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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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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왕중왕 | 틀:역대 사파비 왕조 샤한샤
행정구역 타브리즈 | 카즈빈 | 이스파한
지리 남아제르바이잔
사법 · 치안 사파비야 | 키질바시
종교 시아파(12이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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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이전2. 건국
2.1. 이스마일 1세
3. 대 오스만 전쟁 및 전성기
3.1. 1514, 찰디란 전투: 패배3.2. 타흐마스프 1세3.3. 혼란기3.4. 전성기: 아바스 1세
4. 쇠락과 외세의 침입
4.1. 술탄 후사인4.2. 나디르 샤와 멸망


1. 건국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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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왕조의 뿌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련조직인 수피즘 단체에서 시작되었다. 아르다빌 지방에는 11세기부터 그 곳에 말뚝을 박고 살아오던 쿠르드계 가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가문은 스스로를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해당 지방에선 명문가였다. 1252년 이 대가문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사피 앗 딘'이다. 사피 앗 딘은 워낙에 어릴 적부터 머리가 영특해 스승을 찾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길란 지방에서 자헤디야 분파의 수피교 교단을 이끌던 자히드 길라니를 만나게 된다. 사피 앗 딘은 그의 아래로 들어가 수제자로 살면서 자히드 길라니의 외동딸 비비 파티마와 결혼하기까지 하며 명실상부한 교단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고, 자히드 길라니가 죽자 아예 자헤디야 분파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제 이름을 따서 교단의 명칭을 '사파비야'로 개명했다. 사피 앗 딘은 일종의 종교단체에 불과했던 사파비야를 크게 키워 저멀리 스리랑카에까지 포교하면서 사파비야를 정치세력화했고, 1334년 9월에 아들 사드르 알 딘에게 교단을 물려주었다.

사피 앗 딘의 뒤를 이은 사드르 알 딘은 무려 59년 동안 사파비야 교단을 이끌었다. 이때 이미 사파비야가 페르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연스레 당대 최고의 정복자이자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있던 티무르의 관심을 끌게 된다. 사드르 알 딘은 용케도 티무르의 호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티무르는 사피 앗 딘을 기리는 사원을 세우고 사드르 알 딘에게 인근 지방의 징세권을 부여하는 등 막대한 호의를 베풀었다. 심지어 티무르는 사드르 알 딘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소원을 아무거나 하나 말하라고 했는데, 이때 사드르 알 딘은 티무르가 디야르바크르 일대에서 사로잡은 튀르크계 패잔병들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티무르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고 패잔병 포로들을 넘겨받은 사드르 알 딘은 이들을 모두 해방시켜준 뒤 사파비야에 입적시켰다. 이로 인해 수 천명이 넘는 장정들이 사파비야 교단에 입단했고, 이는 사파비야의 일대 장악력이 훨씬 강해지는 계기가 된다.

사드르 알 딘이 죽자 아들 카바예 알리 사파비가 사파비야의 새 교주로 즉위한다. 카바예 알리 사파비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그 아래에서 수니파 교단에 가까웠던 사파비야가 점점 더 시아파적인 성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이미 이맘처럼 자리를 친족에게 물려주는 등 시아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카바예 알리 사파비 시대 들어서는 대놓고 이전보다 시아파에 더 가까워졌다. 이후 사파비야의 교주 자리는 카바예의 아들 셰이흐 이브라힘을 거쳐 이브라힘의 아들 셰이크 주나이드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종교 수련단체에 머물렀던 사파비야는 셰이크 주나이드 아래에서 완전한 정치 단체로 변모한다. 한편 이때당시 이란 지방을 다스리던 왕조는 흑양 왕조였는데, 흑양 왕조의 군주였던 자한 샤는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사병 조직이 되어버린 사파비야를 굉장히 꺼림칙하게 여겼다. 자한 샤는 사파비야를 멀리 쫒아버렸고, 셰이크 주나이드는 어쩔 수 없이 흑양 왕조의 최대 경쟁국인 백양 왕조로 피난갔다.

백양 왕조는 그를 굉장히 환대했다. 심지어 당시 백양 왕조의 군주 우준 하산은 제 여동생을 셰이크 주나이드에게 주어 결혼시키기까지 했을 정도. 셰이크 주나이드는 백양 왕조의 도움을 받아 인근 지방들을 침략하고 다녔는데, 그러다가 시르반 지역에서 전투 도중 살해당했다. 그렇게 사파비야를 수니파 교단에서 완전한 시아파 12이맘파를 믿는 군사조직으로 변모시킨 셰이크 주나이드가 죽자 하이다르 사파비가 사파비야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하이다르 사파비의 삼촌인 우준 하산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키고 나서 사파비야 세력의 본거지였던 아르다빌을 하이다르에게 돌려주었다. 아르다빌을 회복한 사파비야는 이후 이라크나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하이다르는 주로 오세티야 지방이나 다게스탄 지방을 마구 약탈하면서 세를 불렸는데, 이는 인근 아제르바이잔을 통치하던 쉬르반샤 왕조의 심기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사파비야에게 호의적이던 우준 하산이 죽은 후 백양 왕조의 다음 술탄으로 즉위한 술탄 야쿠브는 사파비야에게 전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파비야가 지나치게 극단주의적으로 흘러가 교주를 신처럼 숭배하는 등 영 좋지 못한 단체라고 생각했던 것. 하이다르가 튀르크계 기병집단 키질바시[1]를 강화해 군사력을 더욱 굳히자 야쿠브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쉬르반샤 왕조는 이런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쉬르반샤 왕조는 야쿠브에게 접근해 그와 반-사파비야 동맹을 맺었다. 하이다르가 지속적으로 일대를 약탈하러 침공해들어오자, 쉬르반샤 왕조는 하이다르가 3번째로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침공했을 때를 노려 타바사란 전투에서 백양 왕조와 합심해 그를 기습한 후 죽여버렸다. 하이다르가 타바사란에서 전사하자 장남 알리 미르자가 임시로 사파비야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알리 미르자가 복수해올 것을 두려워한 술탄 야쿠브가 그를 공격해 모친을 포함해 일가 전체를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으로 유배보냈고,[2] 알리 미르자와 사파비야 일가는 파르스에서 4년 동안 유폐되어 있는다. 그가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술탄 야쿠브가 죽은 직후 내란이 일어나자 사파비야의 막강한 군사력을 빌리고자 했던 로스탐 왕자가 그를 풀어준 이후에서야였다.

로스탐 왕자는 그가 죽으면 알리 미르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조건으로 알리 미르자와 사파비야 군대를 끌어들였다. 로스탐 왕자는 사파비야의 막강한 군대에 힘입어 야쿠브의 아들 바이손코르를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함께 싸워보고나니 사파비야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을 알게된 로스탐 왕자는 사파비야를 두려워해 뒤통수를 치고만다. 뒤통수를 아주 거하게 맞은 알리 미르자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본거지 아르다빌로 향했지만 로스탐 왕자가 이를 놔둘리가 만무했다. 로스탐 왕자는 기병대를 보내 그를 따라잡게 했고, 아무리 도망쳐도 제 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알리 미르자는 당시 7세에 불과하던 제 동생 이스마일에게 사파비야를 넘긴다는 명령을 전했고, 이스마일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추격대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이렇게 사파비야의 운명은 어린 이스마일의 손에 달리게 된다. 이스마일은 길란 지방에 숨어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12살이 되는 1499년에 아르다빌로 귀환해 키질바시를 재소집했다. 뿔뿔히 흩어져있던 투르크족들은 그의 부름에 응답했고 이스마일은 카자르, 아프샤르 부족 등으로 구성된 몇 천의 군대를 거느리게 된다.

2. 건국

2.1. 이스마일 1세

당시 이란의 정세는 굉장히 복잡했다. 한때 페르시아 전체를 호령하던 티무르 제국은 진작에 힘이 쪼그라들었고, 대신에 종교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것. 특히 이슬람 사회에서는 소수파 취급받던 시아파 세력들이 이란 지방을 중심으로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이스마일이 이끌던 사파비야 교단도 이들 중 하나였다. 1500년 즈음에 이란 지방에 뿔뿔히 흩어져 있던 세력들은 크게 헤라트티무르 제국, 타브리즈백양 왕조, 쉬르반샤 왕조 등이 있었다. 이 모든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페르시아의 막강한 잠재력을 제대로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은 이스마일이 마침내 잠적을 깨고 대군을 불러일으키면서 급변한다.

1500년 여름, 이스마일은 7천 명의 키질바시들을 거느리고 쉬르반샤 왕조로 진격했다. 그는 카바니 지방[3]에서 파루크 야사르가 이끌던 쉬르반샤 군대를 대파했고, 여세를 몰아 쉬르반샤의 수도였던 바쿠마저 정복하면서 현 아제르바이잔 일대 상당수를 정복했다. 이스마일이 다시 쳐들어오자 위기를 느낀 건 백양 왕조였다. 당시 백양 왕조의 왕이었던 알반드는 바로 타브리즈에서 빠져나와 대군을 몰고 이스마일이 있는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스마일과 알반드는 1501년 샤루르 전투에서 대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이스마일은 수적으로 4배나 열세였지만 이를 꺾고 백양 왕조에 대승을 거두는 데 성공한다. 이전까지 페르시아 지방을 지배하던 백양 왕조를 꺾어버린 이스마일은 1501년 스스로 '이란의 샤'로 즉위했고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았다. 이스마일은 이스마일 1세로 즉위한 후 사파비야를 국교로 삼았다. 즉 시아파 중에서도 12이맘파를 국교로 삼았다는 건데, 이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 지방에는 꽤 수니파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이스마일 1세는 저항하는 자들을 모두 칼로 찍어누르면서 시아파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백양 왕조를 무너뜨린 이스마일 1세는 이제 페르시아 대부분 지방을 다스리는 대군주로 올라섰다. 이스마일 1세는 남아있는 세력들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 끊임없이 원정길에 올랐고, 정복군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빠른 속도로 남은 잔당들을 쓸어버리면서 페르시아를 통일했다. 1501년에는 아르메니아 지방을 정복했고 1502년에는 에르진칸과 에르주룸을 떨어뜨렸다. 1503년에는 하마단, 1504년에는 시라즈와 케르만, 1508년에는 반을 함락했으며 1509년에는 마침내 대도시 바그다드헤라트를 함락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티무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던 우즈베크인들을 모조리 쫒아낼 수 있었다. 이스마일 1세는 우즈베크인들의 왕 무함마드 샤이바니를 죽이는 데 성공했고,[4] 우즈베크인들은 사파비 군대에 밀려 저멀리 옥수스 강까지 쫒겨났다.[5] 이렇게 우즈베크인들까지 완벽하게 몰아낸 사파비 제국은 몇 백여년 만에 페르시아 지방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다.

3. 대 오스만 전쟁 및 전성기

3.1. 1514, 찰디란 전투: 패배

파일:The_Battle_of_Chaldiran,_Qajar_Iran,_19th_century.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8px-%D0%A1%D0%B5%D1%84%D0%B8_1-%D0%B9_1629-42.jpg
찰디란 전투 이스마일 1세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을 제4대 칼리파였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환생이라 여겼다. 그정도로 페르시아를 재통일한 그의 업적이 엄청났기 때문. 그의 최종 목표는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켜 전 중동을 시아파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파비 제국이 시아파였던터라 이같은 원대한 야심은 바로 옆 동쪽 수니파 최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사파비 제국이 계속 튀르크계 유목부족들을 빼가자 더이상 오스만 제국도 사파비 제국과 정면충돌을 불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 오스만의 바예지드 2세는 시아파와 사파비 제국의 급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1502년에 아나톨리아 내 시아파들을 모두 국경 밖으로 추방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의 시아파들이 사파비의 성공에 고무되어 1511년 아나톨리아에서 샤쿨루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오스만이 사파비 제국을 위험하게 보았을 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게다가 이스마일 1세는 끝없이 국경을 서쪽으로 밀어붙였고, 이는 오스만 제국과 필연적인 충돌을 불러왔다.

사파비 왕조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던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아나톨리아 동부 일대에 거주하는 시아파 튀르크, 쿠르드족의 반란을 사주하여 끝없이 오스만 제국을 도발하였다. 1511년에는 시아파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샤쿨루 반란을 일으켰고, 진압하라고 보낸 오스만 진압군은 오히려 패퇴당하기나 하면서 시아파들의 위험성이 드러나자 더이상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급기야 이스마일 1세가 술탄으로 새로 즉위한 셀림 1세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대놓고 그의 조카를 지원하는 등 계속 문제를 일으키자, 즉위 이전 트라브존 총독으로 시아파 봉기를 진압한 경력이 있는데다 개인적으로 시아파를 혐오하던 셀림 1세는 사파비를 응징하기 위해 마침내 동쪽으로 원정을 감행하였다. 셀림 1세가 대군을 몰고 쳐들어오자 이스마일 1세는 청야전술로 맞불을 놓고 자신도 대군을 소집해 찰디란 지방에서 격돌했다.[6]

1514년 8월 23일, 6만 명의 오스만 군대와 4만 명의 사파비 군대가 격돌하니 이를 찰디란 전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스마일 1세의 군대에게는 이전과는 달리 엄청난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적군에게 대포와 화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은 화승총과 대포 등 기본적인 화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반면 사파비 군대는 전통적인 창칼에 그쳤다. 당연히 칼 따위가 총에 적수가 될 리 없었고 안그래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던 사파비 군대는 찰디란 전투에서 처참하게 무너진다.[7] 기세를 탄 오스만 제국은 9월 7일 수도 타브리즈까지 함락했다. 셀림 1세의 목표는 다음해 봄까지 페르시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예니체리들이 열악한 보급 문제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사파비 군대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표하자 셀림 1세는 어쩔 수 없이 타브리즈와 페르시아 일대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대신 이라크 북부와 소아시아 일대만을 점령하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그 덕에 이스마일 1세는 수도 타브리즈를 포함해 사파비 제국의 영토를 빠르게 재수복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보급 문제로 조기 철군하면서 외견상으로는 사파비 제국이 크게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이스마일 1세의 속은 완전 무너져버렸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살아있는 신이라고 믿고 언제나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대패하고 후궁과 첩들까지 모조리 적에게 빼앗겼으니.... 이스마일 1세는 이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군대를 지휘하지 않았으며 국정에서도 거의 손을 떼버렸다. 게다가 그동안 그를 믿고 따르던 키질바시들도 찰디란 전투에서의 대패로 이스마일 1세의 능력과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황제의 권위는 한순간에 땅으로 떨어져버렸다. 영웅적 면모를 완전 잃어버린 이스마일 1세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황궁에 박혀 살다가 1524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찰디란에서 승리한 셀림 1세는 그에 대해 '언제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정사에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다만 아예 금치산자가 되어버린 수준은 아니어서 국정에 약간 신경을 쓰긴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맺은 반-오스만 동맹. 이스마일 1세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3.2. 타흐마스프 1세

그나마 압도적인 권위로 신하들을 찍어누르던 이스마일 1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대놓고 키질바시들이 황제에게 이견을 제기하거나 군대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마일 1세가 1524년 사망하자마자 키질바시들은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날뛰기 시작한다. 아직도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한 황제의 권위 실추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스마일 1세를 이어 황제에 오른 타흐마스프 1세가 고작 10살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키질바시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어린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대신 맡아보던 자는 룸루 부족 출신의 디브 술탄 룸루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부족사회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던 페르시아에서, 룸루 부족 출신이 섭정을 맡아 자기네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한다는 것은 타 부족들 입장에서 꽤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스파한하마단을 다스리던 타칼루 부족과 호라산타브리즈를 장악한 우스타줄루 부족이 반발이 심했다.

반발이 워낙 심하다보니 디브 술탄 룸루는 타칼루 부족과 우스타줄루 부족에게 삼두정치를 제안했지만 씨알도 안먹혔다. 결국 내전이 발발했고, 안그래도 혼란스러운 제국은 부족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직전까지 몰린다. 1526년 페르시아 북서부 지방에서 시작된 내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전체로 확대된다. 이 내전에서 가장 먼저 퇴출된 부족은 우스타줄루 부족이었다. 룸루 부족은 우스타줄루 부족을 내쫒으면서 일단 내전에서 승기를 잡는 듯 보였지만.... 내전 도중 우즈베크인들이 투스와 아스트라바드 지방을 공격해 약탈하자 이에 책임을 떠안고 타흐마스프 1세의 명령으로 궁정에서 쫒겨났다.[8] 룸루 부족마저 사라지자 유일하게 남은 가문은 타칼루 부족이었다. 타칼루 부족은 왕의 섭정을 자처하고 최대 경쟁부족 샴루 족을 헤라트에서 쫒아내려 들었지만 오히려 샴루 족에게 역관광당했고, 샴루 부족의 호세인 칸이 또 섭정을 자처했다. 하지만 타흐마스프 1세가 점차 성장하면서 본인이 직접 제국을 통치하려 들었고, 황제가 직접 우즈베크인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결국 호세인 칸이 1534년에 숙청되며 지긋지긋한 내전이 끝난다.

타흐마스프 1세가 당시 황권을 되찾았다지만 그의 앞에는 험난한 길만이 놓여있었다. 가장 큰 적은 당연히 동쪽의 오스만 제국이었는데, 하필이면 그의 재위기에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그 쉴레이만 대제였던 탓에 사파비 왕조는 허구한날 오스만 제국에게 털리고 살아야만 했다. 쉴레이만 대제는 5차례에 걸쳐 군대를 몰고 페르시아를 공격했고, 타흐마스프 1세는 재위 내내 겨우겨우 오스만 제국군을 방어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우즈베크인들이 페르시아의 재화를 뜯어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호라산 지방으로 쳐들어왔던 것. 17세의 타흐마스프 1세가 직접 군대를 몰고 우즈베크인들을 쫒아내려 달려가야 했을 정도로 우즈베크인들의 침입이 잦았다. 다만 사파비 제국은 우즈베크인들을 몰아내는 데는 좀 더 수월하게 임할 수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찰디란 전투에서 얻은 뼈아픈 경험 때문에 군대에 대대적으로 화기와 포병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즈베크인들을 상대하기 쉬웠던 건 또 아니어서 1530년에는 대도시 헤라트까지 점령당하는 등 우즈베크인들은 끊임없이 사파비 제국의 신경을 긁었다.

쉴레이만 대제는 재위 초창기부터 동쪽의 사파비 제국을 크게 경계했다. 하지만 타흐마스프 1세의 재위 초반 10년 동안은 서쪽에 합스부르크 가문빈 공방전을 벌이느라 사파비 제국을 칠 시간이 없었고, 서방과의 전쟁이 다 끝난 1530년대에야 제대로 사파비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1532년에는 오스만에 망명한 옛 타칼루 부족 출신의 올라마 벡에게 5만 명의 대군을 맡겨 타브리즈와 쿠르디스탄 지방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기를 쓰고 이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2년 만인 1534년에 이브라힘 파샤가 또다시 대군을 몰고 페르시아를 침공했고, 그해 9월에는 쉴레이만 본인이 직접 친정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야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옛 샴루 부족이 타흐마스프 1세를 독살하고 대신 그 동생을 황제로 세우려하는 등 혼란이 극심해졌다. 샴루 부족은 타흐마스프 1세의 형제 샘 미르자를 새 황제로 올리려 들었고, 심지어 쉴레이만도 이를 인정했지만 이 계획을 듣고 경악한 타흐마스프 1세가 온 힘을 끌어모아 쉴레이만이 메소포타미아로 빠진 틈을 타 후방을 공격했다. 후방을 공격당한 쉴레이만은 별 수 없이 바그다드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들을 포기하고 1535년 이스탄불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오스만 제국은 쭉 사파비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쉬르반 지방의 총독이자 타흐마스프 1세의 동생 알카스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파비는 또다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게 된다. 알카스 미르자는 쉬르반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얼마 못가 진압군에게 패퇴당했고, 크림 반도로 도망쳐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알카스 미르자는 쉴레이만에게 저가 황위에 오르면 사파비를 수니파 제국으로 바꿀테니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때는 이때다 싶었던 쉴레이만은 대군을 동원해 3차 페르시아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타흐마스프 1세가 철저한 청야전술을 펼치고 키질바시들도 알카스 미르자에게 반감을 드러내자 오스만 제국도 주춤했다. 알카스 미르자가 1549년 타흐마스프 1세에게 붙잡혀 죽자 더이상 명분이 사라진 쉴레이만은 그해 가을에 철수했다. 쉴레이만은 타흐마스프 1세의 아들 이스마일이 에르주눔을 공격한 걸 빌미삼아 4차로 또 침공했지만 타흐마스프 1세가 수도를 카즈빈으로 천도하고 청야전술을 쓰자 또 물러나야만 했다. 4번에 걸친 침략이 무위로 돌아가자 결국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1555년 아마스야 조약[9]으로 마침내 몇 십여년에 걸친 대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를 이룩한다.

참고로 이 시대에 남아시아 지방에서는 사파비 제국을 능가할 또다른 제국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으니 바로 인도무굴 제국이었다. 이당시만 해도 무굴 제국은 카불과 아프간 지방을 기반으로 한 작은 지역 왕조에 불과했는데, 창업군주인 바부르가 죽자마자 혈족들 간의 제위다툼으로 2대 황제 후마윤이 다스릴 영토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방랑하던 시절이었다. 갈 곳이 없던 후마윤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마침내 1543년에 사파비 제국으로 망명을 요청했는데 타흐마스프 1세는 떠돌이 신세인 후마윤에게 황제의 격을 갖춘 대우를 해주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정말 엄청난 파격 대우를 해주었고,[10] 제국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군대를 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후마윤은 무굴 제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 보답으로 칸다하르 지방을 타흐마스프 1세에게 주었다.[11]

타흐마스프 1세는 50년이 넘도록 페르시아를 통치하면서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가장 큰 유산은 이스마일 1세의 죽음 직후 공중분해되어버릴뻔 했던 제국을 하나로 유지했다는 데 성공했다는 것. 만일 타흐마스프 1세가 우즈베크인들과 오스만 제국에게 이리 맞고 저리 치이는 상황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면 페르시아는 또다시 수많은 부족들로 나뉘어 통일 제국을 이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타흐마스프 1세는 키질바시들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저멀리 오스만 제국을 보면서 귀족층들의 지나친 전횡이 나라 전체를 좀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인데, 안그래도 부족 사회의 경향이 강했던 페르시아에서 키질바시들이 제각기 따로 놀면 치명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타흐마스프 1세는 재위 기간 내내 키질바시들을 약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황권 강화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맘루크예니체리처럼 노예 병사들의 페르시아 자매품인 '굴람'을 대거 양성했다. 기독교를 믿는 조지아체르케스인들을 끌고와 개종시킨 뒤 자신의 직속 수하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존 키질바시들을 견제하면서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고, 덕분에 타흐마스프 1세는 나름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3.3.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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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빈 사파비 황궁

그렇게 나름대로 잘 사파비 제국을 굴려가던 타흐마스프 1세가 죽자 사파비 제국은 또다시 흔들린다. 타흐마스프 1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지겨운 내전이 또 터진 것이 바로 그 원인. 당시 황제에게는 총 9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개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크게 이스마일과 하이다르였다. 주로 튀르크인들과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 그리고 파리 칸 카눔 공주와 상당수 황족들은 이스마일을 지지했고, 조지아인들이나 궁정 노예들은 하이다르를 지지했다. 이스마일은 이미 전에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키질바시들의 반대로 사형만은 면했고, 이번에도 대부분의 페르시아 귀족들과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키질바시들이 이스마일의 편을 들어주면서 황위는 이스마일이 가져가게 된다. 이스마일은 1576년 이스마일 2세라는 이름으로 황위에 즉위했고, 최대 경쟁자였던 하이다르는 그해 8월 22일에 바로 목이 잘려버렸다.

안타깝게도 이스마일 2세는 제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발끝도 못따라가는 암군이었다. 몇 십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터라 성격이 암울하고 어둡게 변해버렸던 탓이 컸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제위를 위협할만한 황족들을 모조리 목을 날려버렸다. 그나마 무함마드 호다반다와 그의 세 아들들은 살려두었는데 그 이유도 호다반다가 장님이어서 황위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그는 종교적인 대격변을 일으켰는데, 시아파가 나라의 근간이던 것을 뒤집고 수니파를 페르시아에 재도입하려는 짓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히 반대가 엄청났고 곳곳에서 항의하는 시위나 반란이 터져나왔다. 물론 아예 이스마일 2세가 생각없이 한 짓은 아니었다. 당시 시아파 교단들의 세가 너무 커져서 황제조차 견제하기 힘들어지자 수니파를 도입해 이를 견제하려 했던 것인데, 그 시기나 방법이 너무나도 미숙했을 뿐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스마일 2세를 증오하기 시작했고 그는 14개월 만인 1577년에 제 누이 파리 칸 카눔 공주에게 살해당했다.[12]

이스마일 2세가 허무하게 암살당한 직후, 파리 칸 카눔 공주는 장님이라서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무함마드 호다반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장님이라 국정에 거의 관여를 못하는 것을 이용해 자신이 섭정직을 해먹으려는게 주 의도였다. 그러나 파리 칸 카눔 공주도 오래가진 못했다. 호다반다의 황후 마흐드 이 울야가 재상 미르자 살만 자베리와 작당해 파리 칸 카눔 공주를 암살해버렸기 때문이다. 마흐드 이 울야는 카눔 공주를 죽인 뒤 미르자 살만 자베리마저 내치고 혼자서 국정 전체를 틀어쥐고 흔들었고, 얼마가지 않아 마흐드 이 울야도 1579년 7월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게 목이 졸려 처참하게 죽었다.[13] 나라가 날로 흔들리자 호다반다는 제 11살 먹은 아들 함자 미르자를 왕세자로 임명했다.[14] 하지만 왕세자를 임명한다고 나라가 조용해지는 건 아니었고, 오스만 제국은 아마스야 조약을 깨고 페르시아를 재침공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15] 우즈베크인들도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약탈해갔다.

오스만 제국이 끝없이 사파비 제국을 침공하면서 트란스코카시아, 다게스탄, 쿠르디스탄에 이어 심지어 옛 수도 타브리즈마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자 신하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분위기가 퍼진다. 결국 1581년 4월에 호다반다의 아들 아바스 1세를 내세워 호라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우스타줄루 부족과 샴루 부족이 그를 지지했다. 왕세자 함자 미르자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고 우스타줄루 부족의 항복은 받아냈지만 샴루 부족은 꺾지 못했다. 그와중에 함자 미르자가 거느리던 키질바시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아바스 1세의 반란군을 제대로 꺾지도 못한 채로 돌아와야만 했고, 진압군이 일단 물러나자 우스타줄루 부족의 군주였던 무르시드 쿨리 칸이 샴루 부족에게서 아바스 1세를 잽싸게 채어왔다. 함자 미르자가 1586년 원인불명의 이유로 살해당하고 우즈베키스탄이 1587년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자 기회를 노린 무르시드 쿨리 칸은 혼란을 틈타 수도 카즈빈으로 진격했다. 수도의 시민들은 아바스 1세를 환영했고, 호다반다는 제 아들에게 반강제로 양위한 후 물러났다. 그렇게 1588년 10월 1일에 아바스 1세가 사파비 제국의 새 샤한샤로 즉위한다.

3.4. 전성기: 아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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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1세[16] 이스파한의 거울궁전[17]
아바스 1세가 막 즉위했을 무렵 사파비 왕조는 꽤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어린 샤를 등에 업고 무르시드 쿨리 칸이 섭정 격인 '와킬'을 자칭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동쪽에선 우즈베크인들이 그리고 서쪽에선 오스만 제국이 제국을 끊임없이 침범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스 1세는 일단 당장의 불을 끄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사파비 제국은 일시적으로 오스만이 점령한 모든 영토들을 모조리 할양해주었고, 카게티, 다게스탄, 쿠르디스탄 지방 등을 모두 넘겨줬다. 이렇게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뒤에는 자신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무르시드 쿨리 칸을 죽이려는 귀족들의 음모를 직접 밝혀내 처형해버리면서 무르시드의 경계심을 풀어놓고 바로 1589년 7월에 그를 직접 숙청해버렸다. 가장 세력이 강했던 무르시드 쿨리 칸을 죽여버린 아바스 1세는 헐거운 부족 연맹에 가까웠던 사파비 제국을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제국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한다.

아바스 1세가 가장 먼저 단행한 개혁은 지방의 키질바시들에게 수조권과 징세권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반발이 막대했지만 아바스 1세는 그냥 밀어붙였다. 기존의 세습 키질바시들을 제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관리들이 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세금도 기존의 키질바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걷는 방식에서 황실이 직접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로 인해 황제권은 급속도로 강화된 반면 키질바시와 귀족들의 권력은 크게 약화됐다. 특히 이 조치로 인해 페르시아 최대의 수출품인 비단의 생산지이자 최대 경제권이었던 길란 지방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아바스 1세는 본인에게만 충성하는 친위대를 육성할 수 있었다. 그는 기존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해묵은 민족 갈등을 재점화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체르케스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으로 구성된 대군을 꾸렸다. 아바스 1세는 예전 찰디란 전투에서의 뼈저린 패배를 기억해 일부러 머스켓을 주력으로 하는 1만 5천에 달하는 체르케스 기병대를 만들었고,[18] 전성기 시절에는 무려 4만에 달하는 친위대를 육성해 오로지 제 명령만 듣게 만들며 황권을 크게 강화했다.

아직까지도 중앙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페르시아에서 강한 군사력 없이 귀족들에게 권한을 빼놓으려 시도한다는 건 황제로서 자살시도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아바스 1세였기에 친위대 강화에 모든 힘을 쏟았던 것. 그는 대포에도 관심이 많아 한 번의 전투에 최대 500여 개의 대포를 동원하는 게 가능할만한 규모로 포병대를 키우라 지시했고, 약탈을 엄히 금지하는 등 군율 세우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군사기술이 발전된 서방에서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고 반-오스만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는 궁병과 포병을 모두 1만 2천 명씩 새로 추가해 군단을 하나씩 만들었고 황제의 근위병들도 무려 3,000여 명 수준으로 이전보다 크게 늘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세수 개혁으로 직접 황제가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군사를 강화한 아바스 1세는 수도를 옮기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도 방어할 겸 기존의 카즈빈에서 더 내륙 지방에 새로운 도시를 세운 것인데, 이게 바로 이스파한이다. 1598년 사파비 제국의 수도가 페르시아 내륙 지방인 이스파한으로 옮겨가면서 사파비 제국은 예전보다 훨씬 더 페르시아 민족 국가에 가깝게 변모한다.[19]

군사력을 회복한 아바스 1세는 그동안 우즈베크인들과 오스만 제국에게 강제로 빼앗겼던 영토들을 수복하려 들었다. 먼저 1598년 반란을 준비하던 타바리스탄의 사산제국 잔존세력 판두스판 왕조를 징벌하여 완전히 소멸시키고 오스만보다 약한 우즈베크인들을 공격해 헤라트와 마쉬하드를 수복해 동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1603년부터는 평생의 숙적이던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해 1616년에는 바그다드이라크 동부, 코카서스 지방을 다시 되찾았다. 가장 큰 의의라면 그동안 수도도 털리고 밀리기만 했던 사파비 왕조가 마침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첫 전쟁이었다는 것. 물론 1638년 20년만에 다시 바그다드를 빼앗겼지만 옛 이스마일 1세의 패배로 잃어버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동부 지역 일부나마 되찾는 데는 성공했다.[20] 뿐만 아니라 1602년에는 바레인에서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와도 손을 잡았고, 당시 세계 해상 무역을 좌지우지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도 역시 협력했다. 아바스 1세는 페르시아의 경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서양 상인들과도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고 덕분에 사파비 제국의 경제력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조지아인들과도 전쟁을 치렀다. 당시 사파비 제국은 조지아 지방에 카르틀리 왕국카헤티 왕국을 속국으로 두고 있었다. 카르틀리 왕국은 루아르사브 2세가, 카헤티 왕국은 테이무라즈 1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둘은 아바스 1세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루아르사브 2세와 테이무라즈 1세는 조지아를 다스리며 친이란 성향의 신하들을 숙청하는 등 아바스 1세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짓들만 거듭했다. 아바스 1세가 1613년 이들을 사냥 연회에 초대하자 루아르사브 2세와 테이무라즈 1세는 아바스 1세가 연회에서 자기들을 처형할까봐 두려워해 연회에 불참, 대놓고 명령에 불북했다. 격노한 아바스 1세는 바로 대군을 일으켜 조지아로 진격했다. 루아르사브 2세와 테이무라즈 1세는 오스만의 봉신 이메레티 왕국으로 피신해 아바스 1세에 맞섰다. 루아르사브 2세는 나중에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귀순했다가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다 처형당했지만, 테이무라즈 1세는 끝까지 항전했다. 이때 아바스 1세는 감히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조지아인들의 씨를 말려버릴 기세로 가혹한 진압을 벌였는데, 이로인해 카헤티 왕국 인구의 3분의 2가 사라졌다. 대부분은 강제로 페르시아로 끌려갔고 상당수는 살육당해 죽었다.[21] 하지만 이후에도 조지아인들은 끊임없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해 사파비 제국에게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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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사절을 접견하는 도제 마리노 그리마니[22] 아바스 1세의 궁정
외교 면에서 보면 대체로 서양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최악의 공동 숙적이 엄청난 힘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 이스마일 1세 시절에도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손을 잡았지만 별다른 실효는 없었고, 타흐마스프 1세는 아예 영국인 여행자들을 기독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외세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하지만 실리를 중시하던 아바스 1세는 달랐다. 그는 1599년에 유럽으로 첫 페르시아 사절을 파견, 루스 차르국노르웨이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건너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를 알현하도록 했다. 루돌프 2세를 알현한 뒤에는 로마에서 교황 클레멘스 8세를 알현했고,[23] 1602년에는 마침내 스페인에서 펠리페 3세를 보기도 했다. 이 사절단은 귀환 도중 아프리카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페르시아 귀환에는 실패했지만 페르시아와 유럽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와 서양의 교류는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진다.[24] 특히 영국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는 걸 도와주는 등 나름 우호적인 분위기를 띠자 아바스 1세는 이들에게 무역 특권을 부여했는데[25] 이게 나중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페르시아를 집어삼키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아바스 1세 치세 하의 사파비 제국은 매우 풍요로운 전성기를 구가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를 위시한 서양 세력들과 교류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오스만 제국과의 패권 싸움에서도 조금 밀리기는 할지언정 무너지진 않았고 팽팽한 호각 상태 정도를 유지했다. 최전성기 시절 사파비 제국은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바레인,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터키 등 수많은 국가들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특히 수 백년 동안 부족들로 조각조각 나뉘어있던 페르시아를 다시 하나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탈바꿈시키며 제국의 안정도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다. 또한 기존의 키질바시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대신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코카서스인 등 수많은 인종들이 새로 유입되어 부를 쌓았으며 황제의 권한은 유례없이 강력해졌다. 하지만 아바스 1세의 잔혹한 성품이 화를 불러온다. 그는 조금이라도 반란의 의심이 들거나 저에게 반항하는 세력이 있으면 가차없이 목을 날려버렸는데, 이는 제 아들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태자였던 모하마드 바케르 미르자는 반역 의심죄로 목이 잘렸고 나머지 아들 2명 역시 비슷한 이유로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던 것. 때문에 그가 1629년 1월 세상을 떠날 즈음 사파비 제국에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4. 쇠락과 외세의 침입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던 사파비 제국도 아바스 1세 사후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제국 밖에서 외세의 침입은 날로 강해지는 반면 유약한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했기 때문. 아바스 1세 사후 즉위한 사피는 무능하고 무식했다. 18세의 나이로 황제에 등극한 사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데다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위인이었는데, 재상이라고 앉혀놓은 인간은 세금 밖에 올릴 줄 모르는 등 아편 중독자에 무능하기까지 했다.[26] 사피가 무능하다는 걸 바로 알아챈 무라트 4세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바그다드를 다시 빼앗아갔고 우즈베크인들과 튀르크인들도 곳곳에서 약탈을 계속했다. 사피가 1642년 술을 퍼마시다 과음으로 사망하자 아바스 2세가 새 황제로 즉위한다. 그나마 아바스 2세는 '아바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름 능력있는 위인이었다. 즉위할 적 10세도 안되는 어린 나이였던터라 재상 사피 타키가 대신 섭정을 맡아 국무를 처리했고, 유능한 재상이었던 사피 타키는 나름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나갔다.

사피 타키는 뿌리깊은 페르시아의 부정부패를 줄이려 노력했다. 당연히 반발이 극심했고 결국 타키는 1645년 11월 암살당했다. 15세가 되자 아바스 2세가 직접 친정에 나섰다. 그는 1649년 무굴 제국에게 빼앗긴 칸다하르 지방을 재탈환했고 아우랑제브[27]를 어쩔 수 없이 물러가게 만들며 칸다하르를 완전히 수복했다. 1651년에는 러시아가 국경지대에 군사 요새를 신축하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강제로 파괴하고 현명하게 잘 넘겼으며, 1659년에는 카헤티 왕국에서 일어난 반란도 성공적으로 억눌렀다. 옛 아바스 1세 이래로 텅 비어버리다시피 한 조지아를 채우고 대러시아 국경 지대를 강화하고자 튀르크인들을 조지아 지방으로 이주하려 시도했는데 기존의 카헤티인들이 극렬힌 반발했던 것. 이로 인해 이주 계획 자체는 실패한다. 어쨌든 아바스 2세 치세 동안 사파비 제국은 점차 다가오는 외세의 위협을 나름대로 잘 넘길 수 있었다.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아바스 2세는 현명하고 품위있는 군주였다고 남아있고, 여러 건축물들을 건립하며 외견상으로는 충분히 아바스 1세 시절의 전성기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바스 2세가 1666년 세상을 뜨자 사파비 제국은 본격적으로 붕괴의 징조를 보인다.

아바스 2세 이후 즉위한 미르자 왕자는 제 왕명으로 '사피 2세'를 택했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자마자 1667년 쉬르반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카스피 해에서 코사크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자 천문학자들은 아무래도 그가 즉위 날짜와 왕명을 잘못 정한 것 같다며 사피 2세에게 다시 대관식을 올릴 것을 요청했다. 사피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668년 '술레이만 1세'라는 왕명으로 다시 대관식을 열었다. 하지만 왕명이 바뀌든 아니든 사람이 바뀔리는 없었는데 술레이만 1세는 유난히 정무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국사는 재상과 신하들에게 떠맏기고 자신은 하렘에서 후궁들과 놀아났던 것. 당연히 부정부패가 끝을 모르고 증가했고 신하들은 황제가 노는 틈을 타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붙여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냈다. 나라는 날로 피폐해졌고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1688년에는 카르틀리 왕국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오스만은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뼈아픈 패배를 입고 허둥지둥하던 터라 소득은 없었다. 술레이만 1세는 별일없이 카르틀리를 재정복했고 외치적으로 큰 이변은 없었다. 그의 재위 들어 조지아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더욱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4.1. 술탄 후사인

술레이만 1세는 1694년 임종 직전 신하들에게 2가지 선택권을 줬다. 만일 신하들이 제국의 번영과 황실의 영광을 원한다면 나이가 더 어린 타흐마스프 왕자를, 아니면 평화와 제국의 안위를 우선시한다면 나이가 더 많은 후사인 왕자를 택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술레이만 1세는 개인적으로 타흐마스프 왕자를 더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신하들은 후사인 왕자를 더 선호했다. 선천적으로 유약한 성품이던 후사인 왕자를 황제로 세워야만 신하들의 권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 황실의 환관들과 대고모였던 마르얌 베굼은 결국 후사인 왕자를 새 황제로 옹립했고, 후사인 왕자는 1694년 8월 7일 술탄 후사인이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참고로 이 대관식이 엄청나게 호화로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즉위를 기념해 수도 이스파한 내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나눠주었고, 수도 중앙의 광장과 바자르에는 등을 달아 빼곡하게 채웠다고. 술탄 후사인은 그의 대관식 때 기존의 관례를 깨고 이스파한의 최고위 이슬람 성직자였던 모하마드 바케르 마젤레시에게 주관을 맡겼는데 그는 이 대가로 샤리아를 제국 전역에 더 엄격하게 제공하길 바랐다. 술탄 후사인은 이를 들어주었고 제국 전역에서 의 제조와 음용, 여성의 자유로운 출입 제한, 도박과 비둘기 싸움 등을 모조리 금지했다.[28]

술탄 후사인이 무능하긴 했다지만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통치는 나름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분쟁이 일어나 반란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그의 무능함이 제대로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지방에는 크게 2개의 부족이 있었는데, 하나가 길자이 부족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압달리 부족이었다. 1709년에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하던 길자이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사파비 제국에 독립을 선포했고 7년 후에는 압달리 부족 역시 마찬가지로 사파비에게서 떨어져나갔다.[29] 점차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떨어져가는 와중에 제국 내부에서도 이와 동시에 반란이 일어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술탄 후사인은 바케르 마젤레시의 청을 들어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등 시아파 정책들을 강력 실시했는데, 내부의 수니파들이 이에 반발해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쉬르반과 다게스탄, 쿠르디스탄 지방의 수니파 신도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1721년에는 쉬르반 지방의 중심 도시였던 샤만키를 함락해 총독을 죽이고 모조리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체르케시야 지방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져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만에서 해적들이 날뛰고 북서부 지방에서는 역병이 창궐하는데도 무력한 술탄 후사인은 넋놓고 바라만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중에 1722년에는 러시아 제국표트르 대제에게 쉬르반, 다게스탄, 코카서스, 바쿠 등 중요한 알짜 땅들을 모조리 빼앗겼다. 제국이 점점 위태로워져가는 와중에 술탄 후사인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맞고만 있었다. 개중 최악의 역경은 앞서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의 길자이 부족들이 세운 호타키 왕조였는데, 이들은 점차 힘을 키워 심지어 수도 이스파한까지 진격하려 들었던 것이다. 호타키 왕조의 왕 마흐무드 호타키가 아프간 군대를 이끌고 이스파한으로 쳐들어오자 소수의 아프간 군대를 우습게 본 술탄 후사인은 대군을 이끌고 골나바드 전투에서 마흐무드와 격돌했다. 하지만 술탄 후사인의 형편없는 지휘력으로 이길 수 있었을 리가. 결국 술탄 후사인은 쫒겨 이스파한으로 도망쳐들어왔고, 수도를 포위한 아프간 군대에 몇 개월 동안 맞서려 들었다. 하지만 술탄 후사인의 처참없기 그지없는 통치력과 기근,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 등으로 8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굶어죽는 데까지 이르자 버티지 못하고 결국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30] 항복한 술탄 후사인은 페르시아 황제 자리를 마흐무드 호타키에게 넘겼다. 마흐무드 호타키는 처음에는 후사인을 호의적으로 대해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저를 내치고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하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를 제외한 모든 사파비 왕족 남성들을 죽이라는 명까지 내린다.[31]

마흐무드 호타키는 이스파한 점령 후 얼마 못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니 4월 25일 사망했다. 마흐무드가 죽자 그 아들 아쉬라프 호타키가 즉위해 아버지가 빼앗은 페르시아의 지위를 주장했다. 아쉬라프 호타키도 처음에는 제 아버지로 인해 모든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어버린 술탄 후사인을 동정했고 덕분에 후사인은 제 딸을 아쉬라프와 혼인시키는 등 나름 호의적인 행동을 베풀었다.[32] 그러나 페르시아 지방에 간섭할 기회만을 노리던 오스만 제국이 이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바그다드의 오스만 총독이던 아흐마드 파샤는 아쉬라프에게 서한을 보내 '당장 사파비 황실에게 페르시아를 돌려주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가라'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다. 당연히 격분한 아쉬라프 호타키는 1726년 11월 15일 술탄 후사인의 목을 잘라 아흐마드 파샤에게 돌려준다. 페르시아의 정당한 지배자는 사파비 왕조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이야기. 이렇게 술탄 후사인은 58세의 나이로 어이없이 죽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잽싸게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코카서스 지방들을 서로 갈라먹어 떼어갔다.

4.2. 나디르 샤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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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르 샤 1730년대 오스만 제국사파비 제국을 기록한 지도.
그렇게 수도 이스파한호타키 왕조에게 장악되어 있던 와중, 이스파한에서 겨우 빠져나왔던 타흐마스프 왕자는 옛 수도 타브리즈로 향했다. 그는 스스로 페르시아의 정당한 샤를 자칭하고 '타흐마스프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해 따로 정권을 세웠는데, 심지어 코카서스 지방의 수니파 일부도 그를 지지하는 등 나름대로 세력도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 타흐마스프 2세는 인근의 강대국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으로부터도 페르시아의 정당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타흐마스프 2세는 최대 적이던 호타키 왕조를 수도에서 몰아내고 제국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던 중 나디르 샤라는 인물을 만난다. 나디르 샤는 아프간 출신의 걸출한 신인 영웅이었는데,[33] 천재적인 군사 재능을 발휘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타흐마스프 2세의 군대 전체를 지휘하는 군사령관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1729년 5월 헤라트에서 압달리 부족을 굴복시켰고, 그해 9월에는 호타키 왕조의 아쉬라프마저도 담간 전투에서 꺾어버렸다. 그 덕에 타흐마스프 2세는 12월 이스파한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34] 나디르 샤는 보답으로 타흐마스프 2세의 딸과 혼인, 칸다하르를 비롯한 페르시아 동부 전체를 총괄하는 대총독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나디르 샤는 여세를 몰아 1730년에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호타키 왕조에게 수도가 먹혀있던 혼란기 동안 오스만 제국이 빼앗아간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나디르 샤의 천부적인 재능이 어디 가지 않았던지 나디르 샤는 그 오스만 군대마저도 대파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을 더 밀어붙이기 직전에 마쉬하드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 동생 이브라힘을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돌아와야만 했다.[35] 옛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디르 샤와 타흐마스프 2세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었는데, 타흐마스프 2세가 나디르 샤의 재능을 질시했기 때문. 결국 나디르 샤가 반란을 진압하느라 동쪽으로 가있던 사이 타흐마스프 2세는 직접 오스만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렸다. 하지만 나디르 샤 같은 천재나 당시의 오스만 제국군을 격퇴할 수 있었지, 일반인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타흐마스프 2세는 처참하게 깨졌다. 심지어 나디르 샤가 되찾은 영토마저 모두 다시 빼앗겼으며 조지아아르메니아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겨우 평화협정을 맺었다. 상황을 파악한 나디르 샤는 격노했고, 궁전으로 돌아와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시켜버린다.[36]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시킨 나디르 샤는 타흐마스프 2세의 어린 아들 아바스 3세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당연히 아바스 3세는 허수아비였고 실세는 섭정직을 차지한 나디르 샤가 다 가지고 있었다. 나디르 샤는 곧장 대오스만 전쟁을 재개해 타흐마스프 2세가 빼앗겼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지방을 1735년 여름에 다시 수복했다. 뿐만 아니라 1735년 3월에는 러시아와도 협정을 맺어 모든 러시아 군대가 페르시아 국경 밖으로 철수한다는 확약을 받아냈고, 외세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나디르 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로 인해 사파비 제국은 코카서스 지방과 이란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 대부분을 다시 얻어냈다.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나디르 샤가 고작 어린 꼬맹이의 아래에서 섭정이나 맡는 것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나디르 샤는 수하들의 옹립을 받아 1736년 아바스 3세를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폐위된 아바스 3세는 아버지 타흐마스프 2세와 함께 수감되어있다가 반란을 두려워한 나디르 샤의 아들 레자 콜리 미르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로써 237년에 걸친 사파비 제국이 완전히 막을 내린다.[37]
[1]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반란세력 호람딘의 잔존 세력으로 사피 앗 딘 시절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해 사파비야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이다르 하에서는 명실상부한 사파비야의 핵심 군사력이었다.[2] 원래 술탄 야쿠브는 이들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자 했으나 사파비야 일가와 친척 관계였던 야쿠브의 모친이 필사적으로 말리면서 어쩔 수 없이 유배형으로 만족해야만 했다.[3] 현 아제르바이잔 사마키 라욘 지방.[4] 17,000의 키질바시들로 28,000의 우즈베크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마일 1세는 샤이바니의 해골을 보석으로 장식해 술잔으로 썼다고.[5] 이후에도 우즈베크인들은 부유한 페르시아 지방을 노려 수차례 약탈하러 침공은 해왔지만 사파비 제국의 존재 때문에 예전처럼 아예 점령하고 둥지를 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6] 이때 워낙 청야전술을 철저하게 펼쳐서 예니체리들에게 나누어줄 군량조차 없자 분노한 오스만 병사들이 셀림 1세의 천막에 항의의 뜻으로 총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7] 이스마일 1세 본인도 이 전투에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간신히 달아났고, 오스만 병사들은 이스마일 1세의 아내들도 포로로 붙잡아 터키로 끌고갔다.[8] 타흐마스프 1세가 궁정에서 신하들이 모인 앞에서 디브 술탄 룰루에게 직접 화살을 쏘아버렸다고 한다.[9] 주요 내용은 페르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영유권을 인정하고 라쉬둔 칼리파국 시대를 저주하는 걸 멈추는 대신, 오스만 제국은 메카메디나 등 이슬람 성지에 페르시아인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10] 당시 후마윤은 15년 가까이 집도 없이 떠돌던 방랑자에 불과했다.[11] 나중에 무굴 제국이 사파비 제국을 넘어설 규모까지 성장하자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은 이 칸다하르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면서 사이가 급경색된다.[12] 이스마일 2세는 파리 칸 카눔 공주를 홀대했다. 기껏 황제로 올려놓은 이스마일 2세가 자신을 홀대하자 화가 난 파리 칸 카눔은 결국 그를 죽여버렸다. 설에 의하면 그가 피우는 아편에 독을 섞어 조용히 보내버렸다고 한다.[13] 죽인 사유는 황후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고 암살자들에 대한 재판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4] 마흐드 이 울야 황후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었다.[15] 이 아마스야 조약 파기가 엄청 치명적이었다. 기껏 얻어낸 평화가 몇십년도 못가서 다시 위협받게 생겼고, 이때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을 상대할 여력 따윈 없었기 때문이었다.[16] 그의 재위시절 이탈리아에서 사절로 방문한 무명의 화가가 그린 그의 초상화다.[17] 사파비 제국의 몰락과 함께 파괴되었던 것을 현대에 들어 다시 복원했다.[18]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머스켓 기병대였다.[19] 덕분에 사파비 제국이 페르시아인과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20] 당시 오스만 술탄 무라트 4세는 1639년 주하브 조약으로 터키와 페르시아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이 조약으로 현대 터키와 이란의 경계가 나뉜다.[21] 대략 6만 명에서 7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인구가 페르시아로 끌려갔다.[22] 베네치아의 89대 도제였다.[23] 페르시아 사절들에게 흥미를 느낀 클레멘스 8세는 유난히 오랫동안 사절들을 접견했다고 한다.[24] 유럽인들은 이색적인 페르시아인들의 모습에 열광했다. 이즈음 쓰여진 셰익스피어의 희곡 열두 번째 밤에도 페르시아의 를 의미하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25] 영국인들은 페르시아가 포르투갈로부터 호르무즈 항구를 되찾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26] 참고로 제 할아버지 아바스 1세와 마찬가지로 담배를 정말 혐오했다고 한다. 거리에서 흡연하는 사람을 보면 목구멍에 녹인 을 부어 죽어버렸다고.[27] 이 당시에는 샤 자한이 황제로 버티고 있어서 아직 왕자 신분이었다.[28] 물론 별 효과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고모 마르얌 베굼에게 권력이 넘어갔고, 술탄 후사인은 이 이후로 술독에 빠져서 살았다.[29]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사파비 제국의 가혹한 종교 정책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0] 당시 술탄 후사인의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타흐마스프가 도망쳐 지방에서 군대를 끌어오려했지만 그 사이에 이스파한이 이미 항복해버렸다.[31] 경악한 술탄 후사인은 제 몸을 던져 이를 막으려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까지 입었다. 그 덕에 겨우 2명의 어린 왕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32] 이는 페르시아 지방의 관료들에게 호타키 왕조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33] 참고로 이 인간은 아버지를 어릴 때 잃고 장작이나 주워 파는게 유일한 수입원이었을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순전히 자신의 재능과 실력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뜻.[34] 이 과정에서 나디르 샤가 제 군사들에게 지급할 돈을 거두기 위해 이스파한을 약탈했다. 타흐마스프 2세는 이를 전해듣고 상당히 언짢아했다고.[35] 나디르 샤는 돌아온지 14개월만에 반란을 제압했다.[36] 그는 타흐마스프 2세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그 추태를 신하들에게 보여준 뒤 '이렇게 자질없는 자가 우리의 황제로 군림하게 놔둘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고 한다.[37] 그러나 아프샤르 왕조 또한 나디르 샤의 무리한 원정으로 인해 10여년 만에 나디르가 암살당하며, 그 영토는 이란의 잔드 왕조, 아프간 지역의 두라니 왕조로 분열되었다. 이후 호라산 지역에 겨우 잔존하는 신세로 남아있던 아프샤르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킨것은 카스피 해 남단에서 발흥해 새로이 이란을 접수해가고 있던 아가 모함마드 샤의 카자르 왕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