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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1:39:30

김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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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김온아
金溫兒|Kim Ona
파일:59C6DA96-DB8A-4389-B759-952C0DCC290A.jpg
출생 1988년 9월 6일 ([age(1988-09-06)]세)
전라남도 무안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무안초등학교 (졸업)
무안북중학교 (졸업)
백제고등학교 (졸업)
종목 핸드볼
포지션 센터백
소속 효명건설벽산건설인천시청 (2007~2015)[1]
SK 슈가글라이더즈(2015~2020.11.)
인천시청 (2020.12.~2022.11.)
삼척시청 (2022.12.~ )
신체 170cm, 60kg
종교 기독교
가족 부모님, 언니 김가나[2], 여동생 김선화(1991년 1월 7일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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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평가4. 방송 활동5. 기록
5.1. 국내 대회5.2. 국제 대회

[clearfix]

1. 개요

파일:20210131김온아돌파.gif
대한민국핸드볼 선수이며 포지션은 센터백이다. 빠른 슈팅력과 일대일 돌파시 유연성을 이용해서 공간을 파고드는 공격력이 가장 큰 장점이며, 센터백으로써 시야가 넓어서 속공 패스나 빈 공간을 만들어 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 한 두번 패스안에 골을 성공시켜야 하는 패시브 상황에서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키는 집중력과 뛰어난 스냅력을 이용한 빠른 슛 스피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파일:20192020_SK온아패시브.gif
또한 임오경오성옥 이후의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의 센터백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고등학교 졸업 이전

파일:백제고_전국우승_7번김온아.jpg
백제고등학교 7번 김온아
10살이던 1997년 언니를 따라 핸드볼에 입문했으며, 18살이던 2005년에 첫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대회 1위를 시작으로 이미 고교시절부터 차기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의 센터백 계보를 이을 에이스로 불렸다.

고등학교 3학년인 2006년에는 30회 전국 연맹회장기 핸드볼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수상을 받았으며, 캐나다에서 열린 청소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준우승과 득점상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백제고등학교 은사인 최현목 감독은 중학생이던 김온아를 처음 봤을 때, 어깨가 아닌 손목 스냅 만으로도 공을 컨트롤하는 파워를 가진 김온아의 가능성을 알아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속이는 스텝이 좋아서 남자 핸드볼 팀과 축구 경기를 할 때도 남자 선수들 서너명을 돌파하는 스텝을 보이는 운동 능력을 가졌다고 전했다. 이후 김온아가 백제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체력이나 체격에서 선배들에게 밀려서 슬럼프를 겪었는데 이때 친언니가 부상으로 비우게 된 센터 자리를 김온아가 맡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더해졌으나 김온아는 '잘 돼서 나중에 부모님께 여러 가지로 보탬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부담을 극복했다.

2.2. 2006년-2008년

졸업을 앞둔 2006년 시즌에 인천을 베이스로 한 효명건설에 데뷔했다. SK핸드볼큰잔치에서 효명건설은 3위를 하고 김온아는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입단한지 1년 만인 2008년 1월 효명건설의 부도로 인해 벽산건설이 팀을 인수했다.
파일:김온아 베이징.jpg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당시 임영철 감독은 2004 아테네 올림픽 우생순 멤버 위주로 팀을 만들었는데, 당시 김온아는 20세의 나이로 센터백 오성옥[4]의 백업으로 선발되었다. 올림픽 출전권을 따기 위한 지역예선을 3번이나 거쳐야 했는데, 아시아핸드볼연맹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경기가 무효처리가 되었다. 이를 받아들인 국제 스포츠 중재재판소 주관 하의 지역예선에서는 승리했으나, 결국 이도 무효가 되었다. 마지막 국제핸드볼연맹(IHF)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승리하면서 출전권을 따냈다.

김온아의 활약은 러시아와의 조별예선 1차전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 경기에서 전반 13-16으로 끌려가다가 후반전에서 더격차가 벌어졌다. 그러나 주전 센터였던 오성옥 대신 투입된 김온아는 평균 180이 넘는 러시아 중앙 수비벽을 헤집고 다니며 수비진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팀내 최다골인 7골을 기록하며 29대 29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한국 대표팀은 노르웨이와의 준결승 경기에서 아쉽게 패했다. 종료 버저 직전에 던진 노르웨이 선수의 공이 비디오 확인 결과 후반 종료 부저가 울린 순간 골라인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으나 심판진이 이를 인정하여 1점 차이로 안타깝게 동메달 결정전으로 떨어졌다. 이후 헝가리와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오성옥이 부진하던 타이밍에 교체된 김온아는 맹활약을 보여줬고 33대 28로 한국 여자 핸드볼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2.3. 2009년-2010년

2009년 2월 SK핸드볼큰잔치에서 벽산건설을 우승시켰으며, 81골로 득점상과 베스트 7에 뽑혔다.

2010년 1월 SK핸드볼큰잔치에서 벽산건설을 우승시키며 본인은 최우수선수상, 어시스트상(20개), 베스트7상(레프트백)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벽산건설이 팀 해체를 선언했고 반년 가까이 인수할 팀을 찾지 못해서 팀 공중분해 위기에 놓였다. 2010년 10월 전국체전에서 팀 해체를 앞두고 우승했으나, 결국 인수할 기업을 찾지 못했고 인천시에서 팀을 인수해서 인천체육회 소속으로 뛰게 되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준결승전에서 일본에게 아쉽게 패배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서울시청 감독 임오경에 의하면, 주전 선수들이 부상으로 인해 아시안 게임 이전 제대로 호흡을 맞추지 못했고 소속팀인 벽산건설과 용인시청의 해체 소식으로 인해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거취가 어수선했던 여파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더불어서 패배한 원인은 실력이 뒤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밝히며 핸드볼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2010 아시아선수권에서도 카자흐스탄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4. 2011년-2012년

2011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인천체육회 팀을 우승시켰고 챔피언전 MVP를 받았다. 12월 어깨 부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 참가했으며 24개국가 중 11위를 기록했다. 2012년 SK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소속팀인 인천시 체육회가 우승했으나, 김온아는 런던올림픽 전부터 무릎이 좋지 않아 경기에 결장이 잦았으며 올림픽 이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파일:런올온아.jpg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세대교체 이후 팀을 이끄는 센터백으로 뛰었으나, 조별리그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무릎인대 파열 부상을 입고 그 이후로는 경기를 뛰지 못했다. 부상은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서 후반전 경기 종료 90초 전에 발생했다. 당시 몸싸움도 없었고 바닥이 미끄럽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고꾸라지며 쓰러졌고 육안으로 보일 만큼 무릎이 엇나가 있었다. 이후 김온아는 들것에 실려나갔고 선수촌 내 클리닉에서 무릎을 지탱하는 근육이 끊어졌다고 진단하며 경기를 뛸 수 없게 되었다. 김온아는 올림픽에 끝까지 남아서 팀원들을 격려했는데, 8강 전이었던 러시아와의 경기에는 아픈 다리를 끌고 벤치에 나와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볼수 있고 이 경기에서 한국이 24대 22로 이기면서 4강 진출을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별리그 프랑스전에서 정유라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해 결국 한국 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다시 만난 스페인에게 2번의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9대 31로 패하며 아쉽게 4위를 기록했다. 부상 당시 결선에서 뛸 수 있는 가벼운 정도의 부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후 한국에 귀국하여 받은 정밀진단에서 무릎인대 파열로 판정 받아 결국 수술을 진행했다. 이후에도 염증이 재발하며 재수술을 통해 1년 가까이 재활을 거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2.5. 2013년-2014년

2013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소속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앞서 기술한대로 김온아는 수술과 재활로 국내대회와 국제대회 경기에 거의 뛰지 못했다. 그러나 7월부터 리그에서 유니폼을 입고 벤치에 앉아서 출전을 기대하게 했으며 마침내 8월에 경기에 출전해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4년 6월 MBN에서 시상하는 4월의 여성스포츠대상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으며 결승전에서 일본에 29대 19로 압도하며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4년 전 패배가 결코 실력으로 진게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2014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는 인천시체육회가 인천시청으로 팀 소속부서가 내부이전 되었고 김온아는 부상에서 회복되어 다시 인천시청을 우승에 올려놓았다. 이때 챔피언전 MVP와 베스트 7(센터백)에 선정되었다.

11월 인천시청과 계약 만료로 자유 계약 조건이었으나 같은 팀에서 뛴 동생 김선화의 계약 만료 1년을 기다리며 인천시청과 재계약했다.

2.6. 2015년-2016년

파일:2016RIOKOA.jpg
2015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인천시청을 우승에 올려놓았고 정규MVP와 득점상, 어시스트상, 베스트7(센터백) 등 4관왕을 이뤘다.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은메달을획득했으며, 11월 인천시청과 계약이 만료된 이후 동생 김선화와 함께 SK 슈가글라이더즈로 팀을 이적했다. 이후 중국에서 열린 올림픽 지역예선에 출전하여 4전 전승으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조별리그 두번째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쇄골부상으로 아웃되며 올림픽에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 여자핸드볼은 최종 10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전에도 크고 작은 부상이 있었으나 혹독한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한 임영철 감독이 당시 해병대 훈련을 비롯 한 강도높은 훈련을 시키다가 올림픽 전부터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은 조별리그 첫번째 경기에서 러시아에게 역전패 당하면서 위기에 빠졌다.

조별리그 두번째인 한국 팀에는 비교적 약체로 평가받던 스웨덴과의 경기 전반전 초반에 세골을 몰아넣고 갑자기 어깨 통증을 호소하면서 교체되었다. 이후 후반전에 출전하여 경기를 강행하면서 한 골을 넣었지만, 결국 통증을 참지 못하고 경기를 포기했다. 이후 선수촌의 폴리클리닉에서 오른쪽 흉쇄관절이 파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결국 남은 경기를 모두 포기하고 귀국했다. 2012 런던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이미 올림픽 이전 휴식 없이 여러 대회를 뛰면서 자잘한 부상을 달고 있다가, 올림픽 시작되자마자 결국 큰 부상으로 터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년 동안 수술과 재활 기간을 가졌다.[5]

2.7. 2017년-2018년

2017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SK 슈가글라이더즈에서 활약해서 팀을 창단이후 첫 우승에 올려놓았고 자신은 챔피언MVP를 받았다. 이후 부상으로 12월에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는 선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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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을 29대 23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예선 첫 경기는 북한과 가졌는데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의 북한과 첫 맞대결이어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크게 승리했다. 태국과의 준결승에서 대승하고 선수촌에 돌아왔을때 절친인 배구선수 김연경이 등짝을 스매싱하며 "미리 우승 축하한다"고 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국내대회로는 2018-2019 SK핸드볼코리아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8. 2019년-2020년

2019년 중국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지역예선에 출전해서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직행이라는 업적에 기여했으며, 2019-2020 SK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도 우승했다.

2020년 11월 SK 슈가글라이더즈가 계약 종료와 함께 다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재계약을 할 것을 원했으나, 인천시청이 성적 부진으로 김온아를 원하자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곳에서 뛰고싶다며 SK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12월부터 인천시청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리그가 연기되며 김온아는 시즌 중반부터 합류했는데, 김온아의 합류 이후 꼴찌팀이었던 인천시청은 5위로 리그를 마감했고 김온아도 모처럼 부상없는 시즌을 마감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 대회에서는 줄곧 부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6]

2021년으로 연기된 올림픽 본선 출전을 위한 3월 대표팀 명단에 빠져 있어서 각종 게시판에서 팬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부상 위험으로 제외되었다고 보도되었는데 최종 명단에서도 결국 빠지면서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3. 평가

고등학생부터 임오경오성옥을 잇는 대한민국의 차세대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센터백으로 주목 받았다. 핸드볼의 센터백 포지션은 경기를 조율하며 작전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볼 배급을 하다가도 필요시에 직접 돌파해서 슛을 해야하는 위치다 보니 상대 팀의 견제를 많이 받고 슛 과정에서도 몸싸움이 많이 필요하다. 유리몸이라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많은 대회에서 혹사를 당한 것도 사실이다. 크고 작은 부상은 항상 달고 경기에 참가했으며, 국제대회에서도 주로 만나는 유럽선수들의 신장과 체격에 부딪히며 여러가지 부상에 시달렸다. 구기스포츠 종목 중에서도 가장 몸싸움이 심한 핸드볼 선수들은 부상으로 시즌을 날리는 경우가 자주 있는 편이지만, 김온아는 특히 선수 생활 종료로 이어질 만한 큰 부상들이 많았다.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까지도 이어지는 유럽과의 평가전 등을 통해서까지 혹사당한 것들이 누적되어 올림픽에서 결국 큰 부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7]

안타까운 것은 올림픽 이전의 국제대회 등에서는 내내 팀을 캐리 하며 혹독한 국가대표 팀의 훈련을 소화했으나 정작 중요한 올림픽 본선 초반에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한 큰 부상을 겪어왔다. 반복되는 부상-수술-재활 과정은 선수 생활 포기나 은퇴로 이어질 만하지만 이를 극복해내는 멘탈과 회복 과정에서의 체력 역시 대단하다. 실제로 발목, 무릎, 손목, 팔꿈치 등 10여 번의 수술을 했다. 또한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국내 탑 센터백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빠른 돌파 능력과 볼 컨트롤, 슛 스피드[8], 빈 공간을 읽거나 패스할 자리를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은 공간이 났을 때 순간적으로 슛을 던지는 스피드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20년 12월 인천시청으로 재이적 했을 때는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을 코칭해 가며 경기를 리드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4. 방송 활동

4.1. 노는 언니

5. 기록

5.1. 국내 대회

5.2. 국제 대회

올림픽
동메달 2008 베이징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4 인천 단체전
금메달 2018 자카르타·팔렘방 단체전
동메달 2010 광저우 단체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2008 방콕 단체전
금메달 2012 욕야카르타 단체전
금메달 2015 자카르타 단체전
은메달 2010 알마티 단체전
유니버시아드
은메달 2015 광주 단체전
청소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2006 셔브루크 단체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2005 방콕 단체전
금메달 2007 알마티 단체전


[1] 구단의 매각, 인수로 두 번이나 소속이 변했다. 정확한 기간은 효명건설(2007~2008), 벽산건설(2008~2010), 인천시청(2010~2015)이다.[2] 아래 두 동생들처럼 핸드볼 선수였다.[3] 핸드볼 선수로 활동 중이며 김온아와 함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우승했다.[4]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16살이다.[5] 노는 언니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김온아가 올림픽에서 성적 부진으로 인해 '낙타를 타고 오라'는 등의 비난을 받아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여자 핸드볼에 대해 비난하는 여론은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해준 것도 없으면서 4년마다 메달을 기대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올림픽에 연속 출전한 여자핸드볼은 많은 격려를 받았다.[6] 노는 언니에서 자신이 속한 팀이 꼴찌인게 처음이라고 밝혔다.[7] 2012 런던 올림픽에서 갑자기 혼자 고꾸라지며 인대가 끊어진 것은 그런 맥락이다.[8] 핸드볼 슛 구속 측정에서 93km/h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