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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5:37:34

예수의 성전 정화

독사의 자식들아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www.artble.com/jesus_driving_the_merchants_from_the_temple.jpg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288 x 436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1. 개요2. 원문3. 설명
3.1. 해설
4. 기타
4.1. 인터넷 밈 및 이에 대한 반박

1. 개요

οἱ ἀρχιερεῖς καὶ οἱ πρεσβύτεροι τοῦ λαοῦ λέγοντες·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ταῦτα ποιεῖς; καὶ τίς σοι ἔδωκεν τὴν ἐξουσίαν ταύτην;"[1] (Nestle-Aland 28)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공동번역 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21장 23절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일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여 유다인 고위층과 충돌한 사건으로, 예수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성전에 대한 전권 주장'이 와닿지 않다보니 부당한 권력에 맞선 격정적 사건으로 오독 혹은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2]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성전에 대한 권한을 주장했다는 데 있다.

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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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명

예수12사도와 함께 과월절(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돌아보다가 헤로데의 성전에 들어섰다. 그러나 경건했던 성전은 이미 돈과 매매가 횡횡한 장터판에 가까웠고 이에 크게 놀라고 화가 난 예수는 성전 안에서 방문객을 상대하는 환전상과 상인들을 꾸짖고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헤로데의 성전은 벽돌 하나하나에 금박을 입혀 엄청나게 화려하게 지었기 때문에, 후일 금박을 벗기기 위해 돌 하나하나에 일일이 달라붙은 결과 글자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박살났고, 성전의 유일한 흔적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3]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 일을 보고 "이런 일을 행하다니, 무슨 기적을 보여줄 것이냐?"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대인의 관념상,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직접 연관된 선지자뿐이었으므로, 즉 이 말은 "네가 선지자라도 되느냐?"라며 비꼬는 것과 다름없었다.

흔히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예수의 생애를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기록한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들과, 이들과는 많은 점에서 구분되는 요한의 복음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야기이다.

3.1. 해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현대적 선입견들로 1세기를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흔히 예수가 대제사장 계급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해 항의한 것이라는 가설 역시 문제가 많다. 또한 성전의 제사장들이 희생 동물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금전 거래 시 한쪽에 치우친 방법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자주 제기되곤 하는데, 이는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제사장 계급이 대체로 부패했었다는 고대의 증거는 없다. 또한 예수의 그러한 항의가 이곳 외에 그가 가르친 내용에서 중요하게 드러난 경우도 없다.
예수 한 권으로 읽는 역사, 헬렌 K. 본드 저에서 발췌

일반인들에게 피상적으로 알려진 부분이 많아,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뿐더러 현대의 가치관을 멋대로 투영하는 해석을 많이 당하는 일화이기도 하다.[4] 예를 들어, 이 성전 정화 에피소드를 타락한 일부 개신교 목사에 빗대어 예수가 재림하면 가장 먼저 '정화'할 것이라고 하거나, 당시 유대교 제사장들을 속물 취급하는 것이 그 일례.

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 당시에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딱히 종교적 타락과는 거리가 멀었고, 지중해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성전 앞마당의 장사판은 성전의 기능을 보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었고,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었을 뿐더러 많은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기대는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곳이었다.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도덕적으로 옳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성서학자가 없지는 않으나[5] 21세기의 사목자에 대한 반감을 AD 1세기에 투영해서 파악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또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제물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행위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무료로 제공되는 무언가가 악용되어 더 큰 폐단을 불러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심지어 성경 원문에 따르면 성전에서 판매되었던 것은 소, 양, 비둘기 등 꽤 값나가는 가축들이었다. 만약 이런 가축들을 최소한의 비용조차 받지 않고 무료로 준다면 악용하려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유료 가격은 필요했다는 말.

이에 제사장들이 미리 상인들과 짜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가져온 제물에 흠을 잡아 그것으로 제사를 못 드리게 한 다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제물을 사도록 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주일학교같은 곳에서 적지 않지만, 달리 사료적 근거는 적다.

2번째로 짚고 넘어갈 오해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했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 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6]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에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7]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나자렛 예수》(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370쪽.
예수는 반항아도 아니고 개방적인 자유주의자도 아니다. 그분은 예언자로서 토라를 해석하신 분이다. 그분은 토라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신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제1권, 박상래 옮김, 바오로딸, 2012, 199쪽.
또한 이방인인 로마인들 역시도 성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8]
당국이, 또한 로마 당국도, 자기를 반대하는데 대한 마지막 수단으로 터트린 것이 성전 상거래에 공격을 감행한 저 성전저항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그중에도 특히 사두가이 파 대제관들에게 성전이 이스라엘 신심의 본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점령세력인 로마인들도 평정된 각 민족의 신들을 존중했고 따라서 야훼도 존중하여 성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전에서는 날마다 로마인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고, 그런만큼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 쪽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방송 대담[9]

게다가 공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사아적 암시를 이미 하였다.[10]
오늘날 모든 독자가 곧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코 복음서가 묘사하는 입성이 임금의 입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환호는 축제를 앞두고 성전에 들어서는 일단의 순례자 무리를 맞으며 외치는 일반적인 환호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임금이 자신의 도시로 입성하는 것, 메시아가 시온에 들어서는 것이다. 임금은 말하자면 이 도시를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해 들어온다.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의 의도임을 어린 나귀가 보여 준다. 구약에서 어린 나귀는 메시아가 타고 올 짐승이다. 즈카르야서 9장 9절과 창세기 49장 11절이 그렇게 말한다. '어린 나귀'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예수님의 입성 이야기가 즈카르야서 9장 9절을 반영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11] 그 구절을 보자.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것이 '임금다운' 입성임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지들이 있다. 고대 도시들은 나뭇가지들과 겉옷들을 길에 깔고 통치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본래 간구의 외침이었던 '호산나(도와주소서!)는 여기서 이미 구원과 경배의 외침으로 바뀌어 있다. '호산나'가 원래 하느님께 드리는 외침임을 감안하면, 이 외침은 적어도 "오시는 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찬양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찬양이 예수님에게 쏟아진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들어 오는 임금의 입성을 묘사한다.[12]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2-433쪽.
그런데, 바로 이 맥락에서[13] 예수는 마치 예루살렘의 왕권을 주장하듯이(!) 성전으로 향한다.
그분은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오해를 감수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 오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삼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대한 입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분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어디서나, 특히 수도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선포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당신 자신을 통해 '표징 안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성전 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이 성전 정화는 바로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차지하는 일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갈릴레아에서의 활동 이후 이제 수도에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대리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그분이 성전을 제쳐놓으실 리 없다. 여기에도 옛 원칙이 통한다. 곧, 임금이나 통치자가 성전 책임자라는 원칙이다.[14] 따라서 입성과 연결된 성전 정화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이심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는 일에 성전의 모든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아니 최우선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거의 필연적으로 성전 정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5-437쪽
물론 예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오해를 낳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성과 성전에 대한 어떤 왕권을(그러나 정치적 왕권이라 할 수 없는 종말론적 왕권을) 주장한 것이다.

공관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성전 정화 및 예수의 성전에서의 설교로 인해 군중들이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중 첫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하며 제사장들의 반응이 별 달리 특별하게 묘사되지 않으며, 예수는 그저 상인들에게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은 것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이런 차이 때문에 성전 정화 사건이 사실 2번 있었다는 식의 해석이나, 성전 정화 사건은 순전한 창작이라는 해석도 존재하나, 학계의 중론은 성전 정화 사건 자체는 실재했으며 공생애 초반이건 후반이건 한번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전 정화 행동은 예수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연히 예수님이 이 광대한 구역을 다 '정화'하시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시위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이 몇개의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시고 성전 구역을 가로질러 짐을 나르는 이들을 꾸짖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의 행동은 하나의 표징일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가이 사제 귀족층은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가 예수님에 의해 의문에 처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간파했다. 이미 토라를 둘러싼 갈등이 율법 해석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성전 운영에 관한 주변부 문제들, 이를테면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이 성전 규역보다 도성 안에서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예배를 온통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 복음 선포의 빛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 권한, 그리하여 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곧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종교 기구인 최고 의회가 정확히 이를 문제삼고, 단호히 부정한다.

예수님은 성전 정화 행동을 통해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신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마르 11,18)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8-442쪽.

4. 기타

4.1. 인터넷 밈 및 이에 대한 반박

이 사건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중략) 만약 제사장의 뜰 안까지 들어가서 이러한 행위를 하고자 했다면 그만한 군중 또는 무장된 군사의 동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분명히 성전소요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인의 뜰에서 이렇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성전정화사건에 나타난 예수의 성전에 대한 이해에서 일부 발췌

나자렛의 몽키스패너
사실 존 윅이었다.

가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예수의 이 일화를 예시로 예수 갱스터 설같이 예수의 비범함을 분석하는 농담섞인 떡밥이 올라온다. 여기서 나온 표현 중 하나가 '나자렛의 몽키스패너'. 이런 식으로 매우 건장(?)하고 힘이 장사처럼 묘사되어 있는 예수의 모습은 외국에서도 그 모습 자체로 하나의 이 되었다. 예수가 이런 모습이 되자 12사도들도 엮이는데, 12사도와 예수를 '가나안 장도리파', '연장의 12인' 등으로 불린다. 그리고 원래도 성격이 불같은 베드로 는 그 일화(?) 때문에 '가나안 장도리파 행동대장 베드로', 나 '예수의 소드 마스터'로 불린다(...) 외국에서는 이런 밈을 일명 Buff Jesus(떡대 예수)라고 일컫는다. 밈으로 쓰는 사진 중에는 우리나라의 영천시에 있었던 '기독교 조각공원'에 있는 근육예수상을 찍은 사진이 주로 쓰인다. 아쉽게도 공원과 조각상은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이미 철거된 상태.

예수의 본래 이름이 영어 식으로 Joshua son of Joseph(요셉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점 때문에 죠죠의 기묘한 모험과 엮이기도 한다. 그 이름하야 Jojosus. 종교적인 색채를 빼고 보면 예수의 모험은 확실히 기묘한 모험이고, 7부의 중요 요소인 성인의 유해는 예수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있어 더욱 말이 된다는 게 개그 포인트.

다만 이러한 인터넷 밈은 어디까지나 웃자고 하는 개드립이고, 학계의 중론은 다르다. 학계의 중론은 이 사건이 실제였더라도 물리적으로는 구석의 소동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성전 내부에서 소동이 있는데 군대나 근위병이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실제로 성전에서 소요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한 적이 있다. 게다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한쪽 벽만 해도 400m가 넘는 장대한 건물이었다. 축구장보다도 큰 이런 건물을 전체를 뒤집는 것은 수백명은 되는 무장집단이 필요하다. 즉, 예수의 성전 정화는 물리적으로는 시장 한 구석에서 예수가 혼자서 일으킨 소동에 불과했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사건이었다는 것. 오히려 진짜 핵심은 '성전에 대한 예수의 전권 주장'이었다. 바로 이 '전권 주장'이 물리적으로는 몇개의 탁자와 의자를 뒤엎고 사람 꾸짖은 것에 불과한 이 사건이 '십자가 죽음'이라는 초대형 사건으로 번지게 하였다. 아무리 고대에 인명이 경시되었다지만, 성전에서 탁자 몇개 뒤엎었다고 사람을 십자가형으로 죽이진 않는다.

밈적 해석에서는 예수가 목수여서 체력이 단련되어 있었다고 나름 근거를 붙이나, 농부이든 목수이든 일용직 도시 노동자이든 당시엔 널리고 널린 게 육체 노동자이다. 목수가 딱히 더 체력이 뛰어났다고 볼 이유가 없다.

다만 아무리 넓은 시장통의 한 구석지일지라도 상을 엎고 꾸짖는 행위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임에는 변함이 없고. 홀몸으로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얌전하게만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분노했다지만 본인의 피지컬에 나름 자신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21]


[1] 로마자 전사: hoi archiereis kai hoi presbyteroi tou laou legontes· "en poiāi exousiāi tauta poieis; kai tis soi edōken tēn exousian tautēn;"[2] 종교인의 탈선과 비리가 언론과 시민의식의 발달로 쉽게 접하고 종교적 위세가 약해져 권위로 누르는 것이 어려운 시대에 오히려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모습이 현대인에게 더욱 메시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일부 과장과 유머를 넣기는 하지만 주위를 박살낸 것 같은 기록은 여리한 예수 느낌 보다는 강인한 투사 이미지를 주기 좋다. 즉, 비기독교인들 상당수는 이 일화를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가 성전의 권한을 주장한 것이 아닌, 현대적인 시각에서 '금전주의에 타락한 기성 종교인에 맞선 종교개혁가'다운 영웅적 행보로 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3] 통곡의 벽예루살렘의 성전 중 느헤미야 시절 지어진 제2 성전의 벽 일부이고, 성전 정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헤로데가 지은 제3 성전 쪽이니 좀 다르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흔히 제3 성전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제2 성전을 헤로데가 증축한 건물이다. 즉, 동일 건물이 맞다.[4] 가치의 변화와 인간의 주관적 시선이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학자적 접근으로 이를 받아들이면 실망하거나 흥미를 잃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피상적 혹은 투영적으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예수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농담인 예수무쌍이 한 예로 여리여리해 보이는 예수의 이미지는 강건한 이미지로 바꾸었고, 단순히 종교적 메시아에서 현대에도 통할 부당한 권력에 맞선 위대한 성인으로 그려질 수 있다.[5] 성공회 사제 박태식(괴팅겐 대학교 신학박사)은 '강도의 소굴'(마르 11,17)이 상인들에게 한 저주의 말이라고 본다.(박태식, 《거룩한 독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 2: 마르코 복음》, 바오로딸, 2012, 206쪽[6]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같은 책 169쪽)[7]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8]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신전 모독은 가장 악랄한 중죄로 취급 되었다. 유다교는 엄연히 로마 제국이 인정한 '국가 공인 종교들' 중 하나였으며, 다신교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야훼는 (비록 유다인들이 이해하던 신관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경외로운 신이었다.[9]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4-435쪽[10]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메시아'를 인정하는 장면이 더 뒤의 장면인 14장 61-62절에서야 나오지만, 예수가 메시아적 암시는 그 이전에도 하였다.[11] (책 속 주석)요한 12,12-19는 즈카르야의 본문을 명시적으로 인용한다. 반면 마르코는 이름 암시할 뿐이다.[12] (책 속 주석)이에 대해서는 고대 사회의 수많은 사례가 있다. 참조: 특히 E. Peterson, "Die Einholung des Kyrios", in:ZSth 7(1930), 682-702. 경외심의 표지로 옷을 펼처 깔아놓는 예는 2열왕 9,13과 『빌라도 행전Acta Pilate』 I,2를 보라.[13]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입성 다음에 곧바로 일어난다. 마르코에서는 하루 뒤.[14] (책 속 주석)이 점은 마리우스 라이저가 내게 지적해 주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 자기 임의로 대사제를 해임하거나 임명했던 이들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영주,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로마 행정관들, 아그리파 1세와 2세, 칼키스의 헤로데 등이 있다. 임명권을 행사했던 이들의 인명에 따른 전체 목록은 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175 B..D.-A.D. 135). A New English Version revised and edited by G. Vermes, F. Millar and M. Black, Vol, II, Edinburgh 1979,229-2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sephus, Antiquitates 20,224-251 참조.[15] <나사렛 예수>처럼 일부 영화에선 채찍 대신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한다.[16] 인터넷 밈의 희화화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원전의 맥락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공관복음서(채찍X)와 요한복음서(채찍O)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쪽이든 성전 행동은 물리적으론 점잖게 상 몇개 뒤엎은 것이지, 무슨 깡패들 패싸움 같은 게 아니다.[17] 당시 뽀 강 주변의 농민들에게 포도나무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작중 포도나무가 잘리는 것보다 자기 발목이 잘리는 쪽을 택하리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18] 아무리봐도 이건 반성하는 뉘앙스가 아니다.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팬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하고 항의하는 격.[19] 제롬 목사(Pastor Jerome). 클러지 칼라를 착용하고 있어 성공회 신부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Reverend(성공회의 성직자들을 지칭하는 말)'가 아니라 'Pastor(주로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을 지칭하는 말)'라고 지칭되며, 제롬의 교회 또한 일반적인 성공회 성당의 구조가 아니라 여타 복음주의 개신교 교회의 구조를 닮아있다. 더구나 북미나 서구 지역에서 클러지 칼라는 천주교나 성공회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복음주의 개신교회 목사들도 흔히 착용하고 다닌다. 그 의미가 성좌나 주교좌에 대한 순명만이 아니라, 주와 계명에 대한 순명으로 더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20] 나무위키 문서를 기준으로 하면 그리스도 대성당 문서를 통해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21] 공교롭게도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으심'(Cacciata dei mercanti dal Tempio)은, 엄연한 성화인데도, 격노한 예수가 죽빵을 날리려고 하고 이를 보는 주위 사람들은 식겁해 하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