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tle of Vimy Ridge La bataille de la crête de Vimy[불] Die Schlacht bei Arras (1917)[독] 비미 능선 전투 | ||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2차 아라스 전투의 일부 | ||
기간 | ||
1917년 4월 9일 ~ 1917년 4월 12일 | ||
교전 지역 | ||
비미, 프랑스 | ||
교전국 | ||
캐나다 자치령[3] 영국 | 독일 제국 | |
동원 병력 | ||
4개 사단 1개 사단 | 3개 사단 | |
사령관 | ||
줄리안 빙 |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 | |
결과 | ||
영국/캐나다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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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프랑스 비미 능선에서 펼쳐진 전투로 영국군이 구상한 대규모 공세인 2차 아라스 전투의 서전 역할을 하였던 전투이다. 비미 능선 전투, 혹은 비미 고원 전투라고도 한다.
2. 전개
비미는 북프랑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1차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거점으로 구성된 지점들 중 하나였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곳을 거쳐야만 넓은 렝-도에 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독일군은 철조망과 3중 참호, 대규모 포병과 기관총좌를 터널로 연결한 야전요새 수준의 방어를 구축해놓고 있었으며, 이곳을 공격한 프랑스와 영국군은 당시의 전근대적인 병력 축차투입으로 막대한 인명손실을 겪어야만 했고, 1915년 프랑스군은 무려 15만명의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 사령부는 1917년 또 다른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번에는 공세의 핵심을 영국 제5 보병사단과 새롭게 보충된 영국 자치령 캐나다군이 도맡게 되었다.
다행히도 캐나다군의 지휘관은 그 동안에 영-프군이 시도한 실패들에서 교훈을 얻어 후방에 모형을 만들고 소대 단위로 전술을 훈련시켜, 각개 병사들이 장교나 부사관 수준의 지형습득 능력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단순한 돌격이 아니라 개별적인 임무를 소대 단위로 부여받았고 독일군 참호 밑으로 땅굴을 파 대규모 지뢰를 폭파시켜 참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들도 고심했다.
3. 전투
1917년 4월 2일, 캐나다군은 적 진지에 대한 대규모 포병사격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이 포격의 규모는 그 소리를 영국, 런던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1주간에 걸쳐, 무려 백만발 이상의 탄을 퍼부어 독일군 진영을 갈아엎어버렸고, 리지 라인 뒤에 은폐되어 있는 독일군 포병진지를 섬광과 소음 등으로 관측하여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에 대포병사격을 가하여 약 83%의 독일군 포대를 파괴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약 1주간의 야간돌격을 실시했다. 아서 커리 장군은 이런 야간돌격은 어리석고 너무 위험한 공격법이라고 주장했으나 독일군은 이 기간을 고통의 주간으로 부를 정도로 괴로워했다.
1917년 4월 9일, 부활절 월요일 새벽녘에 3만여명의 캐나다군은 포격의 바로 뒤에 붙어 참호를 점령하는 잠행탄막 전술을 시도하였다. 영국군이 솜므 전투에서 사용했다가 병사들의 숙련도 부족으로 실패했던 것과 달리 캐나다군은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대규모 병력이 포격선 바로 뒤에서 양측 참호간의 무인지대를 걸어서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역포화 전술같은 몇가지 실험적 전술도 동원되어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성공을 거두어 독일군 포병대를 대부분 가동불능 상태로 만들어 전진중인 보병들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기관총의 간접사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통해 화력적 우위로 독일군이 참호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2시간 내로 캐나다군 4개 사단중 3개 사단이 목표를 달성했으나, 4번째 사단은 리지 145고지에서 쏟아지는 기관총 탄막에 전진이 지연되었으며, 87대대는 절반의 병력을 손실하였다. 보급과 공병을 맡던 85 노바스코샤 하이랜더 부대가 이 지역에 증파되어 그날이 저물 무렵 145고지도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이 승리를 듣자 그럴리가 없다고 못믿다가 작전에 나선 부대가 캐나다군이었다는 말을 듣자 그제서야 캐나다인들이라면 가능하지!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
3.1. 영국군
사실 이 비미 전투는 캐나다군만이 담당한 것이 아니다.- 영국 제1 군단은 132문의 중포와 102문의 야포를 제공하여 전체 포병전력의 21%를 제공했다.
- 돌격에 투입된 13개 대대중 1개 대대는 영국군이었다.
- 영국 항공대 16비행대도 24기의 항공기를 제공, 상대측 포병전력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협조했다.
- 보급의 대부분은 영국이 담당하였다.
4. 결과
4월 12일, 캐나다군은 비미 리지 전역을 장악했다.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이 지휘하는 독일 6군은 2만여명의 사상자와 4천여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 캐나다군은 3598명이 사망하고 7004명이 부상당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독일군은 방어하기 어려운 저지대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세는 대규모 전략의 일부였으며 보다 남쪽에서 진행된 영국군이나 호주군의 공세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캐나다군의 승리로 얻은 전략적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다만, 이 작전에서 치러진 일련의 전투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감으로써 참호를 돌파할 전술적인 기초들이 마련되었고, 연합군은 아라스 주변에서 장기간의 고착상태를 타개하고 일시적이나마 전진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미 리지 전투는 연합군이 1년 반만에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고, 독일군이 돌파 불능의 방어거점으로 삼았던 비미 리지를 점령해 내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전투이다.
1918년 4월이 되자 독일군 최후의 공세에서도 이 지역의 중요성은 다시 입증되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이 역공을 가하는데 큰 이점을 제공했다.
또한, 캐나다군의 활약은 캐나다 군인들과 캐나다인들이 "영국 자치령 캐나다"가 아닌 "캐나다"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호주인의 정체성을 심어줬듯이 비미 리지 작전도 캐나다인들의 독립심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어 캐나다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4]
[불] 프랑스어[독] 독일어. Schlacht bei Vimy (비미 전투)라고도 한다.[3]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의 자치령(Dominion)이어서 정치는 분리되었지만 외교권과 국방권이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의 전투에 참전해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은 자치령들의 독립 의식을 강화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4] 다만 갈리폴리 전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영국의 삽질로 인한 대참사였으며, 특히 호주군은 여기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비미 리지 전투를 자랑스러워하는 캐나다와 달리, 호주는 갈리폴리 전투를 비극적인 날로 기억하며 이를 기리는 영화까지 만들었다. 영국 자치령 소속이 아닌 호주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남의 나라끼리 싸우는데 불려가서 의미없는 희생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