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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7:28:42

이성웅(배우)

마영달에서 넘어옴
이성웅 | 李成雄
파일:마영달(우 이주일).jpg
영화 <평양맨발>에서 이주일과 함께.
출생 1940년 5월 3일[1]
경기도 김포군
사망 1999년 2월 10일 (향년 58세)
가족 부인, 1남 3녀[2]
종교 불교[3]
학력 인천고등학교 (졸업 / 58회)[4]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학사)
데뷔 1962년 뮤지컬 <포기와 베스>

1. 개요2. 생애3. 출연작
3.1. 드라마3.2. 영화3.3. 연극3.4. 외화
4. 수상 경력5.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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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성우. 한때 마영달이란 예명으로 활동하였다.

2. 생애

1940년 경기도 김포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인천에서 성장했고, 인천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클라리넷 실력으로 밴드부장 활동을 하다가 고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1기생으로 입학해 동기생인 정진, 김기일 등과 함께 연극부 활동을 했다. 1962년 동랑 유치진이 연출한 한국 최초의 뮤지컬 <포기와 베스>에서 로빈 역으로 데뷔한 후, 이듬해 모교 재학생 및 동문 등과 함께 '동국극회'를 발족하여 정진 등과 함께 창립작품 <그 얼굴의 햇빛을>에도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연출가 임영웅은 경향신문에서 본인을 포함한 출연진들의 연습과 앙상블 부족 등을 지적했으나 정진과 더불어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 '제3극장', '자유극장' 등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새우잡이(1965)>, <카니발수첩(1966)> 등지에서 뛰어난 미성과 춤 실력을 선보여 박수를 받았고, 1966년 <신의 대리인>의 리카르도 신부 역도 엄격 진지하게 열연한 바 있다. 다른 한편 1964년에는 라디오서울 공채 성우 1기로 입사하여 성우로서 라디오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고, 같은 해 12월 개국한 동양 TV의 전속 탤런트로 채용되어 드라마에도 발을 들였다. 강렬하고 날카로운 마스크 때문에 TV 드라마 출연 초기부터 <형사수첩> 등에서 범죄자나 간첩 등 악역을 주로 맡다가[5] 1979년 TBC 매일연속극 <야 곰례야>에서 건달기는 있지만 의협심 넘치고 순박한 청년 마영달 역할을 맡아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에는 TBC 탤런트실 간사로 일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통합 되면서 KBS 전속 탤런트로 소속이 바뀌었고, 1982년부터 극회장으로 선임되어 KBS-TBC 계파 간에 발생한 배역 분쟁, 하극상 등 여러 암투와 기강 해이 상태에 빠진 극회 분위기를 조폭 스타일로 빡세게 잡기 시작했다.[6] 그러나 KBS의 제작 시스템이 TBC와 달리 폐쇄적이라서 염증을 느끼다 못해 영화계에서 적극 활약했고,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이 기획 중이던 여명의 눈동자 영화판에서 일본인 오오에 오장 역을 맡으며 삭발까지 해서 준비를 철저히 했으나, 여배우 캐스팅 및 제작비 문제 등으로 영화가 엎어지고 말았다.[7] 1983년에는 KBS 극회가 MBC 탤런트실과 통합되어 한국텔레비전방송연기자협회(현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산하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극회가 부활해서 회장직에 재선임됐다. 뒤이어 1986년 한국TV방송연기자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후생복지 사업, 탤런트 등급조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8개월이 지나도록 지킨 게 없었고, KBS-MBC 양사와의 출연료 협상에서도 방송사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점 등으로 회원들의 빈축을 샀다. 1986년 <형사> 촬영을 끝으로 전 부인[8]과의 관계 정리 문제 등으로 잠깐 잠적했고, 이후 딸들의 허락을 받아 무용학원을 운영하던 신모 씨와 재혼했다. 1987년에는 서울 신촌 크리스탈백화점[9] 7층에 '크리스탈현대미술관'을 개업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1980년대 중후반 이후 드라마 및 영화에 잘 나오지 못했고, '마영달'의 이미지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1991년 기초의회 선거 때 신민당 인천 중-동구 의원 후보로, 1995년 제1차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인천 동구청장 후보로 각각 출마했지만 배우로서의 이미지 탓에 전부 떨어졌다. 그 뒤 개인 사업을 해 오다가 1998년 '대한불자예술인연합회'를 세워 초대 회장을 맡아 불교 포교 등을 맡아왔으나, 1999년 2월 10일 오전에 심장마비로 인해 59세로 숨을 거뒀다.

3. 출연작

3.1. 드라마

3.2. 영화

3.3. 연극

3.4. 외화

4. 수상 경력

5. 참고/관련 자료



[1] <TV가이드> 1982년 제57호 '82 탤런트 인명사전' p156.[2] 3녀는 전처, 1남은 후처에게서 각각 나왔다.[3] 반면 후처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4] <TV가이드> 1983년 제109호 '스타의 모교탐방: 이성웅' p22~24.[5] 특히 1975년 <추적> '간첩 송재하' 편에서 송재하 역을 맡을 적, TV 탤런트 데뷔 이래 200번째로 작중 검거되면서 아예 '수갑 200회 파티'를 열 정도였다.[6] <TV가이드> 1982년 11월 27일(제71호) '스타에세이'에서 본인이 탤런트실장을 하던 시절의 고백이 실린 바 있는데, 탤런트실 내부에선 양아치 회장이란 별명이 붙었으며 초기 1년 간 군기를 잡는 과정에서 "이런 방맹이(맞아야 정신차릴 녀석이란 뜻)!"라 윽박지르거나 설득을 해왔고, "와중(난세)에는 양아치가 왕이다" 같은 명언들도 배우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7] 다만 그는 1991년 MBC 드라마판에서 야마다 형사 역을 맡아 반쯤이나마 꿈을 이뤘다.[8] 1964년에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 탓에 5년 후 호적상 이혼했다. 그러나 슬하 3녀의 장래 탓에 비밀리에 결혼 상태를 유지해왔다.(원 출처: <선데이서울> 1987년 제948호(3월 22일) p28~29, <주간경향> 1987년 제978호(12월 13일) p56~57)[9]이마트 신촌점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