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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6-11-03 19:18:14

미국 애니메이션/역사


1. 개요2. silent age(고요한 시대)
2.1. 월트 디즈니(Walt disney)
3. golden age(황금 시대)
3.1. 텍스 에이버리(Tex avery)3.2. 척 존스(Chuck jones)
4. world war ii age(제2차 세계대전 시대)5. television age(텔레비전 시대)
5.1. 윌리엄 해나(William hanna) & 조셉 바베라(Joseph barbera)5.2. 랠프 박시(Ralph bakshi)
6. modern age(현대 시대)
6.1. 존 크릭팔루시(John kricfalushi)

1. 개요

미국 애니메이션은 수십 년간 연출 변화, 제작기술 발전, 업계 규모 성장, 대중의 시선 변동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해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영어 위키백과에선 미국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크게 5가지의 시대로 구분해 기록하고 있다.

2. silent age(고요한 시대)[1]

1906년 제작된 '웃긴 얼굴의 유머 단계(Humorous Phases of Funny Faces)'는 훗날 미국 애니메이션의 시초가 된 작품으로 불리고, 제작자인 제임스 스튜어트 블랙턴은 최초의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되었다. 이보다 2년 지난 1908년 에밀 콜에 의해 제작된 '판타스마거리(Fantasmagorie)'는 직접 손으로 그린 수작업 방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었다.

위의 시도들이 진행된 시기, 미국 예술가들은 속속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보고 실험하였으며, 1914년 윈저 매케이에 의해 제작된 공룡 거티는 캐릭터가 메인이 된 최초의 미국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1915년 존 랜돌프 브레이 & 엘 허드는 애니메이션 제작 역사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완성하였으며, 이 기법이 소문을 타고 제작자들한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제작된 광대 코코(koko the clown)와 펠릭스 더 캣은 1920년대의 대표적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캐릭터가 메인으로 활약하는 점에 있어 미국 애니의 기본적 토대 중 하나를 완성시킨 작품으로 꼽힌다. 광대 코코를 디자인한 맥스 플라이셔는 형제인 데이브 플라이셔와 함께 1921년에 플라이셔 스튜디오를 설립했다.[2] 시간이 지난 1927년, 앨리스 시리즈를 제작한 월트 디즈니유니버설 픽쳐스에서 영입해 오스왈드 래빗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이윽고 월트 디즈니는 유니버설을 나왔으며 이듬해 동업자 어브 아이웍스랑 최초의 미키 마우스 단편인 〈미친 비행기〉(plane crazy)를 발표했다.

처음에 이 작품을 본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허나 얼마 뒤 발표한 〈증기선 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월트 디즈니는 신인 감독으로 주목을 받는다. 이 무렵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픽쳐스, MGM에선 카툰 스튜디오를 활성화해 여러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발표하면서 다경쟁 구도가 만들어졌으며, 월터 란츠 & 플라이셔 형제 & 리언 슐레진저가 프로듀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1. 월트 디즈니(Walt disney)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애니메이터 중 하나로 명실상부하게 꼽히는 거장 중 1명으로 초창기 미국 애니메이션에 영향력을 준 애니메이터진 중 하나인 디즈니 계열[3][4]을 형성하게 만든 간접적 요인(디즈니 스튜디오 형성)을 제공한 바 있었다.

자세한 활동은 문서를 참조할 것.

3. golden age(황금 시대)[5]

미국에서 TV의 보급이 활발하지 못했던 1930년대의 미국 영화사들은 성인들이 감당할수 있는 비용으로 드나들던 극장에서 10분 미만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해 상영시킨다. 대부분 루니 툰, 딱따구리(애니메이션), 톰과 제리, 미키 마우스처럼 동물 캐릭터들을 주역으로 설정해 대중문화, 사회풍자 요소를 삽입한 작품들이 인기를 얻어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실리 심포니(silly symphony)와 동화를 소재로 여러 장편들을 제작해 영화사들 중에선 독보적으로 아동 친화적 분위기의 애니메이션들을 발표했으며, 디즈니가 30~50년대에 발표한 단편 애니 중에선 캐릭터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생활 속의 고난들을 다루거나 몇몇 캐릭터가 곤란한 상황을 저지르자 무작정 도망치거나 피해 버리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았다. 이미 스튜디오 시설을 활용해 단편 카툰을 제작하던 유니버셜과 파라마운트와는 다르게 극초기의 워너 브라더스, 메트로-골드윈-메이어의 극장용 단편 카툰들은 디즈니 스튜디오 출신 애니메이터의 메인 감독 배정 등에서 보이듯 디즈니 카툰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많았다.

1930년엔 여러 영화사들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공개하였으며, 그 이전부터 단편 카툰을 제작하던 플라이셔 스튜디오는 베티 붑을 발표해 성인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1933년뽀빠이를 발표하면서 원작을 뛰어넘은 대흥행을 거두었고, 뽀빠이를 미국인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캐릭터 중 하나로 재탄생시켰다. 1939년과 1941년엔 각각 1편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1942년 플라이셔 스튜디오는 페이머스 스튜디오(famous studio)로 사실상 재창립되었다. 워너 브라더스는 1930년 루니 툰과 메리 멜로디스(merry melodies)를 만들어 인지도를 쌓았다. 루니 툰은 스타 시스템식 전개와 유행에 맞는 대중음악들의 삽입, 할리우드 스타 출연 등을 활용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카툰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주요 감독들은 텍스 에이버리, 척 존스, 로버트 매킴슨, 밥 크렘펫, 프리츠 프렐랑[6] 등이 있었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UA)는 같은해 개구리 플립(감독은 어브 아이웍스)을 공개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1934년부턴 휴 하먼과 루돌프 아이징을 고용해 보스코(bosko) & happy harmonies 시리즈를 제작했으나 상대적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이에 mgm은 the captain & the kids 시리즈를 상영시키지만 이 카툰 또한 인기를 얻지 못했고, 1940년대에 발표된 톰과 제리, 텍스 에이버리 카툰으로 인해 이전에 비해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1916년에 만화가 폴 테리가 설립한 테리 툰즈는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단편 카툰 제작을 시작해 1968년 해체되기 전까지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을 생산해냈다. 여러 번 배급사가 교체되었지만 주요 배급 기업은 영화사인 20세기 폭스 사가 전담하였다.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과 특수 효과가 점진적으로 상향, 발전하게 된 시점도 황금 시대부터이다. 월트 디즈니의 실리 심포니(1932년), 워너 브라더스의 메리 멜로디스(1934년)를 시작으로 영화사들은 테크니컬러를 도입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며, 1955년부턴 시네마스코프 기술을 애니메이션 제작에 활용하였다. 플라이셔 스튜디오에서 로토스코핑 기법을 활용한 시기도 황금 시대였고 뮤지컬 위주였던 미국 애니메이션의 코미디, 스토리텔링 연출이 다변화되는 시점이기도 했는데,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애니메이터들이 텍스 에이버리, 척 존스, 해나-바베라 콤비, UPA의 감독들이다.


같은 시기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생산자들에게 스튜디오 근무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는 애니메이터들의 대규모 파업도 몇차례 전개되었으며, 그중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파업을 전개하고 퇴사했던[7] 애니메이터들이 주축이 되어 1943년에 UPA가 설립되었고, UPA가 제작한 작품들의 배급은 콜럼비아-트라이스타 픽쳐스가 맡았다. 이후 1952년 존 허브레이가 좌익 사회운동 참여 경력을 계기로 매카시즘 의혹에 휩싸이자 얼마 후 자진사퇴했고, 텔레비전 시범 방영판 초연에서 호응을 얻지 못하는등 여러 문제점에 직면해 1960년대 이후론 사실상 애니메이션 제작을 중단하게 된다.

'UPA 스타일'은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MGM에 큰 영향을 끼쳐 1953년에 디즈니는 Melody와 Toot, Whistle, Plunk and Boom에서 UPA식 연출을 표현하기도 했고, UPA가 활용한 제한 애니메이션(limited animation) 기법을 활용해 동시기 영화사의 스튜디오들이 제작비를 감소시키는 계기로 작용해 이후 미국 내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사들과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도 이 기법을 이어가 계속 활용시킨다. 시간이 지나 각 영화사 내부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애니메이터 중애선 외부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이직한 사람도 있었으며, 1980년대 후기 시점으로 황금 시대에 활약한 애니메이터 중에선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이 적지 않았다.

3.1. 텍스 에이버리(Tex avery)

텍스 에이버리는 가속도적인 (캐릭터의) 움직임, 캐치 프래이즈적 대사들, 익살스런 웃음, 그림자 캐릭터 등을 미국 애니메이션에 도입시켜 당시 디즈니, 플라이셔, 월터 란츠가 표현하지 못한 연출들을 시도하여 척 존스, 밥 크렘펫 등의 후대 감독들이[8] 활약해나가는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할수 있으며, 극초기 192~30년대의 미국 애니메이션이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면적, 뮤지컬적 슬랩스틱, 스토리텔링 구성을 보다 변화시킨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할수 있다.

텍스 에이버리의 캐릭터 연출은 움직임을 비상식적으로 빠르거나 과장되게 연출시키며[9] 슬랩스틱을 표현해 해당 씬마다 동화 프레임이 매우 자연스러워지는 점이 특징이다.[10] 또한 애니메이션 내에서 캐릭터가 흥분하거나 놀랄 때 몸짓이 최대한 그에 맞춰 나타나는 것도 백미로 꼽히는 요소 중 하나로 시간이 흘러 1980년대 이후의 미국 애니메이션 연출에 다시금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다만 tv 애니메이션 작업을 뒤늦은 시기에 참여하다 세상을 떠난 점이 여러모로 안타깝다고 할수 있다.

3.2. 척 존스(Chuck jones)

척 존스는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에 시각적인 코미디 슬랩스틱과 1940년대 초기 미국 애니에서 유행하던 추격물을 패러디하며 독자적인 설정, 디자인의 캐릭터를 활약시키는 등 미국 애니메이션의 코미디 발전에 적잖은 영향을 남긴 애니메이터 중 1명이다. 이런 연출은 당시의 다른 감독들과의 개그 리액션이나 코미디 공식관 구별되는 요소가 생겨났는데, 이외 194,50년대 당시의 극장용 단편 카툰에선 외관상으로 미치광이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나오고 비시각적 구조의 개그 & 코미디 장면들이 많지만 척 존스의 카툰을 살펴보면 슬랩스틱이 다른 작품들보단 비교적 부드럽거나 가벼운 연출들이 많으며[11], 어느 정도 독보적인 코미디 활용[12]이 드러나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4. world war ii age(제2차 세계대전 시대)[13]

일본군1941년 12월 7일, 갑작스레 태평양의 미국군 기지를 공습하는 사건이 발생해 소식이 미국 본토로 알려지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훗날의 911 테러 못지 않은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얼마 못가 미국 군대가 태평양 전선과 유럽 전선에 파견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영화사들은 선전 목적으로 나치 독일과 구 일본 제국에 반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된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의 의뢰와 접촉을 여러번 거치면서 총통각하의 낯짝이나 죽음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death), 치킨 리틀(chicken little) 등의 수많은 선전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여 대중한테 많은 호평을 받았다.

페이머스 스튜디오나 워너브라더스도 뽀빠이, 루니 툰이나 스나푸 이등병 시리즈(private snafu)같은 선전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고 해외의 미국 군영에 보급시키며 추축국에 적대적이었던 당시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으로 병사들한테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였다.(선전 애니메이션 문서 참조.)

5. television age(텔레비전 시대)[14]


1950년대 후기, 텔레비전이 미국에서 완전히 대중화되어 영화 매체를 위협하는 대세적 흐름 속에서 애니 업계 관계자 및 일부 메이저 애니메이터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을 설립해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방송사에선 황금 시대의 고전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재방송시키거나 TV판으로 새롭게 제작된 애니메이션들을 방영하기 시작했으며, 해나-바베라 프로덕션[15]1960년대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젯슨 가족, 쟈니 퀘스트 등을 발표해 많은 인기를 얻었고, 명실상부한 미국 tv 애니메이션의 대표 기업 중 1곳으로 자리잡았다. TV 애니메이션 제작이 양성화되고 이에 따른 예산 활용 규모가 황금 시대에 비해 감소하면서 이 시기 많은 미국 애니메이션들의 동화 프레임은 이전에 비해 경직되어버린다.

1960년대 중기엔 슈퍼 히어로 붐이 발생해 해당 코믹스들을 바탕으로 한[16] 애니메이션들이 제작되어 토요일 아침 시간대에 방송되기도 했으며, 이전의 프라임 타임 시간대에 방송했던 애니메이션들과 황금 시대에 제작된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의 재방송을 진행하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60년대 후기엔 당시 미국 애니메이션들의 폭력성 등 여러 문제점을 꼬집어 비판하는 부모들이 모인 워치독 그룹(watchdog[17] group) 등의 시민단체가 형성되어, 애니메이션 회사들한테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었고,[18] 이러한 과정들은 미국 비성인 애니메이션의 폭력성이 1970년대에 들어서 보다 약화된 원인으로 작용한다.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까지 제작된 고양이 프리츠, 쿤스킨(coonskin), 헤비 메탈(heavy metal) 등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은 미국의 성인 애니메이션들이 이후 TV 매체로 진출해나가는 발돋움을 마련해놓았(다고 할수 있)으며,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수입한 우주전함 야마토, 로보텍, 백수왕 고라이온 등이 내용을 편집시켜 전파되자 이들을 접한 미국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감상한 애니메이션들관 무척 색다른 모습이었고, golden age 이후 미국에서 TV로 애니메이션이 방송되면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이나 가족이 감상하는 매체물이란 관념이 퍼지기도 했으나[19] 일본 애니메이션에 매료된 일부 시청자를 바탕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층이 형성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훗날 애니 업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연출 및 작화 기법에 영향을 받거나 오마쥬를 한 애니메이터들도 나타나게 된다.

1980년대부턴 본격적으로 미국 애니메이션에 CG컴퓨터 기술이 삽입되기 시작하며, 일본, 유럽,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랑 공동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20] 1980년대 초부터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보다 저연령층이 선호하는 장난감 판매에 주목하게 되어, 마이 리틀 포니, 트랜스포머, 지아이조 등의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해 관련 장난감 상품들을 출시한다. 이는 미국 TV 애니메이션의 수익 구조 다변화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며 관련 장난감 광고의 폭력적인 장면들이 ACT 등 몇몇 시민단체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5.1. 윌리엄 해나(William hanna) & 조셉 바베라(Joseph barbera)

전세계 약육강식 역전 슬랩스틱 애니메이션의 표본으로 꼽히는 톰과 제리를 제작한 것과 더불어 golden age 이후 양성화된 미국 tv 애니메이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남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썬 빠질 수 없는 콤비이며, 미국 본토에선 이들의 감독 작품, 제작사의 영향으로 월트 디즈니를 제외하면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몇 안되는 애니메이터들로 꼽힌다. 또한 그들이 설립한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은 훗날 modern age를 빛나게 한 메이저급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양성해냈다.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의(해나 바베라 콤비가 총책임자를 맡은) 애니메이션들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캐릭터간의 우정적 전개 연출과 콤비적인 캐릭터 구성 연출,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이나 톰과 제리에서 볼수 있듯이 우스꽝스러운 듯한 슬랩스틱 연출이 있다. 이중에서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젯슨 가족 등에서 나타난 가족주의 연출은 훗날 심슨 가족, 패밀리 가이의 줄거리 노선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5.2. 랠프 박시(Ralph bakshi)

미국의 성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감독이자 해당 장르에 미국인으로써 '첫번째' 메이저 애니메이터가 된 사람은 랠프 박시이다.[21] 데뷔 이전 랠프 박시 자신이 예술 학교를 졸업한 바 있어 여러 미술 관련 기법들을 학습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반지의 제왕 애니메이션에서의 로토스코핑 활용이나 고양이 프리츠의 색채 전환 기법 등 다양한 미술 기법들을 애니메이션의 배경 및 작화에 접목적으로 표현 & 연출시켰으며, 후대 미국 애니메이터들이 보다 발전된 예술 관련 기법 및 효과를 미국 애니메이션에 삽입시키는 발돋움으로 작용했다고 할수 있다.

6. modern age(현대 시대)[22]


니켈로디언, 카툰 네트워크 등은 1990년대 초부터 렌과 스팀피 & 우당탕탕 로코와 친구들 & 네모바지 스폰지밥 & 파워퍼프걸 & 덱스터의 실험실 등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전 텔레비전 시대까지의 많은 애니메이션들의 내용과 전체적으로 대비된 세계관, 캐릭터들의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한테 많은 관심을 얻었고, 해당 애니들로 인해 이후의 미국 비성인 TV 애니메이션에선 사회풍자적 코미디 연출, 기괴스러운 작화 연출이 자리잡아가게 된다. 더불어 이 시기부터 TV 애니메이션 회사의 애니메이션 예산 활용 및 투입이 증가해 TV 애니 원동화 프레임 수가 상승함으로써 캐릭터의 동작도 이전에 비해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1987년에 폭스 채널의 트레이시 울먼 쇼에서 1분짜리 단편 카툰으로 출발했던 《심슨 가족》은, 1990년을 기점으로 분량을 늘려 자체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새로 제작되며 미국 전역에 전파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슨은 성인들과 평론가층한테 호평을 얻는다[23]. 이후 현실 사회를 바탕으로 설정한 세계관을 다루어 정치풍자를 삽입한 《사우스 파크》, 《패밀리 가이》, 《퓨처라마》 등의 성인용 애니메이션들이 연이어 제작되며, 그 애니메이션들을 바탕으로 어덜트 스윔같은 전용 프로그램이나 2차 창작물 발표도 현재진행형이다.

2010년대 현재 미국에서 인지도가 있는 메이저 애니메이터들이 80년대 후기부터 속속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했다. 이중엔 해나-바베라에서 이직하거나 독립 회사를 세운 사례도 있었으며, 해당 애니메이터들은 존 크릭팔루시, 세스 맥팔레인, 겐디 타르타콥스키, 로렌 파우스트, 버치 하트먼, 데이비드 실버먼, 스콧 펠로스, 스티븐 힐런버그, 크레이그 맥크라켄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독보적으로 활약함으로써 현대 시대부터 미국인 애니메이터들 중에서 인지도가 상승한 애니메이터들이 보다 증가했으며 적극적으로 대중이나 팬들과의 교류를 추진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1989년의 인어공주, 1990년의 《미녀와 야수》, 1992년의 《알라딘》, 그리고 1994년의 《라이온 킹》으로 디즈니는 극장용 2D 애니매이션의 가장 위대한 순간을 장식했다.(흔히 말하는 디즈니 르네상스도 이시기.) 뿐만 아니라 디즈니의 투자와 배급은 픽사가 《토이 스토리》(1995년작)로 업계의 흐름을 3D 중심으로 바꾸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변화를 통해서 정작 디즈니의 상징과 같았던 2D 애니매이션이 극장용 애니매이션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아이러니하달까. 대신 픽사는 업계에 메이저 제작사로 그 인지도를 알렸다. 픽사를 자회사로 흡수 한 디즈니는 2014년의 《겨울왕국》의 흥행으로 또 한 번 대박을 터뜨렸고, 2차 디즈니 르네상스라는 평가를 받으며 달려나가고 있다.

6.1. 존 크릭팔루시(John kricfalushi)

존 크릭팔루시는 1991년 첫 방영된 렌과 스팀피에서 이전 세대 애니메이터인 밥 크렘펫이 워너브라더스에서, 텍스 에이버리가 MGM에서 주로 연출한 캐릭터의 초자연적 동작 표현을 광대화적으로 연출해낸 것과 동시에, 기괴스런 분위기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비정상적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들을 삽입해 렌과 스팀피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데 성공시켰다. 이런 연출은 업계 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렌과 스팀피랑 비슷한 수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제작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니켈로디언이나 카툰 네트워크에서 이런 애니메이션의 후속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제작 & 방송시키는 경향이 1990년대 초, 렌과 스팀피가 방송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1]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2] 처음엔 이름이 잉크웰 스튜디오(inkwell studio)였으나 8년 뒤 이름을 바꾸었다.[3] 나머지 계열 중에서 유명한 워너브라더스, mgm 계열에서도 유명한 감독들이 배출되었는데 척 존스, 텍스 에이버리, 해나-바베라 콤비가 이에 속한다. 이중 전자의 계열은 루니 툰 단편 제작 이후 타 회사로 이직하거나 제작사를 차린 애니메이터들이 있었고(프리츠 프렐랑 : 데파티-프렐랑, 필 로먼 : 필름 로먼, 척 존스 : 시브 타워 12 프로덕션), 후자의 계열은 애니메이터들 중에서 일부 인력이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으로 이직해 활동하기도 했었다.[4] 참고로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들 중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도중에 폐쇄되지 않은 유일한 영화사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써, 존 라세터는 1세대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디즈니 계열에 속한 감독 중 하나이다. 또한 1940년대에 만들어진 UPA도 일부 디즈니 계열 애니메이터들에 의해 설립된 스튜디오였다.[5]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6] 이 애니메이터가 1963년에 동업자와 같이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바로 데파티-프렐랑.[7] 1941년에 일어난 디즈니 애니메이터 스트라이크(disney animator strike)가 이에 해당한다.[8] 실제로 밥 크렘펫, 척 존스, 해나-바베라 콤비의 데뷔 시점인 1937년, 1938년, 1940년보다 텍스 에이버리가 데뷔한 연도(1935년)보다 각각 몇년씩 뒤쳐진다.[9]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무척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움직이는 연출은 당시 워너브라더스에서 터미트 테라스에 속해있던 애니메이터 중 1명인 밥 크렘펫 또한 자연스럽게 표현해냈으며, 그한테 영향을 받은 modern age의 미국인 애니메이션 감독 존 크릭팔루시가(인터뷰 및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함.) 렌과 스팀피에서 해당 연출을 승계시킨다.[10] 이는 텍스 에이버리가 감독한 애니메이션들 중 MGM 단편 애니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11] 정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해나 바베라가 감독한 톰과 제리 카툰과 척 존스가 감독 & 연출한 톰과 제리 카툰의 프레임을 비교해 볼것.[12] 로드 러너에선 활동 배경이 미국 남서부 사막으로 제한되어 있는 점과 더불어 로드 러너는 절대 코요테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 점, 양치기 개 샘과 늑대 랄프는 직장동료로 업무 시간이 끝나면 하던 일들을 멈추고 자연스레 휴식하거나 덕담을 나눈다는 점 등등[13] 1942년부터 1945년 전반까지.[14]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15] 톰과 제리의 원작자 윌리엄 해나와 조셉 바베라가 1958년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이후 2001년 워너브라더스에 합병되었으며, 제작된 모든 작품들의 판권은 워너브라더스에서 소유하고 있다.[16] 예를 들면 마블 슈퍼 히어로즈라든지...[17] 파수꾼, 감시자를 의미.[18] 영어 위키피디아 스쿠비 두 문서에선 1960년대 후기 ACT(Action for Children's Television) 등의 시민단체 활동으로 인하여 몇몇 해나-바베라 애니메이션이 조기종영되었단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19] 오죽하면 당시 신예 애니메이터로 일했던 존 라세터가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 보는 거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20] TMS 엔터테인먼트, 토에이 애니메이션, 에이콤, 라프드레프트 코리아 등등[21] 사실 이전의 황금 시대 애니메이션들은 주로 극장에서 성인들이 보는 영화에 속했기에 개인의 관점에 따라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이후 1970년대 초기 '완전한'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감독한 애니메이터로써 유명세를 알린 건 랠프 박시가 (트레이 파커 & 맷 스톤보다) 20여년 정도 먼저였었기 때문이다.[22] 1980년대 후기부터 2010년대 현재까지.[23] 물론 전부 호평받은 것은 아니고 일부 기성세대들의 반발로 인해 초기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심슨 가족 문서 역사 문단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