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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12:25

개신교/대한민국/개선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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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선되지 않는 이유3.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개신교의 개선 방안을 담은 문서.

2. 개선되지 않는 이유

일부 정치권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단체까지 나올 정도로 개신교의 인식 개선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본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교단[1]이 워낙 많아 개선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개신교가 보여주는 많은 문제들은 사실 한국 개신교만의 문제만으로 떼어서 보기는 힘든 면이 존재한다. 미국의 백인 보수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개신교로 대표되는 개신교 우파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전부터 영향을 끼쳐오던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과 해방 후 대한민국의 탄생부터가 역사적으로 미국의 영향과 보호를 강하게 받으며 성장해온 만큼, 미국 백인보수복음주의 혹 근본주의[2] 쪽의 개신교가 보여주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의 양상들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혹은 한국 문화에 현지화되어 보여주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리고 이걸 정치병 내지 진영논리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편파적인 서술이라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소위 기독교 좌파라고 불리는 개신교 진보 교계에 대한 비판점들도 항목에 나와있듯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점들은 있으나, 우리가 202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위 개독교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을 형성한 행동들을 어떤 부류의 개신교인들이 행했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개신교인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런 부류다. 이는 대한민국이 역사 정치적으로도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3], 대한민국의 미국의 동맹국으로써의 관계, 북한, 중국 등과의 국제정세적 이해 관계가 변하거나, 교계가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4][5]을 넘어선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성찰을 할 수 있게 되거나, 세대의 교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정이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세대를 거치며 인류 스스로 뭔가 발전하고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부터를 말세나 종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답이 안 보이지만.

다만 한국 개신교가 미국 복음주의 혹 근본주의 개신교보다 자정 가능성이 있을만한 요소들이 있다면, 미국은 기독교(주로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비롯한 유일신계통 종교(유대교, 이슬람)가 정치와 문화의 배경 전반에 걸쳐 넓고 깊게 깔려있는 반면,[6] 한국은 보다 세속적이고 다른 아브라함계통 종교들(가톨릭, 정교회, 유대교, 이슬람 등)의 영향[7]도 적게 받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종교적 논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행할 수도 있을 비상식적인 행위[8]들을 세속사회의 견제와 눈치, 피드백을 더 강력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속적 요소조차 도움이 안 될 이유는 문제를 일으키는 신앙인들은 워낙 기독교(개신교) vs 세상이라는 이분법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속사회의 강한 피드백이 있던 말던 종말론, 박해, 핍박, 순교 같은 내러티브와 공성전 멘탈을 가지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에 뭔가 모순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커다란 인지부조화가 오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와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예로 미국에서는 2016년 대선 때 기독교인으로써의 행실과 거리가 먼 생을 살아온 도널드 트럼프81-85%의 백인복음주의자들[9]이 몰표한 모습을 보며 교회나 신앙을 떠난 복음주의자들의 이야기도 많으며, # 한국에서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같은 참사 중에 같은 개신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자기중심적이거나 카톡에 나돌던 험담, 음모론 및 가짜뉴스 등을 보고 실망하여 가나안성도가 되거나 진보 교단 및 신학 쪽으로 발을 돌리거나 신앙을 떠난 개신교인들의 이야기들도 점점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고 있다. #[10]

그렇게 개신교의 세속사회와의 교류에선 개신교가 세상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기준은 세상이 제시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11] 개신교 내부에서의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기준은 세상이 제시해 줄 수 없다. 문제는 애초에 개신교 내부의 신앙적 기준부터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거나 비현실적인[12] 경우가 많아 스스로도 뭐가 맞는지 잘 모르고 논리와 이성과 알려진 사실들이 잘 조화된 설명도 하지 못하면서[13]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와 무적의 논리로 우겨대는 근거없는 확신에 찬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학과 현실의 목회나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지고 괴리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 자조하는 목회자들이나 미리부터 이런 현실을 자각하고 앞길에 대해 패닉에 빠진 신학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자들이 신학을 긍정하면 신앙의 기본적인 논리(?)의 토대라도 제시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동시에 은근히 신학을 경시하는 풍조도 꽤 팽배한다.[14] 그 태도는 미국 개신교 바이블벨트에서 나타나는 마초이즘적 반지성주의의 모습과도 상당히 흡사하다.

그렇게 신학 경시의 풍조를 가진 기독교 계열들이 있다면, 반면 상대적으로 신학을 더 중요시하는 계열들도 있다.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는 신학을 중요시하는 편에 속해있고, 대부분이 칼뱅주의 신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교단들이 많다. 하지만 칼뱅주의 신학은 많은 신학들의 스케일에서 그 구원론에 상당히 극단적인 축[15]이 있는 비판이 있는 신학이며, 그 추종자들은 대게 앞 뒤가 꽉꽉 막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타협"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게 이들의 개혁을 가로막는 주요 문제다.

일례로 칼뱅주의의 후신인 개혁주의를 좋아하는 개신교인들 중에선 자신들의 신학이 16세기 개혁된 이후의 상태를 유지[16]하는 걸 개혁으로 여기는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팬질이 아닌가 하는 내부인의 자조도 들을 수 있다. 예장고신의 경우 일제시대때 신사참배 거부했던 것에 대한 프라이드를 지금까지도 정체성으로 삼고 있어 예장합동과 함께 다른 교단 목회자 및 신학자들 사이에서 과거의 자부심에 갇혀 앞을 보지 못하는 고지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교단들이기도 하다. 정작 성경은 누가복음 17장 10절[17]에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무언가를 한 것을 자신의 의로 내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런 성향들을 가진 교계의 여집합쯤으로 여겨지는 기독교장로회, 감리회, 구세군, 성공회 같은 사회활동에 적극적이고 비교적 온건 내지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교단들이 영향력을 키우는 법도 생각 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이런 교단들에 대해 소위 정통보수 프라이드를 가진 교단의 목사들은 타협내지 이단이라고 보는 태도가 꽤 흔하고, 평생 이런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골수 신자들 입장에서는 "이럴 거면 뭐하러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거부감 내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 혹은 믿음을 잃거나 배도자가 될 거란 두려움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영향력은 넓혀 나가되, 정작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소위 골수들은 외부인들이 뭘 해서 바뀔거라고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이들은 정체성을 외부의 적을 정의함으로써 내부의 단결 유지를 도모하는 사고방식이 많기에 그걸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처벌 따위로 바뀌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박해 및 순교 내러티브를 자극해 더 큰 저항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늘 그래왔듯 세상사람들의 목소리는 더더욱 듣고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온갖 광신도적인 모습은 이런 정체성 위협의 원인을 종말론적 내러티브와 외부에서 적들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심리의 실체화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세상은 어떡해서든 시간이 지날수록 악해져 스스로 멸망해야만 하는 곳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자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스스로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려는 그 어떤 노력이나 행동[18]에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고 마지막 때를 외쳐대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점점 악해지거나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자가 틀렸거나, 과학이 맞다면 성경이 틀렸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불신이거나, 이들에겐 단순하고 강력한 인지적 종결을 요구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이들은 "사랑의 종교"와 "하나님 사랑"을 빙자한 인류[19] 혐오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20] 여기에 성경의 예수가 말한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이웃사랑의 정의란건 이웃이 원하는 사랑과 상관없이 자의적이며, 이웃에 대한 존중역시 이웃이 원하는 존중과 상관없이 자의적인, 존중이 결여된 단어만 존중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왜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 어떤 존중을 원하는지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아무 문맥에서나 통할 거라고 확신하는 모든 것의 치트키, 절대반지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 못해 국가간의 외교의 일부인 의전에서도 상대 외교관, 인사의 문맥을 고려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결국 "하나님이 XX할 수밖에 없었던 문맥은 하나님이 공의의 창조주 하나님이므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웃의 YY할 수밖에 없었던 문맥은 죄는 어쨋든 죄이기 때문에 존중 받을 필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바른 해석이라고 믿는) 하나님은 항상 진리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신들(미국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이 지키겠다고 난리인 세속적 민주주의적 가치부터가 반성경적인 가치여야 할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부터가 중세유럽을 지나 종교개혁즈음부터 시작된 인문인본주의, 소위 "민주화"로 기우는 세상의 덕을 가장 크게 본 수혜자이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 반면에 동시에 성경의 권위나 하나님의 권위에 기반한 권위주의말고는 타당성도 현실성도 없는 상식을 초월하는 종교적 논리들은 한 민주주의 국가를 "복음화"를 빙자한 신정국가화[21]하는데 쓰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만큼 다른 사람(세상,이웃)의 입장이 어떻던, 어떻게 생각하던, 피드백이 있던없던 전혀 그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없이 밀고나갈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웃들의 말을 듣고 인간적인 마음에 마음이 약해지고 공감하게 되면 세상적인 영, 인본주의의 영 따위에 매혹된다는 둥, 그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신앙적으로 "위험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 골때리는 건 자기들도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하고있는 줄 스스로 직관적으로는 알고는 있는지 교회 수련회나 집회 컨퍼런스 등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굳건한 믿음을 달라며 스스로들 울며불며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들의 안의 마지막 일말의 직관이나 양심조차 "인간적인 생각"이니 인본주의니 하며 성경구절로 덮어 씌워버리고 무작정 돌진만 해대니 개독교로 대표되는 이 모든 사고들이 안날래야 안날 수가 없는 것이다.[22]

이런 맥락에서, 사실 아직까지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최대 문제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들의 많은 것들[23]은 현재의 개신교가 이 문서가 생겨나기까지 개독교란 명사로 대표되는 문제들을 일으켜 온 것들의 원인이나 본질이라고 보기 힘든 것들이 많다. 이중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썩고 곪아 생겨난 것들의 1차 원인 제공을 한 토양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이단, 신천지), 자신이 규정한 외부의 적들과 혼자 오버하고 섀도우 복싱을 하다가 흑화한 경우들도 많다 (음모론, 베리칩, 북한, 창조과학 등). 더구나 상식적으로도 분명히 잘못된 내부의 문제들을 영적인 궤변[24]이나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덮어버리기 일쑤고, 그 문제들을 세상 탓, 일부 이단 탓, 거짓 선지자 탓, 적그리스도 탓으로 돌리며 혼자 허수아비가짜뉴스음모론를 때리며 내부의 단결을 다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소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곳을 만들려다 상식이 기적이 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소통불능을 야기하는 것들의 단적인 예로는 교회와 세상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25]의 세상적인 뜻을 부정하고 더 많이 괴리 될 수록 더 "진짜" 진리를 알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참된 XX가 뭔지 모르고 죄악에 눈이 멀어 있다는 식의 소통 불가 상태를 정체성 삼는 영성(...)문화가 교계 전반에 깊게 깔려있다는 점을 들어 볼 수 있겠다. 더구나 그들이 상식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을 세상에게 돌직구로 지적 받는다 한들 "모든 개신교인들이 그렇진 않다"며 "일반화 하지 말라"는 일부 이단 논리로 떼우거나 꼬리를 자르기 일쑤이지만, 반대로 그들의 언어 문화 속에서 "인간" 혹 "세상"이라는 단어부터가 얼마나 일반화되어서 표현되고 있는지를 교회를 잠깐이라도 다녀봐서 아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자기 변호 및 변증은 위선으로 밖엔 볼 수 없다.[26]

그렇기에 이렇게 자신들끼리도 동의를 못하고 사분오열되며 애매모호하며 자의적이어서 자기들끼리도 반증불가능 한 "영적인" 기준들로 꼬여버리고 자가당착된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개신교적 세계관"에 갇힌 개신교인들에겐 신자 개인의 주관 속 하나님의 뇌피셜이 곧 오피셜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는 물론, 그들과 세상의 소통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쓰는 단어들의 의미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개신교는 여전히 외부에는 "사랑의 종교"라는 타이틀을 앞세우며 전도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사랑의 개념을 기대하고 개신교를 믿었다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그 정의가 뒤틀려버려 광신도로 흑화해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27]

3. 관련 문서



[1]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 보수 성향 장로회 교단, 순복음교회, 침례회[2] 근본주의/기독교/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그리고 몰락 참고[3] 목사들이 미국으로 신학 목회 유학가는 일이 얼마나 많고, 미주 한인 교포 사회에서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4] 일례로 서북청년단 같은 월남 개신교인들의 후예들을 비롯한 반공, 혹 반(범)좌파적 성향이 짙은 개신교인들에게서 이런 막연한 동경에 취해있는 경우가 많다. 예로 기독교와 선진국을 동일시 한다거나 등. 하지만 미국이 냉전시대때 소련과의 경쟁이라는 내러티브의 일환으로 공산주의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펼친 반(범)좌파적 내러티브가 매카시즘을 비롯한 내부 결속과 당장의 냉전 자체의 승리에는 분명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그런 내러티브와 자존심으로 강행해온 메아리가 2022년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미국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내부적인 분열과 고통을 비롯한 심각한 부작용들로 돌아오고 있기도 하다. 이런 부작용들의 예로는 첸쉐썬, 신자유주의, 도널드 트럼프/비판과 논란, QAnon,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 # 등을 참고.[5] 해외의 이런 곳에는 아예 (주로) 미국의 범기독교 (개신교+가톨릭) 먹사들이 체포됐다는 기사들을 모아 놓는 곳으로 하루이틀에 한두 번 꼴로 꾸준히 올라오고 있을 정도로 미국 기독교계도 문제가 심각하다. 대한민국에서는 가톨릭의 이미지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같은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마냥 좋지만은 않은 편이다.[6] 굳이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신교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문화적인 기독교(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그 어느 것이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으며, 교회를 평생 안 나가더라도 결혼 정도는 교회에서 올린다던가, 정치인이 무신론자임을 선언을 하는 건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까울 정도로 희소하다.[7] 무신론자와 동맹을 맺고 가톨릭 이슬람과 싸우느니 가톨릭 이슬람과 동맹을 맺고 무신론자들과 싸우겠다는 개신교인들도 있을 정도다. #[8] 예를 들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시작된 이후로 미국 개신교가 마스크 착용 거부, 오프라인 예배 강행 등으로 감염을 엄청나게 가속시켜 짧은 기간만에 미국을 코로나 누적확진자 1위로 등극시킨데 기여한 바가 어마어마하나, 책임에 비해 사회적으로 받는 처벌이나 지탄은 한국보다 약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처럼 확진자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역학조사가 부족한 점과 겹쳐 감염경로 파악이 흐지부지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영향/종교/개신교 항목 참고.[9] 이런 사람들 중 2022년 현재 아직까지도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QAnon 계열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도 아주 많다. # #[10] 해외의 예(주로 미국)로는 종교인들(읽어보면 많은 경우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 계열 개신교다)이 왜 자신이 신앙을 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서브레딧이다.[11] 그것들 중의 하나는 법이고, 철학적 학술적 정의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법은 곧잘 그 사회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의 최소 기준들의 실체화라는 관점에서.[12] 인간은 죄인임을 어떻게서든 납득시켜야 하므로[13] 이걸 못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는 QAnon,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베리칩 같은 안드로메다로 간 음모론들을 한두 개쯤은 믿고 있는 개신교인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14] 이런 경향은 은사적 방면에 열려 신사도 운동 같은 맥락에 취약한 부류에서 많이 볼 수 있다.[15] 원죄(기독교), 개혁주의 신학/비판 참고.[16] 종교개혁을 거친 교회라 한들 지금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그 시대의 부조리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의 부조리와 신학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개혁이었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21세기 현재까지 개혁된 그 모든 걸 개혁했다는 말로 성립시킬 순 없다. 예를들어 식민지화 및 백인의 의무를 필두로 한 제국주의적 선교를 필두로 한 온갖 물리적, 정신적, 영적 폭력들의 정당화라던가. 참고로 미국 백인보수복음주의의 메카인 바이블벨트는 미국 역사에서 남북 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마지막까지 노예를 부리고 싶어 했던 남부연맹이 있던 지역이기도 하고, KKK는 물론 지금도 정치적인 이유로 남부연합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꽤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유럽 기독교에선 스스로 반성하는 편으로 기울어진 제국주의적 선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는 미국을 통해 이런 태도를 재수입해서 대한민국이 선진국화라는 국제 정세변화의 파도를 함께 타고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며 다시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17]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18] 특히 이런 부분은 장로교단들의 칼뱅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은 스스로 선해질 능력도, 의지도 없으며, 우리의 선함을 입증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도, 노력도 다 소용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어쩌고..."는 식의 비관적인 신학관과도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자세한 건 개혁주의 2번 항목 참고.[19] 하나님의 원수 하늘수령님의 원쑤[20] 이는 많은 개신교인들이 "신은 죽었다"라는 대표적인 어록을 꼬아서 받아들이고 웃음거리로 만들기까지도 하는(신은 죽었다 - 니체 → 니체는 죽었다 - 신, 신은 죽지 않았다 등) 프리드리히 니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21] "하나님께 서울을 봉헌하겠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 자유보수정신의 대한민국"[22]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같은 성경구절들을 보면 반지성주의를 정당화하기 딱 좋다.[23] 이단/기독교, 신천지, 혼합주의, 진화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권, 성소수자, 퀴어신학, 무신론, 거짓 선지자, 번영신학, 자유주의 신학, 우상숭배 등등[24] 예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25] 예를 들어 사랑, 자유, 믿음, 행복, 평화, 선, 악 등등. 온갖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좋은 가치들로 생각되는 개념들 앞에 "거짓"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보면 교회에서 들어 봤을만한 표현들이 된다. 거짓사랑, 거짓자유, 거짓믿음, 거짓행복, 거짓평화... 이는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을 빙자한 자의적인 이웃 사랑, 자의적인 이웃 존중에 깔린 태도들과 일맥상통한다.[26] 애초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란 전제를 깔고 가는 종교이기에 있는 한계긴 하다. 하지만 정말 현실의 세상 사람들이 다 악의를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악의가 있었고 처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들, 처음부터 그런 지경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개신교인들과 이야길 해보면 이런 선과 악의 기준조차 상식적인 정의랑 다른 경우가 워낙 많기에 {그냥 뭐든간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자체부터가 죄라던가.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며 살고 있어야 (은혜로든 노력으로든)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하신 참된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거란 기준 같은 걸 가지고 있거나 # 현실과 상상을 구분을 잘한, 상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스트레스 해소 차원의 현실적인 인간적인 생각들까지도 전부 죄라던가. 등} 이런 걸로 논쟁해봤자 대부분 결론이 나지 않고, 지쳐서 포기하게 된다.[27] 이런 경우 자라오며 사람(부모 친구 등)에게 사랑을 안정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개인사, 가정사 때문에 사랑에 대한 정의부터가 매우 불안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신천지가 이런 사람들을 잘 착취하고 이용해먹는 걸로 유명하지만, 이조차도 기존 일부 개신교에서 암시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것들이 벤치마킹되고 체계화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