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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奈良時代당시 복식.
일본의 시대 구분 중의 하나. 서기 710–794년의 기간이다. 한국 남북국시대의 초반기와 겹친다.
이 시기에 일본 역사상 5번째 여성 천황인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平城京)에 수도를 세웠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의 나라 지역에 해당한다. 헤이조쿄는 짧은 기간 천도했던 5년간을 제외하면 나라 시대 내내 계속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다. 헤이조쿄는 남북 5 km, 동서 6 km 규모로 당에서 유입된 조방제(바둑판 구획)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작문, 대극전 등 수ㆍ당의 영향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인구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 0.7%가 귀족들과 관료들이었다고 한다. 헤이조쿄는 강과 너무 멀었기 때문에 배수시설이 나빠서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전염병이 돌곤 했는데, 이것이 후에 천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헤이조쿄의 귀족들은 거대한 저택을 짓고 학과 개 등을 쌀을 먹여 길렀으며, 빙실을 지어 얼음을 가져다 먹고, 백제에서 들여온 우유를 자양강장제 삼아서 마시는 등 호화롭게 살았다. 이 때문에 지금 헤이조쿄에 가면 나라 스타일로 만든 치즈와 우유 전골을 판매하며, 호텔에는 당시 일본 황실의 식단을 재현해서 판매하고 있다.
헤이조쿄의 유명 유적으로는 도다이지 정창원이 있는데 원래 정창은 모든 절마다 딸린 창고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였지만 도다이지의 정창만 남으면서 도다이지 정창을 말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율령시대(律令時代)의 전성기에 해당하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였다. 나라 시대, 그리고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는 천황이 허수아비가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군주 노릇을 해봤던 일본사의 얼마 안 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각 지방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통해 지배한다는 원칙이 막부 시대보다는 그나마 작동했다.
대외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대외교류가 활발했던 시대기도 하다. 다음 헤이안 시대부터는 신라, 발해, 당나라 등 해외와의 교류가 크게 감소하고 국풍문화가 발달하기 때문. 이 시대에는 신라, 발해, 당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특히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거나 당나라 승려 간진(鑑真)이 쇼무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오는 등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이때 음식으로 면, 나레스시, 볶음밥, 찹쌀떡, 가지, 양배추, 순무, 마늘, 호두, 살구, 차, 사탕수수[1], 당과자가 일본에 전래되거나 고안되었다. 장기, 젓가락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이다.
신라와의 관계는 초창기에는 좋았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나빴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이는 백제가 건재하던 삼국시대 말기의 구도나 혹은 일본이 헤이안 시대로 접어든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때는 굉장히 활발한 교류를 했다.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 ~ 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8세기에 발해가 성장하면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인정했고, 고구려 멸망 전에 고구려와 가까운 관계였던 일본은 발해와 친교를 맺기 시작했기에 발해와 경쟁 관계였던 신라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생각보다는 교류가 있었지만 일본이 헤이안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간주하는 9세기경이 되면 외래 선진문물을 이미 충분히 흡수했고[2] 일본의 자존 의식이 커지면서 신라, 발해, 당 모두와 공식적인 관계가 줄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