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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콜라 아자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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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우크라이나 총리
미콜라 야노비치 아자로우
Микола Янович Азаров
파일:Микола_Янович_Азаров.jpg
<colbgcolor=#14497a><colcolor=#fee449> 출생 1947년 12월 17일 ([age(1947-12-17)]세)
소련 러시아 SFSR 칼루가주 칼루가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칼루가주 칼루가)
재임기간 우크라이나 재무부 장관 겸 제1부총리(1차)
2002년 11월 26일 ~ 2005년 8월 3일[총리권한대행]
우크라이나 재무부 장관 겸 제1부총리(2차)
2006년 8월 4일 ~ 2007년 12월 18일
우크라이나 총리
2010년 3월 11일 ~ 2014년 1월 28일
서명 파일:미콜라 아자로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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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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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류드밀라 아자로바
자녀 올렉시 아자로우[2]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지질학, 광물학 / 박사) (2003)
소속 정당 우크라이나 시민회의 (1992)
우크라이나 노동당 (1992 ~ 2001)

(2001 ~ 2014)
(2014 ~)
서명
파일:미콜라 아자로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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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정치 활동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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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콜라 아자로우우크라이나의 정치인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아래에서 제14대 우크라이나 총리 직을 수행했다.

2. 생애

1947년 12월 17일 칼루가주 칼루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스토니아계 러시아인으로, 출생 당시 에스토니아계 성씨인 파흘로(Пахло, Pahlo)를 사용했다. 아자로우라는 성씨는 결혼 후 아내 류드밀라 아자로바(Людмила Азарова)의 성씨을 차용한 것이다. #

1973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지질학, 광물학 박사로 졸업했다. 1976년까지 툴라의 석탄 기업에서 일하다가 1984년 도네츠크로 이주해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우크라이나 국립 지질학 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고 우크라이나 국립 광업 지질학 및 기하학 조사 및 설계 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1985년 우크라이나 국립 지질학 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했다. 1991년 국립 도네츠크 공과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

2.1. 정치 활동

1994년 우크라이나 노동당 소속으로 도네츠크주 도네츠크 페트로스키 선거구에 출마해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에 당선되었다. 최고 라다 내에서는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을 지지하는 도네츠크 지역 파벌이 소속돼 있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최고 라다 상임위원회에 소속되었고 동시에 최고 라다 예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5년 우크라이나 정부 통화 위원회의 고문을 역임했고 1996년에는 우크라이나 국세청장이 되었다.

아자로우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8년간 우크라이나 국세청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세무 조사를 언론 탄압에 이용한다는 의혹이 있었고#, 2001년 올렉산드르 모로즈 우크라이나 사회당 대표가 공개한 쿠치마 대통령의 비서실장인 미콜라 멜니첸코가 몰래 녹화한 테이프에 따르면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과 함께 반정부 성향 기자 헤오르히 곤가제(Георгій Ґонґадзе, 1969–2000)의 암살을 모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국세청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무원들에게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쿠치마의 재선을 도울 것을 강요하면서 불법으로 대선 자금을 동원했고 국영 천연가스 회사 나프토하즈 우크라이니의 부패를 은폐했으며 율리야 티모셴코의 천연가스 회사와 연루된 슬로뱐스크 은행을 무너뜨렸다고 폭로되었다. # 아자로우는 2002년 보리스 펠드만(Борис Фельдман) 슬로뱐스크 은행 사장을 테이프 공개의 실세로 지목해 고발했다.

2001년 우크라이나 지역부흥당에 입당했고 2001년 3월 3일, 제3차 당대회에서 지역당[3]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1년도 안 되어 사임했다. 2003년 지역당 정치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2년, 유럽의 선택 최고 라다 파벌은 아자로우를 총리직에 지명했지만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추천하며 거절했다. 아자로우는 2002년 11월 26일 1차 야누코비치 정부에서 제1부총리 겸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무장관으로서 재정, 세금, 연금, 규제 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경제 개혁 시행을 주도했고, 그 결과 아자로우가 재무장관으로 역임한 기간동안 우크라이나의 GDP 성장률이 2003년과 2004년에 경제성장률을 각각 9.5%, 11.8%를 기록했고 자본투자율 역시 각각 31.3%, 28.0%를 기록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자 아자로우는 2004년 12월 7일부터 2004년 12월 28일까지 총리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으로 야누코비치 당선이 취소되어 다시 야누코비치가 총리를 역임했으나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야누코비치는 2004년 12월 31일에 사임을 발표했고, 아자로우는 다시 잠시동안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야누코비치 정부는 2005년 1월 5일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빅토르 유셴코 취임 직후인 2005년 1월 24일 율리야 티모셴코가 총리로 임명될 때까지 총리 권한대행직을 계속 역임했다. #

이후로도 아자로우는 야누코비치 최측근 자리에 있었고 2006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지역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2006년 8월 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4] 최고 라다 의장 선출 과정에서 2차 야누코비치 정부의 제1부총리 겸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야누코비치 선대위를 총괄하면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0년 2월 21일 강한 우크라이나(2012년에 지역당과 합당)의 세르히 티힙코, 우리의 우크라이나의 아르세니 야체뉴크, 그리고 지역당의 아자로우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 최고 라다에서 343명 중 242명의 찬성으로 2010년 3월 11일 아자로우는 우크라이나 총리로 임명되었다. # 그러나 내각에 여성 장관이 없어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난 세례를 받고 소송까지 당했다.[5] 2010년 4월 23일, 제14차 당대회에서 지역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지역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12년 12월 3일 아자로우를 비롯한 여러 내각 관료들의 최고 라다 의원 당선으로 내각이 해산되었다. # 12월 5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아자로우가 차기 총리로 임명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가 내각에 누구를 데려오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 12월 9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지명했고 2012년 12월 13일 최고 라다에서 승인되었다. # 2012년 12월 24일, 공식적으로 제2차 아자로우 정부가 출범했다.

2014년 1월 28일, 유로마이단 혁명의 여파로 사임했다. 예우헨 무라예우가 후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무라예우 본인이 아자로우가 하르키우에서 벨고로드로 도망가는 것을 도왔다고 밝혔다. # 이후 오스트리아에 입국해 가족들을 만나고# 2014년 2월 23일 이전에 다시 러시아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3월 29일, 지역당 당대회에서 아자로우를 제명했다. #

2015년 1월 23일, 횡령 등의 혐의로 인터폴의 국제 수배자가 되었다. #

2015년 8월 3일, 모스크바에서 구국위원회(Комитет спасения Украины) 설립을 발표했다. 위원회의 목적은 모든 시민, 정당, 노동 조합 및 사회 운동이 단결하고 질서를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며 위원장 겸 차기 우크라이나 대통령 후보로 볼로디미르 올리니크를 지명했다. #

3. 여담



[총리권한대행] 2004년 12월 7일 ~ 2004년 12월 28일
2005년 1월 5일 ~ 2005년 1월 24일
[2]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지역당 소속으로 도네츠크주 슬라뱐스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가 2014년 4월 돈세탁 혐의로 오스트리아 당국으로부터 수사를 받고 있다. #[3] 해당 당대회에서는 당명도 우크라이나 지역부흥당에서 지역당으로 함께 개정되었다.[4] 2006년 총선 결과 당초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유셴코 당선을 도운 친서방 오렌지 연합 정당들(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우크라이나 사회당)이 가까스로 과반을 차지했고 티모셴코 블록의 율리야 티모셴코가 총리로, 사회당의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최고 라다 의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우크라이나 측이 페트로 포로셴코를 최고 라다 의장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사회당이 지역당우크라이나 공산당 편으러 갈라섰고 지역당, 공산당, 사회당의 야권 연합은 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해 모로즈는 최고 라다 의장이, 야누코비치는 총리가 될 수 있었다.[5] 정작 본인은 여성을 존중하고 개혁은 여성만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장관 임명이 없어도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