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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8:06:10

리콴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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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년기2. 정치 입문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4.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다5. 사망

1. 청년기

1923년 부유한 한족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계 싱가포르인 4세다. 그의 집안은 광동성 대포현(大埔縣)에 본적을 둔 객가였다.[1][2]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과 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자랐다.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형성된 일종의 현지 엘리트 집단의 일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수석은 그의 아내이고, 리콴유는 차석이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싱가포르를 침공, 영국 대신 몇 년간 싱가포르의 주인 행세를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리콴유는 영국 식민지 시절 친영주의적인 가족 밑에서 자랐고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리콴유 역시 영어가 모어였고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자서전의 표현을 인용하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 시절 일본 군정의 억압으로 인해[3] 그는 선임장관이 된 이후 쓴 자서전들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으며, 일본의 극단주의 세력들을 청산하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임기 내내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해왔다.[4]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감정은 더이상 전쟁 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더이상 영국에 의지할 수 없고,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소회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지배하는 동안엔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5]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 입학했다가 194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편입했다. 리콴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과를 졸업할 당시 Double Starred First-Class Honours를 받았다. 영국 대학은 졸업시 학위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높을 경우 따로 우등 표창(Honours)을 주고, 세부적으로 그 표창은 First - Class, Upper - Second, Lower - Second, Third - Class Honours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학생에겐 "Starred First"라는 세부 표창을 주고, 중간 성적, 최종 성적 모두 "Starred First"로 졸업했을 때를 "Double Starred" 라고 한다. 한 마디로 두 개의(Double) 특(Starred) - 특(First-class) - 우등 표창(Honours).[6] 식민지 출신이 이 정도 성적을 받고 졸업하는데 식민당국이 주목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1920~2010)를 만나기도 했다. 콰걱추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문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하였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던 시절 리콴유는 최고 영재였는데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2등으로 만든 유일한 학생이 콰걱추였다고 한다.

리콴유는 졸업 후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 학생운동과 연관된 소송 업무를 맡게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에 이미 세간에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

2. 정치 입문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인민행동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리콴유와 같은 영국 유학파 출신의 지식인과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 세력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영어 사용자로서 친서방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였다.

리콴유의 출신 배경 및 신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좌익 세력과 손을 잡은 이유는 1. 당시 좌익 세력은 굉장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고,[7] 2.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밀려날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8]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해외 교역의 관문으로의 가치를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9],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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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apore is out
싱가포르 축출되다

A dream shattered...now a parting of the ways
부서져버린 꿈... 이제는 각자의 길로


당시 영상이며, 원치 않은 독립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은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였고,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된다.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은 8월 7일에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았다.[10]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싱가포르 축출안을 가결했고, 같은 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포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다.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 이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하였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호소하기도 했으며,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 리콴유는 직접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 국가[11]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에 빌붙어 볼까 아니면 말레이에 다시 어떻게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12]
리콴유는 독립 당시 주변 대국,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시아가 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3]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이러한 식수공급의 중단을 매우 두려워했다. 특히나 말레이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여 싱가포르의 축출 혹은 강제 병합을 외치는 강경분자들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엘리전을 통한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싱가포르의 식수공급 중단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14]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 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면서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4.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다

역사상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일부 지도자들의 능력과 그들이 이끄는 국가의 국력 간에는 전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헨리 키신저

독립 후 리콴유는 싱가포르 실권자인 초대 총리로서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안전을 확보한 뒤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화교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부터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1967년에 국가예산 당 국방비 비율이 7%였던 것이 1972년에는 무려 38%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며, 이 돈의 대부분은 싱가포르군의 무기 체제 개선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 리콴유는 징병제를 도입하여, 모든 남성 시민에게 군 복무를 의무화했다. 이는 군사력을 빠르게 확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남아사아의 치열한 경쟁에서 국가 방어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다만 군대가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며[15],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는데 리콴유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과는 다른 그 시절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스라엘군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지만 이를 빠르게 전격적으로 도입하여 단시간 내 동남아시아 최강 군사력을 가진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리콴유는 동시에 서양의 최신 무기와 군사 장비를 도입하고 리콴유 자신의 장기인 외교를 통해 안보를 다루는 외교적 동맹을 통해 국가 안보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다국적 군사 훈련을 통해 싱가포르의 국방력을 높였다.

그리고 리콴유는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싱가포르에 경쟁있는 새로운 교육정책을 도입하여 현재도 싱가포르는 대한민국, 홍콩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같이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분리하는 대신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전국모의고사를 보면 전체 평균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하여 1957년에 52%였던 싱가포르의 문해율이 1990년에는 90%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대학도 열심히 손봤으며, 그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동시에 실용주의 교육 체제를 싱가포르에 도입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에 맞춰 개혁했다. 그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분야에 중점을 두고, 이를 통해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다. 그리고 기술 교육과 직업 훈련에 목적을 두어 리콴유는 교육이 단순한 학문적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직업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학교 전반에 도입하여 이를 교육에 중점으로 여겼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의 산업 기반을 강화하고,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주변에 대체 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를 내쫓으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조호르바루)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 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빌빌대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치고는 말도 안되는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16] 그 결과 싱가포르의 GDP는 1960년에 7.1억 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1990년에 361.4억 달러가 되어 30년 만에 51배나 증가했고 3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물론 1인당 GDP도 비슷한 시기에 428달러에서 11862달러로 28배 가까이 증가하여 리콴유는 집권기간 동안 고국을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간주된다.[17]

싱가포르는 이미 1968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에야 시작되는데,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한(1071달러) 1971년으로부터 10년 후인 1981년에는 세계 평균(2594달러)의 2배를 넘긴 5596달러를 기록, 싱가포르는 1980년대 초에 선진국이라고 부를 만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196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4세로, 전화 보급율은 3%에서 38%로, 관광객 수는 10만 명에서 5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중국덩샤오핑은 22,000명이 넘는 관리들을 싱가포르에 파견해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배우고자 했으며, 르완다폴 카가메의 정책도 리콴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외환 보유고를 관리하기 위해 1981년에 싱가포르 정부 투자 공사를 설립했는데, 이렇게 마련한 기금을 통해 1997-98년에 있던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싱가포르는 통화를 보호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리콴유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상초월의 방법들을 생각했는데 사실 2010년대에 들어 얘기한다면 돌 맞을만한 얘기들이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는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18] 사실 이정도는 리콴유가 재임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하다.

1959년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19] 1990년 11월 28일에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싱가포르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실질적인 당수인 서기장직 역시 마찬가지로 맡고있었다.[20] 그리고 후임으로 고촉통(吳作棟)이 집권한 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로서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으며,[21] 2004년에는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22]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 5월 21일에 리콴유는 고촉통과 함께 각각 고문장관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나며 권력에서 완전히 은퇴했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5. 사망

2013년 2월 15일에 리콴유는 장기간의 심장 부정맥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일시적으로 중지된 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 잠깐 입원한 적이 있고, 퇴원 후에도 항응고제 치료를 받아오다가 2015년 2월 5일에 폐렴으로 싱가포르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결국 2015년 3월 23일 ,현지 시각 오전 3시 18분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콴유의 장남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하였다. 3월 23일부터 29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어 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국기는 조기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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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2015년 3월 29일에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싱가포르 국민들 대다수와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정부 수반 다수를 위시한 약 170만 명이 참석했고,[23][24]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비공개로 화장되어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골함에 함께 안치되었다.
[1] 리콴유 본인은 평생 본적지에 가본 적도 없지만, 현재 대포(다부)현이 속해있는 광둥성 메이저우시(梅州市) 탕지천 정부에서는 리콴유 기념관을 세워 싱가포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관광지를 만들었다.[2] 싱가포르 정부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화교계가 아닌 유라시아 인으로 분류한다. 유라시아 인은 유럽계와 아시아계의 혼혈. 주로 영국, 네덜란드 계와 말레이 계의 혼혈을 의미하지만, 리콴유 조상 중 유럽계가 하나 있는듯하다.[3] 일본의 동남아에 대한 군정은 대체로 가혹했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특히 화교들은 더 크게 탄압받았다.[4] 일본을 향한 리콴유의 감정은 서양인들을 무찌른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경외감과 동시에, 싱가포르인,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던 일본인의 야만성에 대한 혐오감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감정은 수카르노 등 서양인의 지배와 일본의 군정을 모두 겪은 동남아 민족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5] 리콴유 자서전 1권 76페이지부터 일본군 보도부에서 복무하던 시절의 일화가 있다.[6] 구체적으로는 케임브리지 학부 시스템의 Tripos를 알면 이해가 쉽다. Law Tripos는 3년 과정인데, 1년차 Part IA, 2년차 Part IB, 3년차 PartII로 나뉜다. 매 학년 말에 시험을 봐서 성적을 받게 되는데, 1년차와 2년차 성적을 합산해 Part I 성적이, 3년차 성적이 Part II 성적이 되는 것이다. 이 때, Part I과 Part II 성적이 모두 First면 Double First, Starred First면 Double Starred First가 되는 것이다. 법학 단일 전공이고 중간 성적과 최종 성적이 모두 Starred First였단 얘기다.[7]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실패한 실험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공산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정치체계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 당시 싱가포르는 주류 민족집단인 화교들의 조상 나라 중국이 공산화에 성공하여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공산주의의 호소력이 매우 컸다.[8] 다만 리콴유의 오른팔이었던 고켕스위는 처음부터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고, 결국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되었으니 고켕스위의 생각대로 된 셈이다.[9]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최남단에 있어서 서방세계로부터 넘어오는 물류교역의 중심지였다.[10] 라만과 리콴유는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많이 대립했지만, 라만과 리콴유의 개인적인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독립을 위해 함께 한 동지였다. 그래서 라만은 리콴유에게 "우리가 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11] 싱가포르가 번영한 항구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레이 반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번영이었다.[12] 옛 영국령 홍콩 당시 신계 지역을 영국이 추가적으로 장악한 이유, 그리고 홍콩 반환 당시 홍콩 전역을 모조리 반환하기로 한 이유를 대입해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싱가포르는 홍콩으로 치면 이 신계 지역을 제외한 초창기의 영국령 홍콩이 통째로 타국으로 갈라져 나온 격이기 때문이다. 또한 리콴유 역시도 연방 잔류파였다. 축출 여론이 연방 전체에 걸쳐 대세였던 탓에 결국 잔류 노력을 접었을 뿐.[13] 실제로 마하티르가 2018년 재집권한 뒤 상수도 공급계약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식수공급중단 카드를 내보이기도 했다.[14] 현재도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지맛 정수 시설이 전세계 최고 수준인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물을 싱가포르에서 정수과정을 거치고 병에 담고 포장해 역으로 말레이시아에 물을 되팔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자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된 물만 먹는다. 여타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렇지만 병에 담긴 생수라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 특히나 가격이 저렴할수록 위험하고 가격이 비싸질수록 먹을만하지만 여튼 조심해야 한다.[15] 원래는 영속적으로 영국군의 보호를 받길 원했으나 1970년대영국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또한 굉장히 어려워졌다.[16] 비록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이 앞장 섰으나 1997년 아시아 금용위기 이후 싱가포르, 홍콩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섰다. 현재도 그러고 있다.[17]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전체 GDP는 72.4억 달러에서 834.6억 달러로, 1인당 GDP는 4,364달러에서 27,394달러로 증가한 셈이다.[18]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19] 참고로 세계 최연소 수상인 캄보디아훈 센이 만 32세에 총리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리콴유는 매우 이른 나이에 집권한 것이다.[20] 리콴유가 소속되어 있던 '탄종 파가르' 선거구는 독립 이후부터 1991년 선거제도 변경전까지 평균 90% 지지율로 당선되었으며 GRC(다중 의석)로 선거 제도가 변경되었어도 리 총리 사후에 치러진 2015년 총선거 전까지 단 한 번도 야당 후보와 대결한 적이 없고 상대 야당 후보가 아예 이 지역구에 나올 엄두를 내지못해 무투표로 계속 당선되었다.[21] 다만 고촉통도 14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하기는 했다.[22] 한국언론에서는 대부분 '고문장관'으로 표기했다. 주 싱가포르 한국대사관 역시 고문장관이라고 표기. 선임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국 신문에 실은 싱가포르 홍보광고에서는 스승장관이라고 표기했다.[23] 이는 싱가포르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다.[24] 현직 국가 정부 수반이 참석한 경우는 한국(박근혜 대통령), 일본(아베 신조 총리), 인도(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토니 애벗 총리) 등이었고, 중국은 리위엔차오(李源朝) 부주석을 파견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만의 경우는 마잉주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중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국장 직전에 개인 자격으로, 비공개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