와 다마스쿠스에서의 장기적인 거주[24]는 그동안 2인자의 위치에 만족해왔던 알 아슈라프 무사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무사는 술탄의 간섭에 불만을 품은 알레포 등의 시리아 영주들, 그리고 함께 싸우며 친분을 쌓은 룸 셀주크의 케이쿠바드 1세와 동맹하여 내전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해 초엽 케이쿠바드가 사망하고 본인 역시 4월경 몸져 누우며 무산되었다. 결국 8월 27일 무사는 자손 없이 사망하였고 자신의 동생 앗 살리흐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러자 알 카밀은 무사의 죽음을 계기로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이에 홈스와 알레포의 아이유브 가문들도 다마스쿠스를 돕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하였다.[25]

이스마일은 룸 셀주크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내부의 알 카밀에 우호적이라 판단되는 이들을 보스라에 가두는 등 노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홈스에게 살라미야를 돌려달라며 붉어진 하마와 홈스 간의 분쟁으로 하마의 알 무자파르가 술탄 쪽으로 이탈해버렸다. 이에 힘을 얻은 알 카밀은 케라크의 앗 나시르와 동맹을 맺고 북진, 1237년 11월 10일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다. 카밀은 남문, 나시르는 서문, 카밀의 다른 동생들은 북문을 맡았다. 포위군은 시내로 향하는 강을 막았고 공성전이 이어졌다. 이스마일은 홈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겨우 2백명만이 파견되었고 그마저도 격파되어 50명이 포위군에 포로가 되었다. 술탄은 그들을 향해 배신자라 욕하곤 곧바로 교수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후 소모전이 이어졌고 도시의 교외는 잿더미가 되었다.

12월 20일, 마침내 포위군은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특히 서문 쪽의 앗 나시르가 분전하여 수비대를 압도하였는데 시내로 진입하려던 찰나에 술탄은 파크르 앗 딘을 파견, 공격을 멈추게 하였다. 도시에 대한 약탈을 우려했거나 나시르에게 승리의 업적을 넘겨주기 싫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수비군 측의 청야전술에도 불구하고 포위가 지속되자 시내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가가 폭등하고 자원이 부족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결국 12월 말, 이스마일은 협상을 요청하였다. 그는 자진하여 바알벡의 영지로 은퇴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로써 알 카밀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다마스쿠스를 큰 피해 없이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몇달간 도시에 머물렀다.
2.6.4.1. 죽음과 후계자
하지만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지도 않은채 알 카밀은 이질에 걸렸고 3주간 투병한 끝에 1238년 3월 6일 카이로에서 사망하였다.[26] 그는 각각 다른 부인에게서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알 아딜 아부 바크르의 두 아들을 얻었다. 본래 장남인 앗 살리흐[27]가 후계자였고 1229년 다마스쿠스에 대표를 파견할 때까지도 유지되었지만 그가 폭정을 행하고 다수의 맘루크를 모은다는 소식을 들은 알 카밀은 차남 알 아딜로 세자 자리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앗 살리흐는 동북변의 영토, 즉 하산 케이프를 중심으로 한 자지라 일대가 주어졌다. 따라서 카밀의 사후 앗 살리흐와 알 아딜 2세는 각각 자지라와 이집트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미숙했던 알 아딜 2세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자 앗 살리흐가 남하하여 케라크의 앗 나시르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1240년) 알 아딜 2세는 연금되어 1245년에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4. 기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일화도 있고 십자군 포로가 대우에 감동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에게도 대인배로 유명했다.

5. 참고문헌


[1] 이 기록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라면 또 다른 사료로 6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간의 회담을 다룬 공식문서상에 '기사작위를 받은 사라센의 왕 알 카밀'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정황상 살라딘의 조카이자 이집트 대영주인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에게 작위를 줄 만한 인물은 리처드 1세밖에 없었을 것이다.[2]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보다는 시리아 중심의 왕조라는 성격이 컸다. 따라서 술탄 알 아딜은 다마스쿠스에서 통치하였다.[3] 정확히는 베네치아가 이집트를 공격한다는 4차 십자군과도 계약한 후 기존에 이집트로 향하지 않는다는 아이유브 조와의 약속을 둘 다 지킨 것[4] 포위기간 동안 약 5만의 다미에타 시민이 사망하였다고 한다[5] 그의 동생들 중 알 무아잠 이사는 시리아, 알 아슈라프 무사는 자지라를 다스렸다. 그 외에 홈스는 시르쿠의 후손들이, 알레포는 살라딘의 아들 앗 자히르 가지가, 바알벡하마는 살라딘의 동생 누르 앗 딘의 후손들이, 예멘은 살라딘의 동생 툭테긴의 후손들이 다스렸다.[6] 그러나 십자군은 펠라기우스와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 간의 지휘권 다툼으로 절호의 기회였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였다[7] 혈전 끝에 단 두 명이 살아남았는데 장 드 브리엔은 그들을 용기가 부족하다며 처형해버렸다.[8] 카밀 뿐만 아니라 장 드 브리엔 역시 벌어진 이후에 보고받았을 만큼 병사들의 우발적인 공격이었다고 한다.[9] 그 외에도 요르단 일대를 굽어보는 몽레알 요새에 대한 십자군 측 요구를 알 카밀이 거절한 것도 협상 파탄의 요인 중 하나였다고[10] 이에 대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에선 술탄의 너그러움을 그가 궁지에 몰렸다는 식으로 바라보았다고 하였다[11] 그는 다미에타의 약탈물 중 1/3을 차지했다고 한다[12] 이후 십자군은 다미에타 함락의 기세를 틈타 더 진격하기보다 원정을 약속한 프리드리히 2세를 기다렸다.[13] 1219년 자신의 왕국이 공격 받았을 때도 회군하지 않던터라 주위에서도 욕심이라고 뒷담했다고 한다. 또 펠라기우스와의 주도권 다툼에서 신물이 나서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14] 일설에 의하면 그녀가 장이 이전 아내와 낳은 딸 이사벨 2세를 독살하려 한 것을 알곤 죽도록 때려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15] 동시에 그리스도의 깃대를 맨발로 옮겨 강변에 세우도록 했는데, 강의 범람을 막아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6] 후자는 지켜지지 않았다. 성십자가 자체가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 후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라 알 카밀의 수중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슬람에게도 예수 (이사)의 성유물은 큰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했고..[17] 1215년, 1220년, 1223년, 1225년[18] 타르투스와 라타키아 사이에 위치[19] 살라흐 앗 딘의 아들 중 한명으로 알 카밀의 사촌[20] 이때 그는 바위의 돔에 들어가려던 그리스도교 사제를 혼내고 배려차 멈추었던 무아딘의 아잔이 울려퍼지도록 장려하였으며, 십자군을 돼지로 칭하는 등 무슬림 안내자들에게 큰 인상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21] 다신론자. 무슬림들이 삼위일체파 기독교도를 칭하던 말[22] 비록 충성을 맹세했지만 무사의 세력을 너무 키워주지 않기 위해 시리아와 자지라 사이에 절묘하게 그 중간 영토를 나시르에게 주어 월경지로 만들어버리려는 카밀의 계책[23] 그밖에 바이냐스의 알 아지즈는 바알벡을 받고 알 무자파르 마흐무드 1세는 이사에게 빼앗겼던 본거지 하마와 더불어 바린, 마라트 알 누만을 회복하는 대가로 홈스의 시르쿠 가문에게 살라미야를 할양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마디로 어린 앗 나시르에 대한 친척들의 분할 점령. 이렇게 시리아를 다시 분열시킴으로써 알 카밀의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는 계획. 무사 역시 전쟁이 지속되는 자지라 보다는 술탄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평화로운 다마스쿠스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했다[24]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웠다고[25] 당시 시리아의 여러 아이유브 가문 영주들은 압도적인 세력을 지닌 이집트에 대항하기 위해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다.[26] 이때 주변에 아무도 없어 다음날에야 발견되었다고..[27] 그는 잘랄 웃 딘 사후 룸 셀주크의 용병이 되었다가 케이쿠바드 1세 사후 쫓겨난 1만 2천의 호라즘 군대를 용병으로 고용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부왕 알 카밀의 허락을 구하여 그들에게 디야르 무다르에 이크타 (영지)를 하사하였다.[28] 사촌인 앗 나시르 다우드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