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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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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국제 노동 기구 협약3. 역사상의 강제노동
3.1. 고대3.2. 근현대
3.2.1. 일본 제국의 강제노동
4. 대한민국의 병역 대체복무 제도
4.1. 2021년 29호 협약 비준과 위배 논란
5. ILO 강제노동 협약 미비준국
5.1. 완전 미비준국5.2. 일부 미비준국과 암묵적 시행 의심국
6. 가상매체의 사례

1. 개요

강제노동(, forced labour[1]) 혹은 무자유노동(, unfree labour)은 처벌의 위험에 의하여 비자발적으로 제공되는 모든 형태의 노동을 이른다.[2]

전시, 사변 및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 이루어지는 강제노동[A]징용(徵用)이라고 한다. 이는 비상 사태라는 시간적 특수성이 접목된 강제노동의 하위 개념으로, 합리적으로 인적 자원을 충당할 능력이 없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여 행정상의 노역을 강제하는 행위이다. 국제노동기구 제29호 협약에서는 징용과 강제노동을 'forced or compulsory labour'의 범주로 묶어서 설명한다. 한국에서는 강제징용(強制徵用)이라는 표현도 쓰이나, 이미 '징용'이라는 단어에 강제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A] 따라서 국립국어원에서는 '강제징용'이라고 표현할 경우에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징용에 대해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5] [6]
영어명 한국어 번역 의미
Forced labour
(강제 노동)
=compulsory labour,
=unfree labour
징용
(徵用)
『군사』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강제적으로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키는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강제징용
(強制徵用)
『역사』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리던 일.≒징용.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강제노동
(強制勞動)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억압으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지로 행해지는 노동. (=강제 노역).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징병제의 경우, 국제노동기구에서는 '국가의 존속에 필요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하여, 오직 군사적 목적만을 위하여 징병된 경우(현역, 상근병, 예비군)에는 강제노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는 모병제를 통해서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는 국가들을 배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징병된 인력을 전쟁・전투의 수행 및 국방, 치안 유지 이외의 비군사적 용도로 전용(轉用)하는 것은 강제노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 사례로 이미 국제노동기구는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도(보충역, 승선예비역)가 사실상 징병제를 비군사적 목적으로 확대하는 강제노동의 편법임을 2차례 이상 확인한 바 있다(참조)

형사처벌에 따른 자유형징역은 관습상 강제노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7]

2. 국제 노동 기구 협약

Article 1.1: Each Member of the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which ratifies this Convention undertakes to suppress the use of forced or compulsory labour in all its forms within the shortest possible period.
1조 1항. 이 협약을 비준하는 각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적 노동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폐지하도록 한다.

Article 2.1: For the purposes of this Convention the term forced or compulsory labour shall mean all work or service which is exacted from any person under the menace of any penalty and for which the said person has not offered himself voluntarily.
2조 1항. 본 협약에서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적 노동'이란 처벌받을 위협 하에 이루어지거나, 자의로 제공되지 않는 노동행위를 이른다.

국제노동기구, 1930년 6월 28일 제네바 총회
C029: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Convention concerning Forced or Compulsory Labour, No. 29)
국제 노동 기구(ILO)는 1930년 제 29호 협약에 따라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폐지하기로 결의하였다. 1932년 정식 발효됨에 따라 이를 비준한 세계 159개국에서 강제노동이 폐지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하여 비준국 내의 강제노동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다만 세계대공황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걸은 일본1932년 11월 21일 이 협약을 비준했지만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자국민 및 식민지인을 징용한 적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추축국이었던 독일의 경우 국내외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비준을 거부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56년에 협약을 비준했다. 현재 독일은 본 협약을 잘 준수하고 있는 중이나 일본의 경우 105호 협약을 미비준했다. 이후 비준국은 점점 추가되어 현재는 178개국에서 비준하고 있다. (협약 비준국 일람)

국제 노동 기구의 강제노동 금지 협약은 세계 인권사 및 노동사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이는 '강제적 노동'이 아닌 '노동자의 자유 의사에 따른 노동'이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임을 재확인한 것이며, 그 누구도 '사람의 양심과 의사에 반하여' 노동케 할 수 없다는 점을 약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으로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근대 산업혁명기의 사고방식에서 노동을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로 여기는 현대적 사고방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현행 헌법(87년 헌법)에는 근로의 의무라는 말이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제시한 10차 개헌 개헌안에는 근로의 의무를 삭제하고 노동을 권리로 보는 개념을 삽입하는 등 점진적인 사고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3. 역사상의 강제노동

3.1. 고대

강제노동의 역사는 사실상 계급 사회의 역사와 같다.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계급'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라미드 구조의 제일 밑에 헐벗고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고, 그 위에 빛이 번쩍번쩍한 장신구로 치장한 지배자가 있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바로 이 밑에 있는 평민과 천민들이 일종의 ‘인력 자원’으로서 공공 사업을 도맡았다. 청동기 시대에 유행했던 고인돌, 오벨리스크 같은 거석 문화에서부터 괴베클리 테페, 파르테논, 지구라트 같은 종교적 신전, 만리장성 같은 성채에 이르기까지, 기계가 없던 시대에 한두사람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던 거의 모든 것이 강제노동을 통한 동원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이 당시에는 노예 제도와 전쟁에서 패한 피지배 부족이 따로 있어서 이들이 막노동을 담당하다시피 했다.

중국 남북조시대를 종결하고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문제양제황하강과 양쯔강을 잇는 대운하를 놓기도 했다. 두 강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이는 엄청난 토목사업이었으며, 당시 기술력을 생각해 보면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또한 611년 고구려원정갈 때 군사 113만 명에 또 2배가 넘는 보급인원을 강제로 동원하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정책을 펼쳤다. 이는 수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반면 피라미드의 경우, 근세까지만 해도 강제로 동원된 백성들과 노예가 이용되었다고 생각했지만,[8] 현대에 이르러 각종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면서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은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을 받고 자발적으로 근무하는 자유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9]

3.2. 근현대

일본 제국나치 독일은 전시 강제노동인 징용제도를 시행한 대표적인 열강이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정신대, 위안부, 하시마 문서 참고. 그 밖에 소련북한굴라크, 정치범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시행한 바 있다.

3.2.1. 일본 제국의 강제노동

팔라우 및 남양군도 KBS 역사스페셜
지옥의 섬 군함도
사할린 이중징용 강제노동 후쿠오카 지쿠호
"강제 연행 당한 건 1942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
ㅡ 박병태 씨 생전 증언/홋카이도 시카고에 광산 징용 (1976년 육성) #
"배를 곯아서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도 많았고 47명이 와 가지고 12명이 죽었습니다. 전부 영양실조로…"
ㅡ 최종주 씨 생전 증언/홋카이도 비바이 탄광 징용 (1972년 육성) #
"일본 홋카이도에 잡혀있는 조선인 노예들은 매우 나쁘게 취급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고, 대부분 발에 쇠 족쇄가 차여 있었다."
ㅡ 윌리엄 E. 웨버[10] 대령(전역)/ 11공수사단 187연대 3대대 Mike중대 소대장 시절. 종전 이후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 노동자의 이송을 맡은 미군 장교[11](2020년6월3일 육성) #
"오다시(야간 근무) 해 가지고 목표 달성해야 하니까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14시간 15시간 16시간 일을 했습니다."
ㅡ 김석동 씨 생전 증언/후쿠오카 다타쿠마 탄광징용 (1969년 육성) #
동원의 실정
징용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어떤 방법으로도 동원은 완전히 납치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만약 사전에 알려주면 모두 도망가기 때문에 야습, 유인,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하여 인질적 약탈 납치 사례가 많아지는데, 왜 사전에 알려주면 그들이 도망가는지 생각해보면 그곳에는 그들을 정신적으로 끌어당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내선을 통한 노무관리의 부실은 종종 그들의 심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잔류가족의 생활고 내지 파멸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북지방의 노무관리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참혹하여 오히려 군 관련 사업에 징용되기를 바랄 정도였다.따라서 조선 내 노동규제는 전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출동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도망을 방지할 것인가가 조선 내 노동규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내무성 촉탁(嘱託) 小暮泰用 조선시찰보고서#
기존의 공장, 광산의 노동력 충원 상황을 보면, 그 중 90%까지가 자연유입이고, 10% 미만이 소개소 소개로 통해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달라져 모집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관의 힘과 관 알선으로 충당하는 부분이 매우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 알선 임에도 조선의 직업소개소는 각 도에 한 군데 정도밖에 없고, 조직이나 인력도 인원도 극히 빈약하기 때문에 일반 행정기관인 부, 군, 도를 일선기관으로 하여 노동자를 알선하고 있습니다만, 이 알선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송 도중에 도망치거나, 산에서 도망치거나, 혹은 분란을 일으키기는 등의 사례가 매우 많아서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징발도 당장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반강제적인 공출은 앞으로도 계속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륙 동양경제(大陸東洋経済)』1943년 12월 1일호 조선총독부 광공국 노무과 田原実, 조선노동의 결전 기여력(座談会 朝鮮労務の決戦寄与力) 中

일본의 강제징용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으로 징병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노무 동원을 시켰다. 그 중 노무 동원을 이 문서에서 다룬다.

파일:Approval_of_National_Mobilization_Law.jpg

일본의 징용법인 '국가총동원법'의 성립을 알리는 1938년의 신문기사. 왼쪽에 보면 '헌법 정신에 반한다~' 하는 글귀가 보인다.[12] 당시 일본에서도 징용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그러한 목소리는 묵살되었다.[13]

조선인 2630만명 중 태평양 전쟁 시기에만 100만명#이 징용되었다. 그외 시기에 징집된 숫자까지 합치면 약 612만 6,180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되었다. 1999년 ILO는 일본의 조선인 징용(위안부, 정신대, 하시마 등)이 ILO 29호 협약을 위반한 강제노동이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

참고자료 : 송출과정을 중심으로 본 전시체제기 조선인 국외노무동원의 성격-정혜경,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당시 동원은 처음에는 자유의사를 빙자한 강제였다. 예를 들어 일본 기업에 조선인 노무자를 징용할 권한을 준다. 그러면 그 기업의 사원이 조선의 특정 지역을 찾아가서 면사무소, 주재소, 경찰을 동원해 징용 대상자를 모집했다. 면장, 호적계 면서기, 순사 등이 젊은이를 직접 찾아간다. 징용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폭행이 가해지고 배급을 끊으며, 도망가면 연좌제를 통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므로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형식적인 절차 없이 바로 잡아갔다. 원칙적으로 아동노동은 금지였으나, 인원수가 모자랄 때 억지로 규정을 무시하고 끌고 간 경우 현지에서 아동이라는 점이 발견되어도 고국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14세에 하시마섬에 징용된 사례가 있다.

감독관은 민간기업 감독관이든 육군 헌병이든 잔혹했다.[14] 구타와 고문이 일상적이었다. 옷을 벗긴 다음 회초리, 각종 케이블, 목도, 벨트, 고무 튜브 등으로 목숨이 오갈만큼 때렸다. 그냥 조선인들이 모여 있기만 해도 감독관이 가서 구타하기도 했다. 몸이 아파 못 나가겠다고 말해도 구타했다. 하루에 12~17시간씩 일을 시켰고 휴일도 없었다. 그만둘 수도 없었다. 옷에다 크게 '징용'이라고 새기거나 높은 장벽을 설치해서 도망가기도 힘들었고, 도망치다 잡히면 며칠간 죽을 정도로 맞으면서 고문을 당한 후 다시 작업에 투입되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해군 보초가 탈출을 감시했다. 징병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는 것만이 징용에서 합법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부 노무자들은 탈출에 성공해 평범한 일본 기업에서 잡부로 일하면서 숨어 살기도 했다.

일본의 대기업들이 징용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오래된 기업들 중 강제동원 사실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2014년 국무총리 직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2개 기업에 5,567명(중복동원 포함 시 6,415건)이 동원됐으며, 이들 중엔 경성방직(현 경방)과 조선중공업(현 HJ중공업), 조선운수(현 CJ대한통운), 경성전기(현 한국전력공사) 등 현재도 존속 중인 4개 기업이 포함됐다. 그러나 일제 강제동원 배상은 해외 징용만 한정된 데다 피해자들 중에 징용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고, 1965년 한일협정 때 한국측의 약한 협상력 때문에 국내동원 문제는 제외돼 보상 자체에 난항을 겪었다.

무엇보다 국내 징용과 관련된 기업 중 살아남은 기업조차 경방을 빼곤 법인격에 연속성이 없어 책임을 묻기 어려운 데다 설사 책임이 있다 해도 배상시효 경과, 증거자료 부족 등으로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으며, 경방의 경우 2017년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사과와 배상문제를 거론치 않았다.

일본 본토에 끌려간 조선인 노무자의 약 40%를 탄광에 배치했다. 미이케 탄광에서는 월 20일 이상 일하지 않으면 구타를 했다. 부상이나 병으로 쉬면 식사량을 1/3으로 줄였다. 1943년경에는 하루 탄차 15대 할당량 (일 10~12시간 근무), 1944년 말에는 탄차 20대 (일 15~18시간 근무) 할당량을 요구했다.

조선인 탄광 근무자들은 6년간 약 1~2% 사망했다.[15] 높은 사망률은 공습과 열악한 안전관리의 영향이었다. 징용 지역이 방위산업체이므로 공습 대상이었다. 배고픔이나 구타보다도 무서운 것이 공습이었다. 특히 히로시마, 나가사키 지역의 탄광과 조선소에서 일하던 노무자들은 원폭 피해를 입었다.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1만명이 사망했고 2만명이 원폭 피해를 입었다. 또 안전관리에 전혀 비용을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이케 탄광에서는 이틀에 1번 꼴로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조선소에서도 약 0.5%가 사망했다.[16] 사망해도 원인 조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17] 사망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는 경우도 의심되며, 심지어는 은폐를 위해 사망 기록을 말소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18]

월급에 대해서는 아예 설명도 하지 않거나, 고향에 송금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주지 않았다. 설사 서류상으로 월급, 가족수당, 개근수당, 잔업수당 등을 주더라도 역시 서류상으로 퇴직적립금, 국민저축 등의 공제를 해서 실제 현금을 거의 받지 못 했다. 식량 배급량도 적어서 항상 배가 고팠다는 진술이 많다. 길가에 버려진 귤껍질을 주워 먹었다는 증언도 있다.

제철소의 경우 삽으로 탄을 옮기는 막일, 공장 내 철도의 신호소에서 선로 전환과 관리 등의 일을 시켰다. 조선소의 경우 도금공장에서 구리 파이프를 구부리는 일, 철재 운반 작업 등을 시켰다. 똑같은 기업에서 일했다고 해도 일본인 기술자들과의 대우는 천지차이였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경우에 일본인 선박 설계 기사이자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야마구치 쓰토무는 집에서 전업주부 부인, 아들과 함께 살면서 출퇴근하는 등 일본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 일본인 노무자도 있었으나 그들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자리에 배치하는 등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똑같은 조선소 건물에서 일하던 징용 노무자들은 해군과 육군 헌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채찍으로 얻어맞고 월급도 받지 못 하는 등 노예로서의 삶을 살았다. 조선인 외에 중국인, 연합군 포로들도 노예로서 강제노역에 함께 종사당했다.

한편 징용 생존자들의 증언은 대부분 일본, 한국, 사할린 정도에서만 나온다. 남양군도로 징용된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지에서는 주로 사탕수수 등 농장 일을 하거나, 섬에 일본군이 주둔할 때 기지를 건설하고 비행장을 닦는 등의 일을 했다.

특히 파푸아뉴기니는 2차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로, 일본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한국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다. 뉴기니에서 사망한 한국인 희생자 수는 구체적 명부로 확인된 것만 일본 후생성 기준 1천76명이며, 2013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진상조사를 통해 전쟁 당시 약 4천여명이 넘는 한국인이 파푸아뉴기니로 강제로 끌려갔으며 이 가운데 90%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당시 미군의 길버트 제도 공격, 1943년 타라와 전투 때처럼 전투 종료 후 소수의 조선인 징용 생존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밀리환초 학살사건처럼 저항하던 조선인 노무자들이 모두 살해되어 불귀의 객이 된 경우도 있었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적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문서 참고. 이에 대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 판결이 한일기본조약에 어긋나는, 국제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판결이라고 주장하며 경제적 보복에 나섰다. 그러나 대법원은 한일기본조약의 효력을 인정하였으며, 다만 손해배상청구권은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뉴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2019년 9월 17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아베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의견을 국제노동기구(ILO)에 제출했다.#

2019년 MBC에서 징용 피해자들이 아직 장년층이던 1960~70년대에 강제징용을 직접 증언한 약 5백 개 분량의 카세트테이프를 단독 입수했다고 한다. 해당자료는 재일사학자 김광열 선생이 70년 동안 모은 조선인 강제징용 관련 기록물 13만 여건들 중 일부라고 한다. [단독] "16시간 일하고 영양실조로 숨져"…'참혹한 노역' 증언

2020년에는 나가노현에 있었던 강제징용 2,600명 명단이 발견되었다.#

4. 대한민국의 병역 대체복무 제도


국제 노동 기구 기준으로 한국의 군 대체복무 제도가 강제노동 금지 조약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은 대한민국 국민과 외국인 체류자로, 정확히 말하면 사회복무요원(1년 9개월), 산업기능요원(현역 2년 10개월, 보충역 1년 11개월), 예술체육요원(2년 10개월), 전문연구요원승선근무예비역공중보건의병역판정검사전담의사공중방역수의사공익법무관 등(3년) 제도[19]와 외국인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고용허가제#가 제29호 협약에서 정의한 'Forced labour'에 해당한다. 심지어 롯데가 이 현실을 역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활주로 공사에 공군 현역병을 동원하려고 시도했다가 공군 수뇌부에게 걸려 크게 털린 것이다. 2020년 코로나 19 사태 때는 국방부지오영 등 마스크 관련 물류업체에 병력을 지원했다가 고발당하기도 했다(뉴스). 국제 노동 기구는 비전투적 노역에 군사력을 징발하는 것을 강제노동의 편법으로 간주하는데, 당시 장병들은 명령으로[20] 밤 10시까지 무급이나 다름 없는 돈을 받으면서 물류센터에서 일했으며,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20년 군인 강제노동 논란 참조.

2021년 2월까지는 한국은 위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었다. 다만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OECDIMF 선정 선진국에 해당하는 국가들 가운데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인 29호 협약과 105호 협약 중 어느 하나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었다.[21]

한편, 협약 비준이 지지부진하자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 EU에서 해당 문제를 노동 관련 중대사안으로 인식하여 분쟁해결 절차를 개시할 것을 요청하는 등 직접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이는 강제노동력을 사용하는 국가의 가격경쟁력이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높기에 국제무역에서 '반칙'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이 지나도록 비준은 커녕 국회도 열리지 않자 2019년 3월 6일 다시 압박을 가했다. 비준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경제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미 라트비아와 스리랑카가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직접적인 관세는 매기지 못해도 방법은 다양하다는 말도 나온다.

이후 4월 9일 EU 관계자들이 와 올해 여름까지 비준을 꼭 해달라는 압박을 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에 ILO에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6월이 데드라인으로 실제로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제재가 행해질 경우 안그래도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6월 연설을 일정상 못 간다며 포기했기 때문에 사실상 EU와의 약속을 못 지킨 셈이 됐다. 이후 2021년, 전문가 패널은 한국이 한-EU FTA에서 규정한 ILO조약 비준 관련 조항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시, 분쟁이 종료되었다. #

2019년 5월 22일, 한국 정부가 ILO 핵심협약 4개 가운데 3개에 대해 비준을 추진하기로 했다. 강제노동 금지 제29호를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사회복무요원 등을 포함한 보충역에 대해서는 전면 폐지가 아닌 개선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며, 비준 후 사회복무요원, 산업기능요원 등이 현역으로 입대한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현재 ILO에 일본 정부의 29호 협약 위반에 대해 제소할 수 없다. 상대국 협약 위반을 제소하려면 자국도 해당 협약을 비준해야 하는데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는 29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대노총만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과 자료를 ILO에 보내게 된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강제노동 금지 위반’으로 ILO에 제소할 수 없는 이유(2019년 9월 17일, 경향신문.).
2019년 10월 31일, 정부는 그동안의 주장에 따라 앞으로 병역판정검사에서 4급(보충역)을 받더라도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게 병역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역사회복무요원 중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국방부는 "보충역 제도 중 비군사적 복무인 사회복무요원이 강제노동에 해당될 수 있다는 일부 우려가 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개정안은 11월 19일까지 입법예고될 계획이다.# 또한 2021년부터는 학력이 중졸 이하라는 이유로 사회복무요원 처분을 받던 것을 모두 현역으로 처분할 예정인데, 이는 저출산에 따른 징병 인력 부족이 심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국제 노동 기구가 부정하는 제안으로, 협약에서 말하는 선택권은 정 원해서 복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심신 상태를 고려해서 복무를 하지 않을 것인가이다. 이에 반발한 한국의 4급 판정자들의 주도하에 한국의 강제노동 실태를 고발하는 영문 웹사이트가 만들어졌다.#archive 2021년 4월, 사회복무요원으로 판정받았거나 복무 중에라도 현역병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병역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ILO 협약 비준에 대한 추진연혁은 국제 노동 기구 4.1 항목을 참조.

한국의 한 네티즌이 일본의 산케이신문에 '한국의 강제징용 문제를 기사로 써 달라'며 제보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해당 기사는 '한국 남성들이 강제징용을 가고 있다는 내용의 여론을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한국에서 우익계 논조로 논란이 일었던 산케이 신문에 이러한 내용을 제보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 해당 기사에서 중앙대학교 양홍식 교수는 "논리적인 비약이 담긴 주장을 일본 극우매체에 제보하는 등 극단적 방식의 문제제기는 원활한 소통을 저해한다."고 밝혔다. 반면 해당 기사의 네이버 뉴스 댓글에는 '일제 강제징용보다 악랄하다.', '제보하는 걸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고칠 생각을 하는게 맞는거 아닌가.' 등의 댓글이 많은 추천을 받았다. #

2019년에는 병무청 유튜브 공식 계정에서 산업기능요원 제도의 현실을 지적하는 댓글에 일침이랍시고 "다른 노동자들도 다 힘들게 일하는데, 산업기능요원만 인권 소리를 한다." 며 일반 근로자와 징집 복무자를 비교하며 비아냥거리는 망언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1년여 간 유튜브 댓글 고정 기능을 사용해 고정해 놓았던 것이 드러났다. 이것이 2021년경 유튜브 이용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논란이 생기자 병무청은 급히 댓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이 아닌 '입장문'을 게시하여 "공식 입장이 아니며,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는 짧은 입장을 표명해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다. 경인지방병무청 산업기능요원 모욕 사건 참조.

4.1. 2021년 29호 협약 비준과 위배 논란

2021년 2월 26일, 29호 협약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비준하더라도 상기 제도들은 한국의 정치 군사적 특수성이라는 이유로 전혀 폐지 또는 개정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는 조약을 비준하면서 위배하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29호 협약은 2021년 4월 20일 ILO에 기탁되었으며, 이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4월 20일 부터 효력이 생긴다.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3일 비준을 앞두고 "석·박사급 전문연구요원 등 ILO 29호 협약에 배치 안돼" 라는 브리핑을 내놓아, 현행 제도를 조약 아래에서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 바 있다. 그러나 앞서 2007년, 2009년, 2012년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국제 노동 기구의 이사회는 한국 정부의 징집병 민간기업 배치 행위에 대하여 "군사적 목적과 관련 없는 징집은 협약의 예외사항(순수한 병역의무)으로 볼 수 없다."고 답변한 바 있어, 사실상 국제기구의 해석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

정부는 사회복무요원에게 선택권을 주는 병역법 개정안이 국내의 형평성과 협약 준수 조건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22] 한국 정부의 안은 '기존의 선택권 없는 사회복무요원만이 명백한 강제노동에 해당되기에, 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라고 하나, 이러한 복무 선택권을 준다고 해도, 사회복무요원 근무는 여전히 협약에 상충하는 강제노동이라는 지적을 회피하기 어렵다. 'ILO 협정서 제 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이하 협약)' 및 General survey concerning forced labour 2007(이하 서베이)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강제노동은 협약의 1에서 정의되고, 협약의 2에서 예외 경우가 규정된다.

위 근거를 요약하여 선택권이 꼼수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체복무제라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통상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체복무는 징병대상자 그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 즉 한국으로 따지면 신검 1~3급인 사람도 누구나 원하면 사회복무요원 및 기타 보충역으로 복무할 수 있어야 진정한 대체복무라고 할 수 있지만 현 제도는 물론 그렇지 않다. 신검 1~3급인 사람이 할 수 있는 보충역은 일부 자격자에 제한된다.

2. 이미 한국에서 신검 4급의 의미는 사실상은 군대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병무청에서는 현역 복무가 가능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비교도 안되게 빡센 4급 기준을 보면 사실상 사회복무요원 복무조차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대체복무는 심신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냥 몸은 멀쩡해도 군대가 싫은 경우에 다른 통로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아예 취지가 다르다. 공식적으로 군대에 안와도 된다고 인정할 정도의 사람에게 선택권 부여는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이다.

3. (자율 지원에 의한 보충역이긴 하지만) 일부 보충역 제도는 국제 권고 기준인 현역 복무기간의 1~1.5배를 넘는다. 공중보건의사, 공익법무관, 공중방역수의사, 승선근무예비역,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중 신검 4급이 아닌 자 등은 3년으로 현역 복무기간의 2배 정도다. ILO에서는 명목뿐인 선택제를 지양하기 위해 징벌적으로 긴 복무기간은 사실상 현역 복무를 강제하기 위한 꼼수로 보는데 그에 해당한다.

2022년 4월 20일 협약의 국내 발효를 앞두고 사회복무제도가 ILO제29호 협약에 위배되는지를 판단해 달라는 헌법소원(2021헌마1382)이 제기되었으며 사회복무제도와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복무요원 노동조합#도 결성되었다.

5. ILO 강제노동 협약 미비준국

아래 사항은 유엔 국제노동기구의 홈페이지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미비준국C029 - Forced Labour Convention, 1930 (No. 29)
105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 미비준국C105 - Abolition of Forced Labour Convention, 1957 (No. 105)

5.1. 완전 미비준국

ILO 29호, ILO 105호 어느쪽도 비준하지 않은 국가들이다. 북한은 ILO 회원국이 아니므로 제외.

5.2. 일부 미비준국과 암묵적 시행 의심국

ILO 29호, ILO 105호 둘 중 하나를 비준하지 않은 국가들이거나, 비준을 했어도 암묵적으로 강제노동을 시행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국가들이다.

6. 가상매체의 사례


[1] 2015년 일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등재시킬 때, 한국과 일본의 외교 당국은 이른바 '강제 징용'에 대한 정보 서술 문제를 두고 논쟁한 적이 있는데, 한국측은 '강제 징용'의 번역어로 'forced labour'을 사용하라고 주장했다.[2] Convention No. 29(forced labour), Article 2. 1930,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ILO) Information System on International Labour Standards.[A]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강제적으로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키는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A] [5] "『역사』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리던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6] 그래서 이런 용례 덕에 오히려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비판적인 2030 남성들은 겹말인걸 알면서도 강제징용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징용 자체가 전쟁, 사변이나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라는 시간적 조건이 충족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평시 강제노동을 징용 또는 강제징용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북한과의 전쟁재개 또는 국지적 분쟁발생의 위험이 상존하기는 하나, 전쟁 직후도 아니고 70년째 휴전상태인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전쟁, 사변이나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로 보기는 힘들다.[7] 다만 미국과 같이 징역에 민간 기업이 관여하는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8] 이런 인식을 박도록 만든 사람이 헤로도토스다.[9] 피라미드 건설 참여는 농한기의 농민들에게 좋은 수입 수단이었으며, 임금 미지급에 대한 인류 최초의 파업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의 토목공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0] William E. Weber, 1925~2022[11] 여담으로 윌리엄 웨버 대령은 6.25 전쟁 당시 미국 육군 187 공수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했고, 1951년 2월 원주 전투에서는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막는 공훈을 세운 참전영웅이기도 하다.#[12] 성립을 알리는 기사의 설명의 내용은 귀족원에서 다수가 가결했다는 것이다.[13] 더 아이러니한 건 일본은 1932년 강제노동 금지를 명시한 국제노동기구(ILO) 노동협약 29호를 비준하였음에도 강제징용을 실시한 것이다.[14] 이하 징용 실태에 대한 출처는 조선일보 2017년 보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세계유산 가이드북 참조바람.[15] 홋카이도 유바리 탄광에서 7천명이 넘는 조선인이 노역했는데 1939~1945년 유바리 탄광에서 조선인 127명이 사망했다. 후쿠오카 아소 탄광에서도 1939~1945년에 조선인 징용자 10,623명이 노역했는데 이 중 124명 이상이 사망했다.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에서도 1938~1945년 9,200여명 이상의 조선인 징용자가 끌려와 32명이 사망했다. 참고로 현대 한국에서는 약 6,200여명의 광부가 있는데 연평균 5~6명이 사망한다.[16]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 조선인 3,400여명이 끌려와 18명이 사망했다.[17] 홋카이도 유바리 탄광에서는 사망 127건 중 123건의 사인을 '원인 불명'으로 기록하고 있다.[18] 미쓰비시그룹의 경우, 다카시마 섬 탄광에서 조선인 사망자 위패를 소각해버려 죽어간 사람들의 신원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19] 2013년에 폐지된 차출 형식의 전환복무(2012년에 폐지된 교정시설경비교도대와 2013년 폐지된 전투경찰. 육군병과 동일한 복무기간), 2016년에 폐지된 국제협력봉사요원국제협력의사, 2023년에 폐지된 선택 형식의 전환복무(경찰청 의무경찰, 해양경찰청 의무경찰, 의무소방대) 제도도 폐지되기 전에는 문제가 되는 대상이었다.[20] 강제노동의 조건인 '(불응시) 처벌받을 위험'을 만족시킨다. "all work or service which is exacted from any person under the threat of a penalty and for which the person has not offered himself or herself voluntarily.", 참조.[21] 미국은 교도소의 재소자 문제 때문에 29호 협약의 미비준국이나, 105호 협약은 비준했고, 베트남 전쟁 이후 국민 일반을 대상으로 강제노동을 시행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때도 순수하게 군사적인 목적으로 징병제를 운영했기에 강제노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래 단락 참조.[22] 과거 ILO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핀란드 등의 징병제 국가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사회복무를 시키는 것을 '개인의 특권'으로 보고 용인한 것을 보고 판단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