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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모티호

파일:디디모티호.jpg
시가지 전경
파일:디디모티호 3.jpg
디디모티호 성채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오스만 제국2.3. 근현대
3. 여담

1. 개요

그리스어 Διδυμότειχο
영어 Didymoteicho
튀르키예어 Dimetoka
불가리아어 Димотика

그리스 북동부의 도시. 튀르키예에디르네에서 남쪽으로 40km, 알렉산드루폴리에서 동북쪽으로 90km 떨어진 에르트로포타모스 (마리차 강의 지류) 강의 동안에 위치한다. 지명은 '2중'이란 뜻인 디디모스와 '성벽'인 테이호스가 합쳐진 형태이다. 현재는 인구 1만 6천의 국경 도시지만, 동로마 제국 후기에는 디디모티콘이라 불리며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함께 트라키아의 주요 도시로써 중시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 후에도 에디르네를 수도로 기간동안 그 배후 도시로써 중시되었고, 바예지트 2세의 탄생지가 되었다. 따라서 동로마 시기 성벽과 첼레비 술탄 메흐메드 모스크, 오루츠 파샤 하맘, 페리둔 아흐메드 베이 하맘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2. 역사

상고대부터 트라키아인들이 마을을 형성했고, 헬라화되었다가 기원전 204년 로마 군에게 점령되었다. 2세기 초엽 로마 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가 현 시가지 동쪽의 에브로스 강변에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이름을 딴 플로티노폴리스를 세웠다. 도시는 트라키아의 비옥한 땅의 교통 요충지로써 번영했다.

2.1. 중세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플로티노폴리스의 성벽을 보강하며 서쪽의 언덕에도 성채를 세웠는데, 이로써 '쌍성'이란 뜻잉 디디모티콘 지명이 등장했다. 그러다 7세기 들어 슬라브 인들의 남하와 함께 기존 플로티노폴리스 시가지는 버려졌고, 주민들은 서쪽 성채로 이주했다. 플로티노폴리스 지명은 주교좌 지명으로만 남아있다가, 9세기 들어 디디모티콘으로 대체되었다. 813년, 도시는 불가리아 제1제국크룸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동로마 제국령으로 수복되었다. 이후 디디모티콘에는 콤메르키아리오스 (징세관)가 배치되었고, 879년 주교 니키포로스가 제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가했다.

914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일대를 재차 정복했다가 970년 바실리오스 2세가 수복했다. 979년에는 반란에 실패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디디모티콘으로 유배되었다가 991년 3월에 사망했다. 1100-01년 겨울에는 알렉시오스 1세가 롬바르드 십자군에게 디디모티콘에서 재정비할 수 있게 해주었고, 12세기에는 이탈리아계 페트랄리파스 가문이 거주했다. 1189년 11월 24일, 이미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한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6세(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3남으로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이자 필리프의 형)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이 도시를 함락하고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했다. 1198년 베네치아와의 금인칙서에서 디디모티콘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주에 속했다.

2.1.1. 라틴 제국

1204년 여름, 4차 십자군 후 세워진 라틴 제국보두앵 1세는 디디모티콘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하지만 현지 그리스 주민들은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초에게 항복했고, 그는 한동안 도시를 소유하다가 십자군 기사 위그 4세 드 생 폴에게 넘겨주었다. 1205년 프랑스 작가 조프리 빌라르두앵은 디디모티콘이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로마 도시라 기록했다. 그해 2월, 디디모티콘과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민들은 봉기하여 라틴 수비대를 축출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에게 복속했다. 이에 보두앵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4월의 전투에서 칼로얀에게 대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디디모티콘은 사실상 자립했고, 승리 후 돌변한 칼로얀의 파괴를 피해 몰려든 트라키아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9월에는 에브로스 강의 범람으로 도시를 부분적으로 포위하던 라틴 병력도 철수했다. 다만 세레스와 필리포폴리스에서 칼로얀이 학살을 자행하자 여론은 급변했고, 1206년 초엽 디디모티콘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라틴 제국의 새 군주 앙리 드 에노의 그리스인 제후인 테오도로스 브라나스에게 복속했다. 그해 초여름, 칼론얀이 디디모티콘을 포위해 거의 함락할 뻔했으나 앙리가 원군과 함께 당도해 구원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가 성벽을 수리하기도 전인 8월, 칼로얀은 테오도로스를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뒤늦게 도착한 앙리는 칼로얀이 끌고가던 주민들을 구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미 칼로얀이 성벽을 대부분 파괴한 상태라 디디모티콘은 한동안 군사적 가치를 상실했다.

2.1.2. 동로마 제국의 핵심 거점

1225년 에피로스 친왕국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디디모티콘을 점령했으나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이반 아센 2세가 일대를 정복했고, 그는 라구사 공화국에게 트라키아에서의 무역 특권을 하사했다. 그러다 1243년, 니케아 제국요안니스 3세가 디디모티콘을 점령했고 1255-56년 테오도로스 2세는 불가리아 원정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1306년에는 미하일 9세카탈루냐 용병대에 대한 후방 기지로 활용했고, 1321-28년의 동로마 내전 당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디디모티콘을 주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후자는 즉위 후로도 도시에 종종 방문했고, 삼촌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와 재상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 등을 유폐하기도 했다. 1332년 6월에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 요안니스 5세가 디디모티콘에서 태어났다.
1341-47년의 동로마 내전 당시 디디모티콘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부관 요안니스 6세의 거점이었고, 후자는 1341년 10월 26일에 시내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비록 1342년 3월, 요안니스 6세는 부인과 친척들을 남긴 채로 디디모티콘을 떠나지만 아이딘 왕조의 우누르 베이가 보내준 튀르크 함대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알렉산데르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를 격파, 디디모티콘을 수호했고 마침내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즉위 후 요안니스 6세는 아들 마테오스를 트라키아 총독에 봉하며 디디모티콘으로 보냈고, 후자는 성벽을 크게 보강했다. 1352년에는 공동 황제이던 요안니스 5세가 디디모티콘을 영지로 얻었는데, 그는 마테오스와 충돌하며 또다시 1352-57년의 동로마 내전으로 이어졌다.

요안니스 5세는 불가리아 및 세르비아, 요안니스 6세는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청했고 1352년 10월 오르한의 아들 쉴레이만 파샤가 이끄는 1만의 오스만 군이 비슷한 수의 불가리아-세르비아 군대를 디디모티콘 인근에서 격파하했다. 이로써 요안니스 6세는 일시적으로 내전에서 승리하나 싶었지만, 1354년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을 받은 요안니스 5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이후 요안니스 6세는 퇴위했지만, 그의 아들 마테오스는 디디모티콘을 기반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한편 혼란을 틈타 쉴레이만 파샤는 갈리폴리를 점령하고 트라키아에 거점을 마련했고, 1359년 오스만 군은 디디모티콘을 점령했다. 비록 요안니스 6세는 세르비아 제국의 도움으로 도시를 수복했지만, 1361년 오스만 장군 하즈 일베이가 재차 도시를 영구히 점령한다.
서기 200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황금 흉상이 발견된 바 있다.[1]

2.2. 오스만 제국

오스만 시기 도시는 데모티카 혹은 디메토카로 불렸다. 1370년경 세르비아의 데스포티스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가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그는 1371년 마리차 강 전투에서 전사한다. 1373년에는 각각 부황에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한 오스만 황자 사브즈 베이와 동로마 황자 안드로니코스 4세가 데모티카로 피신했다가, 무라드 1세에게 항복하시도 했다. 무라드는 최소 1377년까지 데모티카에 머물며 사실상 수도로 삼았다. 다른 초기 오스만 술탄들도 인근의 드넓은 사냥터 때문에 종종 찾았다. 따라서 성벽이 보수되었고, 궁전이 세워졌다. 궁전에 대해서는 1443년 프랑스 여행가 베르트랑 드 라 브호키에가 방문해 기록을 남겼다.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에도 이 경향은 이어져 1481년 바예지트 2세가 데모티카에서 태어났고, 1512년 그는 아들 셀림 1세에게 양위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망했다.

다만 쉴레이만 1세 들어 에디르네가 제2의 수도로 굳어지며 데모티카는 소외되었다. 1670년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카디 (법관)가 있고 나히야 (읍)의 치소이며, 더이상 쓰이지 않는 궁전이 있는 성채 (크즈 칼레시)는 둘레 1.9km의 2중 성벽에 1백여 성탑들로 둘러져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성채 내에는 수비대장 외에는 전부 비무슬림인 1백야 가구가 거주한다고 덧붙였다. 외성 (바로쉬)에는 6백여 가구가 거주했고, 12개의 마할레로 나뉘었다. 시내에는 바예지트 자미 등의 모스크들과 역시 바예지트가 설립한 것을 포함한 4개의 마드라사가 있었고, 벡타시 수피 교단이 성행했다. 하맘 (목욕탕) 중에서는 '귓속말' (프슬트) 하맘이 제일 유명했고, 그 '디오니소스의 귀'는 189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도심에는 시장이 있었지만 지붕이 있는 베데스탄은 없었다. 특산품은 포도, 마르멜루 (모과), 도자기, 유리공예 등이 있었다. 1713년 2월 ~ 1714년 10월 간에는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한 스웨덴 왕국칼 12세가 데모티카에 머물기도 했다.

2.3. 근현대


1892년 기준 2만 6천의 주민들은 1만 7천의 그리스 정교도, 7천 5백의 무슬림, 1천 2백의 불가리아인, 5백의 유대인, 2백의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되었다. 1차 발칸 전쟁 시기인 1912년, 불가리아 군이 도시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2차 전쟁에서 오스만 군이 탈환했다. 다만 1915년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가 1차 대전에서 동맹군 편에 서는 대가로 일대를 할양해 주었으나, 전후 1919년 뇌이 조약으로 서부 트라키아는 프랑스 장군 샤를 앙투안 샤르피가 이끄는 군정 하에 놓였다. 그러다 1920년 4월의 산 레모 협정으로 일대는 그리스 령이 되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때에는 많은 동부 트라키아의 그리스 주민들이 디디모티호에 정착했다. 다만 현지 무슬림 주민들은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지방과 달리 강제 이주되지 않아 상당수가 남았다. 2차 대전기에 디디모티호는 빠르게 추축군에게 점령되었고, 1943년 5월에 731명의 유대인 주민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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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모티니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