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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3:39:02

북서런던 더비

1. 개요
1.1. 토트넘 홋스퍼 FC vs 첼시 FC
1.1.1. 역사1.1.2. 선수 이적
1.1.2.1.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1.1.3. 여담
1.2. 아스날 FC vs 첼시 FC
1.2.1. 선수 이적
1.2.1.1.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1.2.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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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런던 연고의 토트넘, 아스날 vs 서런던 연고의 첼시의 더비 매치. 북동런던 더비와 마찬가지로 명칭이 길어 흔히 런던 더비로 부른다.

1.1. 토트넘 홋스퍼 FC vs 첼시 FC

북서런던 더비 (North West London Derby)
파일:토트넘 홋스퍼 FC 로고.svg 파일:첼시 FC 로고.svg
토트넘 홋스퍼 FC
Tottenham Hotspur F.C.
첼시 FC
Chelsea F.C.
파일:totten.jpg
토트넘 홋스퍼 FC의 주장 손흥민
첼시 FC의 주장 리스 제임스
종합 전적
(2024년 5월 3일 기준)
토트넘 홋스퍼 FC
Tottenham Hotspur FC
무승부 첼시 FC
Chelsea FC
55 43 80
최근 5경기 전적
일시 장소 결과 대회
2022년 8월 15일 스탬퍼드 브리지 첼시 2 - 2 토트넘 프리미어 리그
2023년 2월 26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토트넘 2 - 0 첼시 프리미어 리그
2023년 11월 7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토트넘 1 - 4 첼시 프리미어 리그
2024년 5월 3일 스탬퍼드 브리지 첼시 2 - 0 토트넘 프리미어 리그
2024년 12월 9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토트넘 3 - 4 첼시 프리미어 리그

두 팀은 런던을 연고지로 하여, 런던 팀들이 으레 그렇듯 사이가 매우 나쁘며 종종 충돌도 발생하였다.

2012년 한 설문#에 따르면 첼시 팬들은 아스날이나 맨유보다 토트넘을 더 주요 라이벌로 여긴다는 결과가 있다. 이 설문에서 토트넘 팬들은 아스날을 첫번째 라이벌로, 첼시를 두번째 라이벌로 여긴다고 하였다.[1]

2020년, 언론사 디 애슬레틱 설문조사에서는, 첼시팬들이 라이벌 구단으로 1위를 토트넘 (58.6%) 2위로 아스날 (26.7%)을 지목했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악연은 첼시의 훌리건과 관계된 점도 있다. 첼시의 훌리건은 신나치 극단주의와 관련이 많았다. 이들 중 극성인 사람들은 히틀러를 찬양하며 인종청소를 선동하고 런던 내 유대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다.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유럽 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국 금융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첼시의 훌리건은 유대인이 밀집한 지역을 연고로 하는 토트넘 역시 곱게 볼 리 없었으며, 이는 경기장 내까지 이어져 유대인을 비방하는 노래를 부르는 등 여러 악연을 쌓아갔다.

뿐만 아니라, 첼시는 지역 라이벌의 부재를 느끼고있는 상황이었는데. 토트넘은 아스날(북런던 더비), 리버풀은 에버튼(머지사이드 더비)과 맨유(노스웨스트 더비)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첼시는 인근 서런던 지역에 풀럼 FCQPR가 있었지만, 이들과 경쟁 다운 경쟁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 이에 첼시팬들이 같은 서런던팀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 구단이 북런던팀 토트넘이 되게되었다.
첼시는 진정으로 직접적인 지역 라이벌리가 없었어요. 풀럼이 바로 옆에 있긴 했는데, 예전에는 이번주에 풀럼경기보고. 다음주에는 첼시경기보고 그랬거든요. QPR은 첼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경쟁적인 라이벌은 아니죠. 첼시팬들은 불가피하게 다른 곳을 볼 수 밖에 없었어요.
1972~1996년까지 트로피 가뭄이 있어서 첼시가 오랫동안 우승경쟁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맨 처음 일정이 발표되면 모두가 첫 번째로 찾아봤던 경기가 무엇이었냐고요?
바로 토트넘과의 경기였어요.
첼시 서포터 데이빗 치드기 - 관련기사

1.1.1. 역사

팬들 사이에서는 첼시와 토트넘 사이에 한동안 증오가 존재해 왔다.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이전까지는 첼시가 오일머니의 투자를 받기 전이였기 때문에 신흥 강호로 떠오르기 전까지 1950~1990년대는 토트넘의 리그 성적이 첼시보다 월등히 더 좋았다. 애초에 2000년대망 해도 첼시는 런던의 다른 팀인 아스날 구단 팬들에게도 역사가 없는 팀이라고 많이 놀림 받았었고. 잉글랜드 축구계에 퍼진 인종차별 이슈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첼시 서포터즈 사이에 반유대주의 세력이 많이 침투했었고, 1980년대에는 유대인이었던 토트넘 공격수를 조롱하는 응원가가 유행했었다. 예를들어, 첼시 팬들은 토트넘 공격수 스티브 아치벌드에게 굴뚝의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챈트를 불렀었다.

두 팀의 첫 만남은 1909년 12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첫 만남을 가졌으며, 경기는 첼시의 2:1 승리였다. 해당 시즌 두 팀은 강등 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1910년 4월 30일 리그 최종전에서 만나면서 강등 결정전이 성사되었다.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치러진 두 팀의 두 번째 만남은 토트넘이 전 첼시 선수였던 퍼시 험프리스의 결승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하면서, 토트넘은 잔류하고, 첼시는 강등되었다. 이후 1961년에는 첼시 유스 출신이었던 바비 스미스가 토트넘으로 이적해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다.

두 팀의 갈등 관계의 시작은 1966-67 FA컵 결승이라고 볼 수 있다. 결승 대진이 토트넘 vs 첼시였는데, 이는 FA컵 역사상 최초로 런던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맞붙는 대회가 되었다.[2] 100,000명 이상이 관전한 이 경기의 결과는 토트넘의 2:1 승리였다. 심지어 당시 토트넘에는 전 첼시 선수인 지미 그리브스테리 베너블스가 뛰면서 첼시의 침몰에 기여를 했다.

가장 끔찍한 경기 중 하나는 1975년 4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경기에서 토트넘이 첼시를 2부 리그로 강등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을 때였다. 경기 전 토트넘은 강등권이었고, 첼시는 승점 1점이 앞선 상태였다. 당시 경기가 얼마나 긴장감이 넘쳤냐면, 경기 시작도 하기 전에 양팀 팬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이로 인해 경기 시작 시간도 늦어졌다. 이후 경기를 진행했으며, 결과는 토트넘의 2:0 승리. 이후 첼시는 마지막 2경기에서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면서, 토트넘은 승점 1점 차이로 잔류하고, 첼시는 강등되었다.[3]

첼시가 1980년대 중반 다시 1부 리그에 올라섰을 무렵, 훌리건주의가 만연했고 첼시팬들은 반유대적 차별로 토트넘 팬들을 겨냥했다.

이렇게 1990년대 이전에는 토트넘이 우위였지만, 1990년대부터는 첼시가 토트넘과의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1997-98 시즌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첼시가 토트넘을 6:1으로 꺾으면서 점점 우위는 첼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첼시는 토트넘을 상대로 무패 행진을 질주했으며, 이는 2006년 11월 5일 토트넘이 첼시를 2:1로 꺾으면서 16년만에 마감되었다.

2007년 3월 11일, FA컵 8강에서 첼시와 토트넘이 만났으며, 토트넘이 1:3으로 이기고 있다가 3:3으로 비기며 극적으로 재경기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경기 다음 날, 첼시와 토트넘의 훌리건들은 런던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였으며, 그 결과 10명의 팬들이 칼에 찔리는 사고도 발생했다. 8강 재경기는 첼시의 2:1 승리로 끝났다. 이는 다음 시즌인 2007-08 시즌 칼링컵 결승전에서 토트넘이 첼시를 2:1로 꺾으며 복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2011-12 시즌에는 각각 토트넘 홈에서 1:1, 첼시 홈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리그 순위는 토트넘이 4위, 첼시가 6위를 기록했는데 이 시즌에 첼시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첼시가 챔스 진출권을 따내고 토트넘은 4위를 하고도 챔스에 나가지 못하고 UEFA 유로파 리그로 가게 된다. 이로 인해 토트넘 팬들의 첼시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해졌다.

2014-15 시즌 캐피탈원컵 결승에서 두 팀이 만나며, 경기는 첼시의 2:0 승리로 끝났다. 첼시 팬들은 경기 후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적인 헤드라인을 걸고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며 토트넘 팬들을 모욕하였다. 여담으로 이 우승을 기점으로 첼시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토트넘의 메이저 트로피 수를 역전하게 되었다.

2015-16 시즌 일어난 스탬포드 브릿지의 전투도 빼먹을 수 없다. 레스터 시티와 토트넘이 리그 우승 경쟁을 하던 시즌 막판 토트넘은 첼시 원정을 떠나 스탬포드 브릿지로 가게 되었다. 에덴 아자르"우리 팀에 토트넘의 우승을 바라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다. 토트넘은 힘든 경기를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혈투를 사전에 예고했고. 세스크 파브레가스"토트넘의 리그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고 아예 대놓고 말했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스퍼스(토트넘 애칭) 대신 레스터 시티가 우승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리고 당시 10위권 밖에서 맴돌고 있던 첼시가 토트넘 우승 저지를 위해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리며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리그 우승은 레스터 시티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경기가 '전투'로 불리는 이유는 첼시와 토트넘, 양팀을 합해서 12명의 선수가 경고를 받았고, 그 중 토트넘은 9장의 카드를 수집할 정도로 경기가 난장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4]
(2015-16시즌) 첼시 상황이 너무 안좋았다. 경기력이 처참한 수준이라 첼시팬들은 심지어 "빌어먹을 토트넘을 이겨야할텐데"라는 응원가를 부를 정도였다.[5]
첼시 서포터 글래빈 - 관련기사

2016-17 시즌 20R 토트넘은 첼시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게 된다. 첼시는 이 경기 전까지 13연승을 달리며, 2001-02 시즌 아스날이 세웠던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연승과 타이였던 상황이었으나, 토트넘이 이를 저지하게 된 것이다.#

2017-18 시즌에는 토트넘의 임시 홈 구장이었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했으며, 첼시가 2:1로 승리하며 토트넘의 19경기 리그 홈경기 무패 행진을 저지하였다.

2018-19 시즌 11월 PL 13 Round 토트넘 임시 홈구장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경기. 프리킥에서 에릭센이 크로스를 올리며 델레알리가 골문으로 돌려놓은 헤더 슛팅 전반 7분 골망을 갈랐다. 리드를 잡은 토트넘 해리케인이 전반 15분 박스밖 중거리 슛팅이 골로 연결되었고, 이 날 좋은 몸상태를 보여줬던 손흥민 후반전 53분 하프라인 사이드에서 패스를 받아 홀로 박스안까지 드리블한후에 완벽한 마무리로 첼시를 압도했다. 후반 84분 첼시 지루가 헤더를 골로 연결했지만 토트넘이 홈에서 3:1 으로 승리를 했다. 이 날 터진 손흥민 시즌 1호골은 18년 11월 PL 이달의 골로 선정되었다.

2019-20 시즌,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의 첫 서북런던 더비가 열렸으며, 경기는 윌리안의 멀티골에 힘입어 첼시의 2:0 승리로 끝났다. 경기 후 안토니오 뤼디거가 토트넘 팬들에게 인종 차별을 당했다는 말을 하며 당국 경찰이 조사에 들어갔으나,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으며, 오히려 첼시 팬들이 손흥민에게 인종 차별을 한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2021-22 시즌 5R에서 만났다. 전반전에는 서로 팽팽하였지만 후반전 캉테가 투입 되고나서 내리 3골을 내주며 토트넘이 홈에서 0:3 대패를 당했다. 이로서 토트넘은 첼시 상대로 공식전 3경기 연속 무득점이다. 그리고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첼시에게 0승 1무 3패 1득점 7실점으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첼시는 여전히 토트넘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21-22 시즌 EFL컵 4강에서 만나며 다시 맞붙게 되었다. 1차전 첼시 홈에서 첼시가 토트넘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2:0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토트넘 홈에서는 뤼디거의 결승골로 첼시가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합산 스코어 3:0으로 결승에 진출하였다. 리그 23라운드에서는 토트넘이 또다시 첼시에게 0:2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이로서 토트넘은 첼시 경기 공식전 최근 11경기동안 2무 9패로 승리가 없으며, 21-22시즌에만 무득점 4연패를 당했다. 그리고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는 첼시가 4승 1무 8득점 1실점으로 단 한번도 패배를 내준적이 없다.

22-23 시즌 프리미어 리그 2라운드에서 만난 두 팀은 치열한 승부 끝에 2:2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경기 내내 투헬콘테, 카이 하베르츠크리스티안 로메로가 신경전을 벌이며 몸싸움까지 벌이는 등 두 팀이 왜 앙숙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결국 두 감독은 경기 종료 이후까지 신경전을 벌이다가 퇴장 당했다.[6] 이후 토트넘의 홈구장에서 벌어진 리그 경기에서는 그레이엄 포터 감독 체제에서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는 첼시를 상대로 토트넘이 공략에 성공하며 올리버 스킵의 중거리 득점과 해리 케인의 득점으로 토트넘이 오랜만에 첼시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08-09 시즌 이후 14년 만에 첼시전 우세 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23-24 시즌 프리미어 리그 11라운드에서 만난 두 팀은 맞대결 이전까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토트넘은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 아래에서 개막 이후 10경기 연속으로 무패 행진을 달리며 창단 이래 최고의 승점 페이스를 보여줬었고, 첼시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로 감독을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도 10위권에 머물고 있는 상태라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팬들 모두 토트넘이 첼시를 상대로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토트넘의 수비의 핵심인 로메로와 판더펜이 전반에만 각각 다이렉트 퇴장과 부상으로 모두 이탈해버렸고, 거기에 매디슨도 부상으로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반전에는 우도기마저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하는 악재까지 겹친 끝에 첼시가 선제골을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4골을 연달아 꽂아버리며 1-4로 승리를 거뒀다[7][8]. 이후 후반기에도 바로 전 경기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5-0 대패를 당해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첼시가 전반적으로 토트넘을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2-0으로 승리를 거두고 더블을 달성했다.[9]

24-25 시즌 프리미어 리그 15라운드에서 만난 두 팀은 저번 시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첼시는 새로운 감독인 엔초 마레스카 감독 체제에서 리그 2위까지 올라가며 완벽하게 부활했고, 토트넘은 빅6인 맨유와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역으로 강등권인 크리스탈 팰리스와 입스위치를 상대로 첫 승을 대주기도 하는 등의 의적 행위로 10위에 위치해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축구팬들 모두 원정팀인 첼시가 승리할 것이라는 반응이 많았었다. 그러나 초반 쿠쿠레야가 연이어 미끄러지는 실수를 해 솔랑키의 선제골과 쿨루셉스키의 추가골로 10분 만에 두 골 차이로 달아났고[10], 얼마 지나지 않아 산초의 원더골이 나오며 추격하나 싶었지만 이후 공격들을 잘 막아내어 전반전을 2-1의 리드로 끝내면서 진짜 의적답게 이기는가 싶었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포스테코글루 감독 전술의 고질병으로 여겨지는 지나치게 라인을 올리는 전술로 인해 점점 수비에서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었고, 전반 13분 만에 부상에서 돌아온 로메로가 다시 부상으로 아웃된 것도 모자라 후반전에서는 브레넌 존슨까지 부상으로 교체되는 등의 악재가 겹치며 결국 58분에 비수마의 태클로 페널티킥을 내주면서 분위기가 급격하게 첼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파머가 깔끔하게 PK를 성공시키면서 동점을 만들었고, 이후 파머의 현란한 드리블에 이어 흘러나온 볼을 엔소가 발리로 차 역전에 성공했고, 또다시 파페 사르의 어처구니 없는 파울로 인한 페널티킥으로 파머에게 파넨카를 헌납하는 굴욕을 당하며 순식간에 2-0의 스코어가 2-4가 되는 대참사가 터졌다. 후반 추가시간 막판에 손흥민의 추격골로 한 점 차로 따라잡았지만 동점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최종 스코어 3-4로 첼시가 다시 한 번 원정에서 토트넘에게 악몽을 선사하였다.

이렇듯, PL 출범 이후 리그 경기 전적에서 첼시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토트넘이 첼시를 상대로 우세 승(1승 1무 이상)을 거둔 시즌은 2시즌(2008-09, 2022-23)뿐이며[11], 토트넘이 첼시를 상대로 더블을 기록한 시즌은 없다. 프리미어리그가 30시즌을 돌파 했음을 감안하면 매우 처참한 성적이다. 첼시가 토트넘을 상대로 우세승을 거둔 시즌은 19시즌 이며, 이중 더블을 기록한 시즌은 10시즌(1996-97, 1997-98,1999-00, 2000-01, 2001-02, 2003-04, 2005-06, 2019-20, 2021-22, 2023-24)이다.

1.1.2. 선수 이적

첼시 보드진과 토트넘 보드진은 둘다 극도로 강경한 협상가들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첼시 인수 이후 양 구단 사이에 라이벌리 의식이 더 고조되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첼시와 토트넘의 보드진들 간의 경쟁이 경기장에서처럼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당시의 시작은 토트넘이 첼시가 스포츠 디렉터 프랭크 아르네센에게 불법적인 접근을 했다고 주장하며 프리미어리그에 첼시를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던 사건.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첼시 인수 이후, 당시 토트넘의 고위 임원들은 새로운 첼시의 운영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느꼈다. 아스날이 경기장 위에서의 치열한 라이벌인 반면, 경기장 밖에서는 두 구단이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누렸다는 느낌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첼시는 달랐다. 아브라모비치는 첼시 인수 2개월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CEO였던 피터 케년를 고용함으로써 엄청난 의도를 표명했으며, 이적시장에서는 재정적인 힘으로 대담한 모습을 보였다.

토트넘 자체는 1년 전에 구단 운영 방식을 재구성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은 프랭크 아르네센을 스포츠 디렉터로 고용하여 토트넘 구단의 이적 전략을 감독하고 감독이 바뀌더라도 일관된 방향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역할에서의 전도유망한 첫 해 이후, 첼시는 스카우트와 유소년 개발 책임자로 프랭크 아르네센을 영입하기 위해 접근했다. 겉보기에는 토트넘에서의 역할보다 더 작아보이지만 임금은 훨씬 더 많았다.

2005년 6월, 이 소식이 전해지고 아르네센이 프랑스 남부에서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만나는 사진이 나오자 첼시와 토트넘 두 구단 간 사이에 끓어오르는 긴장감이 급물살을 탔다. 토트넘 회장 다니엘 레비는 화가 났고 토트넘은 첼시가 구단을 거치지 않고 아르네센에 직접 접근한 혐의로 프리미어리그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첼시는 혐의를 부인하고 "첼시 FC는 2주 전 프랭크 아르네센과 대화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 토트넘 홋스퍼에 공식 접근했습니다. 첼시는 지난 2주 동안 토트넘과 이 주제에 대해 직접 논의해 왔습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구단과 무리뉴 감독이 아스날 레프트백 애슐리 콜에게 불법적으로 접근한 혐의로 5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은 지 불과 며칠 만에 발생했기 때문에 고발은 당시 적절했다. 또한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보드진보다는 선수들만 관련되었지만) 승점 3점 감점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두 구단 간의 격렬한 협상이 뒤따랐으며, 다니엘 레비는 적절한 보상에 대해 논의하면서 결국 물러났다. 결국 첼시는 토트넘에게 약 80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고, 아르네센은 이적 시장이 끝날 때까지 정원 가꾸기 일을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첼시와 토트넘 사이 긴장감은 계속해서 끓어올랐다. 2005년 9월 아르네센을 대신하기 위해 데려온 데미안 코몰리는 이에 대해 "제가 토트넘 있을 때 구단 간 선수를 이적시킬 수 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특히 우리가 판매자인 상황에서 말이죠."라고 언급. 이런 긴장 상태는 두 팀이 마지막으로 이적료가 오고간 선수 거래를 했을 때인 2003년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이다.

칼튼 콜은 첼시가 막판에 계약을 파기하기 전에 구단의 훈련장에서 토트넘 유니폼을 입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토트넘에 입단할 뻔 했죠. 가서 메디컬도 받고 이적이 거의 완료됐죠."라고 콜이 말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그 사실을 알고는 '돌아와야 할 것 같아. 거기 합류할 수 없어.' 라고 말했어요. 로만은 '토트넘에 갈 수 없어. 나는 그쪽과 거래하지 않아.'라고 말했죠." 콜은 결국 웨스트햄에 입단했고, 같은 여름 첼시는 데미안 더프를 토트넘 대신 뉴캐슬에 매각했다.

데미안 코몰리는 "이미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다니엘 레비가 첼시에게 선수를 팔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루카 모드리치에서 시작됐어요."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게 모든 걸 시작하게 했을 거예요."

첼시는 2008년 토트넘에 입단하기 전부터 모드리치에 관심을 가져왔다. 모드리치를 쫓은 사람은 아르네센이었지만 디나모 자그레브는 팔고 싶지 않았다. 토트넘이 2010-11 시즌 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첼시는 자신들의 순간이라고 감지하고 모드리치 영입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모드리치는 에이전트인 블라도 레믹과 다보르 커코비치에 의해 첼시가 모드리치의 영입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는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카를로 안첼로티를 막 대체했고, 모드리치는 그 후 첼시로의 이적에 "열려 있었다"고 인정했다.

모드리치의 2020년 자서전에 따르면 아브라모비치는 모드리치를 영입하고 싶다는 뜻을 바로 밝혔다. 모드리치는 대화가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썼다. "로만이 '토트넘이 이적에 저항할 것 같아? 싸움을 걸까?'라고 물었다. '협상이 어려울 것 같아요.' 나는 구단 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모드리치는 떠나고 싶은 욕망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레비는 모드리치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며 계약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모드리치는 크로아티아 신문인 스포츠케 노보스티와의 인터뷰에서 레비와 "신사 합의"를 했었다고 밝혔다. "더 큰 구단이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려하고 모든 관련자들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에 동의하는 제안이었어요. 이제 레비는 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제가 토트넘을 떠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죠." 한편 토트넘은 신사 합의의 존재를 부인하며 모드리치가 클럽과 6년 계약을 맺었을 때 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모드리치는 프리시즌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레비를 만나러 갔는데, 레비는 모드리치를 질책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매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토트넘 감독이었던 해리 레드냅은 모드리치를 달래려고 시도했고 남아프리카 프리시즌 투어에 주장으로 임명했다. 모드리치는 결국 공식적인 이적 요청을 제출했지만 그때까지도 토트넘 보드진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첼시가 이적 시장이 끝나기 전에 더 나은 제안을 가지고 돌아왔어도 레비는 모드리치를 첼시에 매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1/12 시즌을 앞두고 첼시는 22m, 27m을 비드했고 이를 다니엘 레비가 거절, 이적 시장 막판에 40m을 제안했으나 또 레비에게 거절당했다. 그 후 모드리치가 또 이적요청을 하자 12/13 시즌, 다니엘 레비는 모드리치를 33m에 레알로 팔아넘겨 버린다.

이렇듯 토트넘은 첼시에 선수를 파느니 더 싼 값에 다른 클럽에 팔겠다는 것으로 루카 모드리치 사건은 긴장감을 고조시킨 두 구단 사이의 일에있어 중요한 순간이었고, 토트넘이 다른 프리미어리그 구단에 대한 매각에 저항하려는 진정한 라이벌 의도로 부상한 징조였다.

토트넘이 계약을 마무리 짓기 직전 윌리안의 전화기가 울렸다. 당시 리버풀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기에 충분히 리버풀의 제안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윌리안이었지만, 에이전트 입에서 나온 구단은 리버풀이 아니었다.

윌리안 에이전트는 "첼시가 방금 나한테 전화를 했다. 너를 원한다"라며 윌리안의 마음을 흔들었다. 윌리안에게 첼시는 꿈의 구단이었다. 윌리안은 당시 토트넘 훈련장에 도착해 계약을 마무리하고 메디컬 테스트까지 예약해 둔 상태였지만, 이미 마음은 에이전트의 한 마디 이후 첼시로 날아가 버렸다.

"좋아, 첼시로 가고 싶어"라는 윌리안의 한 마디에 토트넘은 모든 것이 백지화가 될 위기를 맞이했다. 그렇기에 윌리안을 일단 붙잡았다. 무려 8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토트넘 훈련장에 붙잡힌 윌리안은 온갖 협박과 회유에 직면했다. 결정을 다시 생각해달라는 토트넘 측 만류를 맞닥뜨렸다.

당시 토트넘 감독이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는 "널 국제축구연맹(FIFA)에 신고할 거야! 영국 팬들이 모두 야유할 거야"라며 윌리안을 압박했지만, 윌리안은 첼시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8시간의 회유를 이겨내고 훈련장 탈출에 성공한 윌리안은 곧장 첼시로 달려가 자신의 계약서에 서명하며 파란 유니폼을 손에 넣었다.

토트넘 보드진은 윌리안의 영입이 성사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높은 평가를 받은 윌리안은 토트넘 행 메디컬을 마쳤고 약 3천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합류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첼시 보드진은 마지막 순간에 하이재킹을 시도함으로써 스탬포드 브릿지로 데려오려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윌리안 영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당시 윌리안의 소속팀의 구단주였던 러시아인 술리만 케리모프에게 개인적인 전화를 걸었다.
토트넘 사무실에서 윌리안, 다니엘 레비 그리고 내가 같이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윌리안은 문밖으로 나가고 그날 밤 첼시와 계약했다.
당시 토트넘 감독이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 #
다니엘 레비와 토트넘은 극대노했고, 감정이 고조되면서 토트넘의 일부 사람들은 첼시가 토트넘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윌리안 이적 건을 움직였다고 느꼈다. 그리고 급해진 토트넘 보드진이 대안으로 이적시장에 떨이급으로 싸게 나온 선수를 데려온게 크리스티안 에릭센이다.
▲ 첼시팬들의 윌리안 응원가
The sxxt from SPURS, They bought his flight. But WILL-I-AN, he saw the light! He got the call from Abramovich..And off he went to Stamford bridge! He hates Tottenham, He hates Tottenham. x2. - -
첼시 팬들은 "토트넘의 병신은 그의 비행기를 샀지만 윌리안은 빛을 봤네. 윌리안은 아브라모비치에게서 전화를 받고 스탬포드 브리지로 갔지. 토트넘을 싫어하고 토트넘을 싫어하며 토트넘을 싫어해."라고 노래했다.

루카 모드리치윌리안 사건의 여파로, 감정의 깊이는 첼시와 토트넘 양 구단 사이에 비공식적인 이적 금지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깊어졌다. 한소식통은 "선수가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첼시에서 기회가 없다고 해도 첼시는 '음, 토트넘에 팔 수는 없지.'라고 말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두 구단은 2020년 9월 토트넘이 첼시 센터백 안토니오 뤼디거의 영입을 노렸을 때 더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그 때 첼시 보드진은 뤼디거의 토트넘 이적을 막았고, 뤼디거가 파리 생제르맹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막았다. 토트넘의 영입팀 전 임원 중 한 명은 당시 "첼시가 토트넘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서로 팀을 도울 선수를 임대해주고 싶어할 리가 없죠."라고 말했다.
전 정말 거의 이적할 뻔 했습니다. 이번 시즌이 마무리되면 유로를 나가야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 선발을 위해선 경기감각을 끌여올릴 다른 팀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토트넘과 조세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연락도 직접 받았었죠. 뭐, 결국 이런 딜들은 모두 쫑나고 말았죠. 다른 옵션들도 있었지만 결국 저는 딜을 마무리하는데 시간이 부족했어요.
- 안토니오 뤼디거

24-25 시즌을 앞둔 여름 이적 시장에서는 모두 울버햄튼페드로 네투에게 관심을 보였고 두 팀 모두 울버햄튼과 네투 측에 오퍼를 넣었지만 네투첼시로 이적했다.
1.1.2.1.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두팀에서 모두 뛴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나마도 다이렉트 이적도 얼마 없고 구드욘센과 베르너는 임대로 뛰었다. 아스날과 첼시에서 모두 뛴 선수들은 꽤 많은 것과는 대조적.[15]
양 팀 간 다이렉트 이적은 2009년 카를로 쿠디치니를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다.

1.1.3. 여담

1.2. 아스날 FC vs 첼시 FC

북서런던 더비 (North West London Derby)
파일:아스날 FC 로고.svg 파일:첼시 FC 로고.svg
아스날 FC
Arsenal F.C.
첼시 FC
Chelsea F.C.
파일:137326351_3667334860028607_8250169394460983643_n.jpg
첼시 FC의 레전드 프랭크 램파드
아스날 FC의 레전드 티에리 앙리
종합 전적
(2024년 4월 23일 기준)
아스날 FC
Arsenal FC
무승부 첼시 FC
Chelsea FC
83 60 66

첼시가 강팀이 된 시점은 석유 자본 구단주 로만의 구단 인수 이후이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 생긴 라이벌리로, 첫 경기는 1907년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2000년대 초반 로만의 인수 이후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첼시가 신흥 강호로 막 떠오르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두 팀 모두 아르센 벵거조세 무리뉴라는 명장을 내세워 2000년대 프리미어 리그의 부흥기를 이끌었고, 이때는 특히 아스날 현지 팬들이 신흥 강호였던 첼시를 돈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팀, 역사를 돈으로 사는 팀이라는 챈트로 많이 놀렸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아스날은 2000년대 전반기에, 첼시는 후반기에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며 경쟁력있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왔다.

무리뉴의 첼시 2기가 끝난 2015년 이후에 축구를 보기 시작한 국내외[20] 팬들에게는 노스웨스트 더비맨체스터 더비, 북런던 더비 등 프리미어 리그의 간판 라이벌리에 비해 비교적 온건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벵거-무리뉴 시절을 거쳐온 양 팀의 팬들은 두 팀이 서로 얽힌 역사로 인해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랄게 없는 더비이기도 하다.[21]

다만 첼시가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엄청난 자본력으로 우승권이 된 시기와 아스날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건설 후 긴축으로 약화된 시기가 겹쳐 직접적인 우승 경쟁을 한 적은 00년대 중반을 제외하곤 거의 없고, 지역 라이벌 팀 치고는 상호간의 선수 교류도 적지 않았으며 두 팀 모두 토트넘에 대한 악감정이 더 크다는 점 등으로 인해 20년대에 들어서는 big 6 강팀 간의 빅매치로 받아들여지는 성향이 비교적 강해졌다.

그럼에도 두 팀의 대결은 쌓아져온 스토리로 인해 매번 뜨거운 경기를 보이며, 유로파 리그 결승, FA컵 결승과 같이 중요한 길목에서 마주치는 등 여전히 으르렁대는 사이임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두 팀의 선수 거래는 은근 자주 이뤄지는 것과는 별개로 좋다고 하기에도, 마냥 나쁘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한 관계이다. 대체로 두 팀의 직접적인 거래에서는 첼시가 웃고 아스날이 손해를 보는 구도가 자주 나오는 편이지만, 제3자가 끼어있는 상황에서는 반대의 경우도 종종 나온다.

1.2.1. 선수 이적

1.2.1.1. 양 구단에서 모두 뛰었던 선수

1.2.2. 여담

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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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즈음 모드리치의 첼시 이적을 레비가 진상을 부려가며 직접 막은 일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토트넘에 대한 감정이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처박히게 되었기 때문이다.[2] 흔히 Cockney Cup Final이라고 불렸다. 해석하면 런던컵 결승.[3] 1974-75 퍼스트 디비전 순위[4] 아자르가 동점골을 넣은 뒤 경기는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는데 토트넘 선수들이 첼시 선수들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수차례 가하면서 13분동안 옐로카드만 4장을 받았다.[5] 전반에 토트넘이 2골을 넣었지만, 후반에 첼시가 2골을 만회하며 무승부를 거뒀다.[6] 참고로 이 때 주심이 앤서니 테일러였으며 토트넘의 거친 파울들을 불지 않거나 로메로가 쿠쿠레야의 머리를 잡아당겨도 그대로 진행하는 등 수많은 오심 논란들이 많았다. 선수들 내에서도 하베르츠가 이마를 맞대거나 하는 등 신경전이 치열했다.[7] 특히 시즌 초반 처참한 결정력으로 크게 비판받은 니콜라 잭슨은 이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승부에 쐐기를 박기도 했다.[8] 이후 토트넘은 이 첼시전 패배를 기점으로 기세를 완전히 잃어버려 5경기에서 1무 4패를 당하게 되었다.[9] 이후 첼시는 토트넘전 더블을 기점으로 막판 기세를 타며 리그에서만 5연승을 거둬 6위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다.[10] 결국 이후 쿠쿠레야는 두번째 골 이후 바로 축구화를 갈아신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넘어지는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담으로 경기 종료 후 쿠쿠레야는 인스타에 해당 축구화를 쓰레기통에 넣는 스토리를 올리기도 했다.[11] 이마저도 2022-23 시즌은 토트넘에게 매우 유리한 오심들이 나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12] 쿠디치니는 토트넘으로 자유이적 했지만 첼시에서 오래 있었고 팀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해 팬들과 팀에게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다.[13] 첼시와 토트넘 두 팀에서 모두 레전드로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이다.[14] 아스날에서도 활약했다.[15] 다이렉트 이적만 봐도 페트르 체흐, 윌리안, 다비드 루이스, 올리비에 지루, 조르지뉴, 카이 하베르츠 등 굉장히 많다.[16] 아우디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우디컵은 공식 대회가 아니다.[17] 앞에 나열된 감독들은 모두 첼시-토트넘 순으로 양 팀의 감독직을 맡았지만 포체티노는 반대로 토트넘-첼시 순으로 감독을 맡았다.[18] 게다가 무리뉴는 토트넘을 나온 지금 시점까지도, 토트넘과 구단주인 레비 회장을 엄청나게 깐다. 콘테 감독은 첼시에서 뛰어난 성적을 냈지만 현재 팬들에게 민심은 매우 좋지 않으며, 보아스와 호들은 아예 망해버렸다.[19] 그리고 그 콘테는 돌고 돌아 토트넘으로 오게 됐고 토트넘을 살려내나 싶더니 환장할 경기결과로 콘테의 6년 복수가 성공하였다.[20] 특히 런던의 지역 라이벌리 감정에 온전히 몰입하기는 어려운 국내[21] 본격적인 악감정이 시작된 애슐리 콜 이적사가, 벵거와 무리뉴의 악연, 디에고 코스타의 거친 플레이로 인한 감정싸움 등[22] 이 일로 인해 애슐리 콜은 아스날 팬들에게 Cashley Cole 소리를 들으며 금지어 중 하나가 됐으며, 아스날 sns에 애슐리 콜 관련 포스트가 올라올때마다 배신자를 뜻하는 뱀 이모지로 댓글창이 도배가 된다.[23] 공교롭게도 두 경기 모두 첼시전이었다.[24] 이후 체흐는 다시 첼시에서 스태프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전향해서 골텐더로 활동하고 있다.[25] 원래 첼시 시절에도 하베르츠는 유독 후반기에 잘하는 선수였다. 동시에 첼시는 하베르츠를 팔고 콜 파머를 사와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쳐 첼시와 아스날 양쪽 모두 윈윈 거래가 성사되었다. 당시 이 거래는 첼시와 아스날의 니즈가 모두 맞아서 성사된 거래에 가까운데, 첼시는 계약이 2년 남은 하베르츠의 고주급을 털어내고 싶어했고 아스날은 이 고주급을 끌어안아서라도 그라니트 자카의 대체자 수급을 원했기 때문. 정작 하베르츠는 아스날에서도 돌고 돌아 다시 폴스 나인으로 자리잡아서 활약하고 있다.[26] 당시 카이세도 이적 사가에서 나온 루머에 의하면 업계 관계자들 다수는 카이세도가 이미 첼시와 무언가의 관계를 맺었다고 판단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카이세도 사가에 끼어들려는 움직임을 다수의 구단이 포기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이 당시부터 사전에 개인합의를 맺었던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조차도 사실상 첼시행을 기정 사실로 본 것. 이후 리버풀 FC가 못 먹는 감이나 찔러보자는 생각으로 카이세도의 하이재킹을 시도했으나, 카이세도가 직접 첼시행을 원한다며 리버풀 FC의 구단 관계자들에게 정중하게 개인합의 거절 의사를 밝히고 그대로 첼시행을 확정지었다.[27] 문맥상 윌리안이 아스날에서 삽질 끝에 쫓겨난 것을 조롱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윌리안과 달리 체흐와 루이스는 아스날에서 나름 활약했다.[28] 지금은 꽤 사이가 좋지만 드록바가 뛰던 시기는 벵거가 무패우승 이후 하락하고 무리뉴가 벵거에 극강의 모습을 보이며 차츰 맨유의 새 대항마로 떠올라 라이벌리가 훨씬 치열했기 때문에 이런 도발적인 멘트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