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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대학교/남산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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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서울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
서울藝術大學校
Seoul Institute of the Arts
파일:서울예술대학교 엠블럼.svg
<colbgcolor=#a40e17> 표어 예술의 서울, 서울예술대학교
창학이념 우리 민족 예술혼의 현재화 ∙ 세계화
교훈 성실 · 협동 · 창의
상징 불꽃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분류 사립대학, 3/4년제 전문대학
지역 서울특별시
개교 1962년 4월 12일 ([age(1962-04-12)]주년)
드라마센터[1]
설립자 동랑 유치진[2]
총장 제14대 유태균[3]
이사장 제8대 임상혁
법인 학교법인 동랑예술원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 138
,(예장동 8-19),[4]
웹사이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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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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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산캠퍼스 개요2. 시설
2.1. 드라마센터
2.1.1. 드라마센터 특징2.1.2. 무대현황
2.2. 예술관2.3. 심재순관2.4. 문화예술산업융합센터
3. 교통
3.1. 지하철3.2. 버스3.3. 자차3.4. 주차
4. 설립자 유치진친일 행적 및 드라마센터 사유화 과정
4.1. 드라마센터 사유화 및 친일 행적

[clearfix]

1. 남산캠퍼스 개요

파일:동랑센터.jpg
서울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 전경
파일:예대 남산안산.gif
서울예술대학교 이원화캠퍼스[5]
서울특별시 명동(서울) 부근 예장동 남산 자락에 1960년 유치진 선생이 미국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재원 지원을 받아 착공하여 1962년 준공되었다. 설계는 김중업(金重業)이 맡았다.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로 출발하였으며 1962년 직업 배우와 연극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설립한 부설 한국연극아카데미는 1974년 서울예술전문학교를 거쳐 1998년에는 서울예술대학(현 서울예술대학교)으로 발전하였다.

남산 드라마센터와 그 부지에 세워진 건물들은 서울예술대학교의 본 캠퍼스였다. 하지만 4년제 대학교 개편 및 부지 증축을 위하여 안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게 되었고, 남아있던 남산 캠퍼스는 부캠퍼스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워 이를 동랑예술센터라고 명명하게 된다. 주로 예술공연 및 창작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교가 안산시의 적극적인 지원[당시]으로 2001년 이전하면서, 현재는 표면상 안산 캠퍼스가 메인 캠퍼스로 보이나, 사업자등록은 남산캠퍼스가 본점으로 되어 있고 안산캠의 경우에는 지점으로 등록되어있다. 그 전 시대인 20세기 학번 동문들은 지금의 남산 캠퍼스(드라마센터 및 부설 2동)를 비롯해 예장동, 명동 인근의 빌딩 이곳저곳에 매입되거나 임대한 강의실을 오가며 강의를 들었다. 이후 2010년대 초반에 강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본교에 학사학위과정이 도입된 초기에 강의실이 모자라 주 2~4종의 수업을 남산 드라마센터와 맞붙은 부설동에서 진행한 바 있다.[2011년~2012년까지]

남산캠퍼스는 이원화 캠퍼스의 목적에 따라 워크숍, 공연, 전시, 영화제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일부 비정규교과목의 강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본교 산하 동랑레퍼토리극단과 서울예대 학우들의 공연도 이따금 있는 편이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안산에 비해선 외부 인사나 관람객의 유치하기 좋은 측면이 있어 학생들의 졸업작품 공연 및 전시전은 주로 이곳에서 하며 공연, 전시할 공간이 충분하다. 가끔 특수 강연 목적으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2. 시설

2.1. 드라마센터

1962년 유치진(柳致眞)이 설립한 극장으로 설계는 김중업(金重業)이 맡았다.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로 출발한 이 극장은 유치진을 소장으로 사무국장 신태민(申泰旼), 극장장 이해랑(李海浪), 아카데미원장 여석기(呂石基)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1962년 4월 12일 셰익스피어 작·여석기 역·유치진 연출「햄릿」으로 개관공연을 가졌다.

2.1.1. 드라마센터 특징

1962년 건립된 국내 최초의 현대식 연극 전용 극장으로, 현재까지 그 모습을 보존, 유지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극장의 개관과 함께 부설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한국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술대학교)를 시작으로 1974년 서울예술전문대학으로 발전되어 학생들의 실습전용무대로 사용되다, 2001년 캠퍼스를 안산으로 이전하면서 2009년 9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은 연극인들이 한국현대연극을, 꽃피웠던 의미 있는 공간이자 꿈이 무대인 드라마센터의 연극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과 호흡하고자 서울예술대학교로부터 임대계약을 통해 재개관되었다.
2020년을 기준 서울시에서 임대계약을 종료하고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한 뒤, 운영권은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2.1.2. 무대현황

연극의 중흥과 후진양성을 위한 배움터를 겸해 설계한 것으로, 330㎡(100평)의 주무대와 99㎡(30평)의 원형무대 ·뒷무대 ·옆무대로 되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방무대(open stage)'로 꾸민 점이 특징이다. 원형무대는 그리스 야외극장의 무대를 본뜬 것이며 주무대는 근대극의 무대 형식을 가지고 있다.

2.2. 예술관

과거 남산시절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이외에도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이론, 교양 수업 등이 주로 이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드라마센터 건물 뒤에 바짝 붙어 있어 멀리서 보면 한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2.3. 심재순관

남산 캠퍼스의 드라마센터 뒤에 위치한 건물로, 구체적인 정보는 밝혀진 바가 없다.

2.4. 문화예술산업융합센터

심재순관과 붙어 있는 건물로 학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도 예술관처럼 옆 건물과 붙어 있어 한 건물처럼 보이나 서로 다른 건물이다.

3. 교통

3.1. 지하철

서울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는 명동거리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교통이 혼잡하며 남산 초입의 비탈진 경사로 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남산캠퍼스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명동역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이외에 충무로역에서 걸어오거나 서울 버스 01번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방법 1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공사 경인건설본부가 바로 앞에 있다. 이 건물을 우측에 끼고 직진하면 '기억의 길'이라는 경사진 커브길이 나오며, 오르다 보면 건너편에 남산예장공원(2021년 개장)이 나온다. 조금 더 오르다 보면 남산예장공원 너머로 서울소방재난본부 건물과 남산타워가 보일 것이다. 그럼 대한적십자 서울사무소를 우측에 끼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된다. 남산예장공원을 지날 때 즈음이면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세븐일레븐엘비스 프레슬리 서울기념관이 보일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또한 입구에는 서울예대 동랑센터 드라마센터라는 이름의 안내표가 있기도 하다.

방법 2

이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이며 과거 많은 서울예전 학생들이 이 길을 등학교 길로 이용했다.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우측에 한국전력공사 경인건설본부가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이 건물을 좌측에 끼고 조금만 걸으면 이마트24 명동역점이 나온다. 여기서 좌측으로 꺾으면 일직선으로 난 골목길이 하나 나온다(헷갈린다 싶으면 '참빛피아노'와 '다미돈까스'가 있는지 확인할 것). 골목을 따라 직진하면 서울남산초등학교 후문이 나오며, 한양교회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계단만 넘으면 바로 학교 정문이 나온다.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방법 3

이 방법은 명동역에서 갈 수 있는 길 중 가장 오래 걸리나, 볼거리가 많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재미로'가 형성되어 있어 가볼 만하다. 명동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재미로'를 방면으로 걸으면 '퍼시픽 호텔'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숭의여대 정면으로 쭉 직진하면 180도 회전해야 하는 커브길이 나올 것이다. 가파른 언덕까지 있어 차량 확인이 어려운 관계로 반드시 차가 오는지 확인하면서 가야 한다. 커브길을 지나면 리라초등학교숭의여자대학교 정문이 나올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그 쪽으로 간다. 그럼 우측으로 공사중인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울예대 정문이 나온다. 이 길은 언덕이 심하고 커브길을 끼고 있어 추천하는 경로는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애니메이션 관련 콘텐츠가 거리에 많고 카페나 식당이 있으며 리라초등학교나 숭의초등학교를 비롯한 유명 사립학교들이 있어 볼거리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방법 4

충무로역 1. 3호선 충무로역 5번 출구로 나와 퇴계로 2가 교차로까지 도보
2. 아웃백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넌 뒤, 아웃백 앞에서 다시 남산방향으로 횡단보도 건넘
3.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와서 대한적십자사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븐일레븐 옆 서울예술대학교 동랑센터 드라마센터. (도보 약 15분 소요)

3.2. 버스

명동입구/퇴계로2가.명동역: 104, 105[8], 421, 463, 507, 604, 7011
명동입구 하차 후 퇴계로2가 방향으로 도보 이동, 명동역 1번 출구를 지나 언덕길 따라 약 300m 전진 후 대한적십자가 앞 횡단보도 건너 세븐일레븐 옆 드라마센터

3.3. 자차

차량을 이용할 경우 남산1호터널방향, 즉 퇴계로3가 교차로를 이용해야 한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길이니 운전에 유의해야 한다. 이 방향으로 찾아올 경우 우측엔 대한적십자사 본사 그리고 정면엔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가 보인다.

3.4. 주차

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붙어 있으며, 공용하는 주차장에서 바로 서울예대 공연/전시장으로도 갈수 있다.[9]

4. 설립자 유치진친일 행적 및 드라마센터 사유화 과정

4.1. 드라마센터 사유화 및 친일 행적

이곳에 작성된 내용은 <유치진과 드라마센터, 친일과 냉전의 유산>(연극과 인간, 2019)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필자 소개 - 김미도(연극평론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김숙현(연극평론가), 김옥란(연극평론가, 극동대학교 교수), 노이정(연극평론가), 이상우(연극평론가, 고려대학교 교수), 이정숙(경북대학교 초빙교수), 이진아(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조시현(국제법연구자, 전 성신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교수)

1. 드라마센터 사유화 문제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김미도 : <드라마센터에 대한 논란과 쟁점>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치진이 불하받은 토지는 과거에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로 해방 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사용되었다. 유치진의 자서전에서 스스로 밝힌 불하 과정만으로도 부정특혜 의혹이 상당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적인 친분에 의해 허정, 이항녕, 오재경 등이 토지 불하 과정에 개입되었다 해도 토지 불하의 명분은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수혜하는 '공적'인 이유였다.

"나는 우선 그들이 제공하겠다는 10만불을 염두에 두고 극장을 머리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10만불은 법인에게만 지급되는 것이라 하여 나는 부랴부랴 내가 살고 있는 갈월동 집과 처남 집 등 그밖의 부동산을 기부하여 1958년 8월 26일에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 유지재단이라는 것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유치진 구술, 유민영 정리)
즉 국가가 유치진 개인을 위해 국유지를 불하해 주었을 리 없고, 록팰러재단 역시 유치진 개인이 극장을 짓는데 막대한 공적 자금을 지원했을 리 없다. 동아시아 냉전 전략 속에서, 미국 문화 전파에 가교 역할을 하는 록팰러재단의 원조에 힘입은 드라마센터가, 범국가적인 혹은 범문화계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심지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드라마센터 건립 과정에서 유치진의 사재가 투입되지 않았다면 완공되기 어려웠기에 서울예대 측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드라마센터는 절대로 사유화되지 않습니다. 우선 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관절 그 건물이 사복을 채울 만한 건더기가 됩니까?"(1966년 9월 1일, 한국일보 기사)라는 변명이 무색하게 유치진은 드라마센터를 임의적으로 자신이 설립한 학교재단에 기부하여 사유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드라마센터는 서울예술전문대학(일명 서울예전) 학생들의 실습장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공공극장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잃게 되었다. 애초에 드라마센터의 건립 취지가 현대극장의 설립을 통한 한국연극의 중흥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족의 예술혼을 되살리기 위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어처구니 없는 행보다. 다시 말해 유치진이 이 극장을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한 극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기에 록팰러재단과 박정희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센터는 격동의 한국사를 관통하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고, 그 사이 유치진은 사학재단을 설립하여 임의적으로(제맘대로) 그곳에 기부해버린 것이다.

1962년 드라마센터가 개관하기까지 미국 록펠러재단은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유치진 개인을 위한 사적 차원이 아니라 한국연극의 발전이라는 공적 명분을 내세우며 이루어진 일이다. 다시 말해, 드라마센터의 건립이 범국가적인, 혹은 범문화적인 후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기록 또한 역사적 자료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유치진은 총독부 부지를 불하받은 후, 이 땅을 1963년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현 동랑예술원)에 불법∙편법적으로 '증여'하여 국유재산을 사립학교인 서울예대의 사유재산으로 귀속시킴으로써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을 배반하기 시작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재정경제위원장 이주일, 유원식 등 군사정부는 유치진에게 국유재산 매각대금의 납기를 무려 10년으로 연장하는 등 특혜와 은행 융자를 알선해주기도 하는 등 탈법행위를 저질렀다. 국세청에 남아 있는 매도증서에 의하면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 유지재단이 국가로부터 예장동 8-19번지(현 소파로138)의 땅을 매수하는 계약을 체결한 시점은 1960년 9월 28일이지만 부지대금은 첫 불입금 1할만을 납입한 후, 1970년 9월 14일에야 완납된다. 1963년 재단법인이 학교법인으로 드라마센터 건물을 기증할 때 대지는 재단 소유도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장동 8-19번지는 공공극장을 만들겠다는 거짓부렁에 의해 불하 허가받은 곳이다. 애초에 유치진은 한국연극의 중흥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내세우며 박정희 정부와 록펠러재단으로부터 거대한 자본을 후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교묘한 수법으로 이를 사유화했다. 서울예대의 성장과정에서 드라마센터라는 부동산이 중요한 종자돈으로 기능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예대 측은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을 완전히 망각한 채 학교 부대시설로 방치해 오다 10년 전부터 서울시에 임대함으로써 극장의 공공성이 조금이나마 회복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영구적으로 사유화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는 한국연극계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 건립되었던 드라마센터의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2. 노골적인 친일 행적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연극평론가 이진아 : <대추나무> 개작 과정과 친일 행적 지우기

<대추나무>에서 <왜 싸워?>까지

<대추나무>는 해방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치진이 쓴 마지막 희곡으로 1942년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제1회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이다. 유치진이 소위 '국민연극의 시대'라고 불리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세 편의 친일희곡을 쓰는데, 그 첫 작품이 1941년 6월 현대극장 창립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흑룡강>이며, 이어 1942년 4월에는 <북진대>를, 같은 해 10월에는 <대추나무>를 써서 무대에 올린다. 유치진은 <대추나무>를 마지막으로 이후로는 희곡 창작을 접고 해방을 맞는다.

유치진은 1940년부터 적극적으로 국민연극론을 발표하였고, 아직 국민연극이 무엇인지 창작물로서 실체가 없던 시절 현대극장을 창립하고 <흑룡강>을 무대에 올리며 친일연극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러한 과정에서 '국책연극의 예술성과 대중성의 문제'를 고민하기도 하였는데, 극이 국가의 정책과 목적에 적극적일수록 예술성과 멀어지고 그 결과 국민 대중으로부터 경원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러한 고민 속에서 쓴 작품이 <대추나무>이다. 실제로 앞서 창작한 친일 작품들과 비교하며 작가로서 꽤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추나무> 발표 당시의 작극 메모에서 "졸작 <흑룡강>과 <북진대>를 과거의 작품으로 묻어버릴 수 있는 작극상의 새로운 이정표"를 찾고 시험해 보고자, 또 "잃어버린 시를 상기"하고자 이 작품을 쓴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치진은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대추나무>에 대해서는 작가로서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흑룡강>과 <북진대>를 즉각 폐기한 것과는 달리 <대추나무>는 <불꽃>(1952년 작)과 <왜 싸워?>(1957년 작)로 두 번에 걸친 개작을 시도했으며, 1957년 <왜 싸워?> 발표 당시의 친일연극 논쟁과 이에 따른 상처에도 불구하고 작가 생전에 발간한 ⌜유치진희곡선집⌟(1959년, 선문각 발행)과 ⌜유치진전집⌟(1971년, 선문각 발행)에도 <왜 싸워?>를 당당히 포함시키고 있다. 또 작가는 자서전에서 일제 말에 쓴 친일 희곡이 평생 나를 괴롭혔다고 말하며, 때문에 "이때 쓴 작품들의 원고 뭉치를 곧바로 소각"했다고 술회하면서 이들 작품을 "나를 괴롭히는 망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 남산드라마센터의 사유화 과정_신화를 넘어 역사 읽기 - 연극평론가 노이정
1950년대와 1960년대, 소극장과 소극장 연극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 연극계 내에서 이견이 없었다. 소극장에 대한 당대 연극인들의 보편적 열망과 사회적 인정은 드라마센터를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강력한 토대였다. 드라마센터 극장 건립이라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유치진의 열망은 이런 사회적 토대 위에서 현실로 전화되었다. 극장을 짓기 전뿐만 아니라 극장을 짓는 과정, 그 이후 유지 과정에서도 연극 전용극장이 필요하다는 강한 사회적 동의는 극장 실현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연극사에서 남산드라마센터는 록펠러 재단의 기부와 유치진 선생의 열정의 소산이라는 신화로만 기록되어 왔다. 유치진은 어떤 국면에서는 록펠러 재단의 기부를, 다른 국면에서는 자신의 물심양면의 노력을 강조하며 극장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지금까지도 극장에 관한 기록은 유치진 자신의 기록, 그의 위업을 구술한 자료, 서울예대의 기념사업 성격을 지닌 기록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다른 목소리는 공유하기 어려웠다. 드라마센터가 탄생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던 공공적 동의는 기억으로 침잠되고, 극장은 서울예대라는 사학재단의 사유재산권 행사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이 극장이 공공극장이며 그렇게 유지, 운영해야 한다는 인식은 연극계에서 암묵적으로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기에 개인 사유화를 둘러싼 논란 또한 그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과 1980년대 후반에는 이 문제가 신문 지면으로도 크게 불거져 나왔다. 서울예대에서 학교 극장으로 폐쇄적으로 운영한 지 이미 수년이 흘렀던 2007년, 월간 『한국연극』에서 진행한 좌담에서도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 대한 재고와 국가 소유로 이전할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좌담에서 한상철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건물을 짓고 나서 사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극장이 누구의 소유냐 하는 문제죠. 그땐 유치진 씨가 주선을 해서 극장을 짓기는 했지만 그분이 직접 돈을 낸 것은 아니고, 록펠러 재단이 돈을 내고 유치진 씨에게 책임을 맡겼죠. 내가 알기로는 명료화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절대 유치진 씨의 것이 아니다.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적인 재산이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그 소유권을 누구에게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확정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 2, 3년 전인가 서울예대가 안산으로 옮겨지면서 연극계로 환원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죠.
극장을 짓고 그것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 측은 '국가의 문화 발전', '연극 발전이라는 절박함'이라는 명분과 공의를 연극계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공적인 명분의 강력한 제시에 연극계는 언제나 이견을 죽였고, 사회와 국가는 반복적으로 예외와 특혜를 제공했다. 그것은 록펠러 재단의 기부에서뿐만 아니라 땅 불하 과정, 건축비 대부 과정, 불하 토지 대금 지불 연기 과정 등에서 공히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명분과 공의의 결실은 유치진 자신과 서울예대라는 사학재단으로 귀결되었다. 근대 한국 연극인들의 꿈이었던 연극 전용 극장은 학교의 부속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서울시에서 극장을 임대(문화 사업 계약)하여 공공극장으로 새 이름을 갖기 전까지, 아니 그 계약 과정에서마저 학교의 개인 재산으로 운용되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쌓아올린 신화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를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남산드라마센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현실화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는 우리가 이 극장을 남산예술센터로 부르고 있지만, 2009년 서울시에서 남산드라마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계약하려 할 때 서울예대에서는 남산예술센터 명칭을 '유치진 극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장구한 사회적 노력을 한 개인의 노력으로 전유하고 치환하려는 신화화의 전형이다.
남산드라마센터 건립 과정의 '신화'를 다시 본다
우리는 사회적 문맥 속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남산드라마센터라는 연극 전용 극장의 설립이 과연 한 개인의 의지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일인가. 당대 연극의 공공적 목표를 공유한 우리 사회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는가. 서울예대 재단은 공공성의 구현이라는 명분으로 쌓은 성과를 가문의 성취로만 귀결시켜 온 것은 아닌가. 한 사람의 자서전에 근거한 신화가 아니라, 그 신화를 다시 받아쓴 기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적 문맥과 남긴 문서 등을 통해서 살펴봐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공공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남산드라마센터 건립 과정의 서사가 필요하다.
지난 10년간, 계약 형식이기는 하나 서울예대에서 독립해 공공의 관점으로 재영토화한 남산예술센터는 연극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실험의 경험을, 관객들에게는 대학로의 환경에서 떨어진 신선한 공간을 제공해 주었고, 대학로가 제 기능을 못할 때에도 남산예술센터는 그것을 보완하는 대안적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이제 다시 개인의 이익을 내세워 다시금 이 극장을 독점, 전유해야겠다는 서울예대 재단의 요구는, 우리에게 공공의 자산을 또다시 잃게 된다는 상실감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 극장의 공공성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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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드라마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서, 한국연극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곳이다. 같은 해 10월 15일 한국연극연구소 부설 연극아카데미(2년제 과정)에 연기과와 연구과를 설치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1964년 첫 졸업생 배출). 학교의 공식 개교기념일을 한국연극연구소의 설립일이나 교육기관(연극아카데미)의 교육 개시일이 아닌 극장(드라마센터)의 개관일로 하는 것은 그만큼 학교에서 드라마센터를 학교의 뿌리이자 상징처럼 여기기 때문이다.[2] 친일인명사전 문화/예술 분야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 희곡, 연극을 통해 내선일체를 선전하였다.[3] 설립자 유치진의 손자이자, 수십년간 학장 및 총장을 지낸 유덕형 전 총장(현 명예이사장)의 아들이다.[4] 법정동 필동 관할의 행정동이다. 소파로와 남산1호터널 진입로 사이에서 남산 정상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예장동은, 조선 시대 5군영의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예장(藝場)이 이곳에 있던 데서 유래한다. 무예장(武藝場)을 줄여서 예장이라고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경복궁 앞으로 이전하기 전인 1924년까지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5] 그래픽 속 남산캠퍼스를 남산예술센터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이 이미지가 제작될 당시 서울예술대학교 남산캠퍼스의 드라마센터와 심재순관을 서울문화재단에 임대한 상황이라 대외적으로 남산예술센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예술대학교간의 임대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이후 학교에서 해당 건물을 드라마센터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다.[당시] 안산시는 서울예술대학교를 비롯하여 한양대 에리카 등 대학 캠퍼스 유치를 목포하고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안산의 이미지 변화를 꿈꿨다.[2011년~2012년까지] [8] 숭례문 방향만 경유[9] 서울시에서 운영하므로 공용하는 주차장은 공공요금을 받으며 경차 할인도 해 준다. 주차할 데가 매우 부족한 남산 인근에서는 주차장이 그나마 큰 편이고 주차비도 저렴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