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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9 22:03:47

송기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여산 송씨[1]
출생 1890년 8월 27일
충청도 서천군 남부면 옥남리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옥남리)
사망 1950년 3월 26일 (향년 59세)
학력 군산 영명학교 (졸업)
종교 기독교 (개신교)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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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송삼석모나미 대표이사 사장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

1890년 8월 27일 충청도 서천군 남부면 옥남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옥남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현 군산시 구암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했다.

영명학교 졸업 후 군산 구암병원(群山龜巖病院)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공부해 독학으로 약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한편, 경기도 경성부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김병수(金炳洙)는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 200장을 들고 고향에 내려가 곧 있을 3.1 운동에 호응해 만세시위를 일으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병수는 당일 기차를 타고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에 갔고, 스승인 박연세(朴淵世)를 만나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위 사실을 알렸다. 이어 박연세로부터 영명학교 및 구암교회 부속 멜볼딘여학교의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이때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烈)·김수영(金洙榮)과 구암교회 부속 멜볼딘여학교 교사 고석주 등이 자리를 같이 했고, 이들은 군산부옥구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오는 3월 6일 군산부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런 다음 이들은 같은 교회 소속의 구암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무원들을 만나 만세시위에 동참하도록 권유했는데, 이때 송기주 또한 동료들과 함께 권유를 받아들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구암교회 신자들과 영명학교 및 멜볼딘여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를 권유하고, 영명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해 비밀리에 기미독립선언서 7천여매를 인쇄하고 학생들을 동원해 손수 태극기를 제작해 군산부내 각 교회 등에 배포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당시 만세시위에 미리 호응한 인물들
-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교사들
박연세(朴淵世)·이두열(李斗烈)·김수영(金洙榮)·김윤실(金允實)·송정헌(宋正憲)[2]·고석주(高錫柱)·이동욱(李東旭)
- 군산 구암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김창윤(金昌允)·이진규(李眞奎)[3]·유한종(劉漢鍾)[4]·이준명(李俊明)·임병률(林秉律)[5]·이재근(李在根)·홍의일(洪義日)·양성도(楊成道)[6]·송기주(宋基周)·김준실(金俊實)·안경태(安敬泰) 등
- 군산부 거주 예수교 신자
김성은(金聖恩)·이(李)◯◯·홍종옥(洪鍾玉)·유희순(兪熙淳)[7]·임종우(林鍾祐) 등
- 영명학교 학생
양기철·전세종·김영후(金永厚)·송기옥(宋基玉)·이도준·홍천경(洪天敬)[8]·고준상·유복섭(劉福燮)·오한길(吳漢吉)·강규언(姜圭彦)·강인성(姜仁聲) 등

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 5일, 거사계획이 사전에 이미 발각되어 시위 주도자들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이에 영명학교 교사 김윤실(金允實)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회의가 끝난 뒤에 즉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회의가 끝나자 영명학교 학생들이 앞장서고 멜볼딘여학교의 여학생들이 대열에 합류했으며, 옥구군에서 군산부내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했다. 시위 도중에 기독교 신도들과 행진을 하며 거쳐 가는 마을의 주민들, 군산공립보통학교(현 군산중앙초등학교) 학생들, 그리고 군산부민들까지 참여해 시위대는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대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미독립선언서와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배부해주었다.

시위대는 군산부 명치정1정목(현 군산시 중앙로1가)[9] 군산경찰서에까지 이르러 전날 체포된 교사·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황한 일본 경찰들은 익산군 익산면 이리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지원 요청을 했고, 이에 출동해서야 가까스로 시위가 진압되어 주도자들을 검속하고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송기주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징역 6개월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까지 했지만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7월 2일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예배당[10]에서 개최된 구암기독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서기에 선출되었다.[11] 또한 1922년 9월 15일에는 군산개복동기독청년회에서 영신학원(永信學院) 창립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자, 의연금을 기부했다. 1923년 2월 18일에는 구암리 예배당의 집사선출되는 등 종교 및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2년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군 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으로 이주해 '송약방(宋藥房)'을 개업해 생업으로 하던 중 1950년 3월 26일 사망했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 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원윤공파(元尹公派) 28세 기(基) 항렬.[2]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宋憲으로 기재되어 있다.[3]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李鎭圭로 기재되어 있다.[4]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류한용(柳漢鎔)으로 기재되어 있다.[5]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임병렬(林秉烈)로 기재되어 있다.[6]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成道로 기재되어 있다.[7] 김희순(金熙淳)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27일 작성된 박연세 공판시말서(지방법원등사분)에 새롭게 나타난다.[8] 1919년 3월 6일 작성된 박연세의 신문조서에는 홍원경(洪元敬)으로 기재되어 있고, 군산 구암병원 사무원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9] #[10] 예전부터 쓰던 예배당은 군산시청에서 매입하여 군산3.1운동역사영상관으로 개관했다.[11] 박연세는 부회장, 김창윤은 회계 및 사교부장에 각각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