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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9 08:16:00

고대 그리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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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흑시대2. 그리스 고졸기
2.1. 아테네의 등장2.2. 스파르타의 부상2.3. 식민도시 건립
3. 그리스 고전기
3.1. 페르시아 전쟁3.2. 마라톤 전투와 그리스의 승리3.3. 2차 그리스 침공
4. 아테네 제국5. 펠로폰네소스 전쟁6. 스파르타와 테베의 패권기7. 마케도니아의 점령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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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흑시대

그리스 지방에서 처음 생겨난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흥한 미노아 문명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을 지은 걸로도 유명한 미노아 문명은 대략 기원전 3000년 경에 생겨났으며 이후 몇 백여년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1400년 경에는 새롭게 떠오른 신흥 강자 미케네가 크레타를 침략해 함락하면서 미노아 문명을 뒤로 하고 미케네 문명이 새롭게 생겨난다. 이 미케네 문명 역시 미노아 문명의 유산을 받아들여 찬란한 초기 그리스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미케네 문명도 기원전 1100년 경에 몰락한다. 이를 '청동기 시대의 붕괴'라고 부르는데, 단순히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히타이트, 이집트신왕국 등이 한꺼번에 싸그리 무너졌기 때문. 붕괴의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잡다한 해적 집단 바다 민족들의 침략과 기후변화, 가뭄 등으로 인해 문명 자체가 몰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100년 경 몰락한 이후 그리스 지방에는 약 300여 년간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이때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유물들은 하나같이 예전에 비해서 조잡하기 짝이 없으며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번성하던 미케네 문자들이 이때 모두 소실됐고, 한때는 왕성하던 지중해권 국가들 사이의 해상 무역도 모두 끊어졌다. 이 시기의 그리스인들은 예전처럼 석조 궁전을 지을 경제력, 사회 조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으며 뭐 하나 제대로 건설할 역량도 없었던 걸로 추정된다. 아예 사회 자체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단편화되고 잘게 쪼개진 공동체 수준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모양이었으니 당연히 문화도 거꾸로 쇠퇴했는데, 그리스 문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도자기만 봐도 이전에 비해 그 디자인이나 문양장식이 확연히 투박해졌고 훨씬 단순하게 퇴행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이 암흑 시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조금씩 보인다. 옛날에는 아예 그리스 본토가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선진적인 중동 지방과 완전히 연이 단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그리스 본토에서 암흑 시대에도 키프로스와 해상 무역을 진행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 아예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래봤자 암흑기는 암흑기였고, 여전히 절대다수의 학자들이 이 시기가 그리스 최악의 시기였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많아봤자 2~300여 명 정도 밖에 안되는 사이즈였고 경제적으로도 타 지방에 비해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산간 지방이 많고 척박한 땅이 많은 그리스 본토 특성상 농경이 쉽지 않았던 터라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정말 초라하게 살았다. 암흑 시대는 기원전 1050년 경부터 기원전 750년 경까지 쭉 이어졌다.

2. 그리스 고졸기

300여 년 동안 지속된 암흑 시대는 기원전 800여 년 경 즈음에 마침내 막을 내린다. 이후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480년 아케메네스 왕조가 제2차 그리스 침공을 단행하기까지 약 320년에 달하는 기간을 '그리스 고졸기'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아르카익(Archaic)이라고도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서투르고 투박한 옛 시대'라는 뜻을 담은 '고졸기(古拙期)'라고 부른다. 훗날 그리스 예술의 정점을 찍는 고전기나 헬레니즘 시대에 비하면 훨씬 투박하지만 암흑 시대의 장막에서 막 벗어나 그리스 문명의 기초를 쌓아나가는 시대였다는 뜻이다.

2.1. 아테네의 등장

그리스 고졸기에는 폴리스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유명한 아테네스파르타 등의 대형 도시들이 형성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가장 먼저 제일 유명한 아테네를 살펴보자면 공화정으로 유명한 아테네 역시 처음에는 왕정으로 출발했다. 가장 유명한 아테네 왕이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테네는 왕정을 폐지하고 귀족정을 채택하게 된다. 이후 아테네는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과두정을 기반으로 아티카 일대의 수많은 도시들에 영향력을 끼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테네 역시 문제점은 있었으니, 왕이 아니라 귀족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치의 특성상 권력에서 배제된 이들이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아티카 지방에서 경제양극화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사회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솔론이다.
파일:Ignoto,_c.d._solone,_replica_del_90_dc_ca_da_orig._greco_del_110_ac._ca,_6143.jpg파일: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jpg파일:Cleisthenes.jpg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솔론은 각종 개혁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아테네 사회 전체를 뜯어고쳤다. 가장 대표적인 그의 개혁 정책이 '세이사크테이아'라고 불렸던 부채탕감 정책이다. 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존재하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인신을 담보로 한 대출을 금지했다. 당시 아테네에서 인신담보대출이 횡행하며 시민들이 빈민이나 노예로 추락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이후 올리브를 포함한 일부 농산물들을 집중 생산하며 이를 수출한 돈으로 부족한 식량을 사들이는 등 아테네의 경제 구조 역시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았고, 민회의 기능을 크게 끌어올리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사회개혁들을 진행하며 무너지기 직전의 아테네 사회를 지속가능한 안정적인 도시국가로 바꾸어놓는데 성공한다.[2] 다만 솔론 본인은 개혁을 마친 뒤 10년 동안 해외를 순방했는데, 10년만에 돌아간 아테네에는 그 동안 세력을 키우고 있던 유력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있었고, 결국 그에게 밀려나 국외를 떠돌다 키프로스에서 조용히 사망했다고 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사람을 대하고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아테네인들 상당수가 그를 진심으로 따랐고 그덕에 힘입어 아테네의 권력을 장악해 솔론을 꺾고 1인 독재나 다름없는 참주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친농적인 정책을 펼치며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절치부심하던 귀족파의 농간으로 결국 쫒겨났다. 하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쫒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파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대귀족 출신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가클레스와의 관계가 다시 벌어지자 또다시 아테네에서 쫒겨나 10년만에 군대를 몰고 복귀했고 이때 이후로 진정한 의미의 참주가 되어 아테네를 통치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했으며 올림픽과 디오니소스 제전 등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결속을 다졌다. 뿐만 아니라 공공건물 축조와 사업으로 대중들을 현혹했고, 그 덕에 아들 히피아스에까지 참주직을 물려줄 수 있었다.

히피아스는 제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호부견자의 전형이었다. 원래는 아우 히파르코스와 함께 통치했지만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홀로 아테네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동생의 죽음 이후로 상당히 폭압적인 통치를 했던 바람에 아테네인들의 미움을 사고야 말았다. 히피아스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고 결국 알크마이온 가문이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를 끌어들이면서 기원전 510년 참주직에서 쫒겨났다. 이렇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기껏 세워놓은 참주정은 2대 만에 몰락하고 다시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히피아스의 추방에 앞장섰던 인물은 크게 이사고라스와 클레이스테네스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사고라스가 정권을 잡았지만[3] 그의 정치는 보수 반동 정치에 가까웠기에 시민들의 지지를 잃어 바로 쫒겨났고,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은 클레이스테네스가 명실상부한 아테네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클레이스테네스 역시 굉장히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부족사회의 면모가 남아있던 아테네의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해안, 도시, 내륙 3개의 지역에 중간행정구역인 트리튀스를 각각 10기씩 설치했다. 이 트리튀스는 데모스들로 구성을 시킨다. 그리고 해안, 도시, 내륙의 트리튀스들을 하나로 묶어 1개의 행정부족을 만들어 총 10개의 행정부족 체제를 꾸렸다. 그래서 기존의 4개 혈연부족에서 100명씩 뽑아서 선출했던 400인회를 대신해 각 행정부족에서 50명씩 선발하는 500인회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서 기존 부족사회의 영향이 훨씬 옅어졌고, 씨족을 기반으로 하던 귀족들의 영향도 확연히 줄어드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 폴리스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중장보병들을 꾸릴 때도 새롭게 구성된 행정구역들을 기준으로 뽑았기 때문에 군사력 역시 증대되는 부가효과를 누렸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행정개혁과 참정권 확대를 통해 세계 최초로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기에 이르는 데까지 성공한다.[4] 다만 그 유명한 도편추방제의 경우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했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데, 도편추방제가 이 시점에 시행된 것만큼은 확실하다.

2.2. 스파르타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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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가 무역과 예술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등 상대적으로 유연한 분위기였던 반면 스파르타는 완전히 그 대척점에 서있는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타라는 도시 자체는 약 기원전 1000년 경 옛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켰던 정복민족 도리아인들이 세운 도시였다.[5] 무력을 숭상하는 민족이 세웠던 도시였던만큼 스파르타는 그리스 문명권 사이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군사력과 일신의 무력을 숭배해다시피했다. 또한 스파르타는 2개의 마을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도시였는데, 이때문에 왕을 2명 선출한다는 독특한 풍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바로 곁에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발판으로 삼아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기원전 8세기와 7세기 경에 스파르타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정치구조가 흔들리자 스파르타도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쿠르고스다.[6]

아테네에 입법자 솔론과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있다면 스파르타에는 리쿠르고스가 있다.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기에 거의 스파르타 제도의 아버지라 불릴만한데, 가장 대표적으로 7세부터의 어린 소년들을 데려다가 병사로 자라나게 만든 제도를 도입한 인물도 이 리쿠르고스다.[7] 이를 포함해 그가 만들어놓은 사회제도를 통틀어 '리쿠르고스의 헌법'이라고 부르는데, 헌법의 주요 내용은 60세 이상의 장로 28명으로 구성된 장로회의 '게루시아'의 설치,[8] 철저한 토지개혁과 전 시민의 절대적인 평등화[9] 등이 있었다. 특히 리쿠르고스는 금화와 은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오직 철로 만든 철화만을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금과 은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철화는 식초에 담가 녹슬게 만들어 귀금속의 가치를 아예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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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고스의 석상. 현대 스파르타 유적의 모습.[10]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택의 크기와 형태에 제한을 두어 모든 시민들이 동일한 주거 수준을 갖게 했고 가구나 의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공동식당 제도인 '시시티아(τὰ συσσίτια)'를 만들어 모든 남성 시민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단결을 다지도록 만들었으며 시민들에게 교육의 의무를 부과하면서 스파르타인이라면 모두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라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말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에서만큼은 완벽한 수준의 평등을 추구했던 셈. 심지어 그 여성인권이 낮았던 고대 세계에서 여성 역시 평등해야한다고 여겨 상속권과 재산분배권 등을 남녀에게 철저히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기도 했다. 또한 강한 여성이 강한 전사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11] 여성들 역시 남자들과 똑같이 창던지기, 원반날리기, 달리기 등 혹독한 수련을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소년들과 알몸으로 축제에 참석하기도 하면서 소년들의 육체능력을 평가하기도 했다고. 참고로 아테네를 포함한 나머지 그리스인들은 이같은 풍습을 야만스럽게 봤다.

이렇게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의 완벽한 평등을 추구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파르타의 평등'은 오직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당시 스파르타는 크게 3계급으로 나눠졌는데, 1계급의 시민권자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es), 2계급의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Perioeci), 3계급의 노예 헤일로타이(Helots)였다. 위에서 말한 그 의무교육을 받고 진짜 사람으로 대접받았던 건 오직 1계급 스파르티아타이만 가능했다. 2계급 페리오이코이의 경우 상업 등에 종사했고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는 있었다만 참정권은 없었다. 정말 최악이었던 건 밑바닥 헤일로타이들이었다. 이들은 예전에 스파르타에 복속되어 정복당한 폴리스 메세니아와 라코니아의 시민들이었는데, 이들은 사람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이들에겐 개가죽으로 생긴 우습게 생긴 모자를 씌웠고 심심하면 쳐들어가 죽여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노예였기에 하루 종일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목이 날라갔다. 심지어 스파르타 소년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과업들 중 하나가 헤일로타이 1명의 목을 잘라오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스파르타 시민들이 헤일로타이를 무시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제1계급은 전체 사회의 5~10% 밖에 안됐다. 그리고 페리오이코이가 약 30%였고 나머지 60% 넘는 인구는 모조리 헤일로타이였다. 당연히 인구의 60%가 넘는 인원들을 이렇게 대놓고 억눌렀으니 사회가 태생적으로 불안한 것은 당연지사. 헤일로타이들 역시 수 차례 스파르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비참한 생활을 하며 약해진 헤일로타이들이 먹고자고 싸우는 것밖에 안하는 스파르타의 인간병기들을 이기는 건 무리였기에 매번 좌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회구조가 너무나도 불안정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스파르타는 싸우면 싸울수록 국력이 약해졌다. 이후 헤일로타이의 폴리스들 중 하나인 메세니아가 독립해나가자 스파르타는 그 국력이 이전의 반절 수준으로 깎여나갔으며 다시는 그 국력을 되찾지 못했다.[12] 지나치게 노예들에게 의지했던 기형적인 국가의 한계였던 것이다.

2.3. 식민도시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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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기 그리스인들의 영향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약 100여 년간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이며 이와 함께 지중해, 흑해 해안가 곳곳에 식민도시 건설에도 열을 올렸다. 다만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리스인들답게 새롭게 식민도시를 세웠다고 해도 그리스 본토에 충성을 바치거나 종속된다는 개념은 아니었고, 아예 독자적인 하나의 도시가 새로 세워진다는 느낌이 강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영구적인 정착촌인 식민도시였고, 나머지 하나는 '엠포리아'라고 해서 정착도시라기보단 무역소에 더 가까운 개념이었다. 엠포리아의 경우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다수 모이면서 활발하게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식민화한 지역이 바로 시칠리아 섬이었다. 이후 시칠리아 전역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들이 들어섰고, 그 중심지는 시라쿠사였다.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까지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기원전 7세기 경에는 더 멀리 뻗어나가면서 심지어 프랑스마르세유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흑해의 경우 지중해 식민도시들에 비해서 덜 유명한 면이 있는데 오히려 이쪽이 더 무역이나 식민활동은 더욱 왕성했다. 흑해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주로 목재나 가죽 등을 수출했고 대신 그리스 본토로부터 올리브나 농산물들을 수입하면서 상부상조하면서 먹고살았다. 워낙에 흑해 진출을 활발하게 해서 거의 흑해 연안은 대부분 그리스인들의 영향권이었을 정도었다고 한다. 또한 흑해를 포함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해안 지방에도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 식민도시들은 아나톨리아의 비옥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나중에는 심지어 그리스 본토보다도 더 부유해졌다.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크게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일대, 그리고 흑해 해안가 일대, 그리고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일대의 이오니아 지방으로 나뉘어졌다. 특히 이 밀레투스의 경우 비옥한 농토와 상당한 인구를 토대로 본토의 웬만한 대도시들마저 능가하는 생산력을 드러내면서 그리스 세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의 영광을 누렸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등 걸출한 인물들이 여기서 쏟아져나왔고, 사실상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은 오히려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 서부 아나톨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에서 발흥했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다. 다만 이 그리스 자유도시들은 기원전 6세기 경에 초강대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아 페르시아 아래로 복속당했다. 이후 이들은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게 후일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3. 그리스 고전기

3.1. 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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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리스에서 한창 아테네스파르타를 비롯해 수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이 등장해 번창하고 있을 때쯤,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압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아 군대에게 굴복한 도시들이었는데, 페르시아가 후원하는 독재자들이 폭정을 휘두르자 이에 반감을 품고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본국이나 다름없던 아테네와 에리트레아가 이 반란을 지원해주면서 심지어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총독부가 위치하던 사르디스까지 불태우면서 반란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아테네는 심지어 30척의 함대를 파견하면서까지 이들의 반란을 도왔지만 결국 기원전 494년 라데 전투에서 이오니아 연합군이 페르시아에게 대패하며 반란은 무위로 돌아갔다. 허나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를 계기로 그리스를 고깝게 보기 시작했고, 결국 기원전 492년 시험삼아 양자 마르도니우스를 파견해 그리스를 정복하려 시도했지만 폭풍이 심하게 불면서 실패했다.[13]

그리스의 힘을 시험하려 보낸 마르도니우스가 대패하고 돌아오자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도시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다. 그는 그리스에 사절을 파견해 '흙과 물'을 공물로 바치라 명령했다. 당시 페르시아에선 흙과 물을 바치는 것이 곧 복속의 의미였기 때문. 거의 모든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겁을 먹고 굴복했지만 오직 아테네스파르타만은 예외였다. 아테네는 민주정의 근본답게 페르시아 사절을 재판에 세운 후 처형해버렸고 스파르타는 아예 우물 속에 사절을 처넣었다. 당연히 다리우스 1세는 격분했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쓸어버리기 위해서 대군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허나 당시 그리스 측은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전제군주정이어서 잡음이 없던 페르시아와 달리 그리스는 여러 도시들로 권력이 쪼개져 있었을 뿐더러 스파르타에서 내분이 일어나 아테네를 도와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테네는 홀로 페르시아의 분노를 감당해야할 처지에 놓인다.[14]

3.2. 마라톤 전투와 그리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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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의 상상 기록화.

기원전 490년, 이전 마르도니우스의 패배로 속에서 칼을 갈던 다리우스는 제대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손봐주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군사령관은 각각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맡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 함대가 거느린 삼단노선 트리에레스의 수만 무려 6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수는 쓰지 않았지만 후대 플루타르크는 30만 명, 플라톤은 50만 명까지도 추정했다. 물론 현대 학계에서는 과장으로 보고 실제로는 대략 2만 5천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지만 어쨌든 몇 천명만 됐어도 상당한 군사력이었던 고대 세계에서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이 엄청난 대군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페르시아 군사력의 핵심이던 기병은 대략 1,000여 명에서 3,000여 명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이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혼성 군대라고 썼다. 온갖 지방들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왔으니 군장은 물론이요 군복도 통일되지 않았다고.

페르시아 대군은 일단 수도 수사에 모인 다음 동진해 킬리키아 해안가로 향했다. 킬리키아에서 출항한 페르시아 군대는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 섬 등을 거치며 그 곳의 그리스계 주민들을 노예로 삼으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또한 그리스인들의 성지였던 델로스 섬에도 들러 아폴로 신전에 300 달란트의 향유를 태워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스 본토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의 첫 목적지는 아테네와 함께 최대 적국들 중 하나이던 에레트리아였다. 에레트리아는 급작스런 대군에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제대로 상륙 저지도 하지 못한 채 공성을 당했고, 결국 몇 달 후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면서 맥없이 함락당했다. 에레트리아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대는 신전과 도시를 약탈한 다음 도시를 깔끔하게 불태웠다. 에레트리아가 떨어지자 이제 페르시아 군대의 남은 목표는 바로 아테네였다.

에레트리아 약탈을 마친 페르시아 함대는 남쪽 아티카 해변으로 내려가 아테네에서 약 25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15] 아테네는 이들을 막기 위해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보내[16]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도 카르네이아 제전과 반란 진압으로 사정이 바빠 도와줄 수 없었다. 결국 아테네는 인근 도시 플라타이아이의 도움만을 받아 페르시아 대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결국 기원전 490년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서 대격돌한다. 그리스군은 막강한 팔랑크스 전술을 이용해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군대의 우익을 돌파하며 승기를 잡았고, 페르시아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해 함대로 돌아갔다. 페르시아군이 함선을 타고 돌아가 아테네 본토를 때릴 것을 우려한 그리스군은 군대 전체가 3시간 만에 30km를 주파해 아테네로 돌아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라톤의 시작은 아마 이 일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와 이집트에서의 반란이 겹치자 군대를 철수했고, 이렇게 1차 그리스 침공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17]

3.3. 2차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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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전해들은 다리우스 1세는 이번에는 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어 그리스를 치기로 결심, 3년 동안 대함대를 준비시킨다. 하지만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기원전 486년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18] 이 소식을 전해들은 늙은 다리우스 1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그리스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다. 결국 고령의 황제는 건강이 급히 악화되더니 기원전 486년 10월 64세를 일기로 그대로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한다. 아버지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에서의 패배를 잊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그리스에 이를 갈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지난 1차 침공의 패배가 그리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정말 국력을 총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할 준비에 들어간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무려 4년 동안이나 그리스를 침략할 준비를 하는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46개국에서 군대를 끌어모았다고. 게다가 이번에는 황제 본인이 직접 그리스까지 친정하기로 결정, 기원전 480년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는 헬레스폰토스 일대에 배들을 연결해 만든 2개의 거대한 배다리를 만들어 유럽으로 넘어갔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2차 침공에 동원한 페르시아 군대의 수에 대해선 논쟁이 많다. 헤로도토스는 수륙 500만의 대군이라고 썼지만 당연히 과장이고 페르시아 역사가 크테시아스는 80만이라고 썼다. 현대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제 승리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거품이 지나치게 끼는 바람에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가 부풀려졌다고 보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만 명을 넘기 힐들고 대략 18만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다. 그래도 이게 2,500년 전의 전쟁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제국 페르시아로서도 정말 바닥부터 갈아넣은 엄청난 규모의 대군이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가장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를 상세하게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 함대가 무려 트리에레스 1,200여 척, 수송선과 보급선 3천 척 등으로 꾸려져있었다고 썼다. 다민족 제국답게 페르시아 함대 역시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를 이루는 민족은 당시 해상 무역을 휘어잡던 페니키아였다. 1,200여 척들 가운데 4분의 1인 300여 척이 페니키아인들의 배였고, 200여 척은 부유한 이집트, 150여 척이 섬나라 키프로스 등지에서 차출되었다.

페르시아가 4년 동안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당연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리스에서도 페르시아 침공을 막을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막기 위해서는 막강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수많은 트리에레스들을 새로 건조했고 강력한 해군 육성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아테네 홀로의 힘으로는 당연히 페르시아를 막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이번에는 칼을 갈고 진심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를 외면했다. 700여 개가 넘는 도시들 가운데 아테네와 함께한 것은 스파르타를 포함한 70여 개의 도시들 밖에 없었다.[19] 나머지 600여 개의 도시들은 모두 중립, 아니면 친페르시아적 성향을 드러내며 전세를 관망하기만 했다. 특히 그리스 중부의 최강자 테베가 동맹에서 이탈한 게 뼈아팠다. 어쨌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렇게 그리스 동맹군을 결성해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리스 동맹군은 기원전 490년 봄에 군사 회의를 열었다. 맨 처음에는 테살리아 지방의 좁은 템페 계곡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막기로 결정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1만의 그리스 동맹군이 이 결정에 따라 템페 계곡에 가서 진을 쳤지만 알렉산드로스 1세가 템페 계곡이 쉽게 우회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기겁한 그리스 동맹군은 템페 계곡을 버리고 빠져나왔다. 템페 계곡을 버린다는 것은 템페 계곡 인근의 테살리아 도시들을 모조리 버린다는 뜻이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두 번째로 결정된 항전지가 바로 테르모필레 계곡이었다. 워낙에 계곡이 좁았던지라 그 많은 페르시아 대군도 물량으로 밀어붙이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중무장한 그리스 중보병이 경무장한 페르시아군보다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한편 페르시아 함대가 테르모필레를 우회할 수도 있으므로 이들은 아르테미시움 해협 일대에서 차단하기로 결정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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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전투[20] 페르시아 군대의 아테네 함락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올림포스 산 근처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을 무렵 스파르타는 올림픽과 카르네이아 제전이 동시에 열리는 시점이었다. 당시 스파르타인들은 올림픽과 카르네이아 제전에만큼은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는 휴전 기간으로 삼았는데, 이때는 전투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그대로 망할 판이라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가 3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21] 테르모필레로 향했고, 나머지 연합군들과 합류해 1만 명의 군대를 구성해 계곡에서도 가장 좁은 곳에 진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다. 그리스 동맹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몇 배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이틀 동안 붙잡아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배신을 때리고 페르시아에게 우회로를 알려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페르시아가 우회로를 따라 진격해오자 모든게 끝났음을 직감한 스파르타군은 테스피아군 700명, 테베군 400명과 함께 남아 결사항전하며 다른 그리스 동맹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줬다. 이 결사항전에서 레오니다스 1세를 포함한 스파르타군 전원이 사망했고[22] 이를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부른다.[23]

한편 페르시아 함대를 막던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함대 역시 페르시아 함대의 맹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동맹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더이상 아르테미시움에서 버틸 이유가 없었던 그리스군은 즉각 철수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으로 보이오티아 지방이 모조리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갔고, 테스피아이와 플라타이아이가 약탈당해 불탔다. 물밀듯이 들어온 페르시아 군대는 마침내 기원전 480년 9월에 아테네까지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군은 파르테논 신전을 불태우고 시가지를 약탈했고, 비록 아테네 시민들은 예전부터 피난가 있었다지만 아테네의 함락은 병사들의 사기로 보나 전술상으로 보나 여러모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다만 아테네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속도 별로 편치 못했다. 지나치게 그리스 원정이 시간을 오래 끌자 점차 페르시아 본토의 상황이 우려됐기 때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테르모필레에서 보았듯 진지에서 버티는 그리스군을 상대로는 이기기가 쉽지 않았기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해전을 선택했다. 그는 모든 함대를 끌어모아 펠로폰네소스를 향해 진군했고, 그리스 해군도 이에 맞서 모든 것을 걸고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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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의 상상화. 그리스 군대는 이 해전의 승리로 나중에는 오히려 페르시아를 밀어붙이는 공세를 펼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부러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리스 해군 입장에서는 좁은 살라미스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승산이 컸다.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전함의 대형은 무너지기 시작, 결국에는 서로 부딪히는 지경에 이르렀고 때를 놓치지 않은 그리스 함대가 쐐기모양으로 쳐들어가 페르시아 대열을 반으로 쪼개놓으며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페르시아군은 후퇴하려 들었지만 해군 장교들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결국 그리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가 수몰해버렸다. 한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살라미스 인근의 절벽에서 이 모든 광경을 실시간으로 내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제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함대가 그대로 자멸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던 셈. 이 페르시아 함대의 대패로 끝난 전투를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부른다. 이 해전을 보고 충격받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군대를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긴 채 페르시아로 귀환해버렸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떠나기 직전 마르도니우스에게 정예 병력 일부를 남긴 뒤 그리스 정복을 완료하라 명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그와 함께 소개시킨 것을 보면 마르도니우스에게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던 모양.

한편 살라미스에서 대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들 사이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다. 특히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도시들은 이미 본진이 위협당할 위협을 꺾어버렸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1세도 돌아갔다하니 이제 별로 조급하지 않았다. 반면 아직도 도시가 페르시아에 점령당한 아테네는 생각이 달랐다.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를 지키는 핵심 전력이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도 아테네였기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이제 북상해 페르시아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굳이 펠로폰네소스 밖까지 기어나가 페르시아 군대와 일전을 또 벌일 생각이 없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북상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한편 마르도니우스가 아테네에게 연합군 이탈을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제안하자[24] 아테네는 일단 거절하긴 했지만 일부러 스파르타에게 협상 자체를 공개하며 수틀리면 언제든지 페르시아에 붙어버릴 수도 있다고 은연 중에 협박에 들어간다. 아테네가 협상을 걷어차자 마르도니우스는 2차로 아테네를 싹 불태워버린 다음 다시 회동을 제의했다. 아테네는 이번에마저도 스파르타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페르시아와 평화를 체결할거라 협박하며 끝끝내 스파르타를 전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스 동맹군이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도니우스는 보이오티아로 후퇴해 플라타이아이 인근의 평원에 진을 쳤다. 널찍한 평원 지형이라면 페르시아의 자랑인 막강한 기병대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군을 평원지대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끝까지 평원에 들어오지 않고 고지대를 고수하며 작전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군대를 조금씩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 그리스 동맹군들 사이의 통신선과 보급선을 가로챘고, 그리스 군대가 후퇴하자 절호의 기회로 여겨 전군을 이끌고 그리스 중보병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도 증명됐듯이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군대가 중무장한 그리스 보병을 이기는 역시 무리였다. 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무려 7~12만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쓸려나갔다. 심지어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마저 그리스 병사에게 전사했고, 페르시아 패잔병들은 겨우겨우 도망쳤지만 상당수가 도주 과정에서 그리스군에 사로잡혀 죽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두고 기세가 오른 그리스 동맹군은 페르시아 육군에 이어 해군도 격파한다. 당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패 이후 엄청난 손실을 입고 사모스에 수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스 해군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진군해오자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일전을 벌이기라 힘들거라 예상한 페르시아는 함대를 모조리 미칼레 곶으로 몰아넣고 그 곳에 있던 6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군과 합류했다. 페르시아는 미칼레에 진지를 치고 거대한 목책을 둘러 요새화까지 하며 그리스군을 맞을 만반의 태세에 들어간다. 그러나 정작 미칼레에 도착한 동맹군의 규모가 생각 외로 소수인 것을 확인한 페르시아 사령관들은 잘하면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겠다고 판단, 기껏 세워둔 진지에서 나와 그리스군과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당연히 페르시아의 대패. 페르시아군을 무찌른 그리스는 미칼레에 정박되어있던 페르시아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며 페르시아 해군을 끝장냈다. 이 미칼레 전투로 인해 그리스에 남아있던 페르시아 대군이 모조리 소멸했고 이와 함께 페르시아의 대그리스 영향력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오히려 이때 이후부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4. 아테네 제국

폴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사실이었으나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국으로 군림했고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전 477년,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주도했던 아테네를 맹주 삼아서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국가 연합이었던 델로스 동맹은 실질적으로는 아테네 제국과 다름없었다. 아테네는 동맹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려 소속 국가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고 반 동맹 폴리스에 대한 배척은 향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계기가 된다.

한편 이 시기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기원전 457년에 페리클레스가 집권하면서 황금기를 이룬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의 권한을 강화했고 아레오파구스 회의를 약화시켜 장군 10명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국정을 집중시켰다. 이는 페리클레스 정권 후에는 대중영합주의의 성격을 띄며 그의 사후 아테네를 중우정치로 흐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5. 펠로폰네소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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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파르타와 테베의 패권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을 해산시켰고 패배한 아테네를 동맹시로 종속시켰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수비대의 후원 하에 서른 참주의 과두제를 이뤘으나, 이후 공포정치로 인해 다시 민주정치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민주제는 전과는 달리 중우정치에 가까웠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폴리스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그러던 중 나섰던 페르시아 원정에서 참패를 당했고, 폴리스는 테베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기원전 371년 테베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메세니아를 해방시켰고 기반 세력을 잃어버린 스파르타는 패권을 상실한다. 스파르타를 대신한 테베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기원전 362년,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테베는 무너졌고 폴리스들은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7. 마케도니아의 점령 이후

그리스 폴리스가 분열을 지속하던 와중, 북쪽에서 성장하던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의 뛰어난 지도력을 바탕으로 폴리스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테베와 아테네는 연합을 이루어 마케도니아에 대항했으나 기원전 338년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결국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거의 전부가 코린트 동맹으로 묶여 군사적 자치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왕위에 오르자 테베와 아테네는 다시금 반 마케도니아 세력을 이루었으나 곧바로 격파당했다. 이때 테베는 완전히 몰락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 디아도코이들로부터 시작된 헬레니즘 제국 시기의 그리스 폴리스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만 에게해 서쪽에서는 마케도니아에게, 동쪽에서는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자주 간섭당했다. 여러 폴리스들이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등 연합체를 구성하여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가 로마 공화국에 거듭 패배하며 위축되자 폴리스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졌지만 곧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이 로마의 영향력으로 대체되었다. 아이톨리아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를 도와 마케도니아에게 승리했지만, 로마의 전후처리에 불만을 품고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 편을 들었다가 패배하고 몰락했다.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당했고 기원전 146년에는 로마의 보호령으로 전락한다. 비슷한 시기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에 반발하여 무모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맹주 코린트가 폐허가 되고 동맹도 멸망했다. 이에 따라 폴리스 체제 역시 막을 내렸다.

폴리스 멸망 이후에도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는 로마 제국의 존중을 받았다. 그리스어는 로마 상류층의 이중 언어이자 제국 동부의 공용어였고(동부만 차지한 동로마 제국은 아예 그리스어가 제국 전역의 공용어였다.), 로마 상류층은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두기도 했다. 그와는 별개로 동서 분열 이전 제국의 그리스인들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인들을 두고 조상님들 팔아서 근근히 먹고 산다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아테네인들을 용서하면서 "그대들은 위대한 조상들 덕분에 용서받는구료"라고 살짝 빈정거린 바가 있다.

이렇게 로마 제국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토종 폴리스 시민권 특혜가 없어져서 상업이나 항해, 학문연구에 종사하는 인재들이 죄다 해외로 빠져나간 탓에 본토 그리스인들이 할 수 있는 건 시녀나 유모, 가정교사 정도가 되어 버렸고 그마저도 안되면 관광업밖에 못했다. 특히 스파르타의 유서깊은 전사육성체계인 아고게는 로마인 부자 관광객들의 적선을 유도하는 일종의 서커스 소년단 공연 내지는 차력쇼로 전락할 정도였다. 이런 그리스의 쇠퇴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그리스 문화권인 비잔티움(노바 로마)로 옮겨 동로마 제국의 기틀을 세울 때까지 지속되었다.

[1] 이전까진 바다 민족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휩쓸고 다녀서 지중해권이 싹 무너졌다는 학설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바다 민족이 아무리 강해봤자 그 많은 정주 국가들을 모두 몰락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바다 민족보다는 기후 변화와 가뭄, 기근 등 복합적인 요인이 더 중요했다는 학설이 주류다.[2] 솔론은 아테네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여러 모로 사회의 기틀을 다잡았다는 점에서 '입법자'라는 칭호로 불린다.[3] 클레오메네스 1세는 아테네를 도와 참주 히피아스를 몰아낸 뒤 친스파르타 성향의 이사고라스를 먼저 아테네의 지배자로 앉혀놓았다.[4] 물론 이 당시 시민권은 아테네에 사는 성인 남성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시민 전체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개념 자체만큼은 획기적인 개념이었고 이후 중세 유럽이나 동양보다도 훨씬 일진보한 면이 있었다.[5] 미케네 문명 몰락 이전에도 스파르타 지방에 도시가 있었던 증거는 있지만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거치며 모두 무너졌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스파르타의 시작은 미케네 문명 몰락 후 약 200년이나 지난 기원전 1000년 경이다.[6] 그는 당시 카릴라우스 왕의 삼촌으로 왕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막대한 반발을 꺾고 사회를 개혁할 수 있었다.[7] 이 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목욕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침상을 쓰는 것 역시 금지되어 바닥에서 자는 경우가 흔했다. 1년마다 입고 다닐 망토 하나씩만 주어졌고 서로 허구한날 치고 싸우면서 용맹한 전사로 자라났다.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교육을 시킨 덕에 개개인의 전투력 하나만큼은 그리스 세계 최강이었다고.[8] 이 게루시아를 설치한 덕에 이전보다 훨씬 정치판이 온건해졌다.[9] 부유층의 토지를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때문에 반발이 엄청났지만 밀어붙이는 데 성공하면서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는 거의 절대적으로 평등한 수준에 이른다. 물론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였고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노예들은 국가 소유로 비참하게 살았다.[10] 현대 아테네 유적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 유명한 스파르타의 유적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초에 무력을 숭상하던 스파르타는 많은 건물을 남기지 않아 별볼일없는 돌무더기만 남아있는 탓이 커서 관광객도 별로 없다. 남아있는 유적들마저도 고대 스파르타인들이 세운 게 아니라 로마인들이 훗날 덧붙여 지은 것들이 태반이다. 유적 뒤에 있는 도시는 1830년대에 재건된 스파르타 시로, 여담으로 그리스 내에서 가장 보수 성향이 강한 도시다.[11] 참고로 스파르타에서는 결혼을 신성한 걸로 여겼다. 건강한 전사를 국가에 공급하는 헌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의 경우 체육관 등의 사용이 제한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수치를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12] 특히 이 메세니아는 수 백년에 걸쳐 스파르타에 말도 못할 괴롭힘을 당해왔던터라 정말 그 증오심 하나는 끝내줬다. 그래서 나중에 로마 제국에 나란히 병합되기 전까진 스파르타가 참여하는 그 어떠한 동맹에도 참여치 않는다.[13]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1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복속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참고로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8대 조부다.[14] 아테네는 스파르타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서 페르시아 군대를 먼저 맞아 싸워야하는 형세였다.[15] 옛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의 아이디어였다.[16] 보통 사람들이 이 전령이 마라톤 전투 이후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알리고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고, 탈진해서 죽지도 않았다.[17] 다만 페르시아가 이 전쟁에서 아예 패배하고 손실만 본 건 아니다. 페르시아는 아테네는 아니어도 핵심 적국이던 에레트리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고 영토도 늘렸다. 전쟁 승리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정이 더 오래 살아남는 기틀이 마련된 것은 확실하지만 아예 생각하는 것처럼 페르시아가 전쟁의 패배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18] 주된 이유는 무거운 세금과 수사, 페르세폴리스의 황궁을 짓느라 막대한 인력을 페르시아로 끌어갔기 때문이었다.[19] 이미 스파르타도 페르시아의 적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도시들에게 다시 '물과 흙'을 내놓으라 사절을 보냈는데 고의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겐 사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교적 협상을 할 생각도 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20] 보면 알겠지만 옆이 산과 바다로 꽉 막혀있어서 저 좁은 지형을 돌파하지 못하면 테르모필레를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다. 스파르타 군대가 이 곳을 격전지로 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21] 이건 진짜 말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는 결사대였다. 다시는 살아돌아오지 못할 거라 직감했기 때문에 일부러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남자는 모두 제외했다.[22] 다 죽은건 아니고 3명이 살아남았다. 하나는 전령이었고 하나는 다시 테르모필레로 돌아가 싸우다 죽었고 마지막 하나는 치욕스럽게 살다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죽을 생각으로 뛰쳐나가 싸우다 전사했다.[23] 워낙 유명해서 영화 300(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가 중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