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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3:49:14

네리마 5인가족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시라이 일가3. 사건의 전개
3.1. 발단3.2. 계획3.3. 일가족 살인3.4. 발각과 체포
4. 범인5. 판결6. 유일한 생존자7. 사건 이후

1. 개요

練馬一家5人殺害事件 / 練馬一家5人惨殺事件(네리마 일가 5인 참살사건)

1983년 6월 27일 도쿄도 네리마구 오오이즈미가쿠엔 6초메에서 발생한 토막살인 사건.

경매로 취득한 토지의 거래 문제가 진전되지 않자 부동산 감정사가 토지에 세들어 살던 일가족 5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내어 유기하려고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17년 후 발생한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과도 비교되며[1]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이전에 부동산 경매의 거래 문제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10년 이후 부동산 거래 관련 문제의 선구안적인 사안이 되었다고 거론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다음날 일어난 배우 오키 마사야투신자살 사건의 파장이 컸기 때문에 묻혔다.

2. 시라이 일가

이 사건의 피해자인 시라이 일가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6명 중 당일 야외학습을 나가 있던 장녀를 제외하고 5명이 모두 살해당했는데 이 중 3명이 10세 이하의 유아였다.

3. 사건의 전개

3.1. 발단

1982년 11월 부동산 감정사였던 아사쿠라는 특별 매각에 부쳐졌던 건물의 존재를 알고 검토한 결과 "등록부상의 소유 명의인 거주자 일가의 권리는 매수인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 또 시중 시세에서 하면 상응한 경비를 보고 만족스러운 전매 이익이 꼽힌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아내는 우려했지만 아사쿠라는 거주자 일가에 대해서는 인도명령이 가능하다는 집행관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강제로 가능하다"고 속단해 버렸고 매수를 위해 자신의 정기 예금, 자택, 사무실 용도의 맨션, 산림 등 모든 자산을 담보로 넣어 은행에서 약 1억 4,500만엔을 대출했으며 1983년 2월 2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열린 경매에서 도쿄도 네리마구 오이즈미가쿠엔 6번가의 건물을 1억 600만엔으로 낙찰받아 구입하고 1억 280만엔을 납부하였다. 4월 13일 아사쿠라는 시부야의 부동산업자와 1억 2950만엔으로 매매계약을 했는데 명도기한은 6월 30일로 계약금 1500만엔을 받았다.

이 건물에는 신주쿠 니시와세다에 있는 일본 양서판매배급회사의 상품관리과장인 시라이 아키라 일가 6명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퇴거 보상금을 줄 필요가 있었는데 아사쿠라는 보상금을 지급하더라도 대강 1000만엔의 이익을 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라이가 명도기한까지 퇴거해 주지 않으면 아사쿠라는 전매처에게 계약금의 두배의 위약금인 3000만엔을 지불해야만 했다. 하루라도 빨리 퇴거를 원했던 아사쿠라는 3일에 한 번은 교섭을 위해 시라이의 집에 찾아갔지만 시라이는 온갖 이유를 대면서 퇴거를 거부했다.

분노한 아사쿠라가 명도소송을 걸자 시라이는 소송을 취하하면 바로 이사를 가겠다고 제안했다. 아사쿠라는 시라이의 말을 믿고 소송을 취하했지만 이후 아사쿠라가 시라이의 집에 가 보아도 이사 준비를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고 부부의 대응도 성의가 없었다. 오히려 시라이의 시간끌기 작전의 일환이 되었다.

사실 이 건물은 시라이의 장인의 소유였고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지긴 했으나 장인에게 계속 눌러앉아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시라이는 그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다. 이 장인은 부동산 거래 베테랑으로, 이전부터 여러 차례 부동산 관련해서 재판을 한 적이 있고 두세번은 직접 소송을 걸기도 하는 등 부동산 쪽으로 꽤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즉, 퇴거 보상금을 가능한 올려 받기 위해 시간끌기 공작을 한 것이다. 퇴거 보상금은 500만엔 정도가 시세였지만 아사쿠라가 요구받은 보상금은 무려 3000만엔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아사쿠라는 계속해서 퇴거를 요청하였지만 도저히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점차 시라이 일가에 대해 살의를 품어 갔으며 후술할 최악의 사태로 치닫게 되었다.

3.2. 계획

5월 하순부터 아사쿠라는 치밀한 살인 계획을 세웠다. 후술하겠지만 아사쿠라는 몇십 년 전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을 산 적이 있었다. 출소 후 아사쿠라는 아내를 위해 갱생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를수 없었던 그는 결국 완전범죄를 일으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사쿠라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1. 낮에 시라이의 집에 들어가 우선 아내를 살해한다.
2. 그 다음 귀가한 가족들을 순차적으로 살해한다. 다른 가족들은 가능한 피를 내지 않기 위해 박살이나 교살로 죽이고 시라이 아키라는 성인 남성이기 때문에 급소를 친 다음 도끼로 베어 죽인다.
3. 가족 6명을 모두 죽인 다음 시체는 그 자리에서 해체하고 비닐봉투에 넣는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미리 빌린 맨션으로 옮겨서 작업한다.
4. 내장은 가장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분쇄해서 변기에 버린다.
5. 시체의 얼굴과 지문을 훼손시킨 다음 후지산 산기슭에 유기한다.

아사쿠라는 한 달 동안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우선 시체를 해체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을 구입했는데 전동기, 도끼, , 뼈칼, 수술용 장갑은 물론이고 관절을 쉽게 분리하기 위해 정원용 가위까지 하나 구매했으며 흉기와 의류, 시체 운반 용구 등을 구입했고 운반을 위해 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장롱면허였지만 차를 구입해 자동차교습소에서 운전 연습을 했으며 날씨가 안 좋을 경우를 대비해 일시적으로 숨길 만한 맨션을 월 10만엔에 빌렸다.

다만 이런 철저한 준비와 별개로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아사쿠라는 일가 살해 후 이사간 것이라고 위장할 생각이었으나 가족들이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지면 당연히 실종신고가 들어갈 것이고 그동안 시라이 일가와 분쟁이 있었으며 살인미수 혐의까지 있는 아사쿠라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으며 성인 2명과 어린아이 4명을 해체 후 증거인멸하는 부분도 현실적인 여건이나 변수 등을 고려하지 않은 안일주의식 계산이었고 이것 때문에 나중에 발목이 잡혔다.[4] 정작 사체를 유기하기로 했던 후지산의 지도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3.3. 일가족 살인

파일:nerima.jpg
사건 당시 피해자의 자택

6월 27일 오후 2시 45분 경 아사쿠라는 시라이의 집 근처에 세운 차에서 내려 휴대용 가방 1개를 들고 시라이의 집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쇠망치 2개, 갈아입을 트레이닝복 상하의가 들어 있었다. 쇠망치 두 개 중 하나는 금방 꺼내 쓸 수 있도록 가방 겉에 붙어있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3시 경 아사쿠라는 시라이의 집에 도착해 아키라의 아내인 사치코를 만났는데 평소처럼 명도 건으로 왔다는 말을 했고 사치코도 "남편은 지금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라는 투로 이제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말을 했다. 격노한 아사쿠라는 "여기 토지와 건물은 내 소유다, 대체 언제쯤 퇴거할 생각이냐"고 항변했지만 사치코는 그 말을 무시하듯 거실로 들어갔으며 아사쿠라는 사치코의 뒤를 쫒아 거실까지 들어왔다. 12장의 다다미로 이루어진 거실에는 사치코 외에 차남 마사토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삼녀 마사코가 있었다.

아사쿠라는 이제 더 이야기할 여지가 없다고 외치면서 가방 겉주머니에서 쇠망치를 꺼내 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쇠망치를 있는 힘껏 휘둘러 사치코의 머리를 가격했다. 사치코는 넘어진 다음 비명을 지르며 부엌 쪽으로 도망쳤고 아사쿠라는 쇠망치를 들고 사치코를 쫒아가 싱크대 앞에서 목덜미를 잡아끌어당겨 정수리를 서너번 반복해 힘껏 내리쳐 사치코를 살해했으며 죽은 후에도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그때 쇠망치의 손잡이가 꺾이면서 쇠 부분이 바닥에 튕겨 날아갔다.

이후 차남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아사쿠라는 차남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가면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차남도 죽이기로 결정한 후 거실로 돌아가 가방에서 두번째 쇠망치를 꺼내 들고 부엌으로 돌아왔고 쓰러져 있는 사치코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울고 있는 차남의 정수리에 쇠망치를 내리꽂았다. 이 일격으로 차남은 사치코 위에 쓰러져 즉사하였다.

아사쿠라는 거실로 다시 돌아와 창백한 안색으로 떨고 있었던 삼녀와 마주쳤는데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이어 삼녀의 정면으로 다가가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쳤고 삼녀는 "괴로워..." 라고 신음하며 쓰러졌다. 아사쿠라는 삼녀의 목을 강하게 졸랐고 2분 후 삼녀는 사망했다.

이후 아사쿠라는 3명의 시체를 욕실로 옮겼으며 거실과 부엌에 떨어진 사치코의 피를 걸레로 닦은 뒤 다시 욕실로 돌아와 사치코와 차남의 옷을 칼로 베어 벗겨냈지만 삼녀만은 가엽게 여겨 옷을 입힌 채로 두었고 3명의 시체를 욕조에 넣고 덮게로 덮어 감췄다. 벗겨낸 옷들은 세탁기로 물세탁을 한 뒤 탈수를 마치고 2층으로 들고가 그곳에 있던 비닐봉투에 넣었다.

오후 3시가 지나 차녀 토모코가 귀가해 부엌을 지나 거실에 들어섰고 소파에 앉아 있는 아사쿠라를 보고는 별말 없이 2층으로 오르려고 했다. 그때 아사쿠라가 차녀에게 "언니는 언제 돌아오니?"라고 물었고 차녀는 "학교 소풍이라 29일 저녁에 돌아와요."라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장녀 요시코는 나가노현에서 열린 임간학교[5]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후 아사쿠라는 차녀의 앞을 가로막은 다음 목을 있는 힘껏 졸랐고 차녀는 강하게 저항하며 바둥댔지만 결국 숨을 거두었다. 아사쿠라는 차녀를 바닥에 눕힌 뒤 옆에 있던 전기 청소기 코드를 이용해 다시 한 번 강하게 목을 졸랐고 차녀의 사체도 옷을 벗겨 욕조에 감췄다.

아사쿠라는 마지막으로 시라이를 살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피로 더러워진 트레이닝복을 준비해 뒀던 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가 근처에 세워 둔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서 도끼, 타월, 손주머니 등이 들어 있는 배낭을 가지고 시라이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더러워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안쪽에 도끼를 숨겨 시라이의 귀가를 기다렸다.

시라이는 오후 6시 반 경 퇴근해 회사 동료와 타카다노바바역 앞 스시집에서 술을 마신 뒤 오후 9시 반경 귀가했다. 귀가한 시라이에게 아사쿠라는 명도 건으로 왔다고 이야기했고 둘은 거실 소파에 마주앉아 약 30분간 퇴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점점 시라이가 평소와 집안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는 기색이 보이자 아사쿠라는 "이쪽은 상황이 절박하다"고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고 놀란 시라이도 동시에 일어났다. 아사쿠라는 틈을 주지 않고 오른쪽 주먹으로 시라이의 명치를 가격했다. 고등학교 시절 권투부 소속이었던 아사쿠라의 펀치에 시라이는 고통을 호소하여 상체를 숙였으며 아사쿠라는 도끼를 꺼내 시라이의 왼쪽 목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피가 아사쿠라의 트레이닝복에 튀었고 시라이는 쓰러졌지만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아사쿠라는 재차 도끼로 시라이의 왼쪽 목을 강하게 내리찍었고 결국 시라이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사쿠라는 시라이의 시신을 욕실까지 옮겨서 입고 있던 옷을 칼로 베어 벗겨내고 사체를 욕조에 숨겼는데 벗겨낸 옷은 아까와 같이 세탁한 후 2층으로 가져가 방에 있는 종이봉투에 넣었다. 이때 아키라의 지갑에서 1만 3500엔을 빼내고 지갑은 쓰레기통에 버렸으며 거실에 흩날린 피를 닦아내고 피에 얼룩진 융단은 욕실에서 세탁한 다음 현관 흙마루에 두었다. 아사쿠라는 시체를 토막낼 생각이었지만 소리가 외부로 새나갈 것을 우려해 새벽녘까지 기다렸다가 실행하기로 하고 냉장고에 있던 통조림을 먹으면서 새벽을 기다렸다.

다음날인 6월 28일 오전 4시 반 경 아사쿠라는 피가 묻은 트레이닝복을 깨끗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자신의 차량을 시라이의 집 문앞까지 이동시켰으며 차 트렁크에서 전동 고기다짐기, 뼈에 쓰는 칼, 톱, 비닐봉투 등을 꺼내 시라이 집안으로 옮긴 다음 다시 차량을 원위치시켜 놓았고 집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현관 근처 계단 아래부터 욕실까지의 복도에 사체절단에 필요한 도구를 수순에 맞춰 늘어놓은 다음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의료용 고무장갑을 끼고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오전 6시 반까지 시라이의 시체를 해체한 다음 사치코의 시체를 절단하는 작업에 들어가던 중 인기척이 들려와 아사쿠라는 해체를 중단하고 사치코의 시신을 욕조에 숨겼다. 그 다음 차남의 시체를 꺼내 해체를 시도했지만 사후경직된 시체에 무뎌진 칼날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피곤도 몰려왔기 때문에 아사쿠라는 한숨 자기로 결정하고 시신을 욕조로 되돌려 놓은 다음 욕실에서 씻고 팬티도 세탁해 2층에 널어 놓은 다음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잠들었다.

3.4. 발각과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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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건을 다룬 영상. 일가족 살인 사건은 1분 40초까지 나온다.

오전 9시 경 이웃 주민이 부엌문에서 안의 상황을 엿보기 시작했는데 사치코의 모친이 집에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며 무슨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엿보는 것을 눈치챈 아사쿠라는 "이 집 사람들은 어젯밤 이사갔습니다, 나는 이치노세입니다." 라고 가명을 꾸며내 대답했고 이웃 주민은 이 말을 사치코의 모친에게 전했다. 이때 아사쿠라는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 시체를 가지고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치코의 모친은 분명 이날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딸이 연락이 안 되는 데다 갑자기 딸 부부가 말도 없이, 그것도 장녀가 임간학교에 묵고 오기로 했는데 이사를 갔다는 말에 의구심을 느끼고 즉시 아들, 즉 사치코의 남동생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오전 10시에 사치코와 만나기로 했는데 8시 쯤엔 나도 나가야 하니까 아침부터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아. 이웃집에 상황을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치노세라는 남자가 있다는구나, 그가 말하길 어젯밤 이사갔다는데 요시코도 아직 임간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나에게도 일절 그런 연락은 없었는데 이상하구나.

명도건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남동생은 시라이 일가가 감금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오전 11시 반 경 친형과 함께 샤쿠지이경찰서를 찾아갔다.

오후 12시 58분쯤 경찰관 2명과 형제는 시라이의 집으로 급히 향했다. 경찰은 나무쪽 문으로 진입해 부엌문을 열려고 했지만 비닐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경찰은 그 문을 강하게 잡아당겨 10cm 정도 틈을 낸 다음 집안을 향해 "누구 없습니까, 샤쿠지이 경찰서입니다!"라고 외쳤다. 당황한 아사쿠라는 지금 나간다고 한 다음 반대쪽 현관으로 빠져나가 자신의 차를 타고 도주하려고 했지만 재빠르게 반대쪽까지 달려온 경찰에게 발각되었으며 무슨 목적으로 침입했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이윽고 "이 집 사람들을 죽였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경찰들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반신반의하며 아사쿠라를 체포했고 이윽고 집을 조사해 욕실 바닥과 욕조에 일가 5명의 시신이 차례차례 겹쳐져 있는 피투성이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서 긴급체포된 아사쿠라는 차분한 어조로 범행동기를 진술했다.
나는 정상입니다, 심경에 변화는 없습니다. 사체는 산속에 묻을 생각이었고 시라이 녀석은 뼈까지 산산조각을 내주고 싶었기 때문에 홀가분할 뿐입니다. 부인과 아이들을 죽인 것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후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대놓고 비웃던 시라이의 아내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성장하면 자신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조사에서 일관되게 "후련하다"고 이야기했으며 반성의 기색은 커녕 자신이 잘못한게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감정을 보인 것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로,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 거꾸로 가족을 힘들게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 범인

파일:DZyHjEPVQAIOmhs.jpg
범인 아사쿠라 코지로

아사쿠라 코지로는 1935년 3월 9일 생으로 사건 당시 48세였다.

아버지는 아키타현의 시장에서 정육업 일을 하는 동시에 행상인들을 관리하는 지역 유지(顔役)였는데 매우 폭력적이고 흉포한 성격으로 10대 시절에는 폭력단에 있었으며 가끔씩 식칼이나 일본도를 휘두르며 싸웠는데 항상 애인의 집에서 지냈으며 가끔 집에 오더라도 아내를 때리기만 하고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쿠라는 아버지의 애인 집에서 쌀을 훔쳐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억압당하고 절대복종하며 자라난 장남 아사쿠라는 좋아하지도 않는 권투를 억지로 하거나 아버지의 자릿세 걷기를 억지로 돕곤 했는데 그런 복잡한 환경 속에서 아사쿠라는 소심하고 말수가 적은 평소의 모습과 자릿세 징수를 할 때 가차없이 상대를 협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사쿠라는 장남이니 대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요로 부정입학으로 니혼대학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원래 대학에 다닐 정도의 능력이 없었던 그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첫 학기 시험부터 컨닝을 하려다가 들키거나 교수에게 "너의 머리로는 수업을 들어도 답이 없으니 혼자 공부해라"는 비난을 듣는 등 대학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들었던 법의학 수업이 후에 살인 사건에서 시체를 해체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1살 연하의 아내와 만나 결혼했고 딸도 생겨 평범하게 지냈는데 1960년 5월 아버지가 병사한 후부터 급변했으며 점점 아버지처럼 포악한 성격으로 변해 갔다고 한다. 동년 12월 그는 부엌칼로 동생의 가슴을 찔러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혔으며[6] 1961년 9월 10일 재산 다툼 도중에 당시 19살이었던 동생을 부엌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7] 그는 바로 자수했지만 수사 결과 미리 부엌칼을 보자기에 싸서 준비해 두었다가 저지른 계획범행이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결국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친족들에게도 절연당했다.

1965년에 출소한 아사쿠라는 가족들에게 갱생할 것을 약속하고 이때부터는 건실하게 살았는데 어려운 살림 속에서 아내에게 도움을 받으며 부동산 감정사 공부를 시작했으며 마침내 1975년에 정식으로 부동산 감정사가 되었다. 이후 부동산 감정 사무소를 설립했으며 사업도 잘 돼서 자기 아파트도 사고 1981년에는 도쿄 지방 법원의 감정 위원으로 뽑히는 등 순풍만범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부부 관계도 매우 원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2년 그는 노력에 비해 돈이 많이 벌리지 않는 감정사 일에 점차 피로감을 느꼈으며 컨디션 악화로 입원한 아내가 병원 안에서까지 사무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고생시킨 아내를 편히 지내게 해 주고 아이들의 취학 비용을 모으기 위해 부동산 거래 업무를 같이 하기로 결정했는데 저렴한 물건을 물색하다가 첫 번째 매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문제의 시라이 일가의 저택이었다.

이런 복잡하고도 일부 동정받을 만한 과거가 있지만 일본의 여론은 당연하게도 호의적이지 못했다. 물론 일부 동정론도 있기는 했지만 체포된 후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욱해서 저지른 범행이라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 잔인하고 계획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무 죄도 없는 10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3명이나 학살했다. 당시 도쿄 고등법원은 "동기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며, 범행은 더할 나위 없이 냉혹하고 잔학하다. 피고인이 사건 당시 궁핍한 심리에 몰렸던 것, 깊이 반성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죄의 중대성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자 유족과 사회적 영향, 결과의 중대성 등을 고려했을 때 극형을 선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는데 정확한 사건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아사쿠라의 변호인은 아사쿠라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참작을 요구했는데 여기에 대학교수 오다 유키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 점착 기질이 과격화된 범행으로 분석했다. 이 기질이 강한 사람은 한 번 폭발하면 매우 자기중심적이 되며 목표도 없고 시야도 좁아진다고 하며 아사쿠라가 완전범죄를 노리고 치밀하게 준비했는데도 실제로는 매우 허술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5. 판결

1983년 7월 19일 도쿄지방검찰청은 아사쿠라를 살인, 사체 훼손 등의 혐의로 도쿄지방법원에 기소하였다.

1983년 10월 21일 도쿄지법 형사15부(아키야마 노리오 재판장)에서 첫 공판이 열렸을 때 아사쿠라는 합의하에 기소 사실을 인정하면서 대단히 미안한 짓을 했다며 사죄하였다. 검찰은 아사쿠라가 범행에 사용하기 위해 차량을 구입했으며 아지트로 아파트를 빌리거나 50개에 달하는 범행도구를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계획적으로 행해진 범행임이 인정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아사쿠라의 변호인단은 범행 당시 아사쿠라는 심신미약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84년 7월 17일 제 12회 공판이 열렸을 때 도쿄 지법형사15부에서 아사쿠라의 책임능력을 조사하기 위해 정신감정을 의뢰했고 그 결과 1985년 6월 도쿄 지방법원에 아사쿠라는 사건 당시 정신상태가 긴박했지만 사리분별 및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 면에선 정신적인 문제가 없었다는 감정결과가 나왔다.

1985년 10월 18일 도쿄지검은 아사쿠라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며 1985년 12월 20일 도쿄지법 형사15부는 검찰의 구형대로 아사쿠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사쿠라 측은 양형 부당을 이유로 사형 판결에 불복해 도쿄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1990년 1월 23일 항소심에서 기각되었고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1996년 11월 14일에 열린 상고심 판결 공판에서 1심, 항소심 사형 판결을 지지하고 상고를 기각하면서 아사쿠라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2001년 12월 27일 아사쿠라는 도쿄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출범 이후 21세기의 첫 사형 집행이었다.

6. 유일한 생존자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장녀 요시코는 나가노현에서 임간학교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참상을 면했다.

학교측은 임간학교 도중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당황했는데 장녀에게 이 사실을 지금 알려야 할지, 나중에 알려야 할지 교사들은 고민했으나 결국 "처음 야외에서 집단 생활을 경험한 만큼 끝까지 즐거운 추억을 주고 싶다"며 임간학교가 끝날 때까지 이 사건을 장녀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던 장녀는 가족에게 줄 기념품을 사고 동생에게 줄 거라며 전세버스 안에서 나눠받은 과자까지 먹지 않고 챙겨 두었다.

임간학교가 모두 끝난 6월 29일 장녀는 도쿄로 돌아왔고 전세버스에서 내린 장녀를 경찰차가 마중나와 친척 집으로 배웅했다. 친척들은 장녀가 사건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가족은 모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만 장녀 이외의 동급생들은 "요시코의 부모, 여동생, 남동생이 모두 흉악한 남자에게 살해되었다. 하나 남겨진 딸이 빨리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7월 1일 일가족 5명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중 장녀는 이날 아침 친척에게 사실 자신의 가족들은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 친척의 해명에 따르면 자신들도 끝까지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가족의 장례식은 중요한 것이니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장녀는 자신의 가족들이 자주 전화를 걸 어오던 그 부동산 남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만 살해당했다는 사실 전했고 잔인한 범행 내용은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7월 2일부터는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에서 "친구가 되자, 힘내세요,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보내세요." 등의 격려의 편지[8]를 보내는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장녀는 7월 6일 백부에게 양녀로 거두어져 새 학교로 전학을 갔고 사건이 발생한 지 약 2주 만에 등교를 할 수 있었다. 한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이 새하얘지거나 혼자 외출하는 것을 매우 무서워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이후에는 정상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아사쿠라의 공판에 가끔 모습을 비춘 게 전부다.

7. 사건 이후

사건 이후 피해자 일가의 자택은 실내의 가구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정원은 잡초가 자라 상당히 황폐해졌지만 3억엔 이상의 값이 붙자마자 부동산 업자들은 그 자택을 구하기 위해 눈독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아직 토지의 소유권자였던 아사쿠라는 토지와 건물을 매각해 피해자 유족에게 줄 배상금과 자신의 가족에게 줄 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그걸 알게 된 도쿄도 타치카와시의 운수 부동산업자가 1987년 5월 하순에 토지 브로커 업체를 통해서 주오구 내 부동산 업자에게 본건 물건을 저희가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고 위의 물건을 2억 5000만엔으로 구입하도록 속였다.

본 건 물건은 사건 직후 전매의 예약을 하던 신주쿠 구내의 건설 회사가 체포된 아사쿠라에게 지불한 계약금 1500만엔을 회수할 수 없게 되기 전 보전하는 조치로서 1983년 6월 30일 소유권 이전 가등기가 행해진 후 아사쿠라가 경매에서 본 물건을 구입할 때 1억엔을 융자하던 은행이 담보로 저당권을 설정했다.

주오구 부동산업자는 권리 관계가 복잡한 것을 이유로 계약을 거절했지만 타치카와시 부동산 업자가 반드시 아사쿠라와 합의해서 1987년 7월 중 본건물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1987년 6월 19일에 현금 500만엔, 그 해 7월 9일에 현금 2, 000만엔(총 2, 500만엔)의 계약금을 보냈으나 8월이 돼서도 토지 취득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주오구 부동산업자가 아사쿠라의 대리인들에게 사정을 들었는데 아사쿠라측은 "본건물은 가등기하고 있는 건설 회사 간에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이 되었으며 타치카와시 부동산 업자에게는 재판매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응답했다. 이와 함께 타치카와 부동산 업자는 주오구 부동산 업자와의 계약 후 처음으로 아사쿠라측 및 건설 회사와 협상을 시작한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주오구 부동산 업자는 "토지를 입수할 수 있는 전망이 없는데 타치카와시 부동산 업자로부터 계약금 명목으로 2, 500만엔을 털렸다"는 명분 하에 사기죄로 타치카와 부동산 업자를 경시청에 고소하였다.

이에 타치카와 부동산 업자 측은 마이니치 신문의 취재에 대해 "올해 초부터 저당권 설정 은행 등과 협상 중이며 아무런 근거로 주오구 부동산 업자에게 매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소송이 얽혀 버렸기 때문에 인도 기일에 맞추지 않았을 뿐 아사쿠라와 소유권을 다투는 건설 회사에서 소송을 당해첨부, 아사쿠라 측과도 본격적으로 협상할 방침이다"라고 회답했다. 이에 덧붙여 착수금은 토지 브로커를 통해서 480만엔밖에 못 받았지만 계약상 자사 측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주오구 부동산에 위약금을 포함하여 5,000만엔을 지불하고 화해를 제안할 것이다. 1987년 8월에 5,000만엔짜리 어음을 주오구 부동산에 반입했지만 거절당했으며 이런 문제로 번질 것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건 이후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 경매의 명암이 재조명되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이유와 노자와 히로시의 소설 주홍에도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나왔으며 주홍은 2005년 영화화까지도 되었을 정도로 사건의 파장은 상당했다.


[1] 단,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은 아직까지도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제사건이 되었다.[2] 공교롭게도 사건 당일은 사치코의 생일이었다. 사건 전날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차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이틀 연속 생일파티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3] 장남과 차남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장남은 태어날 때부터 병을 앓고 있었고 생일이 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4] 아사쿠라는 다음날까지는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피해자가 다음날 아침 모친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두었기 때문에 금방 들키게 되었다.[5] 여름방학에 숲속, 고원 등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의 건강증진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교육활동이다.[6] 원래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 동생도 아키타현에서 유명한 난동꾼이었다고 한다.[7] 당시 동생은 11cm 정도의 큰 상처를 입고 과다출혈로 의식불명의 중태가 되었다고 한다.[8] 1983년 7월 6일 기준 100통 이상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