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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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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부산광역시 비하 발언 논란3. 서울특별시 비하 발언 논란4. 이후 사건5. 관련 뉴스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해찬부산.jpg
파일:서울천박.jpg
부산은 초라해서 대개조하겠다.
이런 천박한 도시를 만들면 안 되거든요.

13-17, 19-20대 국회의원과 36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0년에 연달아서 터트린 망발이자 망언, 설화이부망천에 이은 또 다른 정치인의 지역비하 발언이다.
고사성어
부산
가마 부
초라하고
서울
천박하다
얕을 천

2. 부산광역시 비하 발언 논란

2020년 4월 6일 부산광역시에서 열린 선거대책 위원회에서 이해찬 대표가 “부산에 올 때마다 매번 느끼는데 왜 교통체증이 많을까, 도시가 왜 이렇게 초라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

그런데 당시 부산광역시장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던 오거돈이었고 박재호, 전재수, 최인호, 김해영, 윤준호, 김영춘 6명의 국회의원이 부산에 지역구를 두고 있었다. 당시 가뜩이나 유재수, 조국, 오거돈, 송철호, 김경수 등으로 인해 이미 부울경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불리한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21대 총선에서 부울경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잃었다. 이후 오거돈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실시된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후보는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의 온갖 의혹 및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단 한 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20% 안팎의 격차로 밀리면서 고전했다. 결국 선거 결과는 박형준 62.67% vs 김영춘 34.42%, 즉 28.25% 차이로 전 지역구에서 대패했다.

특히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와 임시 수도 역할을 하던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는데 나라 정세가 어지러워 반듯한 도시 계획이 세워지기 어렵고 제대로 된 토목 기술도 없던 시기였으니[1]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밖에 없었으며 교통체증 또한 난개발로 인해 정리되지 못한 도로교통망에 더해서 대한민국 제1의 무역항을 끼고 있는 대도시인 만큼 차량의 통행량 자체가 매우 많을 수 밖에 없는 환경임을 숙지했다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섣부른 평가 발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서울특별시 비하 발언 논란

특히 제가 (외국 도시들에서) 인상깊었던 건, 서울 한강변은 배를 타고 지나가면 저기는 무슨 아파트, 한 평에 얼마, 조금 또 지나가면 저기는 무슨 아파트, 한 평에 얼마. 이걸 쭉 설명을 해야돼요. 갔다가 올 때도 또 반대편 저기는 무슨 아파트. 아파트 설명 밖에 없습니다, 한강변에서. 그런데 유럽의 (프랑스 파리) 세느강 같은 데를 가보면 여기는 노트르담 성당, 여기는.. 역사유적이 쭉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는 게 그게 큰 관광 유람이거든요. 그걸 들으면 ‘아 프랑스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구나’ 하는 걸 느낄 수가 있는 거죠. 우리는 한강변에 맨 아파트만 들어서가지고 저기는 단가가 얼마, 저기는 몇 평짜리. 이런 천박한 그런 도시를 만들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품위있고, 아까 말한 안전하고, 품위있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그런 도시를 잘 만들어나가야 되는데. 저는 세종시가.. 그 누구를 뭐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초기 7~8년, 10년을, 시기를 말하자면 허송세월한 셈이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할 때가 그 때가 제일 말하자면 방해가 많았던 때죠. 2003년-4년 그 무렵이. 지금은 이제 100%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됐는데 그래도 말하자면 지금보다도 세종시를 훨씬 더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살려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출처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열린 행정수도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의 자리에서 '서울처럼 천박한 도시를 만들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일단 이해찬 본인이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국회의원을 재임하기 전에 서울 관악구 을에서 7선 중에 5선을 역임했다. 사적인 발언이라고 해도 자기 지역구 주민이었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의미가 되는데 더불어민주당 대표라는 직위에서 이 발언을 한 것이다. 더군다나 21대 총선에서 서울특별시 내 국회의원 선거구 49개 중 41개가 더불어민주당이 이긴 곳들이다. 용산구송파구 병을 제외한 강남3구 7석을 제외하면 다 더불어민주당이 간당간당하게라도 이긴 곳이다. 즉 민주당 출신 국회의원을 선출한 서울시민들을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서울 시민들이 민주당을 뽑지 않았더라도 이런 비하 발언을 하면 안 된다. 여담으로 서울은 제1공화국 시절부터 민주당계 정당 지지율이 아주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2] 특히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8회에 걸쳐 치러진 전국단위 공직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이 8연승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광역자치단체가 바로 서울특별시다. 한 끗 차이로 서울시장을 내준 5회 지방선거에서도 서울 구청장 25곳 중 21곳[3]을 차지했고[4][5] 전국적으로 새누리당이 승리했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6]제18대 대통령 선거[7],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8][9] 때도 서울만큼은 민주당계의 승리였다.[10]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있어 최대의 텃밭인 호남에서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철수가 창당한 국민의당에게 압살당한 바 있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는 '천박한 곳에서 5선 국회의원과 차관급 부시장을 역임했고, 자당에서는 천박한 곳의 시장을 3선이나 역임하고, 자당 후보천박한 곳에 공천했으며, 그 천박한 곳에서 49개 의석 중 41석을 얻은 것이 된다.' 2020년 차명진 세월호 유가족 망언 파동으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수도권에서 압승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저런 발언은 차기 보궐선거는 물론이고 차기 대선, 차기 총선, 차기 지선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당장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11]으로 인해 당시 열린우리당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 외로 고전한 것과, 정태옥이부망천으로 인해 당시 자유한국당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제대로 참패한 것을[12] 보면 그런 발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부 지지자들은 '서울 천박한 도시로 만들면 안된다는 취지'라고 옹호했지만 이는 발언을 한 장소가 세종시의 개발을 논하는 자리라는 점을 간과한 해석이다. '우리는 한강변 아파트만 있어서 이런 천박한 도시 만들면 안돼.'라는 문장에서의 주어 '우리'는 세종시를 상정한 표현이니 '세종시는 (서울 같은) 천박한 도시로 만들면 안 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13]

아이러니한 점은 누구보다 서울의 도시 미관을 강조한 건 국민의힘오세훈 당시 전 서울시장이라는 것.[14] 그리고 서울의 소위 '단조롭지 않은' 비정형 건축물을 만들 때마다 반대해 온 곳은 민주당이었다는 점이다. 가령 DDP 건설 당시에도 건축비 논란이나 역사성 논란으로 건축을 취소해야 한다며 줄곧 비판했고 세빛섬도 비슷한 논란으로 폐기시키려고 애썼으며 노들섬의 오페라하우스 계획은 실제로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완공되고 나서 DDP는 수익성과 랜드마크 양면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고 노들섬은 기껏 교통량이 넘치는 지역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으면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안 된다고 반발하던 사람들이 음악복합기지라는 이름으로 야외콘서트 및 대중음악의 본거지를 만들었다. 그것도 그저 네모네모난 콘크리트 건축물 형태로.

그리고 비교 대상도 틀린 것이 파리센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부터 센 강의 하중도인 '시테 섬'[15]을 도시의 기원이자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중세시대에도 센 강을 중심으로 성곽을 쌓았다. 반면 서울의 경우 1936년 영등포 편입 전까지 여의도를 제외한 한강 이남 지역은 서울도 아니었다. 한강이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은 강남강서 지역을 편입한 1962년 서울 대확장 이후이다. 또한 자연지리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한강의 강폭은 센 강의 10배이며, 하상계수는 30배에 달하기 때문에 비슷한 풍경이 나올 수가 없다.

결국 민주당 소속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사건으로 인해 치러진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구 단위 기준 25개 자치구에서 전부, 행정동 단위 기준으로도 426개 중 421개에서 패배하는 대참패를 맞게 되었다. 여론조사 결과 박영선 후보가 국민의힘오세훈 후보에게 20~30대 청년층에게마저 압살당했다. 이제는 오세훈의 서울시장 당선 여부보다 그가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땅속 깊은 곳까지 추락하는 가운데 치러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기록했던 득표율 61.05%[16]비영남 지역 3위였다. 그나마 당시 비영남 지역 득표율 1위가 당시까지 영남의 뒤를 잇는 보수의 텃밭 강원도지사에 출마한 김진선 후보였고 그 다음으로 득표율이 높았던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의 득표율은 오세훈 후보보다 겨우 0.88% 높은 정도였다. 당시 오세훈의 득표율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한나라당의 굳건한 텃밭이던 경남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된 김태호의 득표율이 오세훈보다 겨우 2.05%밖에 높지 않았다.]를 넘어서느냐의 여부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17] 결국 20대 남성의 72.5%, 30대 남성의 63.8%가 오세훈에게 표를 몰아주고 20대 여성층에서조차 50%를 넘지 못하며 고전하면서 25개 자치구에서 전부 패하며 57.5%대 39.18%, 89만표 차이로 대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선거의 투표율은 58.2%로 웬만한 지방선거 수준이었고[18] 거기에 오세훈 후보는 280만여 표를 득표하며 서울시장 역대 최다 득표수도 갈아치웠기에 민주당에게는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을 압도적으로 밀어주던 시민들이 곧바로 돌아서 버렸으니 무슨 수를 써도 남 탓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4. 이후 사건

5. 관련 뉴스

6. 관련 문서



[1] 지형이 언덕지형이 산재한 데다가 낙동강 하류 및 동~남해안 특성상 지질 구조도 서울 동북부 화강암 단층지대와 함께 토목공사에 있어 상당한 악조건으로 평가된다. 휴전 수십년 후에 도로나 지하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조차도 인근의 건축물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거의 기본이고 지반침하로 인한 사망사고가 일어나기까지 했을 정도인데 1950년대의 자본과 토목 및 건축 기술 수준으로 대규모 재개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2] 다만 서울은 3당 합당 이후부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이전까지는 한동안 경합지역이기도 했듯이 보수 지지세도 무시하지 못하는 곳이긴 하다. 그리고 1공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앞서기도 했고 자유당도 4대 총선 이전까지는 제법 의석을 챙겼다. 중선거구제 시절에도 비록 2등으로 당선된 사례가 많지만 1등으로 당선된 사례도 있었다.[3] 중랑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 제외[4] 경기도 역시 민주당계 정당이 제법 기초자치단체장, 도의회 선거에서 제법 승리했고 인천광역시도 인천광역시장과 기초자치단체장, 시의회가 민주당계 정당에 넘어갔다.[5] 다만 나중에 중구청장과 양천구청장 자리는 각각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와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보수정당에 넘어갔다.[6] 다만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역시 민주당계가 승리했고 인천도 민주당계가 제법 의석을 늘렸다.[7] 그러나 이 때도 동시 치러진 서울교육감 보궐선거에서는 보수 성향인 문용린 후보가 승리했다.[8] 광역단체장은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1명 많았지만 기초단체장과 광역, 기초의회 선거는 새누리당이 더 많았다.[9] 양천구청장도 민주당계 정당이 다시 탈환했다.[10]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는 서울이 민주당 우세 지역이기는 했어도 보수정당 지지세도 만만치 않았는데 40% 이상은 되었다.[11] 이 발언은 선거철마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인의 설화로 회자되고 있다.[12] 다만 7회 지선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더불어민주당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높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13] 이 발언을 서울시에서 서울시민 앞에서 했다면 서울'을' 천박한 도시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맥락이 성립할 수 있다. 부산 초라 드립은 부산시에서 부산시민 앞에서 했기 때문에 부산'을' 초라한 도시로 만들지 말자는 맥락이 됐기 때문에 서울 천박 운운만큼의 문제까지는 되지 않았다.(물론 파장이 결코 적지는 않아서 국민의힘 부산시당 홈페이지에 올라온 하태경 시당위원장의 인삿말에는 "부산을 초라하다고 한 여당대표"라는 저격 멘트가 남아 있다.) 그러나 서울 천박 어쩌고저쩌고를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했기 때문에 저런 논리는 성립할 수가 없다. 쉽게 예를 들자면 친구의 부족한 부분을 면전에서 지적하면 충고가 되지만 그걸 뒤에서 다른 친구에게 떠들어대면 학교폭력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14]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박주선은 이를 두고 서민의 현실과 애환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귀족후보들이 서민을 들먹이면서 오히려 서민을 울리고 있다면서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15] 시티(city)의 어원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치한 곳이다.[16] 당시 오세훈이 기록한 득표율 61.05%는 이 선거에서 한나라당 광역단체장 후보들 중[17] 현재까지 리얼미터 여론조사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변이 없는 한 오세훈이 55% 이상 득표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리고 현실이 되었다.[18]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장 투표율이 58.6%였다.[19] 조경태토목공학과 출신답게 지하철 문제에 관심이 깊어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다대포 연장선을 뚫어준 인물이다. 덕분에 사하구민들의 조경태 지지세가 강고하여 조경태가 어느 정당에서 출마하건 무조건 이 사람만 뽑힌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조경태는 지역구 관리를 상당히 잘해둔 덕에 5선 의원을 꿰찬 것을 넘어 차기 부산시장 하마평에까지 오르고 있다. 정작 본인은 시장보다는 당권과 국회의장(농담이 아니라 5선이면 진짜로 국회의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레벨이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이름값은 어디 안 가서 후보군으로는 계속 거론되고 있다.[20] 부동산 문제로 이미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컸고 영남 출신의 비중이 높은 강남3구 주민 + 설훈이 비하했던 2030대 남성이 몰표를 선사했다. 거기에다가 2030대 여성층에서도 선방한 건 덤이다. 물론 여기엔 박영선의 네거티브에 보궐선거 5적(임종석, 고민정, 남인순, 진선미, 조국)의 2차 가해까지 겹쳤다.[21] 다만 여기엔 김영춘이 장관 시절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반감도 있었다. 실제로 그나마 21대 총선에선 부산 최악의 시장 중 한명인 서병수여서 3%p 격차였지(그나마 정근이 5%를 잠식한 것도 있다.), 2021년 재보궐선거 경선 후보였던 박성훈이나 전 부산진구 갑 후보였던 나성린이였다면 격차가 더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네거티브로 자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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