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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04

김경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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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고교 시절2.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시절3.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10 시즌3.2. 2011 시즌3.3. 2012 시즌3.4. 2013 시즌3.5. 2014 시즌3.6. 2015 시즌3.7. 2016 시즌3.8. 2017 시즌
4. 이후

1. 중-고교 시절

개성중에서 김백만과 같이 뛰었고 김백만은 부산고, 김경언은 경남상고로 진학했다.

"경남상고호세"로 불리던 화려한 고교시절[1]을 보냈다.

200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8강까지 진출했으나 이동현-오승환의 경기고에 막혔다. 경기고에게 4-0으로 앞서다가 에이스 김덕윤이 거듭되는 연투로 지치면서 오승환에게 불의의 만루포를 맞고 무너졌다. 김경언은 대통령배에서 4개의 홈런(3경기 연속)을 쏘아올렸다.

2.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16185908514B2.jpg
(출처: 포토로)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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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파일:external/www.gjdream.com/200408113619.jpg
KIA 타이거즈 시절

2001년 해태 타이거즈에 2차 2라운드로 지명, 계약금 1억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2]

해태에서는 '제 2의 장성호'로 기대받으며 기회를 꽤 받았고, 데뷔 첫 시즌은 2001년부터 2군과 1군을 오가며 1군에서 .287의 준수한 컨택능력을 보였다. 프로 데뷔 첫 홈런은 해태 시절이던 2001년 5월 4일, 인천 SK전에서 김원형을 상대로 기록했다.

팀명이 KIA로 바뀐 뒤 2년차 시즌부터 주전 외야수로 뛰며 활약했고, 2002년 107경기, 2003년 125경기, 2004년 114경기를 뛰면서 공수주에서 특출나진 않지만 그래도 중간 정도는 하는 선수였다. 고졸신인임을 감안한다면 더 대단한 성적이었고 장래성도 충분해 보였다. 당시 KIA 감독 김성한의 신임도 두터웠다. 삼성에서 20홈런을 2번이나 쳐냈던 신동주와 비슷한 기회를 주며 2000년대 초반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 한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2004 시즌 중 든든한 빽이었던 김성한 감독이 경질된 뒤 유남호 - 서정환 체제를 거치면서 김경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더군다나 LG에서 트레이드로 영입된 이용규에게 먼저 기회가 부여된 데다가, 잦은 부상 및 데뷔 초기 시절에 비해 정체된 성장으로 인해 2006년 이후로는 사실상 1군에서 자리를 잃었다. 2007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8년 8경기, 2009년 2경기 출장에 그치며 사실상 전력 외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2009년에 출장한 2경기마저도 시즌 막판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뒤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 차 잠시 콜업되어 경기에 출장한 것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도 빠졌으나 2009 시즌 종료 후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 주전이 여럿 빠진 탓에 엔트리에 승선하며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조범현 감독 체제하에선 전혀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면서 찍힌 게 아니냐는 의혹도 생겨났다.

3.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10 시즌

2010년 6월 8일, 장성호한화행 트레이드 때 장성호와 같이 묶여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된 후 1번 중견수 주전으로 낙점되어 6월 .333 / 7월 .292의 타율을 기록하며 맹활약, 한화 팬들은 안영명-김경언 트레이드에 장성호는 덤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8월 이후 괴물같은 하락세를 보이며 부진, 게다가 허리에 담까지 걸리며 8월 19일 이후 2군으로 떨어졌다가 9월에 3경기를 뛰고 시즌을 마감했다.

3.2. 2011 시즌

일단 주전 외야수로서 추승우, 이양기, 고동진 등과의 경쟁에서 약간 앞서 있었는데... 롯데에서 활약했던 멕시칸 거포 카림 가르시아가 외야 자원으로 오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단 한화로 온 후 그간 출루율과 타율은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가르시아의 외야수비 능력, 장타율과 타점능력이 워낙에 좋아서... 김경언 자신도 정신 바짝 차리겠다고 공언했으니 어떤 변화를 줄지 기대해봐도 될듯 하다.

2011년 8월 4일 롯데 vs 한화 전에서 2,165일만에 홈런을 쳤다.

2011년 8월 7일 한화 vs LG전 3회 초 만루홈런을 쳤다. 타격폼을 바꾸면서 장타력이 올라가더니 홈런도 조금씩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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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김마조, 김자학 등의 별명을 선사한 2011년 9월 8일의 커트쇼. 링크 그리고 저 커트쇼로 인해 사실상 시즌 아웃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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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3일 결혼했다! 배우자는 배우 엄지원의 사촌 여동생 엄수원 씨라고 한다. 부인이 상당히 예쁘다.

3.3. 2012 시즌

퓨쳐스리그에서 시즌을 맞이했다. 남부리그 6경기에 출전하여 0.318의 타율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 때마침 부진의 늪에 빠진 최진행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틈을 타 1군의 4월 24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 좌익수로 5번 타순에 선발 출장했다.

그리고 5타수 3안타 2타점 1득점을 기록. 특히 9회초에는 타선이 일순해 한 이닝 2루타 2개라는 흔치않은 기록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 날의 관전 포인트는 한화의 박찬호와 KIA의 윤석민 선발 맞대결이었는데, 한화의 타선이 시즌 초의 부진이 무색할 정도로 단체로 각성했버렸다. 윤석민을 상대로 뽑아낸 이대수싹쓸이 3타점 3루타를 시작으로 장성호장외 2점 홈런을 쏘아올렸고, 특히 대타로 출장한 이양기3타점 싹쓸이 2루타를 포함해 3타수 3안타 4타점을 기록! 결국 이 날 한화는 무려 18개의 안타를 뽑아내며 기아를 16:8로 제압했다.

그 후, 4월 26일 KIA전에서 5타수 4안타, 4월 28일 넥센전 3타수 2안타를 몰아치는 활약으로 결혼 버프를 제대로 받았으며, 4월 29일 넥센전에는 기어코 4타수 3안타[3]를 몰아치며 제대로 폭발했다. 사이클링 히트를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4] 4월 30일까지의 시즌 타율은 무려 0.688.

파일:/mypi/gup/283/4953_3.jpg

아무래도 2군에 있었을 때 독하게 칼날을 갈았던 모양. 플레이에 절실함과 독함이 묻어 나왔다. 사실 김경언이 확실한 주전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화 외야를 보면 김경언이 꼭 2군에 있어야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

5월 6일에는 채태인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뇌수비를 유도해 냈다. 사실 이 영상을 보고 100에 99는 채태인에 대한 비웃음을 보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김경언의 집중력에도 칭찬을 보내줘야 한다.[5]

당시 영상

하지만 2군에서 절치부심하고 돌아온 최진행이 1군에 복귀하여 조금씩 감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에 반해, 6번타순으로 밀려난 김경언은 다소 타격감이 떨어진 상태. 5월에 있었던 롯데 자이언츠와의 주말 3연전에 모두 출장했지만 7타수 무안타, 밀어내기 볼넷으로 1타점만을 기록했다.

이후로는 1군 등록 초기의 무시무시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뎁스가 약한 한화 이글스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안타도 가끔 쳐주고 본업인 외야수 외에 1루수 땜빵도 해주는 등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3.4. 2013 시즌

새로운 코칭스탭에 의해 프리 시즌 전지훈련 참가 명단에서 제외되어 겨우내 추운 서산 2군 훈련장에서 땀을 흘렸다. 이에 위기의식이 발동했는지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훈련했다고 하며, 이를 지켜본 이정훈 2군 감독에 의해 시범경기 기간부터 1군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시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둘렀으며, 5월 이후로는 5번 타순에서 클린업을 구성하고 있는데, 최근 몇 년간 2군로이드가 두드러진 선수이긴 했지만 2013년에 들어선 그 활약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5월 10일 기준 규정타석에서 5타석 모자라지만 .338이라는 팀내 최고의 타율을 찍었으며, 규정타석 충족시 이는 리그 7위에 해당하는 기록. 팬덤에서는 슬슬 갓경언이라는 칭송이 들려 오기 시작했으며, 이런 선수를 스캠도 데려가지 않았던 감독 이하 코칭스탭은 선수 보는 눈도 없다며 더더욱 까이고 있는 중.[6]

5월 19일 대전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1회 말 5번타자로 출장했는데, 상대 선발 이정호에게 특유의 커트 능력과 좋은 타격감으로 15구까지 가는 끈질긴 용규놀이 끝에 2타점 적시타를 쳐냈다. 다만 팀은 15:8로 붕괴했다.

그러나 몸을 잘 만들어놓지 못해서인지 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결국 6월 30일 이후 2군으로 내려갔다가 9월 들어 다시 1군으로 콜업되었다.하지만 3할 때리던 갓경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최종성적은 70경기 .276 59안타 24타점 1홈런 26볼넷 53삼진 5병살 1실책 .355 .364 .719 (대타 .500)

3.5.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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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우선협상 마지막 날 3년 총 8억 5000만 원(계약금 3억 원, 연봉 2015년 1억 5000만 원, 2016~2017년 2억 원)에 계약하며 한화 이글스에 잔류했다.

3.6.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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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시즌 후에 오히려 찾아온 커리어 하이. 부상 때문에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해 더더욱 아쉬웠던 시즌이기도 한다.

3.7. 2016 시즌

작년만 해도 갓경언이란 말을 들었지만 4월 9일 NC전을 앞두고 감독에 의해 2군으로 내려갔다. 결국 댓글판은 당연히 대폭발... 게다가 성적이 부진해서 내려갔냐면 그건 또 아닌지라.[7] 심지어 저 당시 특타를 받고 2군으로 갔다고 하여 팬들을 더욱 어이없게 했다.

상식인의 시각에서 하도 어이없는 2군행이라서 부상설, 나지완과의 트레이드설, 이용규 복귀에 맞춰 장민석송주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큰그림 등 온갖 개드립이 난무하고 있다. 일단 김성근 감독 특유의 군기잡기라는 설이 중론이기는 하지만, 김경언의 현재 성적과 팀내 위상을 감안하면 저 음모론들이 그다지 설득력 없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코미디. 트레이드 설에서는 김경언만이 아니라 김용주와 함께 나지완+임준혁 2:2 트레이드 설이 돌았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5월 13일 시점에서는 타출장 .250/.345/.347로 중심 타선에 위치하기엔 한참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5년까지의 통산 BABIP이 0.330이었는데 2015년의 BABIP은 무려 0.404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2015년은 단순한 플루크 시즌이었다는 평가가 올바를 듯. 다만 2014년 BABIP이 0.339였던 걸 생각하면 반등요소가 없는건 아니다. 2015년처럼 미친 활약이 아니더라도 2014년 정도만 해줘도 충분히 괜찮으니.

5월 18일 경기 직후 시점에서 타율 0.214, 1홈런, 5타점, 18안타의 처참한 성적에 머물고 있다. 5월 타율로만 보면 0.128의, 멘도사급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전락한 상황. 결국 19일 삼성전 선발에서 제외되는 굴욕을 당하며 그 존재 이유가 사라진 상황.

5월 21일 kt전 조무근의 사구에 부상을 당해 교체되었다. 정밀검사 결과 종아리 근육 파열 진단을 받았다. 돌아오는 데는 3주정도 걸린다고.

6월 13일 재활을 마치고 훈련을 시작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현재 한화 클린업의 한자리가 휑하니 비어있는 상태라[8] 한화 팬들은 모두 갓경언이 부활해서 그 자리를 메워주기를 바라고 있다.

6월 25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대타로 출전하여 볼넷을 얻어 출루한 후 대주자 장운호와 교체되었다.

6월 28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6회에 대타 출전하여 2타점을 내고 곧바로 대주자로 교체되었다.

7월 10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결장한 이용규의 2번자리로 선발출장해 2회 초 2점 홈런을 쳤다. 영상

7월 13일 LG전 1회초 2, 3루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안타를 쳤고 그라운드 홈런을 노렸으나 홈에서 아웃됐다. 홈 베이스에서 지켜본 정근우의 요청으로 합의 판정했으나 역시 아웃으로 판정됐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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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타수 3안타 2타점 활약하고 8회초 안타 출루 후 대주자 장민석과 교체됐다.

7월 23일 롯데전 4회 초 선두 타자로 나와 솔로 홈런을 쳤다. 영상

7월 24일 롯데전 3회 초 상대 선발 노경은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터트렸다. 영상

7월 29일 두산전에서 11회 초 상대 투수 김성배를 상대로 역전 솔로 홈런을 날려 팀의 올시즌 두산전 첫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영상

8월 6일 NC전 최금강의 사구를 오른발에 맞아 교체됐고 발가락에 실금이 갔다는 진단 결과를 받았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발가락 미세 실금으로 경기 출장과 치료를 병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국 8월 18일에 1군에서 말소됐고, 그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재활을 하며 시즌을 마쳤다.

3.8. 2017 시즌

4월 18일 1군 등록되어 2경기 출장했지만 4타수 1안타 1삼진. 4월 21일 1군에서 말소되었다.

5월 3일 SK전을 맞아 1군에 복귀, 5타수 3안타(1홈런) 2타점으로 좋은 타격감을 뽐냈다.

5월 4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다.

5월 5일 kt전에서 4타수 1안타 1득점 2삼진을 기록했다.

6월 16일, 경기에서 5번 지명타자를 맡아 1회부터 쓰리런 홈런으로 선취점을 만들더니, 이후 로사리오의 역전 쓰리런 후, 백투백홈런으로 도망가는 점수를 만들어 높은 타격감을 뽐냈다. 로사리오의 4연타석 홈런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1점차로 이겼기에 김경언 역시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6월 17일 역시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해 5타수 2안타 1득점 2삼진을 기록했다. 2할 중반의 타율, 3할 초반의 출루율에도 5할의 장타율로 ops 8할을 찍고 있다.

김성근 시절에도 그렇고 상군매직 시절에도 그렇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훨씬 더 타격 생산력이 좋은 타자임에도[9] 장민석은 주구장창 기용되는 반면 김경언은 서산행을 벗어나지 못했다.[10]

결국 8월 이후에는 아예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며 그대로 시즌 종료. 부상으로 1, 2군을 왔다갔다했던 작년보다도 더 기회를 못 받았다.

그런데 11월 7일 한화 측에서 김경언을 방출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박종훈 단장의 체질 개선을 명목으로 노장 방출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2차 드래프트 및 FA를 위한 보호선수 명단을 짜기 위해 선수단 정리가 추가로 있을 예정이긴 했으나 팬들은 대체로 당황하고 있다.

4. 이후

본인은 현역 생활을 이어갈 의지가 있다고 했다. # 우선 겨울에는 자비를 들여 사이판에서 개인 훈련을 진행했고, 귀국 후에는 김인철 청주고 감독[11]의 도움으로 청주고 야구부와 함께 훈련하며 몸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만 프로야구 리그마이너리그 팀을 알아볼 예정이라고 언급하였다.

2018년 3월 29일 열린 독립리그 개막전에서 저니맨 외인구단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3월 31일에는 대만 팀의 쇼케이스에 참가했다고 한다.

4월 중순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대만리그 및 마이너리그와 에이전트가 접촉 중이며 겨울까지 안 풀리면 고창성처럼 호주리그 진출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대만프로야구는 투수/타자 몰빵영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2016년의 펠릭스 피에를 끝으로 타자 영입을 하지 않았다. 대만프로야구는 전문 선발 투수가 한 팀에 1명 정도가 끝이고 나머지는 죄다 땜빵선발이라 선발 보강이 한국보다 매우 시급한 상황.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일본인 투수 치넨 코야는 퉁이 라이온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 선수는 독립리그에서만 뛰고 일본프로야구는 밟아본 적도 없는 선수였던 걸 감안하면 김경언이 투수였으면 대만에서 기회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년 뒤인 2019년 로저 버나디나를 포함한 3명의 용병 타자가 대만리그로 가며 3년만에 외국인 타자가 생겼다. 정작 셋 다 중도 퇴출되었지만. 그리고 실제로 대만프로야구 트라이아웃에서 타자라는 이유로 결국 탈락했다.

2018년 5월 18일, 18-19시즌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서 뛸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한국 선수들 위주로 새로 창단되는 질롱 코리아에서 뛴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행을 포기했다고 하며, 질롱 코리아의 최종 선수 명단에도 빠졌다. 아마 어린 아들들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새로 뛸 팀을 구하지 못하였고, 사실상 은퇴했다.

[1] 동갑내기 프로야구선수들이 부산에 많았다. 추신수, 김백만, 정근우(이상 부산고), 이대호, 장민석(이상 경남고), 채태인, 이우민, 차정민(이상 부산상고), 같은 학교에는 김덕윤과 송산, 백승룡이 있었다.[2] 당시 IMF 이후 모기업이 부도나 자금난에 시달리던 해태가 1차 지명자도 아니고 2차 2라운드로 뽑은 선수, 그것도 야수에게 입단 계약금으로만 1억을 안겨준 건 그만큼 김경언에 대한 해태 구단의 기대가 꽤 컸다는 의미다. 1차 지명자 정원은 7,000만원, 2차 1라운드 지명자 김주철은 18,000만원을 받았다.[3] 2루타, 역전 2점 홈런, 3루타.[4] 게다가 단타(!!!)를 못 쳐서 달성하지 못했다.[5] 처음부터 열심히 뛰지 않은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했다면 아마 채태인이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보면 채태인의 등 뒤를 지나갈때 부터 스피드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끝까지 집중을 했다는 증거. 참고로 이 둘은 친한 편이고 김경언은 채태인을 생각해 둘이 만날때 이 수비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6] 선수가 스프링 캠프를 거쳐 몸을 잘 만들어 놓지 못한 경우 풀 시즌을 소화하기에 점점 힘이 부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 따라서 김경언이 시즌 초의 페이스를 이후에도 유지하는 것은 여느 때보다 더욱 어려운 도전이 될 것이다.[7] 장타력은 아쉽지만 4월 9일 기준으로 타율이 0.385다. 이는 해당 시점 당시 중심타선인 김태균, 로사리오 보다도 높다![8] 기대했던 송광민이 4일연속 병살이나 치면서 삽질을 하고 있다.[9] 김경언과 비교해 장민석이 가지는 확실한 비교우위는 주루, 수비 정도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선구, 장타 등 나머지 요소에서 장민석이 워낙에 밀리는지라...[10] 결국 그 장민석도 몇 차례의 본헤드 플레이 끝에 8월 말 서산행 버스를 탔고, 이후 다시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긴 했다.[11] KIA 시절 선수로 같이 뛴 적 있고, 김인철 감독이 한화 프런트로 일하던 시절 같은 팀에 몸담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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