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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자력의학원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國家放射線非常診療센터 '''Korea Institute Of Radiological & Medical Sciences | |
국가 | 대한민국 |
개원 | 2002년 6월 |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원로 75 (공릉동) |
종류 | 종합병원 |
규모 |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1] |
웹사이트 | 한국원자력의학원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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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원자력의학원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National Radiation Emergency Medical Center)1.1.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원로 75 (공릉동)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의학원[2] 산하 방사선 피폭 치료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 기관이다.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이하 방비센터)는 방사선 재난 발생 시 피폭 관련 환자의 응급치료 및 조기 대응을 위하여 2002년 9월 26일 개소했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와 인재로 인한 방사선 사고 및 방사능 테러 발생을 대비하여 사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훈련과 비상진료 교육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여 효율적인 비상진료 체계 구축에 힘쓰고 있다.
방비센터의 주요 업무로는 방사선비상진료교육과 방사능방재 훈련, 방사선비상진료 인프라 구축, 전문 인력 양성은 물론 물리적/생물학적 피폭선량평가 기술 개발과 방사선 건강 영향 평가연구, 피폭치료기술 개발, 대외협력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2. 설립배경
1999년 2월 20일에 발생한 김해 공장 방사선 피폭 사고[3], 9월 30일 일본에서 발생한 도카이촌 방사능 누출사고[4]등을 계기로 방사능 누출에 따른 피폭자 발생시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의료기관의 설립 필요성을 느껴 2002년 6월에 출범한다.1.3. 역대 센터장
임상무(초대 센터장, 2002.6~2005.10) |
최창원(2대 센터장, 2005.10~2008.6) |
박경덕(3대 센터장, 2008.7~2009.8) |
김병일(4대 센터장, 2009.9~2010.5) |
이승숙(5대 센터장, 2010.5~2015.8) |
진영우(6대 센터장, 2015.8~2020.8) |
박선후(7대 센터장, 2020.8~2023.4) |
장원일(8대 센터장, 2023.4~현재) |
1.4. 홍보영상
한국원자력의학원 60주년 기념영상2.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의 역사
2000년 4월 공사를 시작한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는 2002년 9월 연면적 6,612 m²(2,000 평)의 독립건물로 준공되었으며 원자력의학원 체제 전환 직후인 2002년 9월 26일, 원자력의학원 산하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로 개소했다.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는 방사선비상진료 분야 국제 선도 기관으로서 국제기구 및 다양한 해외 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2004년 1월에는 세계보건기구(WHO)-방사선비상 의료 준비 대응 및 지원네트워크(REMPAN, Radiation Emergency Medical
Preparedness and Assistance Network)의 연락기관으로 지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방사선사고 대비와 인명구제 극대화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대응책 마련, 방사능재난과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의 의료대응 분야 사회적 비용부담 감소, 방사선비상진료 분야의 자주적인 방재역량 강화 등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고, 2010년 2월 9일에는 방사선비상진료 사이버교육시스템 레미스(REMIS, Radiation Emergency Medical Information System)를 구축했다.
2016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방사선 피폭 관리 및 선량평가 분야 역량개발센터(CBC, Capacity Building Centre)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부터 WHO 방사선비상진료 분야 협력 센터(CC, Collaborating Center)에 지정되어 국제 워크숍을 개최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장을 마련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WHO-CC로 재지정 됐으며, 다양한 전문가 연수 과정을 개최하여 회원국의 방사능 재난 대응 역량 향상에 기여하여 2021년에 IAEA-CBC에 재지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3년 9월에는 서울에서 제17차 WHO-REMPAN(Radiation Emergency Medical Preparedness & Assistance Network) 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WHO의 ‘방사선비상 의료준비대응 및 지원 네트워크(REMPAN)’는 1987년 설립되어 세계 40여 개국의 의료 및 연구기관이 참여해 방사선 비상 관련 응급의료, 혈액학, 화상 및 외상치료 등 전문분야의 의료자문과 생물학적 선량평가 네트워크 운영, 피폭 환자 정보 데이터 관리 등에 대한 협력을 추진하는 네트워크다. 총 20여 개국에서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제17차 WHO-REMPAN 총회는 방사선비상 의료대응에 관한 참가 국가의 역량과 경험을 공유하고 국가 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세계가 함께 나아가는 국제적인 협력과 지식 공유의 장으로써 의미를 더했다. 이로써 총회를 개최한 한국원자력의학원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산하에는 비상진료부, 방사선량평가부, 비상진료정책부가 운영되고 있다.
3.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역사(방사선의학연구소-원자력병원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한국원자력의학원 문서 참고하십시오.4. 한국원자력의학원 60년
4.1. 역사 요약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부터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까지(1963~2001)한국원자력의학원의 역사는 우리나라 원자력 역사와 궤를 같이 하며 동시에 근대 과학기술 발전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뿌리가 되는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시작은 원자력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협력 협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 발표 이후 미국은 UN 산하 기구인 IAEA 설치를 주도했고, 우리나라는1957년 6월 17일 IAEA 협약에 관한 국회 비준을 거쳐 같은 해 8월 8일 IAEA 정식 회원국 지위를 획득했다. IAEA는 후진국의 원자력 연구를 지원했으며 우리나라에 해마다 1만 5천~3만 달러 규모의 연구비를 지급했다.
정부는 원자력 연구 개발 및 이용을 위한 첫 원자력 행정기구로서 원자력과를 신설했고 1958년 10월 대통령령 제1394호에 의해 원자력원 직제가 공포됐다. 이후 원자력원은 관련 산하 기구를 신설하며 본격적인 원자력 시대를 열어나갔다. 1959년 2월에 설립한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 연구·개발을 통한 학술의 진보와 에너지 확보 및 원자력 이용의 촉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연구기관이었다.
1963년 12월 17일 개소한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는 방사선의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국내 유일기관으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암 전문병원이다. 1967년에 과학기술처가 신설되면서 원자력원은 폐지되고 과학기술처 산하 원자력청으로 개청되었고 1968년 2월에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을 개원했다. 전국의 암 환자들은 다소 이름이 긴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을 단박에 떠올리지 못하고 그 대신 “서울 광화문에 가면 암을 원자력으로 고치는 병원이 있다”라는 입소문이 널리 퍼졌다.
1973년 2월 ‘한국원자력연구소 법안’이 의결되어 원자력청은 사라지고,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재단법인 형태로 새롭게 태어났다. 방사선의학연구소는 ‘재단법인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으로 민영화됐다.
1980년 5·17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연구효율 극대화’라는 명분 아래 각 연구기관 통폐합을 추진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흡수 통합시킨 후 1980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변경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이 됐다.
원자력병원은 1982년 10월 종합병원 인가를 획득하고,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1984년 공릉동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병원을 신축 이전했다. 원자력병원은 병원신축자금과 최첨단 의료기기 구입 자금 약 700만 달러를 미국, 스웨덴과의 차관계약을 통해 조달했는데, 신축병원에는 국내 최초 원형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Cyclotron)’과 입자가속기의 일종인 ‘마이크로트론(Microtron)’ 등 국내 최초의 특수 장비가 설치됐다. 1986년 11월 국내 최초로 원자력병원이 사이클로트론 및 중성자선 암 치료기와 마이크로트론 방사선 치료기를 정식으로 가동하여 당시 말기 암환자의 암을 치료율을 끌어올렸다. 암에 걸리면 사망선고와 다름없던 시절 암 환자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1988년 1월 제6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한국에너지연구소 원자력병원’은 ‘한국에너지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으로 승격 조정됐다가 1990년에 다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으로 환원됐다. 1989년 7월 원자력병원 보건사회부로부터 ‘500병상 이상 대형 종합병원’의 기준에 부합하는 ‘3차 의료기관’ 지정을 받았지만 환자 수 급감과 함께 재정악화를 심하게 겪었다. 재정악화는 공릉동병원 신축으로 차입한 부채 금액과 전 국민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으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탓도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의료시장은 의료시장 개방화와 대기업의 병원사업 진출로 요약할 수 있다. 원자력병원은 급변하는 대외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명실상부한 ‘종합학술병원’이 되기 위한 장기 비전을 재정립하고 중점 전략프로그램 등을 개발했다. 연구의 활성화, 진료의 특성화, 기관경영의 효율화라는 3대 중점 추진과제를 설정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3일 IMF 외환위기로 환자 수가 급감하자 병상 일부를 폐쇄하고 인력 구조조정 및 직원 연봉 감축 등 일련의 경영혁신을 단행했다. 원자력병원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위기가 환자의 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신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다.
1997년에 최첨단 장비인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PET, Positron Emission Tomography)’ 장치를 도입 가동하였다. PET 가동으로 각종 암 진료와 핵의학 연구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갑상선암 검사에 필수적인 장비로 자리 잡았다. 2001년 3월 PET용 방사성의약품과 생산 장비를 국산화한 데 이어 ‘13 MeV급 가속기’를 개발하여, PET 인체 영상촬영에 반드시 필요한 방사성동위원소를 자체생산하게 됐다. 이로써 외국산 장비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입자가속기를 설치·운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내에서 PET를 이용한 암 진단 비용을 훨씬 저렴하게 하는 길을 열었다. 2002년 7월에는 국내 최초 최첨단 방사선수술 장비인 사이버나이프(CyberKnife)를 도입하고 사이버나이프 센터를 개소하여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됐다.
부설 원자력의학원에서 독립법인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시대(2002~)
2001년에 정부의 제2차 원자력진흥종합계획(2002~2006)이 확정됐다. 여기에는 “의료 분야에서 원자력 이용을 확대하여 국민보건에 기여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원자력병원은 과학기술부 장관으로부터 정관 변경을 승인받아 2002년 9월 4일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의학원(原子力醫學院, Institute of Radiological & Medical Sciences)’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2년 9월에는 국가적 방사선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콘트롤타워,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를 개소하고, 2002년 11월 29일에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의학원’이 공식 출범했다.
2006년 12월 26일 정부는 ‘첨단 방사선의학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흥한다’는 내용이 담긴 ‘방사선 및 방사성동위원소 이용진흥법’ 중 일부 개정 법률을 공포한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2000년대에 들어와 과학기술·경제 발전에 따른 삶의 질 향상과 복지증진, 인구의 고령화 추세 등 국내 환경변화에 따라 방사선의학 관련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방사능 재난을 대비하는 공공의료기관으로서 국가적 역할이 확대되는 등 원자력의학원의 역할과 기능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원자력의학원을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기관으로 운영하기에는 고유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에 어려운 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회에 상정된 ‘방사선 및 방사성동위원소 이용 진흥법’중 일부 법률 개정안에는 원자력의학원을 ‘법적으로 독립된 위상을 갖는 방사선의학 진흥 전문기관’으로 확대 및 개편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에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의학원은 44년이 넘은 오랜 ‘부설’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과학기술부 직속의 독립기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원자력의학원은 2007년 3월 27일 독립법인 한국원자력의학원(韓國原子力醫學院, Korea Institute of Radiological & Medical Sciences)으로 새롭게 출발한 후, ‘방사선의 의학적 이용 및 연구개발 업무와 암 진료, 국가적인 방사선 비상진료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되어 국가 과학기술 발전과 국민 건강증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출범과 함께 방사선의학연구소와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를 사업단으로 격상하여 원자력병원·방사선의학연구소·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3개 사업단으로 변경했다.
2010년 7월 19일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집중되어 있는 동남권역에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분원인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정식 개원했다. 정부 및 지자체, 의학원이 공동으로 설립한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방사선의학 융합기술을 개발해 암 등의 난치성 질환 의료산업 기술화를 달성하는 연구병원 모델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임상연구와 진료·치료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설계했으며, 이에 따라 ‘국내 최초 방사선의학연구병원의 새로운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원자력의학원은 2019년 8월 8일 국내 최초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신개념 치료기술 개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국가RI신약센터(KRICP, Korea Radio Isotope Center for Pharmaceuticals)를 개소했다. 국내 치료용 방사성동위원소 생산과 새로운 치료용 방사성의약품 연구 개발 및 제품화를 촉진할 플랫폼을 구축해 현재의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모습을 갖췄다.
한편 한국원자력의학원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방사선의학을 선도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2016년 9월에는 IAEA 역량개발센터(Capacity Building Center)에 지정됐다. 2016년 5월 IAEA와 공동으로 아시아·중동 지역 전문가 대상 ‘방사선 선량평가 교육 과정’을 개최하고 역시 IAEA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같은 해 8월 29일부터 2주간 중동국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CBC(Capacity Building Center, 역량개발센터) 국제교육과정’을 개최했다. 이 국제교육과정에서는 아랍에미리트·카타르 등 총 7개국 10명의 의료 인력을 대상으로 내·외부 피폭선량평가 및 현장의료대응 등 방사선 비상진료에 관한 경험 및 기술을 전수했으며, 개인 방사능 방호조치 및 각종 장비활용 실습도 진행했다.
또 한국원자력의학원은 2017년 아시아 최초이자 국내 최초로 방사선 비상대비 및 대응분야 ‘WHO 협력센터(Collaborating Centre)’로 지정됐다. 이후 한국원자력의학원은 WHO의 국제적인 방사선 비상진료 관련 가이드라인을 번역하여 전파하고, 국제 워크숍 개최를 통해 새로운 지식 공유 및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등 WHO와 지속적인 협력 활동을 이어갔다.
창립 6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원자력의학은 다변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며 ‘진료 중심의 의료기관’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사회문제와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면서 ‘융합형 의료기관’으로의 혁신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2023년에는 「공공의료 기반 특성화 의료사업 강화」, 「첨단 의료기술 실용화 플랫폼 고도화」, 「방사능 재난 의료 연구·진단기능 강화 및 생활방사선 의료대응 확대」, 「아시아태평양지역 방사선의학 연구거점 도약」이라는 미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4.2. 한국원자력의학원 초기 기관장 소개
윤일선(1896~1987)-제5대 원자력원장(1963.12.17~1967.4.12)
윤일선 박사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근대 의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대학자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병리학을 공부했다.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를 거쳐 1929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수로 부임했다.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의 기틀을 정립하는데 힘썼다. 연구풍토 조성을 위해 중앙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고 교실마다 연구실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당시 병리학교실은 3년간 총 9천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윤일선은 후학양성에 힘쓰는 한편 1930년에 한국인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와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 『조선의보』 창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 암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일선은 1934년에 암 예방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에 나서는 등 매우 이른 시기부터 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관심은 1937년 유럽·미국·아시아 국가의 의과대학과 연구소를 시찰하는 병리학 순례로 이어졌고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윤일선은 세계 최초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 연구실을 방문했다. 중성자 가속 장치 사이클로트론이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렌스 연구실을 방문한지 근 50년이 지나 1986년, 당시 원자력병원장인 된 윤일선의 차남 윤택구가 스웨덴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국내 최초 도입하며 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윤일선은 1943년 토끼의 위에 암종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일본 병리학회에 발표했고, 해방 후에는 암 연구를 본격화했다. 1947~1949년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열린 국제암연구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인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종양의 통계적 조사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 1955년에 발행된 종합시사교양지 『새벽』에 「암과 원자력」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는 원자력을 이용한 암 치료 분야의 국내 최초 기고였다. 1958년 윤일선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대한암학회의 모체인 대한암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아 국내 암 연구의 체계화와 보편화에 힘썼다.
윤일선은 정년퇴임 후 한국원자력의학원 창립기념일인 1963년 12월 17일, 제5대 원자력원 원장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암 전문병원의 실제적인 기관장을 맡았고 이후 1964년과 196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IAEA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원자력의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힘썼다.
안치열(1922~2000)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1963.12.19~1969.2.14)
-제2대 원자력청장(1968.9.10~1970.2.17)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한 안치열 박사는 국내 방사선의학의 대부로 걸음마 단계에 있던 국내 방사선의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치열은 1944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조교를 거쳐 제1육군병원 방사선과장, 미국 레다만 육군병원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56년 서울적십자병원 초대 방사선과장을 거쳐 1957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초대 방사선과 주임교수로 재직했으며, 1963년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학 연구실장을 거쳐 같은 해 12월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기관장으로 취임했다.
방사선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국내 최초로 방사선 치료기인 코발트-60 원격치료기를 도입해 국내 방사선 치료의 서막을 열었으며 갑상선 간질환 검진을 비롯해 외암 조기진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암 병원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안치열은 1971년 초대 경희의료원장, 1986년 대한방사선방어학회 회장, 1986~1991년 아시아 대양주 방사선의학회 학술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 방사선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자리에서 도전과 개척을 이어가던 안치열은 퇴임 후 여생을 의료봉사에 바친다. 음성 꽃동네로 내려가 인곡자애병원을 세우고 평생 수집한 의료서적과 집기를 꽃동네에 기증했다. 5년 동안 인술을 베푼 뒤 1995년에는 가평 꽃동네 노체자애병원 의무원장으로 부임해 나환자들과 함께했다.
이장규(1926~1985)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 2대 소장(1969.2.15~1973.2.17)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2대 원장(1974.2.23~1980.8.24)
이장규 박사는 국내 방사선의학 태동기에 연구소장과 병원장을 두루 역임하며 오늘날 원자력병원이 암 전문 종합병원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5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교실에서 핵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 내과 교수를 역임했다. 1969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한 후 암 발생 현황과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 및 예방에 관한 새로운 방안을 폭넓게 모색했다. 그 연구결과는 우리나라 암 치료의 주요 기반이 됐다.
1974~1980년까지 제2대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장으로 재직하면서 99m Tc-generator 최초 도입과 신형 코발트-60 치료기 신규 도입 등 암 치료에 방사선치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리나라 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국내 혈액학 진단과 연구의 개척자로 1976년 대한암협회 이사장과 대한핵의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편 이장규는 ‘의사 중에서 매우 뛰어난 글솜씨를 가진 문학적인 의사’로도 유명해 수필집을 남겼으며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김진용(1928~1998)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1973.2.18~1974.2.22)
1973년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에 부임한 김진용 박사는 재직기간 동안 암 전문기관으로서 원자력병원의 기능과 조직을 확대하고, 진료 기능을 크게 향상시켜 국내 유일 암 병원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김진용은 서울대학교 방사선과를 전공하고 1967년 방사선의학연구소에 부임해 방사선치료 업무를 담당했다. 항상 출근시간보다 40분 일찍 병원에 나와 하루 200여 명에 이른 환자들을 돌본 것으로 유명하다. 병원장이 된 후에는 특수법인체로 전환하여 자체수입 운영방식을 채택했으며 진료 기능을 크게 향상시킨 결과 당시 내원환자가 매년 30% 증가했다.
김진용은 대한방사선방어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 방사선의학 분야를 개척하는데 힘썼고, 1983년에는 ‘한국에서의 암의 역학적 연구’라는 국책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사업은 1963년 방사선의학연구소 창립 당시부터 1982년까지 원자력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약 3만 명의 암환자를 남녀별, 연령별, 지역별, 생활수준별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으로, 이후 우리나라 암환자 치료의 중요한 지표가 됐다.
김진용이 1967년 방사선치료과 책임의사로 부임한 이후 15년간 진료한 환자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원자력병원에서 방사선치료에 헌신했던 그의 삶은 혁신적 암 치료를 선도한 한국원자력의학원의 표상이었다.
윤택구(1932~2015)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속 원자력병원 제3대 원장(1980.8.25.~1987.12.31)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1988.1.1.~1989.12.31)
윤택구 박사는 한국 최초의 병리학 학자이자 암 연구와 원자력의학의 개척자인 윤일선의 차남으로 부친과 같은 병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 교실에서 수학한 후 수도육군병원 병리시험과 과정을 거쳐 1964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전신인 방사선의학연구소 병리학연구실에 실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80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병원 제3대 원장, 1988년 한국에너지연구소 부설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에 취임했고 1989년까지 의학원의 제5대 기관장으로서 원자력병원 경영안정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윤택구는 취임 이듬해인 1981년 신축병원 공사 과정을 진두지휘했는데 공학적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건설 본부장을 자청하였고 문짝 하나에서 문고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설계하며 병원 현대화에 적극 앞장섰다. 1984년 500병상, 8개 연구실을 갖춘 신축병원의 모든 시설과 연구능력은 어느 대학, 병원에 못지않은 수준에 이르게 됐다. 아울러 1982년 종합병원 지정, 1984년 한국 최초의 ‘사이클로트론’ 도입과 전담부서 신설 등을 통해 많은 국민에게 암 치료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병원장으로서 뛰어난 행정력을 펼친 것 못지않게 학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연구에도 전념했다. 특히 고려인삼 및 홍삼의 암 예방 효능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1980년대 인삼이 암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상을 받았으며, 1995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의약학부 종신회원이 됐다.
5. 주요 연표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 주요 연표 바로보기[1] 2002년 개원당시 기준[2]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이다.[3] 가장 심하게 피폭된 손 부분의 피폭량이 5500렘(55SV)나 되었으나 전신피폭 2SV 미만이라는 천운을 발휘했다. 다행히 수차례 피부이식을 통해 치료는 성공했다.[4] 이때 일본은 FM 그 자체를 보여줬다. 비록 인재로 인해 발생한 사고였지만, 피폭자의 후송, 조사 그리고 치료에 대해 교과서 처럼 신속히 이뤄졌다. 특히 피폭자 치료를 위해 반나절이 채 안걸린 시간으로 최고의 의료진과 전문가들이 모인 긴급피폭네트워크를 구성하였으며 이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필사적으로 치료를 시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진전도 있었지만 큰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는데 이를 토대로 수 많은 논문들이 나왔다. 이는 다른 국가들의 모범이 됐으며, 대응 모델의 기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