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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4:37:39

레프 톨스토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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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3. 슬라브주의자 여부4. 파문 여부5. 황제 및 정부와의 관계6.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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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프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평가

명실상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전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위상을 지녔는데 2007년 126명의 유명 영어권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뽑았는데 그의 작품인 안나 카레니나가 1위, 전쟁과 평화는 3위에 뽑혔다. #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은 작가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2위 윌리엄 셰익스피어, 3위 제임스 조이스, 4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5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6위 윌리엄 포크너, 7위 찰스 디킨스, 8위 안톤 체호프, 9위 귀스타브 플로베르[1], 10위 제인 오스틴이다. #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러시아 대문호 중 한명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톨스토이를 파문했던 교회 고위 성직자들 중에서도 톨스토이의 팬이 있었다.톨스토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니콜라이 2세가 추모글을 남겼고, 하원인 국가두마도 애도를 위한 짧은 휴정을 가졌으며, 상원의장 아키모프도 짦은 추모사를 남겼다.

제정 러시아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도 톨스토이는 제국시대의 귀족 출신 문호였음에도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톨스토이가 특히 소련 체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이유에는 농민의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공산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도 있었다. 한 예로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톨스토이만 이런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고 러시아의 문학 애호 경향은 소련에서도 유유히 이어져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등의 대부분의 문호들은 소련에서도 존경을 받았다.[2]

소련에서는 (적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탄압이나 과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구체제적 경향이 농후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비판받은 정도였다.[3] 평가 절하된 인물은 혁명 운동을 악령으로 디스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정도이고 평가절하되었지만 천하의 소련도 차마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성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죄와 벌을 비롯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금지되지 않았고 스탈린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으며[4]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근거로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도 흐루쇼프 시절에 복권되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은,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게르첸, 이반 투르게네프 등의 작품을 유년 시절부터 읽고 열광하며 혁명과 인민 해방의 꿈을 꾸며 자라 결국 나라를 얻게 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을 통해 소련 체제의 성립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2차 대전 이후 동독에서도 보인 특성이지만, 제정 러시아의 문필가들은 정치성만으로 목숨이나 경력, 명성을 날려 버리기에는 볼셰비키 혁명가-지도자들에게 당장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너무 큰 존재였다. 후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저자 미하일 불가코프[5], 《고요한 돈 강》의 미하일 숄로호프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련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서 반체제 작품을 기고했음에도 목숨을 연명했을 정도다.

러시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에는 정책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듯.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인 2010년에도 아무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되려 해외에서 더 화제였고 한국에서도 사망 100주기 기념이라고 행사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자나 완역판이 홍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010년은 공교롭게도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 기념해였는데, 체호프에 대한 행사는 성대히 열린 반면 톨스토이에 대한 행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체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책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설이 유력하다.[6] 게다가 톨스토이는 현재 국교의 레벨로 재등극한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여전히 교과목에 그의 작품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그의 후손들 중 잘나가는 인사도 있기에 정책적으로 그렇다쳐도,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거장 작가로 존경받는 그를 마냥 푸대접받는다고 보기엔 좀 그렇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인 볼리마디르 톨스토이는 박물관을 운영하고 동시에 푸틴 정부하에서 문화 고문직을 맡는 등 제법 잘나가고 있고, 표트르 톨스토이는 아예 러시아 채널1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레먀를 7년 정도 진행한 유명 방송인이다. 톨스토이 직계 후손만 약 400명...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2016년 러시아 여론 조사 결과에선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고리키, 체호프, 고골 같은 역시 걸작 작가들로 부족함없는 다른 러시아 작가들을 제치고 역대 러시아 최고 작가로 톨스토이가 꼽혔다. 톨스토이는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증거다.

3. 슬라브주의자 여부

저는 드미트리 호먀코프를 존경합니다. 그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것을 그의 아버지처럼 재치있게 전달합니다. 제 영적 방향과 성장에 있어서 슬라브주의자들만큼 큰 영향을 미친 러시아인은 없습니다.
1906년 레프 톨스토이와 두샨 마코비츠키[7]의 대화 中
정확히 알 수 없다.

슬라브주의든 서구주의든 당대에 이미 명확하게 정의되고 구분되는 사상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슬라브주의자들끼리, 서구주의자들끼리 서로 더 비판했고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가 일치되는 것들도 많았다. 게다가 자칭 서구주의자/슬라브주의자라 하면서 실제로 사상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반대쪽과 공통점이 많은 기묘한 케이스들도 존재했다.

어쨌든 톨스토이가 슬라브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했고, 서로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다는 점은 톨스토이 본인도 여러 번 인정한 바이긴하다. 실제로 당대에 저명한 슬라브주의자들의 견해와 상당 부분을 공유하기도 한다.

고로 이 슬라브주의를 협의적 의미에서 키레옙스키, 호먀코프, 악사코프 등 당대 가장 저명하고 전통적인 슬라브주의자들의 사상과 그 지지자들만으로 한정한다면[8] 톨스토이는 슬라브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슬라브주의와 핵심 내용을 공유하거나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을 통칭하는 광의의 의미에서는 슬라브주의자나 혹은 슬라브주의의 한 분파로 분류할 수도 있긴 하다.

어쨌든 그 당시 엘리트 계층들이 접할 수 있는 지식과 세계관은 모두 공유되고 있었기에 굳이 슬라브주의/서구주의가 아니라 다른 사상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차르주의와 사회주의조차도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굳이 명확한 경계가 있는 구분되는 사상으로서의 분류는 대부분 후대인들의 자의적인 판단이 더 크다.

4. 파문 여부

그러므로 그의 교회로부터의 탈퇴를 증언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기도하오니, 주께서 그에게 진리의 깨달음으로 회개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디모데후서 2:25). 자비로운 주님,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성스러운 주님의 교회로 돌이켜 주소서. 아멘.
1901년 2월 20-22일에 열린 신성시노드 결정 557번, 레프 톨스토이 백작에 대해 그리스-러시아 정교회의 충실한 자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제가 정교회를 자칭하는 교회를 거부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레프 톨스토이가 자신의 파문 선언에 대해서 1901년 4월 4일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 보낸 답변.
공식적인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은 교회가 톨스토이를 파문한 게 아니라 톨스토이가 자유의지로 교회를 거부했다는 것이며 21세기 현재까지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9] 반대로 톨스토이 본인 역시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므로 거부할 것이며, 때문에 교회로부터 제재를 당하는 것이 합당한 조치임을 인정했다.

일단 톨스토이는 모든 종교 조직을 거부했고 그곳에는 진리가 없다는 견해를 기본으로 포함하고 있었기에 정교회 뿐만 아니라 가톨릭, 프로테스탄티즘 등의 관점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단은 맞았다. 단지 황제들과 정계 및 교계의 고위인사들이 노골적으로 두둔해줬고[10], 그 파문이라는 형식적인, 상징적인 조치를 하려고 당대에 이미 세계적으로 명망높았던 톨스토이를 건드리는게 부담이 컸기 때문에 밀려졌을 뿐이다.

사실 톨스토이 입장에서 운도 없었던 것이 하필 1902년에 러시아 수도에서 종교, 철학, 예술에 대한 지식인, 학자, 성직자, 정치인들 간의 대규모 학회 및 토론회가 열려서 그쪽으로 관심과 논쟁이 과열되어 있는 시점에, 정교회 성사에 대한 조롱이 들어간 톨스토이의 저작 '부활'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쳐버려서 같이 도마 위에 올랐고, 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파문까지 이어진 것이다.

애시당초 당시 정교회의 최고위 종교 제재는 저주(Анафема)이며 전체 역사를 통틀어봐도 이후의 레닌을 비롯한 공산주의-혁명가들이나 과거의 에밀리안 푸가초프 같은 국가적 반란 주동자[11] 정도가 받았다. 그러나 단순히 파문(Отлучение)을 당했다는 것은 결국 교회 입장에서도 회개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도 러시아 정교회는 공식적인 파문 결정에서부터 톨스토이가 회개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고위 성직자들은 톨스토이의 아내에게 남편을 설득하라는 편지를 보내거나, 죽을 때가 되자 고해성사를 받기를 권유하기도 했다.

5. 황제 및 정부와의 관계

재능이 꽃피었을 때, 자신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 생활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 중 하나의 친숙한 이미지를 구현한 위대한 작가의 죽음에 대해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한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자비로운 심판자가 되시기를
니콜라이 2세의 톨스토이에 대한 추모글
러시아 제국에서 테러를 벌이는 극단주의적이거나 범죄자 혁명가들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지식인이나 저명인사쯤 되면 반체제 성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사적으로 친분이 있거나, 황제를 포함한 고위 결정권자에게 알현 신청 및 보고서를 올릴 수 있거나, 여러 방식으로 정부 정책 프로세스에 개입할 수 있긴 했다.[12] 마찬가지로 제정 러시아의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던 레프 톨스토이는 황제를 비롯한 정계의 최고위급 인사들에게 다이렉트로 알현을 요청하거나 보고서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냈다. 또한 표트르 스톨리핀과 정책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슬라브주의,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인 톨스토이는 차르 정부의 존재를 비판했지만, 반대로 구체적인 개별 정책에 대해서는 각각 지지/비판 입장을 표현했고, 설령 비판하더라도 사적으로는 황제나 고위인사들에게 존중과 친분을 표시했다. 당장 1902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를 사랑하는 형제(Любезный брат)라고 "차르가 아닌 형제로서 당신에게 말한다"고 쓰면서 격식 없는 친근함과 존중을 드러냈다. 반대로 황제들도 톨스토이가 사회로부터의 지나친 비방이나 교회로부터 파문 받는 것을 여러 번 무마해줬다. 톨스토이가 죽었을 당시, 니콜라이 2세가 추모글을 올렸을 정도다.

톨스토이를 제외하더라도 이런 관계들은 러시아사에서 드문게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한때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고 이후로도 니콜라이 1세를 깠지만 사적으로는 존중을 보였고, 니콜라이 1세도 푸쉬킨의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논평을 남겼다. 이후의 스탈린과 불가코프도 비슷한 관계였다.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에 대한 평가,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 개인에 대한 평가,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 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황제들을 포함한 제정 러시아 시대의 사람들도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었고 표현했다. 결국 톨스토이를 이단이라 여겼지만[13] 사적으로는 친구처럼 지냈던 이들도 많고, 톨스토이 본인은 이것 자체를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 여기지 않았다.

정작 톨스토이는 생전에 자신에 대한 사소한 비판조차 모욕이라며 용납하지 않는 자칭 팬들,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이들을 싫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 종교철학자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는 톨스토이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현상을 두 번째 검열이라고 비판했다. 고로 그 제정 시대에도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가들에 대한 과도한 '충'들이 많았다.

6. 관련 어록

"Russian author, a master of realistic fiction and one of the world’s greatest novelists."
"사실적인 소설의 거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인 러시아 작가."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14]
우리는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볼테르와 괴테 이래로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명성을 누린 작가가 없었던 것이다.
― 얀코 라브린

톨스토이는 하나의 세계이자 인간이며, 톨스토이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고, 러시아를 아는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막심 고리키

그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용감했으나 야성적이었고 완고했으며 어린아이 같았다.
막심 고리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19세기 전소설계에 군림하는 거대한 기념탑이자 근대의 <일리아스>이며, 그 구성으로 보아 아마 오늘날까지 쓰인 작품 가운데서 최대의 군중소설이며 서사시일 것이다.
로맹 롤랑

모든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톨스토이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다.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그 외에 뭐라 부를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한가?>는 세계의 문학이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이야기이다.
제임스 조이스

나는 서슴없이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토마스 만

만일 세상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
― 이사크 바벨

이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선택하리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톨스토이의 <하지무라트>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최고의 산문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 같은 작품이다.
해럴드 블룸

나는 톨스토이와 한 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직설적이고, 정직하고, 객관적이고, 극명하게 전쟁을 그린다. 나는 전쟁에 대해 톨스토이보다 더 잘 쓴 작가를 알지 못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톨스토이는 예술가이자 심리학자다! 강력하다, 정말 너무나 강력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나의 작품 100편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보고서 알았다.
기 드 모파상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이지만, 단순한 ‘사랑의 모험 소설’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예술은 남달리 강렬하고 맹렬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는 창조적 원숙의 정점에 이르렀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안나 카레니나는 역대 최고의 작품이다.
윌리엄 포크너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무결하다. 인간 영혼의 넓고 깊은 심리 분석, 그리고 러시아에서 전례 없는 예술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인간의 죄와 악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구현한다. 현시대의 유럽문학 가운데 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5][16] #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안나 카레니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이자 19세기 문학의 최고작이다. 이에 근접하는 톨스토이의 작품으로는 이반일리치의 죽음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하지무라트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대중의 영광 앞에서 얼마나 오만했는지.
토마스 만

톨스토이는 거룩한 신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톨스토이는 거대한 바위덩이이자 엄청난 거인이다. 톨스토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학에 진정한 농민의 모습은 없었다. 유럽에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
블라디미르 레닌

난 톨스토이가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판단에 애국심은 그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표트르 차이콥스키

내가 봤을 때 안나 카레니나보다 위대한 걸작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죽겠지만 그 작품은 영원불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우리 시대에 톨스토이보다 중요한 예언자는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학이 톨스토이를 소유하고 있는 한 작가들에게 문학은 즐겁고 쉬운 것이다. 작가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거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인정하는 것도 비통한 일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모두 해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이 문학에 요구하는 모든 기대와 소망을 정당화해준다.
안톤 체호프[17]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가 작가로서 이루고 싶은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쓰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

세르반테스는 첫 번째 소설가이며 그 마지막은 조이스와 프루스트다. 이들의 초월적 형태가 톨스토이에게 집결된다. 톨스토이는 성경, 호메로스, 셰익스피어처럼 비평을 무력화시킨다.
- 해럴드 블룸

안나 카레니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
- 오르한 파묵

전쟁과 평화는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소설이다.
- 서머싯 몸

톨스토이의 짧은 민담은 모든 민족을 위해 쓰여졌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톨스토이의 이름은 나에게 러시아어로 위대함을 뜻한다.
- 제임스 조이스

톨스토이는 미쳐버리기 전에는 최고의 천재였다.
- 헨리크 입센

나는 톨스토이의 반은 염세적이고 반은 운명론적인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난 후 다른 작가들의 소설이나 극작품은 아이들이 쓴 것처럼 느껴진다.
- 윌리엄 제임스

만약 신이 톨스토이에게 장수를 축복한다면 그는 우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경탄시킬 것이다. 그에게는 최고수준의 문학적 재능이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당신과 어깨를 견줄 만한 작가가 없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작품을 안 쓰고 종교에 빠져 있는가. 당신은 성서와 복음서와 불가사의한 윤리서와 사이비 해설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아는가. 이미 문학과는 담을 쌓았단 말인가.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여! 문학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이반 투르게네프[18]

그는 지금까지 생존했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 이반 부닌


[1] 보바리 부인의 작가.[2] 다만 이 때문에 냉전 종식 후 현대 러시아 역사학자들에게는 러시아 농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만들어진 고정관념과 선입견들을 심어주었다는 악평 아닌 악평을 받기도 한다.[3] 소련 정부는 장르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한정짓지않고 다양한 예술 형식을 수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우경화되어감에 따라 더욱 강조된다.[4] 스탈린은 시인 출신으로, 은행강도 뛰던 시절에 그의 시가 교과서에 올라가기도 했다.[5] 볼가코프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팬이었다. 스탈린은 불가코프가 희곡 <백위군>이 당국의 검열을 받자 수정해 발표한 <투르빈가의 나날들>을 좋아해서 홀로 극장에 가서 보곤 했다. 1930년 반체제 작가로 찍혀 곤란한 처지였던 불가코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소련을 떠날 기회를 주거나 극장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고 한 달 후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직장을 얻은 불가코프는 지속적으로 반체제 작품을 투고하다가 극장관리자와 충돌해 조감독 자리를 잃고 출판도 금지당해 곤궁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래도 숙청당하지는 않고 창작활동을 이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완성한다.[6] 그의 대표 중편작 하지무라트를 보면 러시아군이 캅카스의 마을을 하나 초토화시키고, 어린 소년까지 학살당한 현장 묘사를 주민 시점에서 적나라하게 그렸다.[7] 슬로바키아인으로 톨스토이 가문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의 의사였다.[8] 사실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이들의 사상도 충돌하는 부분이 많기에 마찬가지로 의미 없긴 하다.[9] 러시아 제국은 바로 그 중세 종교국가시대부터 속권과 교권의 지속적인 충돌이 일어나다가 끝내 표트르 1세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을 철폐하면서 개편된 나라라서 교회가 자의적으로 파문을 날리는 것에 정부가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파문을 받았다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이단이거나, 신성모독 혹은 국가적 대죄를 저지른 경우였다. 19세기 중순부터는 톨스토이를 제외하면 개개인에 대한 파문은 없었다.[10] 러시아 제국의 엘리트층, 식자층들은 아예 테러리즘에 가담하는 혁명가들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서로 안면이 있거나 서면 대화를 나눠본 이들이었다. 때문에 서로 사상적 , 정치적으로 비판할지언정 사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하거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1] 다만 푸가초프는 고의식파였거나 최소한 고의식파들의 지지를 받았기에 종교적으로도 이단이라 여겨질만 했다.[12] 반대로 제국 정부에서도 반체제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창구 정도는 열어 놓는게 많았다. 당장 아나키스트인 미하일 바쿠닌, 사회주의자인 알렉산드르 게르첸조차 황제들과 교류한 적이 있다.[13] 전술했듯이 톨스토이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이단은 맞았다.[14] #[15] 다만 도스토옙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작품 대부분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16]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도 러시아 문학의 걸작이라고 선언한 기록이 있다.[17] 그러나 체호프는 서른 살에 사할린 기행을 마치고 온 후로 그의 작품을 멀리하게 된다. 작품성에 대한 부정은 아니고 비참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유배지와 그곳에 갇힌 죄인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난 뒤 비폭력, 무저항을 추구하는 톨스토이의 이상론적 사상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된 것. 출판사의 편집장이던 스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사할린에 가기 전까지 내게 있어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하나의 경전이었지만, 돌아온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으로 보인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거와 달리 체호프는 톨스토이 개인에 대해선 여전히 존경해왔고 친하게 지냈으며 그냥 작품에 대한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톨스토이 앞에서 털어놓기까지 했다! 톨스토이는 그래? 이러면서 별로 기분 나뻐하지도 않고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1902년 둘이 정겹게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톨스토이는 자기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고 해도 여전히 후배인 체호프 작품들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톨스토이 역시 체호프가 쓴 것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은 있었으며, 그런 글은 면전에서 별로라고 까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바냐 아저씨. 체호프 역시 이런 일화를 친구에게 웃으며 말했기도 했고, 그 정도로 두 작가는 서로 친했던 모양.[18] 전자는 톨스토이가 처녀작 <유년시대>를 발표했을 때, 후자는 위에 나온 회심 사건 이후이자 투르게네프가 임종 직전에 톨스토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실린 애타는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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