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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12:00:58

회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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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 의미
1.1. 역사1.2. 오해1.3. 회의주의를 배경으로 한 작품
2. 철학적 관점3. 관련 문서4. 유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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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 의미

/ Skepticism

방법론의 한 종류. 회의론이라고도 한다. 크게 철학적 회의주의과학적 회의주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을 회의주의자라고 한다. 이하 철학적 회의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회의주의는 단순한 믿음이나 도그마로 간주되는 지식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의심하는 태도를 말한다. 회의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불신이 아니라 믿음의 중단, 즉 주장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을 권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이용 가능한 증거가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인상에서 비롯된다. 공식적으로 회의주의는 철학, 특히 인식론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제다. 또한 예술사에 있어서 매너리즘과 로코코에서 회의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회의주의는 질문이나 의심의 표현으로서 정치, 종교 또는 사이비 과학과 같은 모든 주제에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종종 도덕 (도덕적 회의론), 무신론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론) 또는 초자연과 같은 제한된 영역 내에서 적용된다. 철학적 회의주의는 회의주의의 중요한 형태 중 하나다. 이는 상식의 관점에서 확실해 보이는 지식 주장을 거부한다. 급진적인 형태의 철학적 회의주의는 "지식이나 합리적 믿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 아니면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보다 온건한 형태는 신이 존재하는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지, 사후 세계가 있는지와 같은 비경험적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1.1. 역사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론과 주장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대가 있었는데, 서양에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와 소아시아권에서,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를 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회의주의는 변론에 대한 반박을 통해 시작하는데, 정해져 있는 틀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맞춰서 진행시키는 논리에 대한 안티테제인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서양의 회의주의는 최초의 소피스트 중 한 명이었던 프로타고라스가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한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완전한 판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동양의 회의주의는 도가노자가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 그도 프로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기준은 없고 세상은 거대하니 짧은 생애에 묶여 있을 뿐인 인간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고 이야기 했다. 초기 회의주의는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 기원의 동일함은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회의주의는 단순히 정해진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서 판단 불가능성,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현실과 현실을 판단하기 위한 지식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발전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과 노자 이후에 도가를 발전시켰던 장자는 규칙이나 규범에 맞춰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대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했다.

근대적인 회의주의는 사람의 오감이 완벽하지 않고 속아 넘어가는 점 등을 통해, "보고 느끼는 세상이 현실 그대로의 세상이 맞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즉 지각의 불완전성으로부터 현실의 완전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

이에 반발했던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은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으며 연역법으로 이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1] 그 연역의 기반이 되는 제1공리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I think, therefore I am)"다. 하지만 첫째로 이 제1공리가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또한 과연 연역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 후자에 대한 견해 차이로 합리론과 경험론의 갈래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백 년간 이러저러 논리배틀을 벌인 후에 나타난 것이 데이비드 흄의 관습원칙이다(Principle of Custom/Principle of Habit).

흄은 철학 역사상 처음으로 분석/종합지식의 구별을 지은 철학자인데,[2] 흄은 모든 종합지식은 단순 관습으로 획득하는 지식이고 확실성이 없다는 주장을 편다. 철학적 용어가 많기에 약간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미혼인 자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왜냐하면 미혼인 자라는 단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지식을 흄은 분석 지식[3]이라 명명하였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분석지식이 아닌 지식, 그러니까 가령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을 흄은 종합지식[4]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런 구별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흄은 모든 종합지식은 불확실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흄의 근거는 이러하다. "보통의 경우엔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지식(상식)이다. 그런데 그 지식의 확실성은 어디에 기반하는가? 내일에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해가 동쪽에서 뜬다.'라는 지식은 결국 반복된 경험에 의한 관습적인 지식이 아닌가?"[5]

결국 이런 의문에 흄은 분석지식은 확실한 지식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지식만을 제공하고, 그에 반해 종합지식은 당연한 지식이 아니며 태생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결론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라 아직까지도 회의주의는 철학계와 비철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테마중 하나이다. 흄 이후로 분석/종합지식에 관해 논의한 철학자에는 임마누엘 칸트[6], 루돌프 카르납[7], 콰인[8]이 있다.

꽤나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는 이런 회의주의적 관점을 채택한 전개를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회의주의를 매우 잘 표현했으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국 관객이 진실을 알 수 없는 《토탈 리콜》이 이 방면으로 유명해서 철학을 공부할 때 참고할 영화로 추천받기도 하며 그 외에도 매트릭스 시리즈나 《인셉션》 역시 회의론이 숨어있다.

회의주의는 허무주의상대주의가 그러하듯이 메타적으로 접근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유사한 역설에 빠진다.

1.2. 오해

회의적 사고는 단순한 의심과는 다르다. 일상생활에서 사물에 일일이 냉소적으로 반응하거나 덮어놓고 의심부터 하려 들거나 모든 일에 음모론을 내세우는 것을 회의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회의주의는 어디까지나 모든 지식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 뿐이지, 모든 걸 "아닐 거야"라고 의심부터 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회의주의의 결론은 "~일지도 모른다."이지 "~이다."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고 사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제시하는 순간, 그 명제 자체도 회의주의적으로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어떠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주의하는 자세나 방법론이라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1.3. 회의주의를 배경으로 한 작품

2. 철학적 관점

3. 관련 문서

4. 유행어

직장에서, 뭣만하면 회의하자고 하는 눈새 직원이나 상사 등을 의미한다. 일종의 언어유희.

[1] 이런 믿음은 매우 플라톤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모두 잊어버렸을 뿐이며 진실이 '반영'된 곳인 이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통해 진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가설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기억(+진실)을 찾아가는 기억상실자라는 셈.[2] 분석/종합의 단어는 칸트가 처음 사용하였지만 개념 자체는 흄의 창작이다.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식론, 게티어 문제 등 참고.[3] 흄은 이를 relation of ideas 라고 불렀다.[4] 흄이 사용한 단어는 matter of fact, 사실(fact)적인 사건(matter).[5] 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동쪽이란 네 방위의 하나. 해가 떠오르는 쪽이다라고 정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로 해가 떠오르는 쪽이라는 것을 그 의미의 본질로 내포하고 있다. 즉 내일 어디에서 해가 뜨던 간에 그 쪽이 그냥 '동쪽'이 된다. 이 예시가 흄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면 '서울'을 기준으로 '강원도'의 방향에서 해가 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야 반대로 '중국'쪽에서 떠오를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러나 동쪽은 반대로 해가 떠오르는 곳 그 자체이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즉 이 명제는 의도한 설명에 따르면 거꾸로 분석지식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더 넓게 봐서 해가 뜨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하므로 그러한 것을 포함하게 되면 종합지식에 해당하는 불확실성이 나타난다.[6] 종합지식/분석지식의 구별에서 더 나아가 종합적 선험(선험=> 경험에 앞서는)/종합적 후험(후험=> 경험에 따르는)/분석적 선험(분석적 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지식의 구별을 하였고, 인간의 지성만으로(선험적) 세계에 대한 지식(종합적)인 종합적 선험지식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지식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흄과 비슷하게 분석적 선험지식이 너무나 당연한 지식만을 제공하고 종합적 후험지식은 태생적인 불확실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종합적 선험지식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이에는 수학, 그리고 그의 방법론을 따르는 철학까지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7] 몇 가지의 공리와 순수 수학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런 방법은 프레게-러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논리학 비전공자라면 정말 어렵다!) 실재하는 각종 개념 (오감, 공간, 시간에서 시작하여 책상, 의자 등의 실재하는 물체에 대한 개념까지)을 도출하는 언어 시스템을 창조해내고 그 시스템 안에서 일관된 철학만이 정당한 철학이라고 보았다.[8] 분석/종합지식의 구별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모든 지식을 분석/종합의 구별 없이 재통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카르나프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다. 그래서 둘 다 더럽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