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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30 18:26:40

이스마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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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제3대 황제
이스마일 2세
شاه اسماعیل دوم
파일:Shah_Ismayil_II.jpg
본명 이스마일 미르지(اسماعیل میرزا‎)
생몰년도 1537년 5월 31일 ~ 1577년 11월 24일 (40세)
재위기간 1576년 8월 22일 ~ 1577년 11월 24일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반키질바시 정책2.3. 수니파 정책2.4.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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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파비 제국의 3대 샤.

2. 생애

2.1. 즉위

1547년에 시르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오스만 제국과 몇 차례 전투를 하기도 하였고, 1556년에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궁정 중신의 음모로 인해 동북방의 한 성채에 20년 동안 유폐되었다. 1574년 선제 타흐마스프 1세가 병에 걸려 더 이상 살아남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자 키질바시는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타흐마스프의 아들인 하이다르와 이스마일 이 2명을 놓고 갈등하였다. 하이다르를 옹호하던 파는 이스마일을 암살하기 위해 암살단을 보내지만, 타흐마스프가 이스마일의 군공을 아깝게 생각하여 암살단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타흐마스프는 1576년에 사망하였고, 하이다르파와 이스마일파료 나뉘어 내분이 시작되었다.

2.2. 반키질바시 정책

그는 재위 전 19년 동안 유폐 생활을 했으며 이 유폐생활의 영향으로 즉위하자마자 키질바시의 간섭을 이겨내려고 하며 친정을 시도한다. 또한 그는 제위를 공고히하기 위해 친족들을 숙청한다. 또한 그들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키질바시 수장들도 모두 죽여버렸다.

2.3. 수니파 정책

그는 당시 국교였던 시아파 대신 수니파를 후원하였다. 또한 그동안 탄압받던 수니파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수니파와 시아파의 공존을 추구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당연히 이 정책은 기득권층인 시아파 성직자들이 반발하였는데 이스마일은 그에게 반항하는 시아파 성직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2.4. 암살

그러나 이스마일 2세의 왕권 강화 시도는 키질바시들에 의해 난관에 부딪친다. 특히 키질바시들은 이스마일 2세의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계속해서 맞서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스마일 2세는 이 반란들을 진압했으나 불안함과 편집증으로 재위를 보낸다. 결국 궁정 내분에 휩싸여 그는 1577년에 독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