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오서의 수상 이력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 |
이름 | 브라이언 오서(Brian Orser) |
출생 | 1961년 12월 18일 ([age(1961-12-18)]세) |
온타리오 주 벨빌 | |
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8cm |
종목 | 피겨 스케이팅 |
링크 |
[clearfix]
1. 개요
캐나다 출신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자 피겨 스케이팅 코치이다. 국내에서는 김연아를 맡았던 코치로 유명했으며, 그 이후로도 많은 선수들의 코칭을 맡았다.2. 선수 경력
2.1. 1976-77 시즌
1977 캐나다 노비스선수권에서 우승했다.2.2. 1977-78 시즌
1978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4위, 1978 캐나다 주니어선수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2.3. 1978-79 시즌
1979 캐나다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했다.2.4. 1979-80 시즌
비엔나 컵에 시니어 부문으로 참가해 동메달을 따고 1980 캐나다선수권에서 4위에 올랐다.2.5. 1980-81 시즌
네벨혼 트로피에서 은메달, 세인트저베이스에서 금메달을 땄다. 스케이트 캐나다에서는 6위에 올랐다. 1981 캐나다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우승하였으며 1981 세계선수권에서는 6위에 올랐다.2.6. 1981-82 시즌
세인트 이벨에서 우승하고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2 캐나다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하고 1982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2.7. 1982-83 시즌
세인트 이벨에서 우승하고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3 캐나다선수권에서는 3연패를 달성하고 1983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2.8. 1983-84 시즌
스케이트 캐나다와 1984 캐나다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4 세계선수권에서는 스캇 해밀턴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2.9. 1984-85 시즌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우승하고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5 캐나다선수권에서는 5연패를 달성하고 1985 세계선수권에서는 알렉산더 파데예프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2.10. 1985-86 시즌
세인트 이벨에서 우승하고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6 캐나다선수권에서 6연패를 달성하고 1986 세계선수권에서는 브라이언 보이타노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2.11. 1986-87 시즌
펜타컵에서 우승하고 1987 캐나다선수권에서는 7연패를 달성했다. 1987 세계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2.12. 1987-88 시즌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우승하고 1988 캐나다선수권에서는 8연패를 달성했다.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
3. 커리어
올림픽 | ||
은메달 | 1984 사라예보 | 남자 싱글 |
은메달 | 1988 캘거리 | 남자 싱글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7 신시내티 | 남자 싱글 |
은메달 | 1984 오타와 | 남자 싱글 |
은메달 | 1985 도쿄 | 남자 싱글 |
은메달 | 1986 제네바 | 남자 싱글 |
은메달 | 1988 부다페스트 | 남자 싱글 |
동메달 | 1983 헬싱키 | 남자 싱글 |
국제대회:시니어 | ||||||||||||
대회 | 76–77 | 77–78 | 78–79 | 79–80 | 80–81 | 81–82 | 82–83 | 83–84 | 84–85 | 85–86 | 86–87 | 87–88 |
올림픽 | 2nd | 2nd | ||||||||||
세계선수권 | 6th | 4th | 3rd | 2nd | 2nd | 2nd | 1st | 2nd | ||||
NHK 트로피 | 2nd | 2nd | ||||||||||
스케이트 캐나다 | 6th | 2nd | 2nd | 1st | 1st | 1st | ||||||
노바라트 | 1st | |||||||||||
St. Ivel | 1st | 1st | 1st | |||||||||
St. Gervais | 1st | |||||||||||
네벨혼 트로피 | 2nd | |||||||||||
비엔나 컵 | 3rd | |||||||||||
국제대회:주니어 | ||||||||||||
주니어 세계선수권 | 4th | |||||||||||
국내대회 | ||||||||||||
캐나다선수권 | 1st N | 3rd J | 1st J | 4th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1st |
J=주니어, N=노비스 |
4. 코치 경력
현역 은퇴 이후로는 프로 스케이터 겸 코치로 전향하여 아이스 쇼에 출연하는 한편 각지의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토론토 크리켓 클럽의 메인 코치를 역임하고 있다.4.1. 김연아
코치로 전향하였지만 전담하는 선수는 없었고, 처음 김연아를 만난 2006년에도 전담 코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캐나다 클럽 소속이었고 한국 소속이었던 김연아가 해외까지 오는 것은 힘들어 보였고, 그가 한국으로 갈 수는 더더욱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연아 측은 토론토 클럽으로 해외원정을 오면서까지 오서가 코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그녀와 만난 후 그 능력을 알아본 오서는 헤드 코치로서의 자리를 승낙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오서는 "마법 같은 4년이었다"라고 평했다.오서는 김연아에게 표현력과 연기력[2]을 가르친 코치였으며 그는 이를 "우리는 그녀가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도록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결과 시니어 무대에서 김연아는 화려한 데뷔를 했고 이후의 성과는 이루어졌다. 해외 언론은 김연아를 "오서의 금메달 꿈을 이루어줄 제자"로 평하며 이 둘의 친밀한 관계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김연아는 결국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 이루지 못했던 금메달까지 이루어내는 성과를 이루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녀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받은 금메달은 오서에게도 무척 특별했던 듯하다. 하지만 김연아를 코칭하던 시절 코치로서 아주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몇 번 했다. 첫 번째로 2007 세계선수권에서 김연아의 부상과 체력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프리 스케이팅에서 2번의 트리플 러츠를 모두 후반으로 배치하였다. 두 번째로 2009 세계선수권 프리 스케이팅에서 마지막 컴비네이션 스핀이 규정에 어긋나 0점 처리를 받았다. 이에 대해선 본인과 스핀 코치가 바뀐 규정을 몰라서 나온 실수라고 인정했다.
5종 점프를 구사할 수 있는 김연아에게 트리플 악셀로 유명한 오서가 붙음으로서 모든 점프를 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다. 트리플 악셀 자체가 여성이 뛰기에 쉬운 점프는 아니다. 2009-10 시즌 올림픽 이후에 오서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트리플 악셀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 사실 전체적으로 2008-09 시즌에 있어 김연아가 올림픽을 위한 안정 노선을 추구한 것과 달리, 오서는 선수 기량을 위한 도전적인 안을 제시하는 편이었다. 트리플 룹으로 컴피를 변경한 사안의 경우 오서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사후 통보를 받았을 정도였다.
2010년 4월에 있었던 KCC 스위첸 페스타 온 아이스 쇼에서 본드걸 컨셉인 김연아에 맞춰 제임스 본드 컨셉으로 공연해 팬들을 놀래켰다. 이건 2009년 아이스 쇼에서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으면 자신이 뭔가를 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거라고 한다.
김연아의 코치를 맡던 당시 오서는 한국 국민들, 특히 김연아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이유는 "아빠 미소"로 대표되는 김연아에 대한 그의 애정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연아가 점프하면 본인도 점프하고 김연아의 경기를 온 몸으로 따라하면서 응원하는 제스처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김연아와의 시간이 "매우 특별한 시간"이며 김연아에게서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같은 기품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0년 8월 24일, 브라이언 오서가 '올댓스포츠의 박미희 대표[3]로부터 일방적인 결별 통보를 받았다'고 오서의 매니지먼트사 IMG가 밝혀서 논란이 일었으며, 오서는 김연아와 결별하게 되었다.[4]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해외에서는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가 헤어진 후 그를 설명할 때 더 이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코치'라고 말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4.2. 아담 리폰, 크리스티나 가오
김연아와 결별한 오서는 아담 리폰과 크리스티나 가오의 담당 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2010-11 시즌 리폰은 2010-11 그랑프리 파이널에는 진출하지도 못했고, 2011 사대륙선수권 5위에 머무르는 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가오는 2010-11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6위[5], 2011 주니어 세계선수권 5위를 하였다. 두 선수 다 자신보다 어린 선수들이 시니어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걸 감안하면 더욱 미래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이후 2011년 4월 1일, 오서의 남은 제자 중 한 명인 아담 리폰이 메인코치를 브라이언 오서에서 지슬란 브라이어드로 변경했다. 브라이어드는 오서와 같이 크리켓 클럽에 있었으며 리폰의 보조코치였다. 즉 리폰은 보조 코치를 자신의 메인코치로 기용함과 동시에 메인 코치였던 오서를 해고해 졸지에 오서는 보조 코치에게도 밀려난 신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김연아와는 다르게 리폰은 오서와 계약기간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일방적인 통보였다.
4.3. 하뉴 유즈루,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2011과 2012년에는 하비에르 페르난데스와 하뉴 유즈루의 코치를 맡았다. 당시 페르난데스는 스페인 최초로 그랑프리 시리즈 2곳에 배정을 받았으며, 하뉴는 2012 세계선수권 동메달의 경력이 있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하뉴 유즈루가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김연아에 이어 두 대회 연속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코치라는 명예를 얻었다.[6] 또한 하비에르 페르난데스도 4위를 차지했다. 이후 페르난데스는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하였으며, 하뉴는 세계선수권에서 2번을 우승하고 그랑프리 파이널 4연패를 달성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하뉴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세 대회 연속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코치가 되었으며 또한, 페르난데스가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4.4.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제이슨 브라운
2018년 5월부터 코치를 맡았다.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는 투트베리제 코치와 결별한 후, 오서 코치 밑에서 러츠의 엣지 교정을 시도하고, 체중을 늘려 아이스 커버리지가 넓고 빠른 스케이팅으로 알려진 북미식 스타일로 노선을 변경하려고 했었다.제이슨 브라운은 코치를 바꾸고 첫 시즌에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두번째 시즌에 사대륙선수권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5. 소속 선수
5.1. 은퇴/이적한 선수들
- 가브리엘 데일먼
- 곽민정
- 김연아
- 남 응우옌
- 라일리 매컬로-치카사르사
- 레이첼 커클랜드 / 에릭 래드포드
- 로만 사돕스키
- 미카엘라 듀 토트
- 소니아 라푸엔테
- 숀 칼로
- 스티븐 고골레프
- 아담 리폰
- 아멜리아 오젤
- 알레인 샤트랑
- 앨리슨 슈마허
- 엘렌 게데바니쉬빌리
- 엘리자벳 뚜르진바예바
-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 예카테리나 쿠라코바
- 요시 헬게손
- 윤예지
- 조셉 판
- 차준환
- 콘라드 오젤
- 크리스티나 가오
- 페도르 안드리브
- 피베 디 토마소
- 하뉴 유즈루
-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5.2. 코칭 선수 수상 기록
<colcolor=#000> 대회 | 금 | 은 | 동 |
올림픽 | <colbgcolor=#ffe970,#c3a100> 4 | <colbgcolor=#c0c0c0,#555555> 0 | <colbgcolor=#d7995b,#6d441a> 1 |
세계선수권 | 5 | 5 | 7 |
유럽선수권 | 7 | 0 | 1 |
사대륙선수권 | 3 | 4 | 0 |
그랑프리 파이널 | 7 | 5 | 2 |
주니어 세계선수권 | 1 | 0 | 0 |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 1 | 0 | 2 |
합계 | 18 | 14 | 13 |
6. 크레이그 리스크 사건
동성애자이다. 1998년 애인 크레이그 리스크(Craig Leask)가 이혼소송과 비슷한 것[7]을 거는 바람에 동성애자라는 게 알려졌다. 아웃팅을 우려한 그는 어떤 스케이터도 아웃팅을 반겨하지는 않는다며 소송을 비공개로 진행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언론에 이미 공개가 된 후였다. 다행히도 '브라이언 대결'로 유명한 미스터 트리플 악셀을 바라보는 캐나다 언론의 시선은 호의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받아들이고 옹호해주었다. 그는 나중에 당시 불안감을 표명했던 게 지나친 걱정이었다며 "지난 며칠간 나는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것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라며 공개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크레이그 리스크가 결혼 전 혼전합의서를 작성하자고 요청했을 때 사랑한다는 이유로 작성하지 않았고, 나중에 자신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이 들통나자 연인을 내쫓고, 자기 재산은 그대로 가지면서 상대방의 개 2마리를 죽였다. 이는 캐나다에서는 유명한 사건인데, 당시 오서는 자신의 명예를 생각해서 비공개 재판을 요청했지만, 판사는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해 공개재판으로 했고, 이때 오서가 게이라는 것도 함께 알려진 것이다.[8]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김연아와의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김연아 측에서 계약서를 쓰려고 할 때 계약 기간이 끝나도 스승과 제자로 영원히 남아있고 싶다며 계약서 쓰길 거부했다.참고로 저 사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느니 스폰서가 끊겼다느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다. 애초 법정에 동성애인의 위자료 청구 소송이 받아들인다는 것부터가 성소수자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는 척도 그 자체이다. 이런 상태에서 김연아와 만났다는 것은 더더욱 구라일 수 밖에 없다. 애초에 김연아와 함께 일한 시기는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일이다. 오서에게는 김연아 이전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처음 그가 전담코치 자리를 거절했던 것도 그의 제자들을 고려해서였다.
2015년 5월 시점에서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 신경 쓰는 한국인은 거의 없으며, 사실 모르는 사람도 은근히 많다.[9]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하고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여담으로 브라이언 전쟁의 당사자인 브라이언 보이타노도 2013년 12월 커밍아웃을 했다.
[1] 개막식에서 캐나다 선수단이 입장할때 기수로 나왔다.[2] 다만, 김연아가 브라이언 오서를 선택한 건 트리플 악셀을 배우기 위해서였고, 오서는 기술 부분을 전담하는 코치였다. 표현력과 연기력을 가르친 건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일 가능성이 높다.[3]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이다.[4] 김연아는 이후 미셸 콴의 제부인 피터 오퍼가드와 코치 계약을 맺고, 2011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땄다.[5] 출전한 미국 선수들 중에선 제일 잘하긴 했다. 다른 미국 선수들은 각각 7위와 8위를 했다.[6] 김연아와 하뉴 모두 주니어 때 시즌스윕을 달성하며 오서에게 가기 전부터 이미 특출난 유망주였다. 오서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선수를 고르는 운도 좋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7] 동거하는 동안 연인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며 이별 후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이었다.[8] 물론 게이라고 차별받은 적은 없다. 그 이전에 법원이 이러한 걸 한다는 것이 동성애자도 법적인 존중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9] 코치와의 결혼설이 돌았던 안도 미키를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