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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6:29:52

마하티르 빈 모하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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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말레이시아 제4·7대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
محضير بن محمد
파일:Mahathir-bin-Mohamad-Prime-Minister-Malaysia-2019.webp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마하티르 빈 모하맛
Mahathir bin Mohamad
محضير بن محمد
출생 1925년 7월 10일 ([age(1925-07-10)]세)
말레이 비연합주 알로르스타르
(현 말레이시아 크다알로르스타르)
학력 에드워드 7세 의과대학
신체 170cm, 64kg
정당 조국투사당
종교 이슬람
약력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말레이시아 외무장관
말레이시아 제4·7대 총리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5033100328_0.jpg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와 함께.[1]

1. 개요2. 생애3. 정치 활동
3.1. 정치 입문3.2. 총리3.3. 총리 퇴임 이후3.4. 야권 전향3.5. 다시 총리가 되다3.6. 총리 사임 후
4. 비판
4.1. 권위주의 통치4.2. 계파 갈등 조장4.3. 인종 관련 행보4.4. 퇴임 이후 행보
5. 여담6. 관련 문서7. 출처

[clearfix]

1. 개요

말레이시아정치인. 전 부총리이자 4·7대 말레이시아 총리(1981-2003, 2018-2020).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장기 집권 총리이며 이외에도 각종 장관직과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원복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의 평처럼 뛰어난 지도력과 높은 청렴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영도자이자 공포의 독재자라는 평가도 받지만, 2018년에는 되레 본래 당에서 나와 신당을 창당해 야권 정치인으로 총선에서 승리하고 말레이시아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루어내 또 2년여를 재임했다.

온건 성향에서 극우 기질까지 왔다 갔다하는 극과 극의 정치 행보로도 비판받는다.

2. 생애

1925년 7월 10일 영국령 말라야 크다 주 알로르스타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모하맛 이스칸데르가 인도-말레이 혼혈인데 정확히는 케랄라 족의 후손이다.[2] 그의 별명 중 하나인 "체 뎃(Che Det)"은 어렸을 때 붙은 "첵 뎃(Cek Det)"을 살짝 변형한 것이다.

말레이시아가 일본에 침공당하면서 전국의 모든 학교가 강제 폐교하여 마하티르 총리도 학업을 중단하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음식 장사를 하게 되었다. 종전 이후 다시 학업을 이어갔고 싱가포르의 킹 에드워드 7세 의과대학(현 싱가포르 국립대학 의학부)를 졸업했으며 이곳에서 훗날의 배필을 만난다. 싱가포르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고향 알로르 스타르로 귀향했고 그곳에서 유일한 말레이인 의사로서 좋은 평판을 쌓았다.

3. 정치 활동

3.1. 정치 입문

이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참여하였고 1957년 말라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레이인 우대를 주장하고 야당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일당독주체제를 구축한 UMNO 내부와는 비교적 다른 노선을 보였는데, 바꿔 말하면 비주류로서의 행보를 보인 것이다. 당시 말레이인들은 급격하게 들어온 중국인인도인들 때문에 UMNO를 전적으로 밀어주었는데, 이러한 길 속에서 이를 다소 반대하는 비주류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당 내에서도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 물론 그가 왜 그랬는가의 진실은 훗날 밝혀진다.

그러나 1963년 기존의 말라야 연방에 사라왁, 사바, 싱가포르의 3개 주가 가맹하여 새로운 말레이시아 연방이 성립되면서, 마하티르 총리는 비로소 본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 주정부 수반이었던 리콴유 총리는 UMNO가 주도하던 신생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와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마하티르는 여기에 리콴유를 "돼지"라고 욕했다.[3] 이 전후로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마하티르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졌고, 곧바로 차기 총리 주자로 주목받는다.

하지만 싱가포르를 축출하고 난 뒤 처음 치러진 1969년 총선에서 UMNO가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는 패배를 당하고 중국계와 인도계 정당이 승리하자 대규모 인종폭동 사태가 일어나고,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계엄령을 내리고 독재자가 된다. 마하티르는 이러한 라만을 신랄하게 까댔고, 결국 당에서 숙청당했다.

결국 한순간에 쫄딱 망한 마하티르는, '말레이 딜레마'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라만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고, 라만의 뒤를 이은 압둘 라작 총리도 독재를 한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 그 책은 단순한 라만 정권을 향한 디스에서 끝나지 않고, 말레이인 우월주의를 주창하며 인종차별을 조장했다는 평도 받는다. 한때는 말레이인 우선주의를 반대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한 것은 다소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라작이 집권한 후, 마하티르 총리는 UMNO로 복당했다. 비록 1971년부터 라작은 독재를 조금씩 풀려는 듯 했지만, 새로운 독재체제를 마련했다. 마하티르는 여기에 가담했고,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 체계를 마련했다. 1974년부터 교육부장관이 되면서 영어는 식민지 시절 잔재라고 하여 말레이어의 공용화를 밀어붙였다.

당연히 그는 새로운 후계자로 유력시 되었고, 라작이 죽자 새로운 총리 후세인 온의 밑에서 부총리의 한 후보로 떠올랐다. 다만 상대편도 만만찮아서 어쩌면 그가 졌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영어도 제법 잘 했고, 지도자 우상화에 힘을 실어준 부인 등으로 인해 이기게 된다. 그리고 1981년 후세인이 사임한 뒤, 그는 총리에 올랐다.

3.2. 총리

집권하자마자 당시 투옥 중이었던 일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였고, 이후 룩 이스트 정책, 와와산 2020 등을 비롯한 각종 경제정책들을 마련하면서 말레이시아 성장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주류였던 그가 집권하자 툰쿠-라작-후세인을 위시로 한 구주류들의 반발에 직면했고, 그 동안 잠잠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당연히 마하티르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당권을 쥐기 위해 강경책을 내세웠고, 이에 따른 구주류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당연히 구주류의 일원이었던 툰쿠는 후에 탈당하여 '46년 정신'을 창당했고, 나머지는 일단 잔류했으나 과도한 강경책이 역풍을 일으켰다. 결국 1987년 위헌정당 크리를 맞으면서 망하는 듯 싶었으나, 이듬해 신 UMNO를 창당하면서 이를 모면한다. 이것도 법조인을 자신과 비슷한 성향으로 대거 교체했고 당명에 붙었던 "신"자도 떼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초기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틍쿠 라잘레이그 함자'를 비롯한 당내 구주류계의 반발은 지속되었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냉전이 종식되고 야당에 대한 규제가 일부 완화되면서 새로운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하티르는 만일에 대비해 구주류계 인사들에 대한 고용을 다소 배제했고, 부총리 또한 자신과 비슷한 신주류 또는 비주류계였다. 당장 1993년에 임명된 안와르 이브라힘과 같은 경우도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가 출신의 비주류였다.

1991년 와와산 2020을 발표하면서, 2020년까지 말레이시아를 선진국 대열로 올려 놓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밝혔다. 하지만 현재 말레이시아는 개발도상국으로 선진국 수준에 다다르기까지 한참 모자라며, 덕분에 이 정책에 대한 의구심도 받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로서야 21세기가 어떠할 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기대가 높았고 처음에는 꽤나 그럭저럭 됐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1997년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경제위기를 피하지 못했고, 이 당시 안와르 부총리가 해임된 것이 발단이 되면서 UMNO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때문에 1999년 총선은 집권당의 패배 가능성도 있다는 일부 예측이 있었으나, 승리했다. 다만 여론의 반발을 어느정도 무마시키고자 구주류인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를 새 부총리로 임명했고 기존의 강경책을 일부 완화했다.

여하간 1999년 총선에서 위기상황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언론플레이 신공과 게리맨더링 신공을 발휘해서 어찌어찌 집권을 연장하는데 성공하고, 외환위기의 원인이 헤지펀드 때문이라 하여 외국자본에 강력한 제약을 걸어 국내시장을 지켜내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2003년 22년의 독재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났다. 집권 마지막해인 2003년엔 인재양성 및 영어 실력 향상을 목표로 이과계 과목들을 영어로 바꾸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3.3. 총리 퇴임 이후

퇴임 후에는 정치와 비교적 거리를 두는 대신 기업가, 재단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이미 당권도 구주류에게 넘어갔고 본인의 입지는 다소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UMNO 내에서 적지 않은 실권을 발휘하면서 상왕 논란은 꾸준히 받았다.

3.4. 야권 전향

2010년대 전후로 중앙정치에 복귀하면서 나집 라작 신임 총리를 지지했으나, 2015년 전후에 터진 1MDB 게이트 관련 스캔들로 나집 총리가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때 무히딘 야신 부총리 등과 함께 나집에게 이러한 문제를 제기해 당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통일원주민당(PPBM)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통일원주민당(PPBM)이라는 신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민주행동당(DAP)과 인민정의당(PKR)과 손을 잡고 신야권연대인 희망동맹(PH)에 가맹했으며, 2017년 제14대 말레이시아 총선거를 앞두고 야권연합의 총리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동안 투옥된 남편을 대신해 야권연합의 총리 후보로 나섰던 완 아지자 완 이스마일(PKR 소속)은 부총리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PPBM 자체가 원내에 겨우 1석[4]만을 두고 있는 군소 정당이었고, 그마저도 하원이며 상원에는 의석 자체를 두지 않고 있었다. 지방의회도 총 3명이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그냥 신주류 원로들 중에서도 겨우 일부만이 PPBM을 만들었고, 그러니 당연히 기반이 튼튼할 리가 없으며 심지어 소속 당원들의 일부가 아예 UMNO로 도로 복당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일각에서는 PPBM이 조만간 해체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 야권연합 소속이나 DAP, PKR 등에 가려져 인지도가 다소 낮은 국민신뢰당(AMANAH)보다도 더 적은 의석수를 둘 정도였다. 그나마 AMANAH는 DAP나 PKR처럼 명색이 중도좌파에 민주투사라기도 하지 PPBM은 또한 아래에 나온 대로 신당을 창당하면서 극우 세력들과 연합해서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작 마하티르 본인이 가담한 야권에서도 일치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때는 UMNO 소속으로 아예 정권까지 잡던 인물이었고 오랫동안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주장했기에 하루아침에 야권인사 흉내를 낸다고 해서 야권 지지자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변절 속도도 2015년 7월에서 10월, 대략 3개월 내지 4개월로 엄청 빨라서 일각에서는 너무 고령인데다가 나집 총리가 신주류를 배척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복귀할 수 없으니까 아예 대놓고 저런 극우세력들과 붙으려는 게 아닌 가 하기도. 물론 명백한 철새 행각인데다가 그것도 정권을 노린다는 사람이 이러니 결국 호감도만 말아먹었다.

이런 이유로 마하티르는 야권 유력주자이지만 다시 총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대세였다. 얼마 안 남은 여생이라도 차라리 UMNO에 계속 남기라도 했으면 비록 개발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어도 국부로서 계속 추앙받으며 말레이시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원로로 남았을 것이고, 아니면 UMNO를 탈당했더라도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등이 소속된 조화의 힘(GS) 등에라도 가담했으면 이 정도까지의 비난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5] 하지만 마하티르는 문제가 많은 PH 소속이고, 거기다가 이제는 너무 초고령이라 설상 총리에 오르더라도 임기 중 죽을 것이라고 다들 보고 있다. 설상 그렇다면 부총리가 되는 완 아지자가 총리직을 승계하고 그러면 야권연합도 이제 PKR이 주도하게 되며, 이후에는 형평성 문제로 후계를 DAP의 림관엥 등에게[6]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때 구여권계가 만든 PPBM은 쪼그라들다 결국에는 망할 것으로 높게 보고 있다. 일단은 여권연합 견제를 목표로 어거지로 하나로 있기에, 집권하면 내부 분열이 본격화 될 것은 뻔하고, 이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PPBM이 제일 먼저 퇴출될 것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도 분명 마하티르가 총리가 되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당연히 마하티르가 총리가 되려면 야권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선거구조 자체가 여권연합에 유리하게 되어 있고, 굳이 선거구조가 아니더라도 말레이시아의 특성 자체가 여권연합에 유리한 상황이다. 특히 말레이인 + 기타 부미푸트라 + 무슬림 + 사라왁, 사바, 라부안인을 기초로 한 강력한 여권연합 기반이 야권에게 몰표를 줄 가능성은 전무하며, 비록 말레이인의 힘이 약한 사라왁이나 사바의 경우도 설상 여권을 욕할 때는 욕하더라도 결국 총선에서 여권을 뽑아주기 때문에, 마하티르가 UNMO 지지자의 분열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3.5. 다시 총리가 되다

하지만 제 14대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PH가 의석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61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룩함과 동시에 마하티르는 아흔이 훌쩍 넘는 나이에 또다시 총리에 등극하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61년에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점, 특히 재임시절 마하티르의 주요 지지기반이자 집권여당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였던 농촌지역에서 PH가 선전하고 돌풍을 일으킨 점은 마하티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인 총리는 곧 석방될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7], 마하티르도 오랫동안 말레이시아를 통치한 만만찮은 인물이므로 안와르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등 향후 권력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다만, 안와르가 10월 13일 열리는 느그리슴빌란 주의 하원 재보선에 출마해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는데, 마하티르는 일전에 안와르가 하원의원이나 상원의원으로 당선될 경우 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곧 마하티르가 물러나고 안와르 이브라힘이 새 총리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마하티르 자체도 워낙 거물인 건 맞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안와르의 총리 등극을 위한 caretaker인 셈. 안와르는 결국 재등원에 성공했으며, 마하티르는 최소 2년 이상 총리직을 지킨 뒤 안와르에게 인계해 주겠다고 한다.

다만 안와르 부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권력투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나오고 있으며, 오히려 "마하티르가 안와르에게 총리직을 줄 리는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역으로 안와르를 다시 파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물론 나이가 나이인지라...

집권당시 리콴유 총리와 악담을 주고받은 사이답게 재집권 이후 다시 싱가포르와 사이가 냉랭해져가고있는데 나집 라작 총리 집권당시 기존에 냉각되던 양국관계를 완화시키고 추진하였던 금융, 철도 등 여러사업들을 다시 칼질을 하고있다, 싱가포르에게 공급하던 식수부터 재협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를 이어줄 고속철도 또한 토지수용까지 진행되던 사업을 비용문제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하였다.
2019년 10월 4일 마하티르 빈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즉시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미 홍콩 내부에서 통제권을 상실한 행정장관이 버티는 모습 자체가 홍콩의 내분을 촉진시킨다고 지적했다. 기사

3.6. 총리 사임 후

2020년 2월 24일에 사의를 표명했다.# 다만 지지받으면 돌아온다고 전했다.# 인민정의당에서 일부 의원을 제명함에 따라 희망동맹의 재적과반이 무너진 탓에 사의를 표명하게 된 것.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오랜 심복이었던 무히딘 야신 내무장관[8]주군 마하티르를 배신하고 통일원주민당을 희망동맹에서 탈퇴[9]시킨 뒤 UMNO,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연립정권을 수립,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믿던 도끼에 제대로 발등찍힌 셈.

워낙 고령[10]이라 그런지, 2022년 3월 차기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2022년 10월, 이 역시 깨고 야당 투쟁력 강화를 이유로 차기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선되면 무려 103세까지 의원직을 유지하게 되며, 본인이 세운 세계 최고령 국회의원 기록을 다시 한 번 경신하게 된다.

하지만 탄탄한 연합정당이 없어서인지 본인의 기존 지역구 랑카위에서 10% 미만을 득표하여 결국 낙선했다. 조국투사당도 마하티르 부자를 포함한 전원이 낙마했다. 정계 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며,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김종필의 정치 말년과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안와르 이브라힘 내각과 의회가 난맥상을 연이어 보이는 와중 트위터를 비롯한 각종 SNS들을 통해 공개 행보를 이어가며 정치행보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4. 비판

4.1. 권위주의 통치

그는 경제를 성장시킨다면서 무슨 연관인지 말레이인을 우대하고 타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쳤고 외국인들을 막 내쫓았다. 심지어 말레이인들에게 대학입시의 길을 열어두겠다며 대학에 멀쩡히 다니고 있던 중국인, 인도인, 외국인 학생들을 그냥 쫓아냈다. 그들 대부분은 아무런 죄도 없었고, 오로지 '말레이인이 아니다'라는 죄 때문에 쫓겨난 거였다. 그리고 대학입시에 있어 학생의 60%는 기본적으로 말레이인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그가 만든 건데, 원칙상 그렇다는 거지 실제 말레이인의 수는 그보다 더 많다. 지금도 말레이인이 아닌 다른 민족 학생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어려워서 질 떨어지는 지잡대나 외국 대학으로 가는 실정이다. 다만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2002년 당시 조사를 보고 중국계 학생 20명 중 1명이 정부학교보다 중국인학교에 많이 간다고 하여 민족분열을 걱정하기도 했다.[11]

뿐만 아니라 말레이인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어느정도 줘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는데, 중국인이나 인도인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어느 중국인 기독교도가 마하티르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하면 당장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에서 여야 대립은 말레이인들만의 대립이었다. 90년대부터 냉전이 풀리고 국제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중국인들과 인도인들도 점차 정계에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파일:external/www.malaysia-today.net/img826.imageshack.us_img826_7418_anwaribrahimmahathirmoh.jpg
(한때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안와르 이브라힘(왼쪽)과 함께. 1990년대 후반 이후 정적 관계가 되었다)

마하티르는 집권기 '룩 이스트'(Look East Policy: 동방을 배우자)라는 표어 아래, 동남아시아보다 앞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 일본, 한국 등 동북아 국가들의 사례를 배우자고 역설했는데, 해필 이때 배운 것 중 하나가 유신독재였는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통해 수차례 장기집권했고, 학생운동가와 양심수들을 탄압했다. 결국 그의 독재는 여당인 UMNO에서도 염증을 느낄 정도였는데, 당의 부수장이자 부총리로 마하티르의 중요 후계자였던 안와르 이브라힘과도 갈등을 겪어 안와르는 끝내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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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마하티르. 안와르의 숙청, 고정환율을 통한 독자적인 외환위기 대응을 다루었다. 마하티르의 국제투기 자본 통제와 안와르의 긴축재정개혁으로 말레이시아는 IMF의 고금리 정책에 따른 경제기반 붕괴,헐값매각,그리고 눈덩이 재정적자 등의 무수히 많은 문제점을 피해갔다.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마하티르의 자본통제를 비난하던 미국은 리먼 브러더스발 금융위기가 닥치자 1997년에 아시아 국가들에게 했던, "망할 기업은 망하게 두라"는 조언과는 정반대로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렇게 되자 마하티르는 또 한번 주목받았으며,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IMF의 처방이 순전히 서방 투기자본의 이익만 반영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마하티르 측은 안와르가 동성애자라는 혐의를 내세워 그를 실각시켰지만, 실제 이유는 1990년대 말의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의 정책적 대응 방향을 놓고 마하티르와 안와르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청년 시절부터 국수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마하티르는 외환위기 자체를 미국이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서방측의 음모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성향과 맞물려 외환위기 당시 한국태국 등이 IMF의 긴축재정 권고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마하티르는 IMF지원 거절, 링깃화 고정환율제 채택을 통한 외국자본 유출금지 등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반면 안와르는 서방측이 주장하는 금융 자유화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안와르의 주장은 마하티르에게 이적행위로 여겨졌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구제금융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필수적인 금융 개혁 조치를 취했고, 그리고 그 결과 축출된 안와르는 마하티르 정권의 2인자, 후계자에서 반정부 인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투옥된 사이 인민정의당을 창당하였고 민주행동당에 버금가는 야당으로 성장한다.

독재자에게 부록처럼 붙는 사치 및 부패 의혹도 있다. 90년대엔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인구가 넘치자 이를 해결한다고, 세팡 중간 지점 일대에 신행정도시를 만들기로 했는데, 짓는 와중에 각종 부패와 사치 문제가 제기되었다.

부미푸트라 정책의 경우 결과적으로 본다면 화교가 경제적으로는 축출되지 않았을 뿐더러 수입 대체산업을 대대적으로 장려하면서 외국인들의 몫이 크게 줄어드는 과정에서 비중이 오히려 확대되는 경향까지 보였기에 극단적인 반발에까지 직면하진 않았고, 말레이계 우대 정책으로 말라야 반도의 말레이계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중국계나 인도계와 대등해진 측면도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원체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말레이계보다 중국계 화교 및 인도계가 경제적 주도권을 틀어잡고 있었던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사라왁, 사바의 사람들은 생각도 안 했고, 이쪽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말 그대로 택도 없었다. 원래 사라왁, 사바는 천연자원이 가득해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곳이어야 마땅한 곳인데, 천연자원 이득은 쭈욱 빨아먹고 이곳의 독립운동가 등은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애초에 말레이계와 특별한 연관이 없는 땅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독재자 이미지 때문에 재집권 시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는데, 일부에서는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취임하자마자 마하티르를 욕한 남성이 구속되거나, 부패 척결이라는 미명 하에 야권 인사들을 대거 탄압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4.2. 계파 갈등 조장

계파 갈등 조장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단 UMNO 내에서도 인기가 낮았고 실제로도 역대 총리들이 후계자를 고심할 때 마하티르는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에 당초에야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총리에 오르면서, 당연히 구주류의 반발이 심했고, 이 때부터 구주류(툰쿠-라작-후세인-바다위-나집) vs 신주류(마하티르) 간의 갈등이 본격화 되었다.

일전에야 숨겨지거나 거의 없었던 계파 갈등이 결국 이 전후로 조장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말레이시아는 내각책임제라 계파 갈등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 데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잘 뭉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는 내부 갈등이 정당 지지율에 큰 악영향을 미치는 편은 아니며, 이에 대한 비판도 한국처럼 강도가 높지는 않다.

그래도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만큼은 피할 수 없다.

4.3. 인종 관련 행보

사진. 통일원주민당(PPBM)이라는 신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극우(명목상 중도좌파) 야당인 민주행동당(DAP)과 인민정의당(PKR)과 손을 잡고 신야권연대인 희망동맹(PH)에 가맹하면서, 각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DAP와 PKR이 겉으로는 민주화 투사, 중도좌파를 자처하는 등 교묘한 언론플레이 덕에 국제사회의 동정심을 얻고 있으나, 실제로는 반이민, 반이슬람을 주장하는 유럽형 극우정당인데, 그나마 당 내에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다소 좌측[12]에 있던 마하티르가 이들과 손을 잡아 각계각층의 비난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DAP는 철저한 중국인 우선주의 및 반말레이, 반이슬람 정당이라 말레이인의 비토가 심한 판국.

나집 총리의 1MDB 관련 의혹이 계속되자 아예 DAP, PKR 등과 연계된 반정부 단체인 버르시가 주관한 대규모 집회에 참여했으며, 마하티르 본인뿐 아니라 기타 PPBM 인사들까지 추가적으로 참여하면서 본인들이 이제 대놓고 변절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 9월에는 마하티르가 DAP에게 말레이인을 모독하라고 지시를 내려 파문이 일었다. 비록 인도인 혼혈이라나 법적으로도, 본인의 정체성도 말레이인인 데다가, 한때는 말레이인 우월주의를 주장했기에 그 파문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 본인이 말레이인 우월주의를 반대했던 소수파 시절 총리를 지낸 툰쿠 압둘 라만의 경우도 말년에 UMNO를 떠나 신당을 창당한 바 있지만, 그래도 말레이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후임의 경우에는 아예 대놓고 부미푸트라 정책이라는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도입했기에 이들과는 정반대 행보를 걷는 것. 정작 자신이 파면했고 탄압했던 안와르가 지금의 마하티르와의 모습이 비슷한데, 실제로 안와르는 마하티르가 영입한 사람이었고 마하티르 정권 초기 안와르는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다.

당연히 UMNO 및 지지 세력에게는 국부가 아니라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국민 가수 취급받는 시티 누르할리자마저 한때 마하티르를 노골적으로 찬양한 전적이 재조명 받으면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을 정도. 시티 외에도 셰일라 마지드파티아 라티프 등 일전에 마하티르를 지지하거나 또는 그런 듯한 뉘앙스만이라도 내뱉은 연예인들 또한 욕을 거하게 먹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농촌 지역이나 중장년, 노년층, 도시 중산층 등 마하티르에 대한 향수가 짙은 지지기반을 중심으로 야권에 지지가 이어지면서 개인으로서는 15년만에 총리복귀, 말레이시아 역사에선 61년만에 정권교체란 기적적 결과를 거두는 저력을 보였다.

중국계에 대해서 젓가락질 하는 것에 대한 차별 발언을 가졌다는 것이다.#

4.4. 퇴임 이후 행보

이 사람의 권력욕이야 잘 알려져 있지만, 퇴임 과정과 그 후의 태도 때문에 욕을 먹고 있다.

말레이시아인들이 마하티르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기 시절(1981~2003) 당시 경제 발전 등을 이유로 존경할 뿐이지, 2기 시절(2018~2020) 당시의 행보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상당수의 말레이시아인들도 1기 때의 마하티르는 유능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존경하지만, 2기 때의 마하티르는 오히려 무능한 지도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13] 그런 과정에서 2020년 2월 24일 돌연 사임을 선언했고, 어쨌든 깔끔하게 퇴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문제는 퇴임 과정, 그리고 그 후에 막말로 국민을 갖고 장난을 친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서 여론의 비판이 거세다.

발단은 퇴임 직후였는데, 초기 여론이 여야를 불문하고 사임을 반대하자 마하티르는 15대 총선 전까지 여야를 가리지 않는 국민통합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를 제안했다. 하지만 UMNO와 PAS는 말레이인들의 반감이 심한 DAP와 협력하는 것을 원치 않아 이 제안을 거부했고, 대신에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그런데 조기 총선을 치르자니 분위기가 영 아니었고, 설상가상으로 마하티르도 PPBM 총재직까지 사임했기 때문에, BN, PAS, GPS 등 야권은 PPBM 총재 대행을 하게 된 무히딘 야신 대표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PH는 안와르를 지명하면서 맞섰지만, 문제는 PPBM 내부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무히딘 지지를 거부하고 마하티르를 지지하면서, PH는 마하티르를 다시 총리 후보로 지명하게 된다.

여기까지야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문제는 마하티르가 PH의 지지를 받게 되자, 갑자기 사임 의사를 철회하고 총리직 복귀 의사를 밝혔으며, 여기에 PPBM 총재직을 사임하고서는 갑자기 아니라고 말 바꾸기를 한 것.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고 봐도 무관한데, 사임을 통해 박수칠 때 떠나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갑자기 돌아오겠다며 약속을 뒤엎는 행동은 여론의 뭊매를 맞았다.

결국 무히딘은 총리 취임을 강행했지만, 마하티르는 무히딘이 원내 과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며 총리로 인정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고, 급기야 조기 전당대회를 주장하며 무히딘을 쫓아내려고 하는 중이다. 하지만 전당대회도 코로나 19 때문에 불투명한 상황이 덮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히딘의 국민연합(PN) 정권이 코로나 대처를 잘 하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악이 받쳤는지 아예 불신임을 상정하면서 최후 발악을 하고 있는 중이다. 표결은 5월 18일.

그리고 신당 창당까지 나섰다.#

당연히 여론의 질타를 심하게 받고 있으며, 나이가 100 가까이 됐으면서 본보기를 보이기는커녕 지금 장난하냐고 욕을 무진장 먹고 있는 중이다.

2020년 10월 29일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벌어진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흉기 테러 이후, 트위터에 "무슬림들은 과거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을 죽일 권리가 있다(Muslims have a right to be angry and to kill millions of French people for the massacres of the past.)라는 망언을 올려 파문이 일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트위터에 증오와 폭력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계정 정지를 요청했고, 해당 글은 이후 삭제되었다. 관련 뉴욕타임즈 영문 기사 문맥을 읽어야한다는 것을 해명했다.#

2021년 5월에 체온을 재지 않고 모스크에 입장했다가 코로나 보건지침 위반으로 수사에 오른 상태이다.#

5. 여담

6. 관련 문서

7. 출처



[1] 마하티르와 리콴유는 생전 사이가 괜찮았던 편으로, 정치적으로 냉랭했던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의 관계도 마하티르 집권 이후부터는 개선되었다. 두 사람은 국가 주도의 개발독재를 아시아적 가치라는 명목으로 미화, 옹호하는 대표격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서로 잘 통했다.[2] 마하티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를 "Kutty Kerala"라고 비하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3] 실제 두 인물은 일생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집권 당시에도 틈만 나면 상대국가를 비방하는 게 일상이었다.[4] 이후 총리가 되는 무히딘 야신.[5] 실제로 GS의 노선은 중도(내지 중도우파)이며, 내부에도 친여 성향과 친야 성향이 둘 다 존재한다. 의외로 국민의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도 GS는 대게 범여권으로 간주되는 편이다. 그리고 일부 친야 인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 아지즈 닉 맛, 하론 딘 등을 비롯한 이들은 UMNO에서조차 존경을 받는 원로들이다.[6] 부친인 림킷시앙이 DAP의 실권자라고 하지만, 림킷시앙 또한 지금은 너무 고령이라 총리는 한 번도 못하고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현재 당권을 아들인 림관엥에게 서서히 물려주려는 상황이며, 림관엥 또한 2020년대로 60대라 자기 자식들에게 당권을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7] 마하티르는 총선 당시 안와르의 사면, 석방을 공약한 바 있다. 재집권을 위해 한때의 정적과 극적 화해를 선택한 셈. 실제로 마하티르 취임 6일 이후 안와르는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8] 통일원주민당 창당 당시 마하티르를 따라 UMNO에서 뛰쳐나온 유일한 현역의원이었다.[9] 마하티르를 지지하는 의원 소수(3명)는 희망동맹에 남았지만 의원 절대다수(33명)는 무히딘의 뜻에 따라 희망동맹에서 뛰쳐나간다. 사실상의 분당.[10] 1925년생이다. 2024년 기준 세는 나이로 100세.[11] 외국에 갈 사정이 있는 중국계들은 외국 국제학교에 보낸다. 현재 싱가폴이나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에 많이 보인다.[12] 물론 구주류에 비해서 좌측에 있을 뿐, 실제로는 UMNO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보수 우파다.[13] 다만 1기 때는 국민전선(BN)의 일당우위정당제 치하였으며 BN이 곧 UMNO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UMNO 위주로 장악되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국정 운영을 할 수 있었지만, 2기 때는 희망동맹(PH)이 특정 정당 위주로 구성된 것이 아닌 탓에 계파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4당 중 그 누구도 압도적인 장악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1기 때 처럼 거침 없는 행보를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14] 90년대 초반에 KBS에서 방영된 주말 연속극 야망의 세월에서 실권이 없던 부수상 “아틸” 이란 인물이 이명박을 모델로 한 주인공 박형철과 친분을 쌓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 이명박과 마하티르가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그대로 따왔다.[15] 마하티르 총리의 생년이 1925년 7월 10일. 재취임 날짜가 2018년 5월 10일.[16] 다만 90대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건강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