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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0:56:15

아비마엘 구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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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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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이후

1. 개요2. 생애3. 만행4. 평가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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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마오주의 군벌 빛나는 길의 창시자이자 지도자.

2. 생애

마누엘 루벤 아비마엘 구스만은 1934년 12월 3일에 페루 지방의 항구 도시 몰렌도에서, 부유한 상인의 사생아로 태아났다. 구스만은 철학 및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제목은 칸트의 공간 이론(The Kantian Theory of Space)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The Bourgeois Democratic State)였다. 1962년 산크리스토발데우아망가 국립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de San Cristóbal de Huamanga) 철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는 1965년 당시 부인인 아우구스타 라토레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처음 방문했다. 구스만은 1970년대 중반에 학교를 떠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구스만은 곤살로 동지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마오주의 모델, 농민 주도의 혁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을 이어간 "공산주의의 여섯 번째의 이론가"로 선언했다. 그의 정치적 선언에서 제국주의가 궁극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실패하며 향후 50~100년 안에 폐허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스만은 이 비판을 미국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 제국주의에도 적용 했는데, 그는 "사회제국주의"라고 불렀다.[1]

아비마엘 구스만을 지지하던 그룹은 페루 공산당 내에서 수 차례의 정치적 투쟁 끝에 여러 분파들과 결별한 후 빛나는 길을 설립했으며 수도 라마가 아닌, 시골 및 농촌지역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의료봉사와 야학활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주민들을 포섭해나갔다. 공산주의의 성평등이념에 따라 여성 지휘관 비율이 40-50%인 것도 큰 특징이었다.

1980년 그가 만든 빛나는 길은 추스치(Chuschi) 마을에서 투표함을 불태움으로써 페루 정부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구스만의 무장반란이 군정에 대항하여 발발한 것이 아니라 군정 종식 후 민정 이양 과정에서 발생한 점이라는 것이다. 한 때 아비마엘 구스만의 빛나는 길은 페루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1992년 후지모리 정부의 테러방지국(DIRCOTE)의 감사로 인해 구스만의 은신처가 발각되어[2]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후로 세력이 매우 줄어들었다. 그 후 구스만은 1992년 군법 재판을 받고 1993년 평화 선언을 하면서 빛나는 길 조직의 와해를 가속화시켰다. 2004년의 재심 이후, 2005년의 공판에서 테러 및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리마 폭탄 테러로 인한 2018년의 추가 재판에서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21년 9월 11일에 리마항 칼라오 해군기지 내의 최고 보안등급의 감옥 내에서 사망하였다. 후지모리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후지모리와 같은 날에 사망했다.#

3. 만행

빛나는 길은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좌파 조직, 자신들이 조직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 농민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했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와 협력(민주적 선거 투표 포함)하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영국의 가디언 지에 따르면 빛나는 길은 매우 잔인했고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가리지 않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빛나는 길에 28,000명 이상의 페루인이 살해당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빈농이었다.기사 뉴욕타임즈 등 여러 진보 성향의 해외 언론들 역시 구스만의 만행에 대해 보도하였다.

2001년 조직되어 2003년까지 활동한 진실화해위원회(Comisión de la Verdad y Reconciliación)에[3] 따르면 1983년 고지대의 루카나마르카(Lucanamarca) 마을에서 69명(여성과 어린이 포함)이 빛나는 길에 의해 고문과 살해를 당했다. 좌익 언론인 자코빈(Jacobin)에 따르면 빛나는 길의 지휘관이 루카나마르카에서 살해되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광장에 내몰아서 총살하거나 마체테로 베어 죽였다.기사

파일:250px-La_Masacre_de_Lucanamarca.png

4. 평가

한 때 페루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 혁명군의 지도자였기에 페루의 일부 원주민과 농민공동체, 빈민에 지지를 받았으나 도시민[4]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딱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해외 마오주의자들은 구스만의 이론적 공헌을 매우 고평가한다.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은 구스만이 죽자 트위터에 "우리 동포들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테러의 주모자 아비마엘 구스만이 사망했다. 테러를 규탄하는 우리의 입장은 확고하고 확고하다."라고 올렸다.[5]

5. 기타

구스만은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영향인지[6] 종교에 그다지 적대적인 편은 아니었다.

일부 카스티요 정부 관료들이 빛나는 길에 동정적이거나, 동조했던 과거가 있어 페루에서 논란이 됐다. 기사 그나마 카스티요 본인이 빛나는 길에 맞서 싸운 과거가 있는지라 논란이 희석된 편. 하지만 빛나는 길 음악의 댓글들을 보면 "자유페루의 정치인들은 이곳 출신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카스티요가 이기면 학교가 이렇게 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쟁. 인민전쟁과 곤살로 동지 만세", "곤살로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좋았다면 왜 아이디어가 아니라 폭력으로 설득을 하였나요" 등의 댓글 싸움이 펼쳐진다. # 댓글에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1] 이는 당시 마오쩌둥이 가진 소련에 대한 입장이기도 했다. 참고로 엔베르 호자 또한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 스탈린 이후 소련을 비난했다.[2] 한 기사에 따르면, 그의 은신처 내부에서 배출된 다량의 쓰레기 내부에 포함된 구스만이 앓던 병인 건선 치료제 및 몇몇 쪽지들을 발견한 것이 체포의 주된 계기였다고 한다.[3] 20세기 후반에 극심한 내란에 시달리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20세기 말부터 진실위원회(Truth commission)를 조직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었다. 페루의 진실화해위원회도 그 중 하나이다.[4] Kenney, Charles D. 2004. Fujimori's Coup and the Breakdown of Democracy in Latin America. Notre Dame, Indiana: University of Notre Dame.를 참고하면 약 15-17%의 도시민만이 동조적이었다. 2004년 당시 페루인의 3/4이 도시에 거주했다.[5] 카스티요 역시 좌익 성향이긴 하나 노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빛나는 길마오주의와 다르고, 카스티요 본인도 빛나는 길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6] 마오쩌둥은 종교인을 배척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군중을 찾아 가자마자 바로 ‘우리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믿는 신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종교를 반대하고 선전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