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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1. 개요
羅州掛書事件영조 31년(1755)에 일어난 괘서[1] 사건. 이 해가 을해년이기 때문에 '을해옥사'라고도 하고, 사건을 주도한 윤지(尹志)[2]의 이름을 붙여 '윤지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2.1. 배경
숙종 말년 누구를 후계자로 지정할 것인지를 놓고 연잉군을 지지하였던 노론과 세자를 지지하였던 소론 사이의 다툼은 격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에 성공하지만, 숙종 말기부터 이미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삼는데 성공한다. 급기야 일부 노론 세력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초강수[3]까지 동원하였지만, 이런 무리수로 소론이 반발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신임옥사를 주도하여 노론은 실각했다.신임옥사 때 목호룡이 고변하여 노론의 주요 가문을 풍비박산내버렸고, 더 나아가 소론이 급기야 세제였던 연잉군을 왕세자에서 추탈하는 것을 경종에게 주장하여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그렇지만 경종이 보호한 덕에 연잉군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허약한 경종이 즉위한 지 4년째인 1724년에[4] 사망하고, 연잉군이 보위를 이어받았다.
즉위 직후 영조는 보복을 감행하여 1724년에 김일경과 목호룡을 제거했다.1725년에는 윤지의 아버지 윤취상도 처형됐다.[5]그러나 영조 3년(1727)에 실각한 소론 강경파 준론 주도로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였고, 반군이 경기도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진압된다.
2.2. 진행
이인좌의 난 직전에 있었던 정미환국 이후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조정에는 소위 탕평책이 적용되어 노론 온건파(완노)와 소론 온건파(완소)를 중심으로 표면적인 균형이 이루어졌으나 헤게모니는 실질적으로 노론 온건파인 완노가 쥐고 있었다. 노론 강경파였던 준노와 같이 소론에 대해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면서도, 탕평책에 반대했던 준노와 달리 완노는 탕평책에 찬성적이었고, 당연하게도 영조의 마음은 완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한편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였던 준소와 갑술환국 이래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들의 연이은 반란 음모가 이어졌다. 중앙 정계에 자리잡은 소론 온건파인 완소는 과거에는 준소와 같이 경종을 지지했지만 1716년 병신처분이래 노론과 소론에게 피비린내나는 당쟁을 이어왔던 터라, 당쟁보다 나라 안정을 우선시했고, 영조가 탕평책을 펴자 바로 탕평책에 대해 지지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완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인 입지가 갈수록 위축되었다.
결국 영조 16년(1740) 완소 내에서 가장 강경파였던 이광좌가 사망한 이후 신임옥사가 무고로 처리되고 노론 4대신을 비롯한 사건의 희생자들이 복권되면서(경신처분) 사실상 완소의 정치적 입지라는 것은 결국에는 완노를 위해 열심히 바친 것으로 되어졌다. 이 무렵 김일경의 옥사 이후 30년 가까이 유배를 가 있던 윤지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남인과 준소를 중심으로 불만 세력들을 규합하는 한편으로 나주 목사들과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백성들의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무당들의 푸닥거리를 통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한편, 영조 31년(1755) 1월에는 나주 객사에 국왕을 비방하는 괘서를 붙이지만 거사를 채 일으키기도 전에 적발되었다. 괘서에 관련된 보고를 받은 조정 측에서는 '무신년 일당들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윤지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그대로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임금이 동룡문에 나아가 윤지를 친국하며 신문하기를,
"너는 바로 역적 윤취상의 아들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 먹고 숨쉬도록 용납한 것도 이미 관대한 은전인데,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서를 망화루에 걸어 둔 음흉하고 참담한 정절은 남김없이 탄로가 났으니 반드시 주무한 자가 있은 연후에 이를 하였을 터이며, 더구나 너의 서롱을 임국훈에게 전하여 간직하게 한 것을 임국훈이 현납하였음을 너의 집 종이 또한 벌써 모두 고발하였으니, 아무리 속이려고 한들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上御銅龍門, 親鞫訊問尹志: "以汝卽逆商之子, 尙容食息已是寬典, 而敢懷怨國之心, 掛書於望華樓, 陰慘情節綻露無餘, 想必有綢繆者然後爲此, 況汝書籠, 傳藏於林國薰家, 國薰現納, 汝家奴亦已盡告, 雖欲欺, 焉可得也?"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2월 20일자 기사
관련자들은 영조의 친국 이후 모조리 사형당하였으며, 그 중 주동자였던 윤지는 국문 도중에 죽었다. 사건 직후인 같은 해 5월에는 심정연을 비롯한 준소와 남인의 자제들이 과거 시험장에서 정권을 비방하는 답안지를 써서 다시 한 번 피바다가 몰아쳤다."너는 바로 역적 윤취상의 아들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 먹고 숨쉬도록 용납한 것도 이미 관대한 은전인데,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서를 망화루에 걸어 둔 음흉하고 참담한 정절은 남김없이 탄로가 났으니 반드시 주무한 자가 있은 연후에 이를 하였을 터이며, 더구나 너의 서롱을 임국훈에게 전하여 간직하게 한 것을 임국훈이 현납하였음을 너의 집 종이 또한 벌써 모두 고발하였으니, 아무리 속이려고 한들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上御銅龍門, 親鞫訊問尹志: "以汝卽逆商之子, 尙容食息已是寬典, 而敢懷怨國之心, 掛書於望華樓, 陰慘情節綻露無餘, 想必有綢繆者然後爲此, 況汝書籠, 傳藏於林國薰家, 國薰現納, 汝家奴亦已盡告, 雖欲欺, 焉可得也?"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2월 20일자 기사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역적 윤혜(尹惠)가 복주(伏誅)되었다. 윤혜의 문서에 열성(列聖)의 어휘(御諱)가 한 종이에 나란히 쓰여 있는 것이 있어 임금이 놀라고 통분해 그 까닭을 국문하니, 윤혜가 공초하기를,
"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상고하느라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즉시 보여(步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서 종묘를 지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부덕(不德)으로 인해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
- 영조실록 영조 영조 31년 5월 6일 기묘 1번째기사
심지어 윤지의 일족인 윤혜는 피휘를 어기고 역대 제왕들의 이름을 줄줄이 써놓은 뒤 "내 아들 이름 지을 때 참고 좀 하려고 썼다"라고 왕 앞에서 바락바락 대들기까지 하니 영조가 크게 분노했다는 내용도 있다.[6]"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상고하느라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즉시 보여(步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서 종묘를 지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부덕(不德)으로 인해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
- 영조실록 영조 영조 31년 5월 6일 기묘 1번째기사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7]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致雲曰: "上旣疑之如是, 臣請自服。 臣自甲辰後, 不喫蟹醬, 此乃臣之逆心, 鼎衍凶書, 亦臣所爲也。" 上憤痛流涕, 侍衛將士莫不崩心痛骨, 直欲手臠其肉。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자 기사[8]
致雲曰: "上旣疑之如是, 臣請自服。 臣自甲辰後, 不喫蟹醬, 此乃臣之逆心, 鼎衍凶書, 亦臣所爲也。" 上憤痛流涕, 侍衛將士莫不崩心痛骨, 直欲手臠其肉。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자 기사[8]
2.3. 결과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 나주괘서사건 [羅州掛書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러한 집단 자결에 가까운 남인과 준소의 마지막 발악은 갑술환국에서 살아남은 남인의 몰락에 치명타에 가해 완전히 사실상 멸망했으며, 세력이 다시 회복되려면 정조 시절까지 가야했다. 특히 괘서를 주도하고 이후 영조를 욕한 윤지,윤혜,신치운의 일족은 모조리 몰살되어 씨가 말라 버렸다. 한편 소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 당의 붕당 의리에 손해를 끼쳤고 준소는 완전히 역당으로 전락했으며, 조정에 있었던 완소는 완노에게 기세가 눌려졌다. 또한 연이은 음모에 인내심이 바닥난 영조는 그래도 완노가 자신의 정책에 대해 지지했기 때문에 완노의 청을 받아들여 조태구, 유봉휘를 비롯한 소론 주요 인사들에게 역률을 추죄하는 한편 이광좌의 직첩 역시 박탈했다.
을해옥사로 남인과 소론 인사들은 5백 명 넘게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갔고, 연루된 집안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는 왕족들도 있었는데 소론에 의한 추대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종친인 이증, 이관, 이학, 이당 등은 처형당했다. 상당수는 직접적인 물증에 의해서기보다는 영조가 친히 고문하는 가운데 고통을 참다못해 나온 자백만으로 극형이 가해졌다.
박문수 등 일부 소론은 반성문을 제출함으로써 이런 파국을 면했다. 특히 박문수는 영조가 직접 그를 안심시키고 여전히 신뢰하였다. 국문 도중 박문수, 이종성 등의 이름이 나오자 영조는 이를 불문에 부치게 한 뒤 "여러 해 동안 벼슬한 신하를 만약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역적으로 의심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믿고 나를 섬기겠는가?"라며 변호했다.(]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0일자 기사)
그러나 박문수는 죄인을 자처하고 집에 틀어박힌 채 살다가 이듬해 1756년에 사망했다. 완소는 나주 괘서 사건에서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으나, 탕평책을 지지했어도 과거에 준소와 같이 경종 지지였기 때문에 당의 의리 상으로는 완노한테 완전히 밀려, 듣보잡으로 전락했으며, 예전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이후 이종성이 완소의 영수로 남아서 조정을 개편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에 정계는 노론 온건파였던 완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완노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듣보잡이 된 완소를 흡수하여 탕평당이라는 새로운 당파를 조직해서 영조 말기 정국은 사실상 탕평당이 장악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탕평당이라는 붕당 하나가 권력을 독점했다기보다는, 탕평당 내에서도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홍봉한으로 상징되는 척신 정치였다. 한편 남인과 준소를 비롯한 반대파가 완전히 사라진 든든한 배경 속에서 영조는 천의소감을 편찬하여 자신이 경종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널리 선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건의 여파로 실록에 남게 된 희대의 명대사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는 독살설을 차단하려는 영조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고 오늘날까지 경종 독살설이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원인이 된다.
3. 기타
노론 음모론을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사도세자가 소론을 처벌하길 거부해서 노론이 그를 적대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사도세자 본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영조가 그나마 관련없는 소론 잔여 세력을 보호하려고 한 것에 가깝다. 사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말이 좋아서 대리청정이지 대부분 영조의 뜻대로 국정을 운영했다. 사도세자는 그냥 아버지에게 기죽은 상태에서 몇 마디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 영조가 친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죄인 중 하나가 자신이 나주 사람임을 강조하여 상기 사건을 짧막하게 표현했다. 극 중에서 영조의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4. 관련 문서
[1] 벽서라고도 한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대자보[2] 김일경의 세력으로 지목된 윤취상의 아들이다.[3] 건강이 쇠락한 왕이 대리청정을 할 것을 세자에게 요구하여도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강경히 거부하는 게 조선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하물며 이 당시 경종은 갓 즉위한 30대 젊은 청년이었는데도 노론은 경종을 사실상 바지 사장으로 밀어내려고 한 것이다. 경종이 평균적인 왕권만 손에 쥐었더라도 당장 목을 날려버렸을 요구였다.[4] 이 과정에서 영조가 앓아 누웠던 경종의 수랏상에 게장과 감을 진상했다. 경종의 사망 직전 어의가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처방하라고 강행한 탓에, 영조에게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꼬리표가 생애 내내 따라다녔다. 상단의 신치운이 "나는 갑진년(1724)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다."라고 한 것도 여기서 나온 맥락. 경종 독살설과 관련하여 자세한 사항은 영조 항목과 경종 항목 참조.[5] 본 항목인 나주 괘서 사건을 주도한 윤지 역시 이 사건에 연계되어서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중간에 나주로 유배지를 옮기기는 하였지만 괘서 사건 전까지 30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했다. 당연히 역적의 후손으로 연좌되어 벼슬길에도 못오르는 천리방축을 당해 30년간 그 원한이 골수까지 사무쳤을 것이다.[6] 진행이 조금 웃긴데, 윤혜의 발악을 듣고 영조가 빡쳐서 두들겨 패게 해도 윤혜가 별다른 말을 안 하자 영의정이 그렇게 급하게 막 다루시면 어떡해요? 라고 꼽을 주고(…) 또 이걸 들은 영조는 줘패도 말 안 하는데 그럼 봐줘가면서 해?! 라고 분노하며 종묘로 뛰쳐나가 울고불고 했다는 내용이다. 영조의 성질머리가 드러나는 일화…[7] 대놓고 임금에게 '내가 왜 게장을 안먹는지 아냐? 바로 당신이 게장으로 선왕을 독살해서 그런거잖아. 빨리 날 죽이란 말이다.'라고 바락바락 대든 셈이다.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운은 저 극언 때문에 선대의 이괄, 후대의 김옥균에 맞먹는 대역죄인으로 일가가 모조리 극형에 쳐해진다.[8] 여담이지만, 이 발언 자체는 엄밀히 따지자면 나주 괘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주 괘서 사건 직후, 이 사건에 고무된 신치운을 비롯한 준소와 남인의 자제들이 과거장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글을 쓴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을 일으켰고 이후 추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