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한 내용은 피의 일요일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영국|]] 영국-아일랜드 관계 관련 문서 [[아일랜드|]] | |||||
{{{#!wiki style="color: #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역사 | ||||
영국(북아일랜드), 아일랜드(아일랜드 왕국, 아일랜드 공화국, 아일랜드 자유국) | |||||
정치 | |||||
영국,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아일랜드 통일 | |||||
외교 | |||||
영국-아일랜드 관계, 영국-아일랜드-북아일랜드 관계, 아일랜드-스코틀랜드 관계 | |||||
북아일랜드 | |||||
정치성향·정체성 | 연합주의(민주연합당, 얼스터 연합당), 민족주의(사회민주노동당, 신 페인) 기타(녹색당, 북아일랜드 동맹당, 반긴축동맹-이윤 이전에 인민) | ||||
주요 사건 | |||||
아일랜드 대기근, 북아일랜드 분쟁, 벨파스트 협정, 브렉시트, 북아일랜드 의정서, 윈저 프레임워크, UEFA 유로 2028 | |||||
아일랜드 독립운동 | |||||
관련 인물 | 마이클 콜린스, 로저 케이스먼트, 에이먼 데 벌레라 | ||||
관련 사건 | 영국의 자치권 이양,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내전 | ||||
북아일랜드 분쟁 | |||||
피의 일요일 사건, 아일랜드 단식투쟁 |
1. 개요
BBC NI 피의 일요일 사건이란? | 역사저널 그날, 피의 일요일 사건 |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런던데리[1]에서 아일랜드계의 시위를 진압하러 온 영국군이 시위 중이던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하여 14명이 사망하고[2] 15명 이상이 부상당한 사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인 데리시 보그사이드(Bogside)의 지명에서 따 와 보그사이드 학살이라고도 한다. 북아일랜드 분쟁을 격화시킨 사건 중 하나다.
2. 배경
당시 북아일랜드는 독자적인 의회가 세워져 자치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 자치가 위기에 직면했다. 68운동의 영향으로 북아일랜드에도 학생 계층을 중심으로 한 민권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적 및 물적 우위를 차지한 개신교 친영 연합주의 진영과 소수자인 가톨릭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북아일랜드 정치의 헤게모니를 쥔 친영 연합주의 진영 일부에서 아일랜드계 차별을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여기에 일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다수의 친영 진영은 그러한 의견을 무시했고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계는 희망을 잃고 시위 등 실력행사에 나섰다. 특히 데리는 아일랜드계에 대한 차별이 유난히 심각했던 곳이어서 개신교-친영 세력과 가톨릭-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갈등이 심각했고 양측 모두 시위와 폭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3] 1971년에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IRA 관련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3. 전개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지던 1972년 1월 30일에 런던데리에서 아일랜드계를 위주로 이러한 영장 없는 체포에 반대하는 집회가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총리였던 브라이언 포크너(Brian Faulkner)의 명령에 따라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고 앞서 언급했던 Operation Demetrius 때문에 시내 곳곳에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시위는 평화적 시위에서 폭력사태로 확대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영국군이 시위 통제에 투입되었다. 시위대는 영국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부 격앙된 시위대가 영국군을 공격했고 이에 영국군은 고무탄, 최루탄, 물대포 등으로 대응했다. 시위대는 영국군의 진압에 밀려 보그사이드로 패퇴했고,영국군은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병력의 집단 발포로 14명이 사망[4]하고 15명 이상이 부상당했다.무차별 사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한 부대는 마켓 가든 작전 등으로 유명한 영국 육군 공수연대 제1대대였다.
사건 당시 북아일랜드에 파병된 영국 육군 공수부대원.
4. 영향
이 사건은 당시 인기를 잃어 가던 IRA 과격파에게 명분을 제공하여 이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후에도 영국군의 진압이나 소탕작전으로 무고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죽어나가고 이로 인하여 유족들이 IRA에 들어가거나 소년병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건 다음 날 더블린에서도 사망자들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시위대가 메리언 광장에 있었던 주 아일랜드 영국 대사관을 공격해 불태웠다.[5]분노한 IRA는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숙부[6]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을 1979년 8월 27일에 폭살하면서 '여왕이여, 너의 숙부가 피투성이로[7] 죽은 모습이 7년 전 북아일랜드의 민간인들 모습이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이걸로 끝내지 않고 IRA는 북아일랜드 워렌포인트 지역에서 지나가던 영국군의 차량에 공격을 가해 18명을 사살하고 3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미국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북아일랜드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개중엔 아일랜드 마피아인 보스턴의 제임스 '화이티' 벌저도 있었다. 이것을 소재로 한 영화가 브래드 피트와 해리슨 포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블스 오운(Devil's Own)이다.
5. 영국의 대응
사건 10주 후 영국 정부가 내놓은 조사 보고서의 내용은 '무장한 군중들이 섞여 있었으며 이들의 집을 수색해보니 실제로 무기와 폭발물이 나왔으므로 발포는 정당한 것'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조작된 것이었다. 발포 관련자들은 영국 법정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북아일랜드 지상군 사령관이자 당시 진압군 지휘관이던 로버트 포드 경(Sir Robert Ford, 1923~2015)[8]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3번이나 바스 훈장을 받고 1980~1981년 여왕의 보좌관 장군으로 출세까지 한 후 2015년 11월 24일 향년 91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또 영국 정부는 오랜 시간 이 사건을 은폐함과 동시에 정당화해 왔다.북아일랜드 분쟁이 사그라들고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된 1998년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의 재조사를 명령했고 이에 따라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이른바 '새빌 보고서[9]' 작성을 통해 12년간에 걸쳐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2010년 6월 15일에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의해 이 사건이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임이 공식 인정되었고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 # 이후 영국 정부는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하였으나 액수가 유가족들이 겪은 슬픔과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에 비해 적어 논란이 되었다. 한편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당시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 #
이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새빌 보고서는 1억 9,500만 파운드(한화로 약 3,600억 원)를 투입해 장장 12년간 900여 명의 증언과 정부·군 문서를 검토해 만들어졌다.
6. 대중매체
폴 매카트니의 밴드 윙스의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 (1972) | U2가 라이브 에이드에서 연주한 'Sunday Bloody Sunday' (1985) |
존 레논[10]과 U2의 노래 'Sunday Bloody Sunday(1972/1983)'가 이 사건을 다룬 곡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곡이니 오해 말자. 또 존 레논은 'The Luck Of The Irish(1972)'라는 노래도 발표했다. 존 레논과 한때 같은 밴드에 몸 담았던 폴 매카트니[11]도 이 사건을 보고 흥분해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1972)'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 이전 그리고 이후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거의 쓰지 않은 행보를 생각해보면 꽤나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2002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를 제작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도 U2의 'Sunday Bloody Sunday(1983)'가 나온다. 영화 데블스 오운의 OST인 God be with You Ireland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북아일랜드 분쟁을 다룬 노래이다.
7. 관련 문서
[1] 런던데리의 본래 이름은 데리로, 게일어에서 비롯된 현지 지명이다. 그런데 아일랜드를 영국이 지배하면서 아일랜드 지명 앞에 런던을 붙인 것이다. 현지인 중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런던데리라고 부르지 않고 데리라고만 부르거나 아예 '해방 데리(Free Derry)'라고 부른다. 데리/런던데리 시민에게 "이 도시의 이름이 뭐죠?"라고 묻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알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요즘은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잉글랜드를 위시한 영국의 타 지역에서도 이곳을 Derry/Londonderry라고 병기하여 "데리/런던데리"라고 아예 한 덩어리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빗금도시(Stroke City)'라는 별칭도 붙었다.[2] 사망자 중 7명은 10대였고, 이들은 19세 1명을 제외하면 모두 17세였다.[3] 피의 일요일 사건 이전까지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은 1969년 8월 14일 밤~15일 새벽까지 벨파스트의 가톨릭 게토에서 6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4] 13명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1명은 이후 치료 과정에서 사망했다.[5] 이미 대사관 인원들이 대피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망자는 없었지만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다시 건물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무슨 일만 있으면 털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보니 결국 주 아일랜드 영국 대사관은 1995년 새로 건물을 지어서 나갔다.[6] 필립은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하자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다.[7] 요트 위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IRA가 요트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죽었다. 폭탄 테러로 요트에서 손자, 사위의 어머니 그리고 요트의 선원 한 사람도 함께 폭사한다. 같이 폭발에 휘말린 딸과 사위, 또 다른 손자 하나는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8] 당시 직급은 소장이었다.[9] 대법관 출신의 마크 새빌 경이 총지휘를 맡아 그의 이름이 붙었다.[10] 부계가 아일랜드계다.[11] 존 레논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아일랜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