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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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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0005><colcolor=#fff> 제7대 서강대학교 총장
제15대 서강대학교 이사장
박홍
朴弘
파일:4e12c34d88d58e6021ce3215b150a94e_1579072143_4736.jpg
출생 194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부출장소
(現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사망 2019년 11월 9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학력 영천국민학교 (졸업)
영천중학교 (졸업)
서울 성신고등학교 (졸업)
가톨릭대학교 (철학 / 학사)
대건신학대학 (신학 / 학사)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영선신학 / 석사)
그레고리안 대학교 (영선신학 / 박사)
약력 서강대학교 총장
서강대학교 이사장
전국가톨릭교수회의 지도신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화해교류위원회 상임위원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종교 천주교 (세례명: 루카)
소속 예수회

1. 개요2. 일생
2.1. 초기 생애와 민주화 운동2.2. 1987년 이후2.3. 종교인으로서2.4. 사망
3. 일화4. 저서5.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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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신부[1]로, 전 서강대학교 총장이자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천주교 사제였으나, 1987년 민주화 이후 90년대에 갑자기 전향하여 보수적 발언을 하면서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는 사제다.

별명은 빠콩. 자칭 하느님의 안기부장.[2]

2. 일생

2.1. 초기 생애와 민주화 운동

194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대구부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세무공무원의 6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영천군영천국민학교로 전학간 뒤, 영천중학교와 서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3]를 거쳐 1960년부터 5년 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대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 의사를 꿈꿨으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악동 기질로 살다가 고해성사를 한 뒤부터 얌전해졌고, 성신고 진학 때 신부와 부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진학해 학업을 무사히 마쳤다.

1965년 가톨릭대학교 졸업 후 예수회에 입회해 1967년부터 2년간 대건신학대학[4]에서 신학을 배웠고, 197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같은 해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전임강사로 강단에 처음 선 후 전국 천주교대학생 및 지성인 지도신부와 초대 크리스천 사회행동협의체 이사장(1971년까지)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나섰고, 1972년에 전태일 추모미사를 집전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적 있으며, 1974년에는 지학순 주교 구속으로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이 조직되는데 참여한 초기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79년 종신서원[5]을 하며 교수로 임명된 후 1980년에는 동료 교수들과 민주화 성명 발표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2주간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84년부터 2년 간 서강대학교 교목처장을 겸한 바 있고, 1989년 총장에 취임하고서 등록금 문제로 일어난 사학분규에서 교수와 학생, 재단 이사 등을 모아 대화로 합의점을 도출해내 원만히 해결했다. 총학생회 출범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한 뒤 총학생회장과 어깨동무를 하며 아침이슬을 부르고 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여 막걸리 총장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 1991년에는 전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 1992년 전국가톨릭교수회의 지도신부도 겸임했다.

파일:20230629_230128.jpg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유학 당시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 돌아가면 신변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2.2. 1987년 이후

1987년 이후 민주사회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홍 신부는 과격 투쟁을 이어가는 운동권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는데, '좌경 폭력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는 옹호와 매카시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는 총장으로 있던 8년 동안 시위하다 잡혀간 학생들을 석방시키려고 경찰청, 법무부, 대검찰청 등지 고위층과 만나는 등 민주화 이후 사제로서 투쟁보다는 화해에 종교적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1년 명지대학교 재학생 강경대가 쇠파이프로 무장한 백골단에게 길거리에서 구타당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는 대학생, 노동자들이 연달아 분신자살하는 분신정국이 벌어지자 그는 서강대 메리홀 기자회견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른바 '생명선언'을 설파하여 당시 재야와 학생운동권을 비난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박홍의 발언은 분신정국 와중에 정권이 조작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김지하 <죽음의 굿판을...> 칼럼사건, 그리고 "한국외대정원식 밀가루 세례 사건"과 맞물려서 학생운동, 재야민주화운동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사실 박홍 신부는 1970~80년대 학생운동에 직접 투신했던 인사라서 당시 충격은 상당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71년 전태일분신으로 사망하자 추모미사를 집전하다가 중앙정보부끌려간 경력도 있을 정도. 당시 운동권에서조차 우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발언이 더더욱 화제를 일으킨 것. 당시 이 발언을 했을 때만 해도, 운동권 측에서 "저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닌데…", "틀림없이 정권에서 모종의 협박이 있었을 거야…" 등등의 반응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18일에는 청와대 오찬에서 처음 '주사파 발언'을 시작하였는데, 자세한 항목은 1994년 주사파 파동 문서를 참조. 당시 박홍 신부는 연일 주사파 발언으로 운동권과 재야세력을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한총련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의 사로청이 있다.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저기서 언급된 사노맹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6]의 약자로, 당시 북한김일성 지배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표출한 집단이다. 사노맹은 남한의 주사파를 "조국통일이란 민족주의 구호 아래 노동자계급 혁명을 저해하는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주사파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도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김일성 1인 봉건독재"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노맹은 이미 1992년 안기부박노해, 백태웅 등 주요 간부들을 대거 체포하면서 조직이 완전히 궤멸된 상태였다. [7][8]

박홍 신부는 당시 "주사파가 한총련을 장악했다"고 주장하면서[9], 정작 그 한총련의 배후조직으로 철두철미한 반주사파 세력이였던 사노맹을 거론한 것이다. 더구나 이미 망해서 사라진 조직을. 그리고 이 사노맹의 배후 조직으로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단 이유만으로 아무 상관 없는 사로청[10]을 제시한 것이다.[11]

1995년 6월 한국통신 노조의 명동성당/조계사 농성 강제해산 1주일 후 강연에서 "이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가 1998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고(선고 98다9892) 1996년 1월에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인간적으로 훌륭한 분이니 가능한 용서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했다.# 이뿐만 아니라 1995년 서강대 면접시험 당시 학생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고 "좌경폭력혁명에 가담하지 않겠다." 라는 서약서 제출 강요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또,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이 구속된 후에는 석방운동에도 앞장섰다. #

1995년부터 3년간 대통령 통일고문회의 의원에 위촉됐고, 1999년부터 3년간 제4대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소장도 맡았다. 2003년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한 후 노무현 대통령의 사학법에는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이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주교들이 전반적으로 이 발언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가톨릭 교구 재산들을 보면, 부동산(즉, 학교 및 자선단체, 병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또한 벌이는 사업들 중 상당수가 교육에 쏠려 있다. [12]

21세기 들어서는 발언이 다소 온건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진중권김지하 관련 발언에 개 짖는 소리라고 밝혀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발휘하고 있다.[13] 한편 조선일보TV조선에서는 같은 논조를 선보였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운동의 거두들이 운동권의 과격화, 이념화에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선 경우는 박홍 총장 외에도 다수가 있었다. 전술한 이재오, 김문수는 물론 강철서신의 김영환김지하 역시 기존 민주화 운동에서 변질된 투쟁 일변도의 혁명적 가치와 진보진영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1998년 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 당선자와 면담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신의 은총이라며 극찬했다.[14]

2.3. 종교인으로서

주요 인사들이 각종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던 한국 가톨릭[15]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인물이다. 어쨌든 서강대학교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고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인데다가 한국 천주교는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중립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답답하긴 해도 공개적으로 박홍을 비판하는 천주교 내부 인사는 드문 편이다.[16]

박홍 신부는 예수회 소속 수도사제이다.[17] 예수회 자체가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도 특히나 강경하고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중남미에서 공산주의 혁명 게릴라를 펼쳤던 사람들이 전현직 예수회 회원이었다[18] 아예 주류 가톨릭에서 경원시하는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 정도.[19] 페드로 아루페 총장 이후 예수회는 본래의 예수회 정신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예수회는 각종 사회적 안건 참여를 선호한다. 그래서인지 현재의 예수회 한국관구를 보면, 극우, 극좌 양측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이 공존하고 있다. 천주교대한민국수호모임 쪽에는 예수회 출신 주교인 이한택 요셉 전 의정부교구[20], 박홍 신부가 활동 중이고, 그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는 아주 많은 수의 젊은 예수회 사제들이 활동 중이다.

일례로, 현재 예수회 한국관구장이 제주해군기지 반대 시위 관련하여 체포될 정도로... 페이스북에서 서로 날선 비판을 할 정도로 공동체가 상당히 분열되어 있다. 염수정 추기경은 "사제단의 활동은 비이성적이다"라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 참여를 직접 비판해 서로간 비방이 이어졌을 정도였다. 주교단 회의의 강우일 주교 역시 "정의구현사제단이 어제, 오늘 문제가 아니고…. 주교님들이 오랜 세월 동안 대화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만 결론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아요"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을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천주교 내에도 여전히 사회 참여, 정치적 발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파일:Picsart_23-06-29_23-00-47-435.jpg

2.4. 사망

2008년 재단 이사장 퇴임 후 2009년 6월 충청북도 음성군 '가톨릭 세계지도자 성령대회' 준비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21] 전까지 10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해왔다. 2014년 8월 서강대 동문회와의 접견에 따르면 수년 전에 심장수술을 받았고, 매주 3차례의 신장 투석치료를 받고 있을 정도였다. 예수회 회원들이 상당수 참석하는 2015년의 예수회 사제서품식에서도 목격되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식장에 들어왔으며, 끝난 뒤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탄다는 등 건강 상태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는 증언이 있었다. 2019년 사후 월간조선 보도에서 간병인의 증언에 따르면, 2018년 10월까지 삼계탕이나 회도 먹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2018년 말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에 입원까지 하며 투병한 걸로 나왔고, 80kg에 달했던 체중도 50kg으로 줄었다. 2019년 들어 당뇨 합병증으로 손/발가락 등지가 괴사하는 증세가 있었고, 말도 못 하고 눈에 백태가 끼며 청력이 약화되는 등 더 심각해졌다.

2019년 11월 9일 당뇨 합병증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병원비는 정치 성향에서 통하는 점이 많았던 정몽준 전 국회의원 측에서 부담해 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입원했던 아산병원이 현대 계열이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틀 후인 11월 11일 예수회 주관으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용인 천주교 묘지의 예수회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일화

4. 저서

5. 수상



[1] 신부교구 소속 신부와 수도회 소속 신부로 나뉘는데, 박홍 신부는 후자. 후자는 수도사제, 성직수사, 수사신부라고도 불리며,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수도자이다. 반면 일선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부들은 교구사제이며, 수도자는 아니고 성직자 신분만 갖고 있다. 신부는 반드시 교구 아니면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2] 이걸 가지고 진중권은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2권에서 "하느님도 모르시는 정보가 있어요?"라고 비꼬았다.[3] 1983년 폐교되었고, 이후 성신중고등학교의 시설은 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에서 흡수했다.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을 보면, 대신학교(가톨릭 신학대학)뿐 아니라 중고등학교도 소신학교(성신중고)를 졸업한 분들이 많다.[4]광주가톨릭대학교[5]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6]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활동했던 지하혁명조직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노동자계급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했다[7] 이후 사노맹의 와해를 마지막으로 남한 좌파판에서 노동자계급 혁명노선은 ISSK(현 노동자연대)나 IBT(현 볼셰비키그룹), 노동자의 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 상대적으로 비주류 노선으로 전락하여 2000년대 말까지 약 10년 이상을 소규모 의견그룹 혹은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 내의 소수 정파로 머물게 된다.극좌 혁명노선이 다시 본격적으로 대열을 갖추고 조직화에 나서게 된 것은 2009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소규모 정파들이 결집하여 사노위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8] 이 시기까지 극좌 혁명노선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소련 해체, 중국개혁개방, 문민정부의 출범과 사노맹을 포함한 주요 지하조직의 와해를 보면서 대대적인 전향을 하게 된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 폐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시민단체, 합법적 노동조합, 대중적 진보정당 운동에 뛰어든다. 이재오, 김문수, 신지호처럼 아예 보수우익으로 말을 갈아탄 사람들도 많았다.[9] 사실, 이 부분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박홍 총장의 말처럼 한총련이 온전히 NL주사파만의 조직이었던 것도 아니다. 1994년이면 NL-PD-21세기 등 운동권 모든 세력이 한총련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NL주사파가 주도권을 쥐긴 했지만, 독주한 것은 아니며 NL 내부에는 비주사NL도 상당수 존재했다. NL주사파 그중에서도 무책임할 정도로 북을 추종하는 강경파(자주단결대오)가 한총련을 완전히 장악한 건 박홍 신부의 발언 뒤인 대략 1996년부터이다. 이 때가 되면 강경주사파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운동그룹들은 한총련에서 들러리로 전락한다.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가 연이어 터진 게 우연이 아니다.[10] 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11] 사실 70년대 이후 제1세계의 좌파운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알고 있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자신들이 건설하려고 하던 정당을 '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고 규정했고... 이는 전통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정당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노맹의 지도부였던 백태웅박노해가 북한 및 현실사회주의 진영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트로츠키주의적 함의가 강한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세력들과 관련이 없음을 명확히 표현하려고 보는 경우가 많다.[12] 그러므로 (가톨릭) 사립학교를 건드리겠다는 건 교구장인 "주교"들 입장에서는 정부에서 자신들 "사유재산"을 함부로 건드리겠다는 것이니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지금도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이사장이 바로 서울대교구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이다. 서양에서도 성직자 아동성추행, 성 비오 10세회 다음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바로 이 교육분야다.[13]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별명을 가진 진중권은 이후 비판할 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김지하와 황석영을 비판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진중권/논란 및 사건사고 중 '황석영 작가는 개그맨, 금붕어' 목차 참조.[14] 박총장 DJ당선은 신의 은총 극찬[15]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군사정권 시절에 저항적인 입장을 보였고, 강우일 베드로 주교를 필두로 하는 일부 사회참여파 신부 덕분에 진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해방 이전이나 이후나 노선이 반정부/진보주의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개신교 계열 인물들이 넘사벽으로 막장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의 대부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는 일제강점기부터 대놓고 정부랑 친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인 장면 요한이 이승만과 결별하기 전까지는 신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이후의 정권들과도 완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오히려 박정희 정권의 거물 정치가인 이효상의 차남인 이문희대구대교구 대주교를 역임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남일보에게 밀렸던 매일신문의 경북지역 구독율 1위로 올려준 게 언론통폐합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 가톨릭 교회(정확히는 대구대교구)에게 유리하게 영남일보를 매일신문으로 합병시켜줬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박근혜가 세례받고, 가톨릭계 학교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괜히 진학한 게 아니다.[16] 다만 사적인 자리에서 '저 분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들은 꽤 많다. 물론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면전에서 따지는 경우는 없다.[17] 서강대학교예수회에서 세워 운영하는 학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대학교와는 계통이 다르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 기반의 서강대와 의과대학 중심인 가톨릭대학교의 통합 떡밥이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번번히 무산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이제는 시기를 놓쳤다는 게 중론.[18] 정확히 말하면, 예수회는 가톨릭의 교리적 입장에서는 강경한 근본주의적 보수파이지만,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우도 많다.(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회는 기본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향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많이 내기에 그 구성원들의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좌우불문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중에서도 급진파나 좌파의 비중이 결코 낮지 않다.)[19] 하다 하다 못해, 역대 교황 중 두드러지게 급진적인 편에 속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조차 수사신부이던 시절 예수회 장상들에게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갈굼당했다고 할 정도다![20] 예수회 신부로서의 이한택은 예수회 수련장이었다. 즉,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거의 대부분 이한택 주교의 제자들이다(...). 이한택 주교의 극우 행보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21]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 선종'[22] 전쟁시나 위급상황에서 신부가 행하는 세례를 통칭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세례를 내리는 것도 비상세례이니 당시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23] MBC 뉴스데스크 역시 보도했다. 자수간첩 한병훈씨, "박홍 서강대 총장 암살계획 사실이라고"[24] http://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8279&Newsnumb=201911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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