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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6:00:16

가야의 역사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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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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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가야 연맹의 변천.jpg
가야 연맹의 변천.

1. 역사성 및 명칭2. 경제 및 제철3. 풍습 및 고분유적4. 기타

1. 역사성 및 명칭

2. 경제 및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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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자국 수요를 넘어 해외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모두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을 낙랑군에 팔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고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철을 사가던 낙랑군이 멸망하자[3] 가야의 철 수출이 막힘과 더불어 가야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없어져 결국 이 이후로 계속 쇠락하게 되었다.

3. 풍습 및 고분유적

4. 기타


[1] 즉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해당하는 낙동강 삼각주 지역은 대부분 바다에, 지금의 김해 시가지 근처까지 바다가 들어왔고 김해는 남해 바다와 접한 항구도시였다.[2] 가야 이전의 고대국가인 변한역시 이 특성상 철 생산이 주력이었다고 한다.[3] 당시 중국을 통일한 서진팔왕의 난영가의 난이 겹쳐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낙랑군과의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하자 그 때를 틈타 고구려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여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 대방군을 정복했다.[4] 진한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 청나라 건륭제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라는 글을 직접 집필하여 "그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세상을 미혹하게 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면 어른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로 눌러놓는다는 것은 실로 인정상 마땅치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옛 풍속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수일이 되면 요람에 두는데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어 머리 형태가 편두(扁頭)처럼 되었다."고 하며 만주족의 옛 풍속을 들어 반박했다. 첨언하자면 편두 항목에서 치누크 족이 편두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돌이나 널빤지로 아기의 머리를 누른다기보다는 아이를 반듯하게 눕혀서 고정시키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5]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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