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인민군 육군 소속 SU-76M 네임드 차량 "영원한 붉은 군대의 지도자 스탈린 동지 만세!" 407번차
바그라티온 작전에서도 다수가 폴란드 인민군과 소련군 소속으로 투입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 SU-76M의 진가가 드러났는데, 가벼운데다 전폭이 넓고 궤도 폭이 좁은 특성 상, 늪지대에서도 타 전차들과 달리 무리없이 기동하였으며, 이 덕에 독일군이 "설마 늪지대를 뚫고 오지는 못하겠지"라며 방심한 틈을 노려 진짜로 늪지대를 돌파하여 포격하면서 독일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시기에도 소련군의 주력 자주포로 사용되어 독일군 및 헝가리 왕국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치렀다.
특히, 부다페스트 공방전 도중 SU-76M의 특기할 사항이 있는데, 함선과 자주포 간의 포격전이 바로 그것이다.
1944년, 다뉴브 강을 따라 순찰하던 헝가리 왕립 해군의 장갑포함 "데브레첸"은 하중도인 체펠 섬 인근에서 소련 육군 산하 제46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당시 소련측의 제46군에는 SU-76M 15문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마주친 순간 재빨리 제46군 측의 SU-76M 2문이 발포하여 함교와 엔진실을 직격해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었으며, 이에 도주하려는 데브레첸은 선수를 돌리다 그만 측면을 노출시키게 되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15문의 SU-76M들이 계속해서 발포하였다. 이 영향으로 전방 포탑과 함교가 사실상 전멸했고 동시에 엔진실이 파괴되며 터빈도 파손되는 바람에 그대로 수상에 표류하게 되었고, 그나마 관측탑에 있어 생존했던 장교 센티슈트바니 중위가 후방 포탑을 잡고 어떻게든 항전을 이어가려 했으나 연이어 발사된 포탄이 연료 탱크에 직격, 그대로 유폭되어 격침되고 말았다.
데브레첸의 살아남은 생존 수병들은 퇴함 후 자력으로 헤엄쳐 추축국 영토로 피신하였으며, 자매함인 "케치케메트"가 데브레첸의 잔해를 수습하려 했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는 소련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의 기관총 진지가 있는 건물에 포격 중인 소련 육군 소속 SU-76M "15번차"
이후에는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전, 역시 보병들과 함께 다니면서 건물안에 숨어있는 판처파우스트병과 대전차포병, 저격수 등 보병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을 보이는 족족 포격하여 제거했으며, T-34-76과, T-34-85, IS-2 등의 전차가 최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차를 부수는 한편, SU-76M은 이들같이 주목받는 편은 아니었지만 묵묵하게, 그리고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자기 본분에 맞게 활동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부상당한 보병을 운송하는 소련 육군 소속 SU-76M "14번차"
추가로, 베를린 전투에 나선 SU-76M들은 야전용 구급차로도 사용되었으며 일종의 보병전투차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열린 승전 퍼레이드에도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으며, 유럽 전선 종전 이후 10월까지 생산되다 후속 자주포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퇴역하게 되었다.
트란스바이칼 전선에서의 소련 극동군 소속 SU-76M 네임드 차량 "용기" "승리의 날을 위해!"[3]
만주 작전 당시에 특기할 만한 SU-76M의 활약으로는 무단장 전투 당시에 제22소총병사단의 제1049소총병연대와 훈련대대가 무단장시를 점령하는데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무단장시 점령 후에도 장거리 곡사 포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특기삼아 야포가 가기 힘든 곳에 출동하여 관동군의 진지를 파괴하는 등 대활약을 하였다.
또한, 만주벌판과 다싱안링 산맥의 거친 지형에서도 무리없이 작동하며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는 관동군들을 제압하는 SU-76M은 유럽에 이어 만주에서도 보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소련이 1947~1949년에 공여해준 150문의 SU-76M을 북한은 각 보병사단 예하 포병연대에 배속시켰다. SU-76M은 남침에 투입되어 전쟁 초반 군수장비가 부족한 국군에 크나큰 출혈을 강요했다.
그러나 기갑장비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인민군은 자주포를 전차마냥 운용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상술한 약점들 때문에 국군의 육박공격에 뜻밖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 당시 국군 역시 기갑장비 자체를 본 일이 극히 적다보니 SU-76M 격파를 전차 격파로 보고한 일도 많았다. 이후 국군에 장비가 인도되고 UN군이 증원되면서 상부 개방식[5] 경장갑 전투실 구조 때문에 다수의 SU-76M이 UN군과 한국군의 바주카, 대전차포, 육박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국군의 기록 중에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국군이 노획한 적도 있다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인민군 전차(SU-76M) 한 대가 온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허둥지둥 매복을 준비중이었는데, 지뢰매설이 덜 끝난 상태였다. 소대장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SU-76M이 당도하였고, 이때 병사 하나가 용감하게 나서 앞을 가로막으며 큰 소리로 이렇게 호통쳤다.
인민군들은 우물쭈물하다가 곧 손을 들고 밖으로 나왔고, 부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포로를 잡고 SU-76M까지 노획했다. 인민군들이 항복한 이유는 병사가 워낙에 배짱이 좋기도 했지만, 주변에 수풀이 우거져서 매복한 국군의 규모나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다 오픈탑이라 방어력도 약하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후에도 지속적으로 전투에 나타났으며, 동란 후기에 들어서면서 훨씬 강력한 IS-2가 투입되었지만, 보병 지원용 자주포가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에 대한 준비가 크게 되어 있지 않은 국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북한에서는 작전명 "폭풍"이라는 명칭으로 새벽 4시경, 불법적인 남침을 행하였으며, 이 때 당시 북한군이 지니고 있는 SU-76M과 T-34-85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퇴하였으며, 이에 북한군은 서울까지 진주하게 되었다.
흥남 철수작전 직전, 1950년 10~11월경 함경도 전역에서 국군 제1군단이 노획한 개체들이 중공군 및 북한군과 응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끝내 흥남까지 후퇴하였다.
국군과 미군은 흥남으로 철수했음에도 인민군의 맹렬한 추격을 떨쳐낼 수 없었는데, 당시 인민군들은 그저 UN군이나 국군이 주둔하지 않고 지나치기만 한 도시, 마을의 주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피의 보복을 행하였기에 이 소식을 들은 흥남 주민들은 "양인들과 남쪽 군인들을 놓치면 우린 그대로 죽는다!"라고 생각하여 흥남을 탈출하기 위해 부둣가에 있었다.
결국 제1군단 측에서는 피난민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들이 선박에 탑승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기 위해 SU-76M, M8 그레이하운드 등의 장비를 동원해 인민군과 끝까지 응전하여 수많은 흥남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였고, 제1군단 소속의 SU-76M들 역시 선박에 실려 남쪽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1] 1944년 7월 3일 촬영된 사진이다.[2]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촬영된 사진이다.[3] 1945년 8월 촬영된 사진이다. "용기"는 주퇴복좌기 커버에 써져 있고, "승리의 날을 위해!"는 전투실 좌측면 후방에 적혀있다.[4] 사진에 흐릿하게 나와서 잘 보이지 않지만, 뒤에 있는 차량을 잘 보면 전투실 상부에 전차번호가 새겨져 있다.[5] 북한군 사용 차량 상당수는 위에 언급한 얇은 지붕을 추가한 개량이 시행된 상태였다. 또한 조종수 해치를 열고 조종해야 했기에 매복 공격에 취약했다.[6] 201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 캡쳐한 화면이다.[7] 사진 중, 앞줄 맨 오른쪽에 PPSh-41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육탄돌격으로 SU-76M을 격파한 조달진 소위이다.[8] 1950년 6월 28일에 촬영된 사진이다.[9] 앞의 두 대는 SU-76M이고, 그 뒤부터는 T-34-85다.[10] 1950년 10월 23일에 촬영된 사진이다.[11] 1950년 12월 3일 촬영된 사진이다.[12] 옆에 있는 반쯤 사진에 잘려나온 전차는 미군이 후퇴하면서 유기한 M26 퍼싱이다.[13] 1950년 12월 24일,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촬영된 사진. 자세히 보면 차체 전면에 피아식별용으로 흰색별이 보인다.[14] 옆에 살짝 궤도만 보이는 차량이 SU-76M이다.