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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7:01

강영식/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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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태 타이거즈3. 삼성 라이온즈4. 롯데 자이언츠
4.1. 2007 시즌4.2. 2008 시즌4.3. 2009 시즌4.4. 2010 시즌4.5. 2011 시즌4.6. 2012 시즌4.7. 2013 시즌4.8. 2014 시즌4.9. 2015 시즌4.10. 2016 시즌4.11. 2017 시즌
5.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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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소속 좌완 투수 강영식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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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23일, 2000년 신인지명 2차 2순위 왼손투수 강영식(대구상고)은 계약금 3천만원, 연봉 2천만원에 해태 타이거즈와 입단 계약했다.#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에 140km/h대 중후반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던 좌완 파이어볼러였던 그는 덩치 큰 왼손잡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 김응용에게[1]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직접 본인의 집에 거둬 구워서 을 해 먹일 정도로 애정을 보였을 정도.

참고로 이 당시 강영식과 함께 김응용 감독의 집에서 기거했던 덩치 큰 좌완투수 유망주가 1명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응용의 까마득한 고교 후배였던 채태인이었다.

3.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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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김응용 감독이 2001년에 삼성의 감독으로 가자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던 신동주를 보내면서까지 그를 삼성으로 데려올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2]

2002년 기대에 부응한 강영식은 선발로 이닝은 많이 못 먹었을지언정 9승을 찍으며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듬해부터 부진하기 시작해 불펜으로 강등당했고 2004년까지는 그래도 무난한 모습을 보였지만, 선동열이 오자마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좌완에 키도 비슷한데 구속은 더 빠른 150km/h대의 공을 던지며 나이도 더 젊은 권혁과 경쟁이 붙으면서 위기에 빠졌다. 훗날 강영식이 말하기를 이 당시 김응용의 너무 큰 총애와 경쟁에 대한 압박감으로 늘 마운드에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고. 그 특유의 새가슴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맘때 나온 별명이 '불펜 선동열'.

결국 권혁에게 밀려, 2006년 시즌 종료 후 11월 21일 2루수 신명철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었다.

투수 오타쿠 선동열이 버릴 정도라는 삼성 팬들의 말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투구를 보였다. 마운드에서 부진한 뒤 선동열한테 라커룸에서 개털렸던 강영식은[3] 이날 털리면서 "아 나는 정말 여기까지인가보다"하는 자괴감이 들어서 남들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처지를 보고 코치들이 트레이드를 권유했고, 때마침 좌완 중간계투가 없는 롯데와 짝이 맞으면서 당시 롯데의 2루수였던 신명철과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 신명철은 롯데에서 최상위 지명으로 뽑아 박정태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공갈스윙만 하고 영 궤도에 못 오르는 2루수였기에, 트레이드 시점부터 팬들도 서로 이해를 했던 특이한 사례다. 결과적으로도 신명철은 노쇠화된 박종호를 대신해 삼성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2009년에는 20-20 클럽에도 가입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고, 강영식도 롯데에 꼭 필요했던 좌완 불펜으로 꾸준히 활동했으니 서로 윈윈한 트레이드인 셈. 결국 강영식은 선수생활 두번의 트레이드를 모두 신씨와 했다.

여담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첫 KS 우승이자, 드라마틱했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승리 투수가 바로 강영식이다. 삼성의 역사 한 페이지에 기록될 선수 중 하나.

또한 2005년 제1회 코나미컵에서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를 상대로 구원 등판, 3타자 연속으로 삼진으로 잡아 "국제용 투수 강영식" 이라는 칭호를 들은 바 있다. 하지만 2006년 제2회 대회에서는 좋지 못했다.

4.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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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에서의 현역 시절.

4.1. 2007 시즌

트레이드 후 2007시즌 롯데에서 강병철의 양아들 시리즈에 들면서 매우 자주 등판했다. 사실 당시 롯데에 쓸 만한 좌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4.2. 2008 시즌

그리고 2008시즌, 새로 부임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로이스터 매직인지 아로요 투수코치의 아로요 매직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항상 랜디 영식 모드로 변신하였다. 항간에서는 강영식의 매뉴얼이 영어로 되어있어서 외국인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드립이 나오기도 하였다. 시즌전에 도미니카 윈터리그에서 뛴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모양.

원래 고질적인 새가슴이 문제였지만 아로요 투수코치의 꾸준한 신뢰를 받아서 지금은 큰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믿으며 등판에 나선다고 한다. 인터넷에 퍼진 자기별명인 랜디 영식도 알고 있으며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

하여간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롯데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랜디영식을 찬양하였다. 그 당시 팬 사이에서는 롯데의 차기 마무리 투수로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괴상망측한 '우타자 더 잘잡는 좌완'[4] 이라는 딱지는 떼지 못했다. 수치를 보면 좌타자에게 약한 것도 아니지만...[5]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삼성이 친정팀이다 보니까 삼성 선수들을 잘 알고 있으며 2008시즌에 준플레이오프가 시작하기 전에는 삼성이 1선발 공개를 빨리 안 하자, 휴일에 배영수의 집에다가 전화 걸어서 미리 배영수가 1선발이라는 걸 알아냈다. 어떻게 알았는가 하니 원래 배영수는 휴일에 집에 잘 없는데 전화를 받아서 그때 눈치챘다고 한다.

정규시즌 성적은 6승 2패 16홀드 2세이브 56⅓이닝 평균자책점 2.88 WHIP 0.85로 프로 입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려, 연봉도 2008년 6,800만원에서 이듬해인 2009년에는 1억원으로 상승하여 억대 연봉에 진입하였다.

4.3. 2009 시즌

2009 시즌 개막 후 다시 한 번 롯데 불펜의 주축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전년도보다 떨어진 구속 때문에 랜디 영식이라 불리던 그 명성은 많이 죽었다.

그리고 제리 로이스터의 무리한 투수 운용으로 이기는 경기, 지는 경기 구분없이 등판하다가 허리 부상이 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허리 부상이 아니라 팔꿈치 부상이었다고... 허리부상이라고 속였다가 당시 강민호의 팔꿈치 부상 이후 팀 내 모든 선수들의 부상 여부를 조사하다가 드러났다.[6]

2군에서 누굴 올려보려고 해도 워낙 수준 이하의 선수들밖에 없어서 커리어하이 시즌이라는 08시즌에 꼴랑 8이닝 던진 게 다인 김이슬에게 팬들의 기대가 몰릴 정도였던 롯데 왼손 불펜 사정 상 강영식은 어느 정도 혹사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작년과는 처참할 정도로 나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좌완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좌타 상대로 0.286의 피안타율로 우타 상대 0.265보다 더 나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는 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이라 2009시즌에도 팀내 투수 가운데서도 이닝은 2번째로 많은 경기에 출장해[7] 롯데팬들을 가슴 아프게 하였다.

11월 결국 왼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을 받았다.

2009 시즌 최종 성적은 4승 3패 8홀드 2세이브, 48⅓이닝 소화 ,평균자책점 4.84, WHIP 1.63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4.4. 2010 시즌

수술과 재활에 성공적이었는지 시즌 초에는 거의 2008 시즌 때만큼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5월 이후로 난조를 보였다. 피홈런이 많아 피안타율이나 WHIP에 비하면 평균자책점은 높았다. 롯데 불펜진 중 임경완(4개) 다음 가는 블론세이브(3개)를 기록했다. 시즌 중반에 허준혁(좌완)이 불펜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좌완투수가 없는 관계로 상당히 자주 등판했다.

2010 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63경기 52⅔이닝 3승 3패 2세이브 3블론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4.44, WHIP 1.41.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 5경기 모두 등판하여 2이닝 3피안타 2볼넷 3탈삼진 무실점,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010 시즌을 마치고 FA가 될 예정이었으나 구단과 모종의 계약 때문인지 FA 신청을 연기하고 롯데 자이언츠와 무려 연봉 3억에 1년 재계약을 하였다.[8] FA 영입 금액이라고 여기면 싼 편이기는 했다. 참고로 강영식은 이 해 이후로 은퇴 때까지 연봉이 쭉 3억이었다.

4.5. 2011 시즌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이다 보니 경기 출장은 잦은 편이었지만 2010시즌보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시즌 초에는 필승계투조에 포함될것이라 여겼지만, 시즌 초 성적은 실망스러워 승리조가 아닌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만 뛰었다.

4월 24일 SK와의 경기에서는 볼질에 이은 싹쓸이타를 맞으면서 배팅볼 기계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그 와중에 또 아프다고 2군을 갔다오면서 욕을 먹었다. 2군 갔다 온 이후로는 그나마 롯데 불펜 중에서는 그나마 상태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팀내에서 임경완(18홀드) 다음으로 많은 홀드(16홀드)를 기록하였다.

1군에 올라온 이후로는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닌지라 1이닝을 소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뛰었는데, 7월 29일부터 무려 30경기 가까이 등판했음에도 자책점은 0이었다. 물론 분식회계는 했었지만.

9월 21일 2위 자리를 다투는 SK와의 경기에선 역전 결승타를 허용하여 분식회계를 함으로써 가루가 되도록 까였지만, 여전히 믿음직한 불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공은 괜찮은데 이쯤되면 지쳤겠다 싶은 날에는 피안타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그냥 체력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였다.

9월 25일 한화전에서는 1⅔이닝을 소화했는데 상대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만(!) 잡아내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10월 6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8회 장성호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 후반기 첫 실점을 기록했다. 롯데팬들은 별 반응이 없는데 저 홈런 때문에 내년에 또 3번 장성호 보게 생겼다고 한화팬들한테 까였다.

2011년은 64경기 41이닝 2승 1패 1세이브 16홀드, 59회 피출루, 평균자책점 3.51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 시즌엔 유독 전반기와 후반기의 성적 차이가 심했다. 전반기엔 6.14의 평균 자책점과 18삼진을 잡는 동안 14볼넷, 4홈런을 허용했으나 후반기엔 0.47의 평균자책점과 1할 7푼대의 피안타율, 21삼진을 잡는동안 8볼넷, 1홈런만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분식회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반기 0.47의 평균자책점은 이 해 오승환과 동급이었으며 경기수로 치면 무려 29경기 무실점인데,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장 경기 무실점 3위이다.[9]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5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여 1⅔이닝 2피안타 1볼넷 1사구(死球) 4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16.20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4.6. 2012 시즌

이명우, 이승호와 함께 셋 밖에 없는 좌완 불펜이었지만 4월에는 등판할 때마다 주자를 쌓고 위기를 자초하며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필승 계투조에서 밀려난 느낌이었다. 자책점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장작만 쌓고 교체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6월에 이르도록 불안불안한 투구내용을 이어갔는데, 팬들은 3억 연봉을 잘하는 다른 선수에게 나눠주라고 조롱하였다. 그리고 6월 중순이 넘어가자 불안하긴 해도 꾸역꾸역 막는 쪽으로 상태가 좋아졌다.6월 SK전에서는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로 이적한 용덕한[10] 과 호흡을 맞추어 2이닝동안 깔끔하게 상대 타선을 틀어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름이 오기는 온 모양.

그런데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남과 동시에 부상으로(왼 어깨 건초염이라는 얘기가 있다.) 2군에 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 동안 짐은 고스란히 이명우가 떠안아야 했다. 다행히도 8월 중순 2군 경기에 등판해서 멀쩡히 던지는 모습이 포착, 다음 텀에 올라오지 않을까 하던 팬들의 예상대로 돌아와서는 안정적인 피칭을 보였다. 2011년에 이어 2012년에도 후반기로 갈수록 투구 내용이 좋아졌다.

강영식은 두산과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2이닝 3피안타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4.50, 1승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2년 10월 19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1로 앞선 8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1⅓이닝동안 탈삼진 2개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스코어 1:4 승리를 지켜내고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강영식은 SK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5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3⅓이닝 1피안타 2볼넷 6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2.70,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하였다.

강영식은 2012 포스트시즌 9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5⅓이닝 4피안타 2볼넷 6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3.38, 1승 1세이브를 기록했다.

4.7. 2013 시즌

초반에는 홀드를 좀 따내는 등 망한 롯데의 불펜에서 김성배와 함께 일을 하는 몇 안되는 투수였지만, 점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정대현, 이명우, 김승회가 좋은 모습을 보이자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김시진 감독의 좌우놀이 성향상 좌타에 등판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말아먹으며 아직도 사용법 못 익혔냐고 팬들은 감독을 깠다. 하지만 우타 상대로 나왔을 때도 크리켓을 했다. 그래도 경험이 많은 투수이니만큼 어떻게든 종종 등판하지만 까였다. 위기상황에 등판하면 볼넷 내주고 그 뒤치다꺼리는 김승회가 하는 모습이 패턴으로 자리잡혔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시즌 종료 후 김시진 감독이 좌우놀이 대신 1이닝제를 적용해보겠다는 구상을 밝혔지만, 롯데팬들은 1년을 날려먹고서야 강영식의 활용법을 알았냐며 또다시 감독을 까는 중.
롯데의 2014 불펜운용…좌완 강영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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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경기에 지명타자 소멸로 타석에 들어섰는데, 헛스윙하고 난 뒤 투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억승사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설자들의 3억타자 드립은 덤. 이후 강영식은 삼진당했고,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하였다. 11월 16일 4년 17억원에 롯데에 잔류하였다. 계약금 4억, 연봉 3억, 옵션 1억으로 대체적으로 좀 많이 준 것 같긴 해도 나름 깔끔하다는 평가. 그래도 어쨌든 쓸만한 좌완투수이긴 하다. 연봉이 3억이라 억삼이란 별명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도 포인트[11] 계약 자체는 마지막 날에 했지만, 강영식은 그동안 쭉 사직야구장에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팬들 사이에서는 맛난 호텔 밥 더 먹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개드립이 나돌고있다. 애초에 딱히 떠날 마음도 보이지 않았던 선수니만큼. 어쨌든 이로써 롯데는 삼성의 뒤를 이어 집단속에 성공한 두번째 구단이 되었다.

나보다 비싼 선수 모두 삼진 잡을 것이라는 인터뷰가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 이 기사의 베플은 '그럼 이대형 빼고 다 삼진잡아야겠네'였으나 이대형4년 24억이라는 거품 가격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자 이 베플의 입지는 묘해졌다...

4.8. 2014 시즌

4월 4일 9회초에 팀이 4점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정대현을 뒤이어 등판하였다. 채태인에게 2루타를 맞고 최형우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지만, 그 후에 난타당하면서 (물론 정훈과 손아섭의 콜 플레이 미스도 있었지만) 0.1이닝 2실점하고 강판되었다.

이후 4월 18일까지는 나름 괜찮게 틀어막으며 방어율을 2점대까지 낮췄다.

허나 4월 19일엔 볼넷과 안타를 헌납, 역전패를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더니, 4월 22일에는 만루상황에 올라와서 박병호에게 스트라이크 하나를 못잡고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끝내기 밀어내기를 허용해 성격과 다르게 시즌 초반에 입 좀 털더니 결국 나아진건 없다며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5월에는 더욱 심각해져 올라오면 좌우 가리지 않고 신나게 얻어맞으며 5경기 4.2이닝 먹는 동안 자책점을 7점이나 기록, 결국 5월 9일에 1군에서 말소되었다. 문제는 또다른 좌완 계투인 이명우마저 부진하다는 것. 신인인 김유영을 올려 테스트 중이지만 신통치 않은 상태다.

하지만...

그러나 6월 첫날에 복귀전을 치른 이후 랜디 영식 모드로 돌입, 올라올때마다 시원시원하게 던지는 뚝 떨어지는 공으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며 삼진과 무실점을 밥먹듯이 기록했다. 특히 6월 25일 한화전에서 7회말 무사 1루에 올라와 정근우와 이용규, 김경언을 삼진 3개로 잡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6월 26일 한화전에서 5번째 선수로 등판[12], 1이닝을 틀어막아, KBO 7번째로 통산 100홀드의 기록을 수립하였다.[13]

6월 28일 NC와의 홈경기에서 1:4로 앞선 8회 2사후에 등판하여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세이브를 눈앞에 두었지만 에릭 테임즈이호준에게 연속안타를 맞아 정대현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8회 올라오자마자 병살타를 잡아내 이닝을 끝냈기에 그렇게 까이지는 않았다. 다행히 정대현은 대타로 나선 조영훈을 투수 앞 땅볼로 아웃시켜 세이브를 올렸다.

이렇게 기어이 6월은 10이닝 무실점으로 끝내며 그야말로 랜디영식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6윌이 지나자마자 실점하는 경기가 많아지면서 평균자책점이 4점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4.9. 2015 시즌

시즌 초반에는 부상으로 인해 전력을 이탈했으나 5월 중순부터 복귀를 했다. 그놈의 불안한 불펜덕분에 매일매일 롯데시네마가 개봉되자 억삼이형 어딨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나 진짜 롯데시네마 회장님이 돌아오실줄은 몰랐다는 평. 평균자책점 9점대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2015 올스타전이 지난다음 랜디영식모드로 전환할뻔 하다가 또다시 볼질을 시전하는 중.

볼넷질에 샤다라빠꼴데툰에서 대차게 까버리기도 했다.

8월 11일 SK 와이번스 경기에서 최연소 700경기 출장(34세 1개월 25일)을 달성했다. 비가 오지만 8회초 시점이므로 노게임이 선언될 수 없는 상황. 기록은 모두 인정된다.

9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3:4로 앞선 9회 1아웃에서 박한이박찬도를 유격수 땅볼과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시켜 2013년 4월 19일 이후 2년 4개월만에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늘 그랬듯이 후반기로 갈수록 투구 내용이 좋아지면서 다시 팬들에게 랜디영식이라고 찬양 받는 중이다.

2015년 시즌 최종전에 등판하면서 역대 2번째 9년연속 50경기 등판이라는 위엄을 장식하였고 이날 승리 투수로 기록되었다.

4.10. 2016 시즌

시즌 개막전에서는 0.2이닝 무실점으로 잘 던졌지만 이후 계속 털리고 결국 조동찬에게 2점 홈런을 맞고 며칠 뒤 가벼운 부상이라는 이유로 말소되었다.

말소된 기간 동안 정대현, 이명우, 김성배와 함께 노쇠화된 불펜진이 없어져야 한다고 까였다.

이후 5월 복귀 이후에는 위 3명보다는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5월에는 1이닝 무실점도 3번이나 하였다. 그리고 평균자책점을 3점대 초반으로 낮추었다.

6월 첫경기 kt전 정대현이 장작을 쌓아놓자 깔끔하게 2K로 틀어막고 평자가 2.08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2.00까지 낮춘 방어율을 NC전에서 2실점 하며 패전투수가 되었고 다시 방어율이 4.00으로 회귀하였다.

그래도 6월 8일 수요일 SK와의 경기에서는 병살타 1개 포함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다시 평균자책점을 3점대로 낮추었고 홀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 출장하여 강영식은 벌써 올시즌 20경기를 등판하였다.

6월 중순 부상으로 인해 말소되었다.

올해는 보통 원 포인트 릴리프로써 등판하고 있다.

그리고 시즌 끝날때까지 소식이 없었는데... 못 올라온 이유가 결석이라는 썰이 있다. 아무튼 이렇게 돼서 10년 연속 50경기 출장이란 대기록은 달성하지 못하게 됐다.

4.11. 2017 시즌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하였으며, 4월 12일이 되어서 1군에 처음 콜업되었다.

콜업된 당일 SK전 1:1 동점 상황에 9회말 한 타자만을 상대하여 삼진을 잡고 내려갔다.

다음 날에도 8회 2사에서 등판하여 8회는 깔끔하게 막았으나 9회에 수비수들의 실책성 플레이로 주자를 내보냈다. 그 후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연속안타를 허용하다 정진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4월 14일, 16일 삼성과의 클래식 시리즈에 등판하여 각각 0.2이닝,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개인 통산 750경기 등판을 기록했다.[14]

그러나 이것이 2017년 1군 등판의 전부였으며 이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이유는 종아리 부상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7년 11월 25일 결국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2017시즌 최종 성적은 2.1이닝 4경기 1패 평균자책점 3.86을 기록하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해태 17 46⅓ 0 4 0 1 0.000 6.99 50 8 27 38 39 36 1.6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삼성 7 4⅔ 0 0 0 0 0.000 0.00 6 0 3 1 2 0 1.93
2002 32 95 6 3 0 0 0.667 3.79 83 11 50 88 44 40 1.36
2003 38 42⅔ 1 2 0 6 0.333 4.22 40 3 25 40 20 20 1.52
2004 23 13⅓ 2 2 1 5 0.500 6.08 15 1 8 14 9 9 1.65
2005 60 31⅔ 0 0 0 7 0.000 4.83 26 4 30 37 18 17 1.67
2006 30 31 1 0 0 1 1.000 4.65 21 1 26 35 19 16 1.4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7 롯데 58 35 0 0 0 5 0.000 3.86 27 5 14 39 15 15 1.14
2008 64
(3위)
56⅓ 6 2 2 16
(3위)
0.750 2.88 35 6 14 41 21 18 0.85
2009 54 48⅔ 4 3 2 8 0.571 4.84 51 6 29 31 28 26 1.63
2010 63 52⅔ 3 3 2 7 0.500 4.44 50 6 25 58 28 26 1.41
2011 64
(5위)
41 2 1 1 16 0.667 3.51 35 5 24 39 16 16 1.39
2012 55 41⅔ 2 0 0 10 1.000 3.89 41 2 19 49 19 18 1.44
2013 55 39⅔ 1 3 1 9 0.250 3.86 32 1 21 40 17 17 1.29
2014 52 47 2 5 0 14 0.286 4.79 46 2 26 42 25 25 1.49
2015 50 38⅔ 2 1 2 6 0.667 4.19 40 6 10 46 21 18 1.29
2016 24 11⅔ 0 2 0 5 0.000 5.40 13 2 9 11 8 7 1.89
2017 4 2⅓ 0 1 0 0 0.000 3.86 4 0 1 2 2 1 2.14
KBO 통산
(17시즌)
750 679 32 32 11 116 0.500 4.31 615 71 361 651 351 325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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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응용 감독은 덩치 큰 선수와 왼손잡이 선수를 선호했다.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덩치 큰 왼손잡이 선수는 그야말로 총애 0순위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해태가 우승을 그렇게 많이 해봤어도 그 라인업에서 투타 막론하고 좌완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꾸준히 활용할 수 있었던 선수가 김정수, 신동수, 강태원 말고는 가물가물할 정도니... 김응용 감독이 말년에 한화 이글스로 갔던 것도 덩치 크고 공 빠른 좌완투수의 끝판왕인 류현진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으나 LA 다저스로 가버리는 바람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2]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김응용 감독이 이 정도로 대놓고 애정을 보여준 선수는 거의 없다. 후에 강영식도 롯데로 트레이드될 때 눈물로 김응용에게 작별인사를 고했고, 여전히 꼬박꼬박 연락을 드린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이 방송 캡쳐로 떠도는데, 옆에서 같이 밥 먹던 어린 선수는 당시 전도유망했던 부산상고 좌완투수 채태인이다.[3] 강영식은 훗날 선동열 감독이 자신에게 '사람이 해선 안 될 말'까지 서슴없이 하며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었다고 밝혔다. 그때부터 강영식은 적어도 선동열이 있는 삼성에겐 미련이 없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즉 선동열과 강영식 둘 다 서로 딱히 같이 동업할 이유도, 동기도 없었던 것이다.[4] KIA 타이거즈박경태도 이런 성향을 가진 좌완투수다.[5]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로 쓴다면 약한편이었다. 우타자 수치가 좋으니 1이닝을 맡길수 있는 중간계투 였던거다.[6] 팀 내 다른 불펜 투수들은 3일 이상 연투 금지에 웬만하면 휴식일을 지켜주고 불펜도 가능한 한 로테이션을 돌려 관리를 해주고 있지만, 강영식은 당시 김이슬을 제외하면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이었다. 따라서 이닝은 많지 않은 데 비해 출장 경기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2008 시즌에 64경기, 56⅓이닝을 던졌으니 원 포인트 릴리프라도 어지간한 경기에서 거의 항상 등판해오다 시피 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불펜 투수는 등판 전 몸을 푸는 과정에서 연습투구를 하기 때문에 1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간다고 해도 하루에 15~25구 정도의 공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7] 첫 번째는 이정훈.[8]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강억삼. 주로 못할때 까는 용도로 사용한다.[9] 1위는 오승환의 기록한 31경기 연속 무실점이고, 2위는 2019년 하재훈이 기록한 30경기 연속 무실점이다.[10] 박기혁, 강영식, 용덕한은 고등학교 시절 동창이다. 이날 경기 전 강영식은 용덕한에게 '내 공을 받으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잘 던져 용덕한이 경기 후 공이 나무랄 데 없이 좋아져 놀랐다고 대답했다.[11] 3년 전 FA 권리를 획득했으나 권리를 포기하면서 얻은 3년 9억과 FA 총액 17억을 합산하면 7년간 26억에 쓰는 격이다. 나이대도 30~37세로 불펜투수치고는 저렴한 편이다. FA 이전 시즌의 성적 차이는 있지만 정현욱이 4년간 28억 6천만에 계약한것과 비교하면 FA 이후 금액은 상당히 저렴하다.[12] 심지어 셋업맨 위치다.[13] 류택현, 정우람, 권혁, 이상열, 안지만, 정대현[14] KBO 리그에서 뛰었던 투수로서는 역대 5번째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