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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1:37:26

김만득(독립운동가)

파일:20210307_154337.jpg
<colbgcolor=#0047a0> 해광(海光)
본관 경주 김씨[1]
출생 1916년 5월 14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 316번지
(現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안강리)
사망 1950년 10월 10일 (향년 34세)
직업 한국광복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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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 당시 국민혁명군 예하 충의구국군 및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출처]

2. 생애

1916년 5월 14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서면(現 경주시 안강읍) 안강리 316번지에서 태어났다. 1931년 안강공립보통학교(現 안강제일초등학교, 3회)를 졸업하고 안강수리조합(安康水利組合)에서 임시직인 고원(雇員)으로 6년간 근무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조선유학생 및 일본 현지 학생간의 폭력사태에 가담해 체포되었고, 주동자로 몰려 도쿄도 경시청에 구금되어 19일간 고문을 당한 뒤 결국 강제로 귀국 처분을 받았다.

귀국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 육군 군속(軍屬)으로 징집되어 중화민국 강서성 구강현(九江縣)[3]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서 근무했다. 이때 겉으로는 통역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한편, 속으로는 일본군의 중요한 정보를 국민혁명군에 제공했다. 그러다 간부들에게 발각이 되자 1943년 7월 탈출해 국민혁명군 소속 특무 유격부대인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4]에 편입되어 1944년 1월까지 복무했다.

이후 1944년 2월 10일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한 뒤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며 상하이 주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사령부에 근무하던 오학선(吳學善) 등을 포섭했고, 이들이 탈영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는 것을 도왔다. 이후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절서(절강성 서부) 분실에 배속되어 전호인과 연락망을 구축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징모 제3분처가 제2지대 제3구대 제3전구 강남분대로 개편된 뒤에는 상해특별시 지구에 파견되어 천사현(川沙縣) 인근 황포강(黃浦江) 동부 지역[5]에 은신처를 구축해 징모 및 첩보 공작을 전개했다. 그 뒤 절강성 금화현(金華縣)[6]으로 이동해 김문호 주임과 연락을 취하며 강서성 상요현(上饒縣)[7]으로 귀환했고, 그곳에서 전호인·김영관·한진원(韓鎭源)·오학선·전복근 등과 국민혁명군 소속 충의구국군 등과 합작해 일본군에 대한 공작을 벌이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파일:김만득 보좌관.jpg
맨 우측(사진상 우측 뒤쪽)의 군복 차림의 인물이 김만득 지사이다.
위 사진은 광복 후 상하이에서 지청천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활동했을 때 촬영된 사진으로, 좌측의 인물은 지청천, 우측은 엄항섭이다.

광복 후에는 상하이시로 진출했고, 지청천 장군의 보좌관으로 잠시 근무했다. 그 뒤 이범석 장군의 지시로 강남분대가 정진군 국내선발대로 개편되자 상하이를 떠나 1946년 3월 마침내 경상남도 부산부(現 부산광역시)에 도착,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김구 주석의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서거하자 그해 10월 비밀경찰대와 함께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 추적을 위해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급파되었으나 이후로는 소식이 없고 다만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0일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 및 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파일:애국지사 해광 김만득공 비석.jpg
'애국지사김만득공항일기공비(愛國志士金萬得公抗日紀功碑)'

3. 여담



[1] 대안군파 42세손.[출처] 김만득-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5권[3]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주장시.[4] 1938년 5월 국민혁명군 총국에서 조직한 특무 유격부대. 다이리가 총지휘했다.[5]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푸둥신구.[6]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진화시.[7]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상라오시.[8] 일본 고치현 아가와군(吾川郡) 야노가와촌(谷野川村) 출신. 일본 제국 육군 예비역 대좌로 1912년 4월 조선으로 건너와 1913년 6월부터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에 거주하면서 농업 및 임업을 경영해 부를 이뤘다. 경상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경상북도 도회의원 및 안강수리조합장을 역임했으며, 1913년 토사코노(土佐興農)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스스로 전무이사에 취임해 회사 소속 토지 및 자신의 사유지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주로 소작을 주었는데, 소작료로 수확량의 7할(70%)를 요구해 당시에도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