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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3:55:07

슈바르체 카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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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4.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과 전쟁 후5. 대표 인물6. 대중매체에서7. 관련 문서

1. 개요

Schwarze Kapelle

한국어로 해석하면 검은 관현악단. 영어로는 Black Orchestra라고 불린다. 나치 독일 당시 반(反)히틀러 성향의 우익 세력들을 게슈타포가 한데 묶어서 부르던 명칭이다. 반면, 공산당 지지자들을 포함한 좌익 세력은 "로테 카펠레"[1]로 불렀다.

2. 특징

주로 기독교계 인사, 구 제2제국 귀족, 심지어 독일 국방군 고위 인사들까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대체적으로 프로이센의 토지귀족인 융커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빌헬름 2세의 복위를 바라는 왕당파에 가까웠고, 왕정복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보수적인 강경우익 성향이 다분했다. 하지만 전통귀족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노동자와 룸펜 등 하층민들의 지지에 기반한 신흥세력 나치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고, 노골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대공황 이후 급속도로 세를 늘려가는 좌익세력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반공을 내건 나치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특히 융커 출신의 군 고위장성들은 재무장을 위해서 히틀러를 이용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우익의 어릿광대, 반공과 재무장을 위해서 자신들이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카드 정도로 여겼던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 후에 빠르게 경제위기를 해결하고 재무장과 영토확장 등으로 독일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자, 오랫동안 누려왔던 자신들의 기득권이 신흥세력 나치에게 완전히 밀려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대중선동에 기반한 나치즘에 대한 회의감과 특히 그리고 나치당이 공개적으로 행하는 국방군 융커 계열 인사들에 대한 견제에 대해서 상당히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2]파리 - 베를린 - 스몰렌스크를 잇는 활동 비선을 중심으로 저항 운동을 주도하거나 쿠데타 음모를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7•20 음모", "라슈텐베르크 암살 음모 사건" 등으로도 불리어지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이들이 한 일.

3.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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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20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인해 짙어진 나치 독일의 패색이 드리워지자 오랫동안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반감심을 품고 있었던 몇몇 독일 국방군아프베어의 고위 간부들이 일으킨 암살 계획이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슈바르체 카펠레 일원들이 일으킨 해당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4.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과 전쟁 후

몰살. 독일에선 그야말로 무적의 인간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게슈타포는 이 사건을 빌미로 슈바르체 카펠레와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으면 곧바로 잡아갔다. 게슈타포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무려 7,000명 이상이나 되는 일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슈바르체 카펠레의 일원들은 1944년 8월부터 1945년 2월까지의 기간 동안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인민재판소로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고 이들의 결말은 대체적으로 참혹했다. 이러한 '순교'는 이후 국방군 무오설의 주요 레퍼런스 중 하나로 쓰였으며, 특히 그 중 가장 중심이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전후 독일 연방군, 즉 서독군의 롤모델로 쓰였다.

그러나 시민 사회, 특히 점령국이나 유대인들은 이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그들에게 슈바르체 카펠레는 그저 히틀러의 뒤를 이을 독일 제3제국 지배자 후보들이었고, 그들이 점령한 지역을 쉽게 놔줄 거라고 보지도 않았다.
"큰 뉴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의 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 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 텐데요."

이미 슈바르체 카펠레 단원들 대다수는 '히틀러와 나치당 세력들을 죽이고 세운 비파시즘 정권을 통해 서방 연합군 세력과 평화협정을 맺고 소련을 견제한다'란 낙관론에 빠져있었고, 자신들의 독일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것을 원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즉 이들이 원한 것은 융커로 상징되는 전통 귀족, 기득권 세력이 지배하는 나치 이전의 독일제국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상당수는 민간인 학살 같은 독일국방군의 수많은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이러한 실상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프로이센 융커 세력들이 위주가 되어 형성된 슈바르체 카펠레를 현대 독일 연방군의 모범으로 치켜세우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5. 대표 인물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Rote Kapelle, "붉은 관현악단"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Red Orchestra"라고 불리었다. 장검의 밤 이후로 세력은 확실히 줄어들었으나 이후 독소전쟁 당시 소련 NKVD에 협력하여 소련군 장성들이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의 동부 전선의 주요 전투에서 독일군의 배치 상황을 알려주는 등의 큰 활약을 했다. 대체로 느슨한 공산주의자들의 연합망으로 운영되었으며 독일에만 활동 범위가 한정된 슈바르체 카펠레와 달리 독일의 점령국 모두에 흩뿌려져있었기 때문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일이 적었다.[2]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이후에도 계속 국방군 고위층을 장악하고 있는 융커출신 장성들의 쿠데타를 우려해서, 이들에게 대항할만한 평민 출신 장교들을 집중육성하였다. 이렇게 키워진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롬멜.[3] 왕당파들 중 일부는 빌헬름 2세의 아들인 빌헬름 3세(원역사의 빌헬름 황태자)를 불러온 후 신정부 내에서 왕정복고 목적의 2차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빌헬름 3세와 시민들과 나머지 검은 오케스트라 가담 세력이 모두 쿠데타에 반발하는 바람에 삼일천하에 그치게 된다. 이후 왕정복고와 구 독일제국 복원을 목적으로 2차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신정부 내에서 숙청되며, 주인공이 자기 아버지를 다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의 빌헬름 3세와 타협하면서 신정부는 왕권이 대단히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채택한다.[4] 검은 오케스트라에 가입한 일부 국방군 장교 등 산하 준군사조직을 동원해 무기를 들고 히틀러의 사무실로 직접 쳐들어가 총격을 갈겨서 벌집을 만들어주는 방식의 암살을 시도했다. 총통 관저에서 총격 소리가 나고 아수라장이 된 바깥의 소리를 들은 히틀러가 대강 상황을 알아차리고 비밀통로로 탈출하던 도중 오케스트라 인원들에게 발각되어 한스 위르겐 폰 블루멘탈 백작이 총을 여러 발 쏴 맞혀 치명상을 입혔다.[5] 블루멘탈 백작에게 총격을 당한 후 10일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고, 혼수상태에서 벗어나도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부상이었으며, 차도를 보여 의식이 돌아왔을 때도 테오도어 모렐이 진통 목적의 마약을 투여했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정도였다.[6] 당연히 슈바르체 카펠레 측에서는 단번에 독일 전부를 장악하려고 시도는 했는데, 원래 역사처럼 허술한 계획과 부족한 사전작업 때문에 실패했다. 그나마 주인공이 계획적으로 자유주의자, 비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독일 사회민주당원, 라인란트 측 반나치 파벌, 고백교회(반나치 개신교 지하교회) 등 여러 세력을 끌어들여 혼합세력을 구성해 빅 텐트를 구축하는 등 사전작업을 한 덕분에 독일 서부에서나마 군권을 장악하고 신정부를 세우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7] 특히 리히트호펜은 당장 쓸 수 있는 군용기들과 전투조종사들, 수송기를 모조리 끌고 와서 신정부로 전향했기에 신정부 측이 제공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무서운 사나이 오토 스코르체니까지 데려온 건 덤.[8] 당연하지만 괴벨스 등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제대로 처벌한 다음 등용하지 않았고, 나치당 소속 중 비범죄자나 내전 도중 전향자만 등용하였다.[9] 다만 반나치 진영의 입장에서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히틀러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괴링이 불안한 나치 정권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측과 밀약을 맺었다. 그 결과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대부분이 전투도 거의 없이 연합군 측으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